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39
140화
아시어스의 기억 속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악마가 라제라, 당연히 그 흑사자가 이 사달에 얽힌 악마라고 생각했다. 리즈벨은 급히 물었다.
“언제, 두 번째 악마를 소환할 예정이신가요?”
“최대한 빠르게.”
엘제니아의 목소리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성공을 확신하는 어조다.
“아버지와 오빠가 돌아오시고 나면 아마 곧바로.”
아니야. 리즈벨은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 아니야. 악마를 소환하면 안 돼. 소환식은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리즈벨은 자신이 뤼켄의 가주에게 헬라르와의 대립을 멈추라 말할 수 없다는 걸 막 깨달은 참이었다.
인간은 무언가에게 완전히 지배당하고서는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느 한 세계도, 절대자의 손안의 인형극이 되어서는 존립할 수 없다.
헬라르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반항하는 이들에게 이길 수 없는 내기를 걸 테고, 그들은 실패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성녀는 계속해서 죽어 나갈 것이며, 대륙의 모든 국가는 매해 수천수만 명의 이단자를 박멸하리라. 지난 5,000년간 그래 왔듯이.
누군가 움직이지 않으면 무엇도 바뀌지 않는다. 그걸 가장 잘 아는 이가 바로 리즈벨 자신이 아닌가.
“이만하면 뤼켄의 신의를 보여 주는 건 충분할 듯싶은데, 어때요?”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암흑이 훅 물러갔다. 분명 문 안쪽으로 들어왔던 것 같은데 어둠이 물러가자 그들은 맨 처음 들어섰던 복도로 돌아와 있었다.
“어땠어요? 내가 보여 준 것들.”
엘제니아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생생히 살아 빛나는 눈이었다.
“지켜 주기만 해야 할 가문은 아닌 것 같죠?”
그 순간 리즈벨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아시어스의 기억 속에서 엿보았던 장면들이었다.
실패한 소환. 멸문할 가문. 본저에서 아비와 함께 흔적도 없는 죽음을 맞을 공녀.
닥칠 일들에 대해 까맣게 모르는 이들은 이토록 자신감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안다 해도, 이미 수백 년간 그래 왔듯 뤼켄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자유와 해방. 그게 그들 가문의 신념이니까. 꼭 리즈벨 자신이 그렇듯이. 리즈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께서 무엇을 보여 주고 싶으셨는지 알겠어요. 이해해요. 존중하고…….”
“아, 다행이다. 좀 걱정했는데.”
엘제니아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휘느니 꺾이는 걸 택하는 부류라. 죽어도 헬라르와의 대결에서 먼저 발을 빼지는 못하거든요.”
엘제니아는 리즈벨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조금 헝클어진 금빛 머리카락 끝을 살살 빗겨 주며 말했다.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다고 했죠, 리즈벨. 하지만 이미 잘 아는 것 같은걸.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은 이해와 존중이 아니던가요.”
“……그런 걸까요.”
“그럼요. 친구라는 걸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다정하게 아침 인사를 건네 주고. 좋은 식사를 함께 하고, 경청하고, 공감하고, 위로하고…….”
“…….”
“그런 사소하고 다정한 것들을 함께 하는 거죠. 친구라는 건. 나는 우리가 당신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해요. 당신도 우리에게 그래 주었으면 좋겠고.”
“…….”
“그래야 어떤 길이든 함께 갈 수 있는 거니까.”
엘제니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보다 더 잘 이해할 수는 없었다. 리즈벨 자신이 아시어스에게 늘 바랐던 평범한 것들이 아닌가.
“내일, 아침 인사 해 줄래요?”
리즈벨은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제니아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와 아버지, 오빠와 남동생에게 하듯 리즈벨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공녀.”
“엘제라고 불러요. 친구끼리는 원래 이름을 부르는 거거든요.”
사실 뤼켄의 공녀를 이름으로 부르는 이들은 가족 외에는 없었다. 리즈벨이 머뭇거리는 사이 엘제니아가 잽싸게 선수쳤다.
