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40
141화
리즈벨과 아이의 눈이 동시에 문가로 향했다. 그리고 둘의 입에서 다른 의미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돌아왔구나!”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시어스였지만,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난 쪽은 리즈벨이었다. 그녀가 얼른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린 소년이 문가로 달려갔다.
“지금 돌아온 거야? 보름은 걸릴 줄 알았는데!”
“……꼬마.”
“라제!”
라제. 그 이름이 리즈벨의 고막을 푹 찌르듯 박혔다. 리즈벨은 숨을 들이켜며 순금 같은 피부를 지닌 예닐곱 살짜리 소년을 보았다. 상대의 검은 눈 역시 예리하게 그녀를 담았다. 리즈벨은 숨을 죽이고 그의 반응을 살폈다.
분명 마탑에서 마지막 인사를 전할 때, 당부했었다.
“어느 시간에서 나를 보더라도,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하고 갔었는지 기억해. 이 말을 하려고 왔어.”
라제는 그녀를 기억할 것인가?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아시어스는 제 손을 더듬듯 찾아 쥐는 악마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라제?”
라제는 입술을 짓이기며 잇새로 중얼거렸다.
“지금 내 눈이 삐었냐? 꼬마.”
“뭐?”
“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아시어스는 의아함에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리즈벨은 나흘 전에 여기 왔어. 엘제 누나랑 같이.”
“저…… 멍청한 것.”
라제는 사납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아시어스의 뒤편에서 기이한 떨림이 감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제. 내 이름이 뭐지?”
“이…….”
라제는 결국 왈칵 역정을 냈다.
“리즈벨 발디마르, 이 미친 것. 네가 돌았지, 정말!”
아시어스는 정말로 당황했다. 라제와 아는 사이라고? 설마, 착각한 거겠지. 그러나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아이는 리즈벨이 이제까지 중 가장 환하게 웃고 있는 걸 보았다.
리즈벨이 라제를 향해 손짓했다.
“뭐 해, 라제. 얼른 와서 반갑다고 해 줘. 잘 왔다고.”
“너 여기가 어디라고, 아니. 그 전에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이 멍청한 인간아!”
그러나 그러면서도 라제는 쿵쾅쿵쾅 발을 구르며 달려와 그녀에게 안겼다.
“너는 이번에야말로 네 삶을 살 수 있었는데……!”
“난 그 어느 때보다 내 삶에 충실한걸, 라제. 다시 만나서 반가워.”
“머저리 같으니!”
이 거친 화법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지. 리즈벨은 그녀의 허리께까지밖에 안 오는 꼬마 모습을 한 악마를 안아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 * *
“너는 말이야, 뭔 일을 벌일 줄은 알았지만. 이딴 허무맹랑한 짓을 벌여? 내겐 일언반구도 없이?”
라제의 툴툴거리는 말투는 여전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눈가가 빨갰다. 리즈벨은 소매로 눈물이 글썽글썽하게 맺힌 눈가를 톡톡 닦아 주었다.
“이 손 떼. 애 취급하지 마.”
그러면서도 얌전히 입만 뚜 내밀고 있는 것까지 여전했다.
“대체 언제 온 거야?”
“이제 열흘 됐어. 이 저택에 머무른 지는 나흘째고.”
“그럼 열흘 전부터 이 땅덩어리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게 네 짓이구나.”
“그걸 느꼈어?”
“그럼 느끼지 못 느끼겠어? 이 시간대에서 힘 좀 쓴다 싶은 것들은 전부 어렴풋이 눈치챘을걸. 이 집 인간들도 그렇고, 어쩌면…….”
“헬라르도?”
“가능성 없지 않지. 젠장.”
라제에게 지금까지 없던 기억이 생겨난 것은 정확히 열흘 전이었다. 세계의 균형이 묘하게 어그러짐을 인식했을 때, 라제의 머릿속을 비집고 기억의 파편들이 쏟아져 내렸다. 미래의 파편들이.
주인을 독촉해 저택에 돌아와 리즈벨을 마주하는 순간, 조각난 기억은 완벽하게 짜 맞춰졌다. 라제는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리즈벨의 몸을 휘도는 성력은 그가 알던 것보다 훨씬 또렷했다.
빛 무리가 작은 요정의 형상으로 창틀에 앉았다가, 다시 방 안을 한 바퀴 빙 돌며 금가루를 흩뿌렸다. 좋단다, 아주.
“별 희한한 힘을 다 얻었구나.”
“원래 내게 있던 거야. 각성이 늦었을 뿐이지.”
리즈벨은 어깨를 으쓱했다. 위기감이라곤 한 톨도 없는 얼굴에 라제는 인상을 찡그렸다.
“균열은 시작됐어. 정확히 네가 뭔 짓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면 틈은 점점 더 벌어질 거야. 대체 무슨 짓을 해 놓은 건지…….”
라제가 말한 ‘균열’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시간 선을 두 개로 나누고, 이 시간대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그녀가 과거에 나타나며 생겨난 시간의 괴리다.
리즈벨의 권능이 경고한 적이 있다.
[본래의 시간 선에서 떨어져 나온 세계는 천천히 소멸해 갈 거야. 모체가 되는 세계도 마찬가지고.]그렇다면 세계가 균열을 따라 무너지기 전에 모든 것을 바로잡아 놔야 한다. 라제가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인데?”
“일단 가주님을 독대해 봐야지.”
리즈벨의 긴 손끝이 탁자 위를 톡톡 두드렸다. 가주와 함께 떠나 있다던 악마, 라제가 저택으로 귀환했다. 그렇다면 가주도 돌아왔을 것이다.
