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00
◈ 501화. 모순 (2)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다, 그냥……!!
“정중하게 용서를 구하겠다, 그대여. 안토니움에서 이 사내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화신체’의 준비를 서둘렀더라면……. 애초에 이러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아홉 번째 왕좌의 마왕, 파이몬.
보통 악마도, 보통 마왕도 아니다. 기이에서 태어난 상위 마왕이자 마계를 비롯. 대체 몇 개의 세계를 집어삼켰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대와 마주하는 순간, 역시 내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군. 아쉬운 입장이니 어쩔 수 없겠지. 더 나아가 이 화신체 또한 이 사내의 고향에 헌납하겠다. 약속하지.”
……쟤, 왜 저렇게 저자세냐?
‘아니, 부담스러운 걸 떠나서.’
파이몬, 저거 진짜 악마가 맞긴 한 건가?
‘웬만한 인간보다 낫잖아.’
그런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물론, 그냥 악마도 아니고 상위 마왕.
강한 악마일수록 영악하다는 걸 생각하면.
저 말을 온전히 신뢰할 순 없겠지.
하지만 나의 침묵에서 묘한 심기를 포착한 걸까.
“아, 그런가.”
슥.
용성락.
아니, 파이몬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째서인가, 그 작은 미소엔 많은 뜻이 담겨있는 듯했다.
“그대는 악마의 말을 신뢰할 수 없겠지. 이해하네, 그대여. 기본적으로 악마란 족속에게 신뢰라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러나 모든 악마가 ‘긍지’를 알지 못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주길 바라네.”
뭐, 긍지?
‘가아아암히 악마가 긍지를 운운해?!’
너, 이제 그랑펠한테 혼날 일만 남았다 파이몬.
그랑펠의 긍지가 얼마나 엄격한데.
악마가 긍지를 따질 수 있다고…….
주륵.
‘……!’
돌발행동.
파이몬이 가볍게 주먹을 쥐자 그의 손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용성락의 시신에서 흐르는 피인가.
내가 흠칫하는 도중, 파이몬이 설명을 덧붙인다.
“화신체에 관해선 이제 그대도 알고 있어야겠지.”
내가 알아야 한다라.
그래도 이젠 플레이어로서 짬 좀 찼다고.
대충 짐작이 갔다.
‘분명 십좌에 관련된 거겠지.’
예상은 적중했다.
“십좌의 힘은 드러내는 것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뒤흔들고, 다른 세계의 존재들마저 자극하는바. 따라서 우리와 같은 십좌에겐 본체를 드러내지 않고 활동할 화신체가 필요하다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면 곧장 추궁했을 거다. 어쨌거나 화신체라는 걸 만들기 위해서 용성락의 시신을 멋대로 이용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으니.
‘……아니, 일리가 있어.’
그러나 납득하고 말았다.
상위 마왕의 가공할 만한 힘을 직접 목격한 덕분이었다.
왜, 멀리 갈 것도 없이 파이몬만 하더라도.
‘아르카나 대륙을 집어삼킬 만한 힘이었어.’
팔 하나로 세오른 대륙을 멸망시킨 바알은 뭐.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니까 내 머릿속은 혼란할 수밖에 없었다.
“총명함을 뛰어넘어 현자에 버금가는 그대의 두뇌라면. 나의 화신체를 보고 이미 그 구조를 파악했으리라 생각되는바. 그렇다면 굳이 내가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
진짜로 뭔데.
나를 비행기라도 태워주는 것처럼.
고평가하는 걸로도 모자라서는.
“그리고 그러한 화신체를 통해 나의 피로 맹세하겠다.”
시키지도 않은 맹세까지 하는 거냐……?
악마의 기만이 아니냐고?
나도 믿기지 않아서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적관계]가 발동된 악마 사냥꾼의 감각으로도.
파이몬의 말에선 기만도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까지 공인해 버렸다……!
나한테만 떠오른 거라면,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파이몬의 농간에 빠진 건가. 의심이라도 했을 텐데. 주변의 웅성거림이 상황을 파악게 한다.
“이 모자이크들은 뭐지?”
“너도 메시지 떴어? 내용 뭔데?! 나랑 똑같냐?”
“응, 맹약이 발생했다고. 어기면 누가 죽는다는데……?”