“그러니까 나도 리즈벨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시어스에겐 이미 이름을 허락했다면서!”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리즈벨은 알 수가 없었다.
엘제니아가 돌아간 뒤, 아시어스는 멍한 얼굴의 리즈벨을 데리고 저택의 나머지 구조를 대강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그녀의 방 앞으로 돌아왔다. 문 앞에 서서, 그들은 잠시 오가는 말 없이 한참을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침묵을 깨뜨린 이는 리즈벨이었다.
“나 정말 후회 안 해. 여기로 온 거.”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소년은 생각했다. 버들처럼 약해 보였다가도 심지 곧은 눈을 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는 사람.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치고 악한 이는 없다는 것이 소년이 가진 믿음이었다.
“내일도 와도 돼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푸른 눈에 약간의 놀라움이 비쳤다. 그러다 이내 그녀의 만면에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언제든 괜찮아.”
“‘언제든’이요?”
아이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내일 저녁에도 또 와도 괜찮아요? 모레는요?”
리즈벨은 저를 향한 잿빛 눈을 홀린 듯 내려다보았다. 눈을 똑바로 마주해 오는 모양이 사랑스러웠다. 호선을 그리는 입매의 모양은 익숙하다.
“언제든 네가 온다면 기쁠 거야.”
“응. 그럼 아침에 올게요.”
아이가 눈을 찡끗했다. 그녀가 늘 아시어스에게서 보고 싶었던 그늘 없는 얼굴이었다.
다음 날부터, 소년은 아침마다 리즈벨의 침실 문을 똑똑 두드리기 시작했다.
* * *
리즈벨이 뤼켄 저택에서 지내게 된 지 나흘이 지났다. 나흘 동안 아시어스는 하루 두 번, 아침과 저녁에 그녀와 함께했다.
오후쯤에는 유레인이나 엘제니아가 그녀를 불러다 점심 식사와 식후 티타임을 함께 했기 때문에 사실상 종일 함께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나흘째 되는 날에는 엘제니아와 유레인이 뤼켄의 제자 교육 건으로 잠시 저택을 비운 터라, 오늘의 리즈벨은 종일 아시어스의 차지였다.
소년은 찻잔을 붙잡고 차를 홀짝거리며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관찰했다. 리즈벨은 뤼켄의 저택으로 날아드는 소식지들을 펼쳐 읽고 있었다. 자신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창가로 들이치는 햇살에 금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공기 중에 가벼운 먼지가 깃털처럼 부유했다. 투명하고 평화로운 한낮이었다.
리즈벨의 존재감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미약했다. 저택 앞 고목 뒤에 숨어 있던 리즈벨을 발견한 순간부터 소년은 그것을 느꼈다.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아득히 멀다.
소년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아예 대놓고 그녀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시선을 느꼈는지 리즈벨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그냥, 예뻐서요.”
“너도 참 너다.”
웃기려 한 말은 아니었는데 뭐가 우스웠는지, 그녀가 작게 킥킥거렸다. 아시어스는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진짠데.
너보다 예쁜 사람을 데려왔다는 누나의 말이 맞았다. 그는 태어나서 저렇게 예쁜 인간은 처음 보았다. 첫날에는 그게 신기해서 계속 보았다. 그러다 그녀가 풍기는 묘한 기운에 끌려 둘째 날에도 셋째 날에도 손님방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넷째 날인 오늘, 소년은 그녀가 두른 기운의 정체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헬라르의 성력과 닮았다.
“리즈벨. 손잡아 주세요.”
불쑥 들려온 말에 리즈벨은 소식지를 읽던 것을 멈추었다. 아이가 마주 앉은 테이블 위로 두 손을 뻗었다. 리즈벨이 멍청한 얼굴로 그 손을 내려다보자 아이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저 손 잡아 주세요.”
