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3)
33 화 강림.
강림.
나는 안식의 나팔수의 등을 쫓아가며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내가 누더기 거인의 머리에서 신성을 뿜어내던 구슬을 챙긴 걸 알아챈 건가? 아니면 설마 내가 악신의 숭배자라는 걸 알아챘나? 안식의 나팔수가 등장한 뒤로 한 번도 부패의 신성을 드러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살해!’
어머니의 손이 꿈틀대면서 먼저 때리는 놈이 무조건 이긴다며, 저렇게 무방비하게 걸어갈 때를 노리고 무자비하게 뒤통수를 후려갈기라고 내게 속삭였다.
안식의 나팔수가 걸음을 멈췄다.
나는 서리강철 검의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 여차하면 벨 수 있도록.
“오신다.”
짧은 한마디. 하지만 그 무게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새하얀 가면 위로 어둠이 기어올랐다. 기어올랐던 어둠이 가면 타고 떨어져 내렸다. 숨 막히는 존재감이 주위를 짓눌렀다.
나는 이것과 비슷한 존재감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인간을 넘어선, 드높은 천상의 존재들이 뿜어내는 자연스러운 압박감.
‘신’의 일부가 이 자리로 내려왔다.
‘죽음과 안식의 나팔’이 치렁치렁한 검은 옷을 들추고 손을 뻗어 손가락 하나를 내밀어 보였다. 내면 저 깊은 곳을 제멋대로 긁어대는 목소리가 귀를 타고 심장에 꽂혔다.
[수도.]압박감이 사라졌다. 새하얀 가면을 타고 흘러내리던 어둠이 걷혔다. 안식의 나팔수는 끊임없이 숨을 헐떡였다. 신이 몸에 깃들었던 후유증이었다.
나는 그가 숨을 고르는 걸 진득하게 기다리며 고민했다. 머리가 굉장히 복잡했다.
손가락 하나와 수도.
설마 지금 신이 직접 내려와서 나한테 수도에 성물이 하나 있다고 알려준 건가? ‘죽음과 안식의 나팔’은 부패의 어머니와 아는 사이인 건가? 이 건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어머니한테 물어봐야만 했다.
그것보다 내 해석이 맞다면 ‘죽음과 안식의 나팔’은 내 정체가 부패의 사제란 걸 알아챘다는 건데, 그의 사제인 안식의 나팔수 또한 내 정체를 알아챈 건가?
“후우.”
겨우 몸을 추스른 안식의 나팔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나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 한마디에는 간단한 뜻이 담겨 있었다. 네가 무엇이든 나는 널 방관할 것이라는 의미가.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그럼 슬슬 돌아가도록 하죠.”
***
나는 안식의 나팔수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서 어머니께 말을 걸었다.
“혹시 방금 그 신과 아는 사이십니까?”
‘살해…?’
‘완전 모르는데…?’라는 간단한 대답.
뭐지?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다시 한 번 머리가 복잡해졌다. 나는 골치 아픈 의문만 가득 건네받은 채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카르멘이 돌아온 날 보더니 쓰게 웃으며 도시 안을 가리켰다.
“그런데 이거 진짜 어쩌지?”
거리를 가득 메운 시체와 피, 그리고 살점들. 게다가 아직 여기저기 불타오르는 곳이 군데군데 남아있기까지 했다.
안식의 나팔수가 품에서 새하얀 나팔을 꺼내 불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채 쓰러져있던 시체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도시 밖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키아는 그 모습을 보곤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식의 나팔수 분이 도와주면 도시 뒷정리하기가 쉽지 않을까요?”
옆에서 듣고 있던 카르멘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공녀님 말씀대로겠네요. 문제는 저 망자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걸 보니까 안식의 나팔수는 우리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거죠.”
“그러니까 부탁을 해보자는 거죠.”
한 쌍의 황금빛 눈동자가 날 바라보며 밝게 빛났다.
“여기서 안식의 나팔수 분과 가장 친한 마르낙 사제님이 한번 말씀해주시면 안될까요? 방금도 두 분이서 만 비밀 이야기를 하고 올 정도로 친한 사이잖아요.”