개미가 코끼리의 생김새를 알 수 없듯. 십좌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자들은 십좌를 제대로 볼 수조차 없다. 시스템을 가진 플레이어도 예외는 아니다.
‘나도 □밖에 안 보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쯤 되니까…….
이쯤 되면 경계심을 푸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태도, 반성, 그리고 사후처리까지.
‘아주 그냥 사과의 정석인데.’
눈앞의 파이몬은 악마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정작 파이몬과 말을 섞을 여유는 없었다.
“이호열.”
록스가 나를 불렀거든.
나는 록스의 눈을 바라봤다.
[타락]의 효과겠지.그 동공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 덕분일까, 록스는 제대로 목격한 모양이었다.
“결국, 너도 위선자였나.”
위선자라.
오해할 법도 하겠네.
록스, 너는 나와 파이몬의 사연을 알지 못하니까. 파이몬이 하는 말을 내가 잠자코 듣고 있는 것도, 파이몬이 내게 허리를 숙이고 맹약까지 맺는 것도 이상하게 보이겠지.
“역시, 너도 똑같았구나.”
하지만 알고 있냐, 록스?
스오오오.
펄럭거리는 악마의 날개.
록스에게서 솟구치는 악의.
동시에 그런 록스를 향해 집중되는 부정적인 기운.
지금 내게는.
상위 마왕인 파이몬보다도 혼혈의 악마.
그래도 절반이 인간인 네가.
훨씬 더 악랄한 악마처럼 비치고 있다는 걸.
‘구마의식이 효과가 있을까.’
[빙의]가 아닌 [타락]이기에 효과를 자신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혼란스러웠다. 진짜 악마인 파이몬을 앞에 두고 록스와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생각해 보면…….’
사실 록스 정도면 양반이겠지.
악마가 아니면서도 악마보다 악랄했던 자식들?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많았으니까.
그러나.
나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의 눈앞이 점멸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
꿈틀.
전신의 혈관이 꿈틀거린다. 의식은 흐려지고 감각은 극대화된다. 록스는 생각했다. 이게 바로 내가 새롭게 습득하게 될 [용사]의 힘인가?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 아르카나.’
이 순간, 내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는 것도 용사의 힘이다. 클래스 퀘스트는 이미 나를 [용사]로 판단, 내게 그 능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펄럭.
그러나 모든 건 록스의 착각이었다.
이 순간, 록스의 혈관을 떠도는 건 혼혈의 힘이었으니까. 하지만 록스에겐 거짓말을 하지 않는 아르카나의 시스템 메시지조차 살필 여유가 없었다.
[당신의 피가 점점 더 혼탁해집니다.] [상태이상, ‘혼란’이 발생합니다.] [상태이상, ‘혼란’이 발생합니다.]…….“이호열.”
스릉.
록스가 자신의 애검을 치켜들었다. 그 손에도 변화가 일어난 상태. 검을 치켜든 오른손이 마치 악마의 팔처럼 급격하게 성장하고 말았다.
혼란의 영향.
그러나 록스가 바라보고 있는 건 오직 한 방향이었다.
퀘스트 목표.
그리고 퀘스트 목표 ‘최흉의 악마’와 맹약을 맺은 호열이었다.
록스가 이를 갈았다.
“이제부터 묻는 건 나다.”
“그렇군.”
“네 대답에 나의 검이, 용사의 검이 움직일 테니까.”
엄연한 경고였거늘.
이호열.
그의 표정엔 일말의 변화가 없었다.
……빠득.
그 한결같은 태도가 록스의 신경을 긁었다.
찰나의 순간, 자신을 호열과 비교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이호열.
혼탁한 머릿속에서 해답이 나온다.
그래.
그랬구나.
“비로소 이유를 알았다.”
“얼마든지 듣겠다.”
“건방지게 재촉하지 마라.”
쿠득, 검을 쥔 록스의 손이 더욱더 부풀어 오른다.
“넌 피도 눈물도 없던 게 아니었다.”
“?”
“애초에 네겐 인간의 마음이 없었던 거다.”
스와아아악.
“넌, 타인의 고통도 슬픔도 이해할 수 없는 거다!”
록스가 호열을 향해 쇄도했다.
누군가,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최흉의 악마와 맹약을 맺은 이호열.
그 역시, 클래스 퀘스트 목표를 달성하는데.