“듀엔은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야, 리즈벨.”
“공녀께서도 그러시더라. 너까지 그러니 이제 조금 무서워지기는 하는걸.”
그러나 무섭다는 사람치고 리즈벨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다. 라제는 인상을 구겼다. 저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 또 나왔다.
“일이 만약에 성공한다 쳐. 그럼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나? 아스테르반에 헬라르를 봉인한 뒤에는 균열을 해결하러 가야겠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고?”
라제가 대번에 맹점을 찔렀다.
“그럼 아시어스는?”
“운이 좋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게 그렇게 쉽게 나올 말이야? 그놈을 보자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었어?”
리즈벨이 태연하게 라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제. 어차피 이 시간의 아시어스는 나를 몰라.”
“…….”
“그리고 나 아시어스에게 이제 더는 아무것도 안 바라. 어린 시절에는 생각보다 훨씬 밝은 꼬마였다는 걸 알고 나니까, 이번에는 그 모습 그대로 컸으면 좋겠어. 그걸로 충분해.”
“충분? 웃기고 있네.”
라제의 눈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리즈벨의 소매를 잡고 쏘아붙이듯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안 보고 싶어?”
“…….”
“저런 꼬맹이 모습만으로도 괜찮다고?”
리즈벨은 침묵했다. 라제는 그 솔직하지 못한 모습에 한숨을 쉬는 한편,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아시어스를 ‘먹었다’. 그의 육신, 영혼, 기억, 마력 한 자락까지 모두. 가여운 멍청이를 먹는 건 심장을 저며 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시어스가 마지막 순간에 내린 판단은 옳았다.
라제에게는 그의 모든 조각난 파편들이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지금은 미래의 일이 된 먼 과거에, 그를 먹은 아시어스에게 그의 파편들이 고스란히 남아 힘을 발휘했듯이.
‘어쩌면…….’
악마의 검은 눈이 반짝 빛났다. 라제는 슬쩍 문가를 바라보았다. 리즈벨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라제에게는 문밖에 서 있는 아이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아시어스는 문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 라제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얼른 기척을 숨겨 내는 마법진을 발밑에 그렸다.
‘뭐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라제와 리즈벨은 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지. 라제와 안면이 있다면 당연히 아버지와도 구면이어야 할 텐데, 그녀는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말했었다.
고민에 빠지는 바람에 아이는 라제의 검은 마력이 슬쩍 그의 발목에 스며드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날 밤, 소년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 * *
“아시어스.”
그건 뭐였을까. 늘 가족, 혹은 마법으로만 가득 차 있던 소년의 머릿속은 요즈음 전혀 다른 것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손님. 어제 라제와 그 손님이 나누던 대화.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뭔가 묘하게 자꾸만 느껴지는 기시감. 그리고 간밤에 꾼 이상한 꿈.
“아시어스, 오늘 안색이 어둡구나. 무슨 일 있니?”
“아…….”
그제야 소년은 퍼뜩 깨어났다. 걱정스러운 눈동자 두 쌍이 저를 보고 있었다. 아이는 멍하니 어머니의 얼굴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푸른 눈에 걱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려다 또 멈칫했다.
“너는, 그리고 나는 괜찮을 거야. 아시어스.”
아스라이 귓전에 맴도는 목소리가 있었다. 잿빛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왜 그래? 어디 아파?”
“…….”
눈. 저 푸른 눈. 주위의 풍경이 이지러졌다. 저를 보는 리즈벨의 얼굴 위에 어떤 환영이 덧씌워졌다. 여자의 표정이 변했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푸른 눈에 고인 투명한 눈물이 뚝 추락했다.
“하지 마.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
“아시어스.”
뺨에 따듯한 손이 닿았다. 소년은 그제야 퍼뜩 깨어났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 리즈벨에게로 딱 달라붙었다. 본능적으로 안정을 주는 존재에게 파고드는 아이다운 행동이었다.
“잠을 설쳐서요…….”
유레인은 리즈벨 옆에 딱 붙어 앉아 그녀를 졸졸 쫓는 어린 아들의 눈에 웃음을 삼켰다. 막내가 기본적으로 귀염성이 많은 성격이기는 하지만, 알게 된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이에게 저렇게까지 의지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걸지도…….’
꿈속에서 아들이 리즈벨을 얼마나 간절하게 붙잡았는지 기억하고 있다. 유레인은 어색하게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주는 리즈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은 왠지 리즈벨의 이야기가 듣고 싶네요.”
“제 이야기라면, 어떤…….”
“멀리서 왔다는 걸 알아요.”
리즈벨의 눈이 조금 커졌다. 유레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쩌다가 원래 살던 곳을 떠나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성력을 가지고 뤼켄으로 왔다면 헬라르와는 척을 질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을 텐데, 왜 그래야 했는지. 그 이야기는 듣지 못한 것 같아서요. 실례가 아니라면 이야기해 줄 수 있나요?”
“…….”
“단지 헬라르에 대한 적개심뿐만이 아닌 것으로 보여서. 아, 물론 내키지 않는다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리즈벨은 찻잔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실은 오지 않을 수도 있었어요.”
“…….”
“제가 살던 곳에는 모든 게 있었거든요. 사랑하는 가족, 평화로운 안식처, 적에게 먹히지 않을 만큼의 힘. 자유.”
“…….”
“제가 있던 곳에서도 헬라르를 봉인할 수 있었어요.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더라도.”
“그렇다면 왜…….”
“오라버니가, 나는 이제 네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말해 주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