아니, 이야기는 저쪽이랑 안하고 신 이랑 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듣기만 한 거지.
“공녀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친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제가 한 번 말해볼까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면 저희 넷으로는 일손이 너무 부족하잖아요.”
도시를 빠져나가는 끝없는 망자의 행렬. 저들이 도와준다면 분명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겠지. 나는 다키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번 도와달라고 말해보겠습니다.”
“고마워요!”
다키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지며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살(殺)!!!’
당장 손 떼라며 버둥대는 어머니를 꾹 누르며 다키아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럼 얼른 말해보고 오겠습니다.”
“네!”
소리 없는 연주를 하고 있는 안식의 나팔수를 향해 다가갔다. 새하얀 가면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용건을 말하라는 듯이.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혹시 에라디코의 뒷정리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망자들을 이용해서 도시 안을 수색해주신다면 분명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안식의 나팔수가 대답했다.
“생자를 돕는 건 내 일이 아니···.”
단호한 거절을 내뱉던 그가 말을 멈추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한숨에는 진한 피곤이 담겨 있었다. 안식의 나팔수가 말했다.
“뭘 도와주면 되지?”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도움을 주겠다면 감사히 받아야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게 됐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찾아주시면 됩니다.”
“그것뿐인가?”
“찾아낸 사람들을 비교적 멀쩡한 건물로 옮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안식의 나팔수가 나팔을 불자, 성문을 향하던 망자들이 방향을 바꿔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멀쩡한 물자들도 옮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대로 놔뒀다간 분명 번지는 불에 다 타버릴 테니까요. 아, 혹시 불도 꺼주실···.”
눈구멍조차 보이지 않는 새하얀 가면이 나를 매섭게 바라보는 탓에 나는 하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안식의 나팔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에 말해라. 제발.”
“어, 음. 그럼 동료들하고 의논해서 부탁할 걸 간단히 요약해오겠습니다. 한 번에 말씀드릴 수 있도록요.”
“… 그래.”
***
‘살해!!!’
소녀로 변한 어머니가 내게 양손을 활짝 펼쳐서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어머니.”
리버켈의 머리에서 나온 구슬을 어머니께 건네자 어머니는 활짝 웃으면서 구슬을 받고는 침대 위에서 용을 쓰시기 시작했다.
에라디코의 뒷정리는 안식의 나팔수의 도움으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됐다. 셀 수 없는 망자의 물결이 기계적으로 사람을 구해내고 불을 끄며 멀쩡한 식량과 물자를 모았고, 나와 일행들은 망자들을 도와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멀쩡한 건물로 옮겼다.
몸이 완전히 멀쩡한 이들도 쉬이 깨어나질 못했지만, 그들에 몸에 스며들었던 신성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게 보였기에 내일쯤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 듯했다.
그렇게 도시 안을 깔끔하게 정리한 안식의 나팔수는 내가 고생하셨다고 말하자마자 작별인사조차 없이 모든 망자들을 이끌고서 도시를 떠나려고 했다.
나는 미련없이 등 돌리고 걸어가는 그를 불러세워서 그에게 챙겨둔 상투스의 오른팔을 건넸다. 그는 내 얼굴을 보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팔을 받아서 진짜로 떠났다.
우리는 떠나는 그를 배웅하고 우리가 묵으려 찜해둔 건물에 각자 방을 하나씩 골라서 쉬고, 내일 아침에마저 뒤처리를 하기로 했다.
‘살(殺)!!!’
내 옆에 달라붙어서 구슬을 붙잡고 용을 쓰던 어머니께서 뭔가 잘 안 되는지 성을 내면서 구슬을 콩하고 집어 던졌다.
“어머니…?”
내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구슬을 보며 어머니를 부르자, 홧김에 구슬을 내던지고 내 눈치를 보던 어머니가 침대에서 뛰어내려서 쪼르르 달려가 구슬을 다시 주워와서 울상을 지은 채 내 팔을 잡아왔다.
‘살해…’
“구슬에 엉켜있는 신성이 잘 안 풀리신다고요? 열심히 하시다 보면 분명 풀릴 겁니다. 제가 장담하지요. 그런데 아무리 화가 나신다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건 정말 안 좋은 화풀이 방법입니다. 그게 얼마나 나쁜지는 어머니께서도 분명 잘 아실 텐데요.”