걸림돌이 될 존재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쾅.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록스의 검격이 허공에서 막혔다.
정확하게는.
“그래, 이러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네 표정이 증거다.”
격이 다른 마력.
탐색, 간섭, 발현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
그저 순수한 마력이 진심을 다한 록스의 검격을 막아낸 것이었다.
“록스, 제발……!!”
“뭐야? 미쳤나, 저게? 너 뭐 하는 건데, 록스?!”
무너진 카밀라.
당황한 레오니.
굳은 표정의 제시에게 고깔모자가 말한다.
-압도적인 격차로군.
마법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가공하지 않은 마력 방출만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마탑에서도 전례가 없을 정도인 이 수석의 발현력을 고려한다면.
-이 수석이라면 기초 마법으로도 도륙을 내겠지.
하급 마법을 운운할 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잘근.
그러니까 제시는 입술을 세게 깨물 수밖에 없었다.
[타락]으로 이미 악마화가 진행된 록스.말했다시피 제시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서히 벌어지는 호열의 입술.
“그 검격에 담긴 뜻을 내가 알았다.”
호열의 자비는 단 한 번도 악마를 비추지 않았단 걸.
“후후후.”
그러한 상황에서 파이몬은 웃음을 뱉었다.
이러한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거늘.
그대에게 허리를 숙여 진심으로 사과한 보람이 있군.
‘흥분을 억누를 수 없구나.’
그대가 마계에 진입하게 될 날이 기다려져서는.
십좌의 마왕.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기에.
관조하는 풍경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이 순간, 파이몬이 바라보고 있는 건 호열 뿐이었다.
그러니 그대와 같은 눈높이에서.
그대의 처지에서 헤아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내가 아는 그대라면…….’
역시,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으리라.
혼혈의 악마라고 한들.
인간의 마음이 남아있다고 한들.
그대에게 악마는 악마에 불과할 테니까.
“그 점이 나를 흥분케 하는 거야.”
파이몬의 입꼬리가 더더욱 치켜 올라갔다.
파이몬은 서울에 떠도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다.
과연, 이 땅은 아르카나 대륙보다도 탐나는 땅덩어리였다.
슬프고, 처량하며, 혼란한 부정적인 기운은 이 도시를 넘어서 실시간으로 월드 전체로 전염되어가고 있었으니까. 파이몬은 하늘을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하늘에 떠오른 마안을 바라봤다.
‘바알.’
이러한 세계라면 너도 탐을 낼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되는데?
세오른 대륙에 마수(魔手)를 뻗쳤던 것처럼.
허나, 유감스럽게도.
‘그때처럼 얌전히 물러날 생각은 없다.’
그대가 있는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니.
파이몬의 우수에 찬 시선이 호열을 훑었다.
그대여.
지금의 경험이 미래의 그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지.
그대는 알지 못하겠지.
“그럼에도 우려할 건 없다네.”
파이몬의 눈이 검게 내려앉았다.
“내가 모든 걸 지켜봐 줄 테니까.”
그러나 파이몬의 비장한 각오가 무색해지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문득, 손에서 느껴지는 이물감.
“……?”
잊고 있던 낯선 감각에 파이몬은 제 손을 폈다. 펼친 손바닥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인간의 시체로 만든 화신체라서 감각을 느끼는 게 아니다.
‘뜨겁다……?’
화신체라는 건 저급한 저주로 이뤄지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이 자리에 파이몬, 자신의 본체가 있었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내가 열기를 느끼고 있다?’
파이몬이 손에 쥔 땀의 원인을 파악한 순간이었다.
호열이 입을 열었다.
그건 파이몬의 내다본 미래에서는 호열이 내뱉지 않은 말이었다.
“그랬군.”
……설마?
“샤이닝(Shining).”
이어지는 자비로운 음성.
“그대는 빛이 되길 원했군, 록스.”
빛, 그 단어에 파이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당신의 ‘구마의식’에 참여자가 존재합니다.]구마의식.
모순에 빠진 나의 의식 속에서.
나를 인도한 건 불길이었다.
선명하게 타오르는 녹색의 불길.
그래, 나와 같은 고뇌를 했을 게 분명한.
아니, 그 고뇌를 직접 겪었을.
지옥의 악크샨 선배님들이었다.
[클래스 퀘스트 : 우리는 여전히 악마인가?]화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