당당하기까지 한 어조였다. 리즈벨은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주었다. 그러나 작은 손이 그녀의 손을 깍지 껴 꽉 잡자마자, 아시어스가 단지 손만 잡고 싶었던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으음…….”
아이는 그녀를 탐색하고 있었다. 마력이 휘리릭, 그녀의 손을 타고 팔과 어깨로 올라가 섬세하게 그녀의 몸선을 훑기 시작했다. 리즈벨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넌 진짜 어릴 때랑 변한 게 없었던 거였구나…….”
첫 만남 때에도 대뜸 입부터 맞추며 구석구석 살펴보더니, 정말이지 한결같다. 리즈벨이 엉뚱한 향수에 잠긴 사이, 탐색을 끝낸 아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상해.”
“뭐가?”
“리즈벨에게서 위험한 향이 나요.”
아이가 그녀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을 빙 돌아 오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자리에 쏙 올라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와 목 쪽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늠하듯 몇 번 코를 찡긋거리며 그녀의 향을 맡던 소년이 불쑥 질문했다.
“나 언제 리즈벨을 본 적 있어요?”
“……아니.”
“그런데 왜 내 향이 묻어 있지?”
이해하기 힘든 듯 미간이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리즈벨은 가까스로 둘러댔다.
“이전에…… 너랑 비슷한, 사람하고 오래 같이 있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봐.”
“나랑 비슷한 사람?”
“응…….”
예쁘고 반듯한 눈썹이 휙 추켜 올라갔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보다 더 예뻤어요?”
“어?”
이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리즈벨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어…… 너만큼 예뻤어.”
“…….”
아이는 여전히 심술이 난 표정이었다. 리즈벨은 그 얼굴을 보며 상념에 빠졌다.
이 나이 또래의 소년. 리즈벨은 그녀가 어렸을 때 봤던 형제들을 떠올렸다. 발디마르가 전사의 나라이며 형제들이 하나같이 괴물 같은 발육을 자랑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아시어스는 또래보다 조금 작은 듯했다.
어렸을 때는 이렇게 작고 귀여웠단 말이지……. 다 컸을 때와의 괴리가 어마어마하다. 하기야, 헬라르에게 붙잡혀 있을 때까지만 해도 덩치가 작았으니. 여신에게서 해방되고 난 뒤에야 키도 체격도 몰라보게 성장한 것이다.
아이가 딴생각에 잠긴 그녀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나보다 키도 크고?”
“응.”
“마법도 더 잘 엮었어요?”
“응.”
객관적으로는 그렇지. 리즈벨은 별생각 없이 긍정했다가, 아이의 얼굴에 낯익은 표정이 떠올라 있는 걸 알아챘다. 그녀가 아시어스를 놀려 먹을 때마다 그가 짓던 딱 그 표정이었다. 잔뜩 토라진. 리즈벨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아니야. 이제 보니까 네가 훨씬 더 예쁜 것 같아.”
“거짓말.”
그러나 아이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결국 리즈벨은 손을 들어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웃음을 참으며 아이를 살살 달래었다.
“진짜야. 그리고 너도 몇 년만 지나면 엄청 클 거야, 아시어스. 나보다 한 뼘은 더 클걸.”
“…….”
“그리고 네가 훨씬 더 착하고 귀여워. 그 남자는 정말이지 엄청나게, 말을 안 들어 먹었거든.”
소년은 미간을 찡그렸다.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안 좋다.
“하지 말라는 짓만 하고, 못된 말이나 툭툭 하다가 결국 혼나고 울고 그랬어.”
왜 이렇게 기분이 별로지? 리즈벨이 생글 웃으며 당부했다.
“너는 그러면 안 돼. 알겠지?”
“……네.”
대답은 착실하게 나왔다. 소년은 뭔가 찜찜한 와중에도 리즈벨에게 귀염받으려면 말을 잘 듣기, 못된 말 하지 않기 같은 수칙들을 머리에 새겼다.
“뭐야, 지금?”
문가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