‘살해…’
이거 하나 못 풀어서 도움이 못되는 게 너무 화가 난다는 말에 나는 어머니를 번쩍 안아들고서 등을 토닥였다. 자그마한 머리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어머니께서 도움이 안 되긴 뭐가 안됩니까. 리버켈한테 멋들어지게 한 방 먹일 수 있었던 것도 다 어머니가 마법을 무효화 해주셔서 그런 건데요. 무척이나 도움이 됐습니다. 정말로요. 그런데 어머니. 다 좋지만, 이거 하나는 꼭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살해?’
어둠과 암녹빛이 끊임없이 일렁이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음부턴 아무리 답답해도 물건을 던지지 않으시기로 저랑 약속하시지요. 어머니께서 아무리 화나도 물건을 안 던지신다면, 지금보다 세 배는 더 매력적인 분이 되실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화나도 물건을 안 던지는 어머니의 인내심을 경배할 테지요.”
‘살해?’
“저한테도 세 배 더 매력적이게 되느냐고 물으셨습니까?”
‘살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아닙니다.”
‘살해?!’
굉장한 당황과 실망. 나는 버둥대는 어머니를 달래며 말했다.
“매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보셔야 합니다.”
나는 어머니를 번쩍 들어주며 활짝 웃었다.
“왜냐하면 전 이미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어머니의 매력에 푹 빠진 상태기 때문이죠. 여기서 세 배가 늘어나든 백 배가 늘어나든 저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살해…!’
넘실대는 감동의 물결. 어머니가 감동에 푹 젖어있는 틈을 노리고 말을 꺼냈다.
“그럼 이제 아무리 화나도 물건은 안 던지기로 저랑 약속하신 겁니다?”
‘살해!’
***
“뭐?! 거짓말 하지 마!”
북부왕국 뒷세계를 주름잡는 조직, ‘일레흐’의 동부지부장 힐덴은 비명을 내질렀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부정.
보고하러 온 부하는 면목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 개같은 악신의 숭배자놈들!”
분노.
“우리 쪽 애들이 죽은 것처럼 혹시 공녀의 일행 중 누가 죽진 않았어?”
타협.
“대체 왜 이런 일이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야···.”
우울.
모든 단계를 거쳐 마침내 수용에 다다른 힐덴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시발…”
에라디코의 영주에게 거액의 뇌물을 먹여서 도시 안에서 완전히 방심하고 있을 공녀의 일행을 급습한다는 계획이 빌어먹을 악신의 숭배자들이 끼어드는 바람에 완전히 망해버렸다.
준비해둔 암살자도 돈 먹은 영주도 몽땅 죽어버렸다.
“이걸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지? 그 새끼가 분명 또 길길이 날뛸 텐데.”
그래도 해야만 했다. 괜히 말 안 하고 있다가 들키면 그 빌어먹을 놈이 두 배는 더 심하게 날뛸 테니까.
힐덴은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앞으로 받을 굴욕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빌어먹을 혈통! 빌어먹을 파충류 새끼! 지가 용왕국(龍王國) 왕자면 다야? 응? 다냐고! 시발! 내가 그 새끼때매 수인들만 보면 치가 떨린다! 치가 떨려!”
***
에라디코에 머무른 지 벌써 삼 일이 지났다. 그야말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국자로 스튜를 퍼서 나눠주자, 스튜를 받은 에라디코의 시민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구원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 이름은 부담스럽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구원자님들한테 아무리 감사를 해도 모자란 걸요. 그렇지 않습니까! 다들!”
“맞아! 구원자님들 네 분 다 만세지! 암!”
“만세!!!”
나와 눈이 마주친 이들이 내게 환호했다.
“에라디코의 구원자 마르낙 만세!!!”
악마도살자, 악신의 대적자 다음엔 에라디코의 구원자인가.
‘살해!!!’
나는 따라 외치는 어머니를 꾹 누르며 다시 국자를 바삐 움직였다. 오늘까지만 봉사하고 이 도시를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다음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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