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금이 간 마석 (1)
던전의 2층 또한 1층과 마찬가지로 성과 호수가 있었다. 다만 성은 이미 반쯤 무너져 있었고 호수 또한 늪처럼 질척이고 얕아진 채였다. 밤과 낮이라는 분위기 차이도 있었지만 침수 식물이 무성하게 우거져 음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위로 나타난 것은 지느러미가 날개로 변이한 듯한 수룡이었다. 배경도 보스 몬스터도 1층의 진화판쯤 되는 건가. 아무튼 용종이라고 해도 A급 수준이니 별거 아니었다. 전투력 F급이 할 말은 아니지만.
“노아 씨 혼자 상대해 보는 게 어때요? 독이나 다른 스킬은 쓰지 말고 수화만 써서요. 비행형 용종이니 여러모로 도움 되는 경험이지 싶은데.”
다른 둘이 처리하게 두기엔 내새끼 스킬 적용해 놓은 게 아깝기도 하고.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용으로 변해 날아올랐다. 빨리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냐고 성현제가 한 마디 던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노아의 보스 몬스터 사냥은 시간이 꽤 걸렸다. 수화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비행 위주고 애초에 근접전 스타일도 아닌 탓이었다. 그래도 무사히 수룡의 숨통을 끊어내는 걸 보니 기특해졌다.
“밖은 몇 시쯤 되었을까요?”
“지금쯤이면 슬슬 날이 밝아오고 있겠군.”
24시간도 채 안 걸렸다니, 정말 빠르긴 빠르다. 이게 다 노아와 리에트가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는 덕분이었다. 원래라면 1층과 2층에서의 이동 시간에만 하루 이상 소요되었을 텐데.
보스 몬스터가 사망하자 게이트가 나타났다. 나가면 바로 가까운 의류점에 들러 옷부터 사 입어야겠다. 지금 꼴로 보는 눈 많은 사육시설로 돌아갔다간 틀림없이 유현이 귀에 들어가겠지. 상의는 그렇다 쳐도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바지는 나 공격당했소 광고하는 셈이니 감춰야 한다.
“…저건 또 뭐야.”
잘 싸우고 돌아온 노아를 칭찬해 주고 있는데 잠깐 사라졌던 리에트가 무언가를 질질 끌고 왔다. 다름 아닌 굴비두릅처럼 줄줄이 묶인 사람들이었다. 몰골이 말이 아닌 최석원과 윤경수도 보인다.
“다 죽인 거 아니었습니까?”
“아껴야 잘살지.”
아이템도 아닌 시계에 억 단위 쓰는 인간이 할 소리냐. 하지만 다들 상급헌터니만큼 그냥 죽여 버리기엔 아까운건 사실이었다. 약점 잡고 흔들 수 있는 입장이라면 더더욱.
심지어 S급도 둘이나 되고.
“관광의 마지막은 역시 쇼핑이죠. 저도 하나 지르겠습니다.”
“안 산다더니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관광객이로군.”
“고객 마음이 바뀌었으면 감사히 판매해야죠, 가이드 씨. 여기 서비스가 영 별로네.”
“눈과 팔을 바치는 정성에도 별로라 하시니 이것 참. 하는 수 없이 통째로—”
“거절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줄 거면 스킬만 내놔라. 리에트도 뭔가 받기로 한 건지 굴비두릅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수담도 크지만 MKC는 먹을 게 더 많겠지.
‘나가면 유현이 계약부터 확인하고…….’
디아르마의 기억들을 차분히 정리해 봐야겠다. 의식 속에서 직접 끄집어낸 것들이라서인지 상당한 양임에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게이트를 넘어서자 약간 후끈한 바람이 느껴졌다. 이어 밝아 오는 하늘이 보인다. 옅게 보랏빛 도는, 어둠과 빛이 뒤섞인 하늘이.
…왜 보이지. 여기 실내였는데. 그런데 야외다.
제법 큰 던전 건물이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흔적은 남아 있었다. 외진 곳인데다가 A급 던전 옆인 만큼 주위의 다른 건물은 인적이 없었는데… 이젠 건물도 없었다. 대신 쳐진 바리케이드와 사람들과 그리고.
“…유현아?”
게이트의 정면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는 유현이가 있었다. 흔한 플라스틱 의자건만 분위기만큼은 왕좌에 자리한 제왕 같다. 다시 말해 무겁다. 싸늘하게 식은 표정도 흘려내는 기세도. 심지어 손에 긴 칼을 빼들고 있다. 무기 꺼내면 안 되는 거 아니냐.
그 옆으로 아성체보다 약간 큰 상태의 피스도 보였다. 역시나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마 피스 머리 위의 삐약이는.
– 삐약!
왜 따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 잡고 있는 두 놈과 달리 반갑게 날개를 들어 인사해 주었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 피곤한 얼굴의 송태원도 서 있었다.
“들통났나 보군. 하긴 눈에 불을 켜고 있었을 도련님이 눈치 못 챌 리 없겠지. S급 헌터가 둘씩이나, 그것도 다른 상급 헌터들까지 동원해 움직였으니.”
성현제가 남 일처럼 말했다. 아니 짐작했으면 귀띔이라도 해 주지.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여유만만한 성현제와 달리 노아는 약간 긴장한 채였다.
“형.”
유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 내린 시선이 찢어진 바지 위에서 멈춘다. 음, 들켰네.
“이거 말곤 다친 곳 없어.”
실제 몸뚱이는 말이다. 용새끼와 있었던 일은, 어차피 진짜도 아니고. 용새끼는 진짜로 죽긴 했다만 아무튼. …영원히 감추는 편이 낫겠지. 용새끼는 물방울이 잡아 죽인 걸로 치자.
“그 셔츠, 세성 길드장 거 아닌가.”
던전 아이템이긴 하다만 그래도 겉보기엔 평범한 거 같은데 눈썰미가 좋구나.
“아, 그게…….”
설명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동생 앞에서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상황이, 좀… 그렇다. 그냥 더러워져서 빌려 입었다고 할까. 던전 내에서 옷 더러워졌다고 갈아입는 헌터라니 웃기지도 않지만.
그때 굴비두릅이 게이트 밖으로 하나둘씩 툭툭 내던져지기 시작했다. 자연히 옆으로 비켜서자 쌓인 사람들 위로 리에트가 폴짝 뛰어나온다.
“다 꺼냈— 어라? 근처에서 던전이라도 터졌대?”
아뇨, 대신 동생이 터지기 일보 직전입니다만. 굴비두릅에 이어 리에트까지 나타나자 그렇잖아도 사납던 눈에 붉은 기까지 감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성현제가 날 미끼로 삼은 거다! 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이 잠깐 들었다. 진짜로 그랬다간 제1회 랭킹전 개최될 분위기니 참아야겠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인내란 인내는 죄다 끌어모아 눌러 참는다는 표정으로 유현이가 성현제에게 물었다.
“용에게 납치되어 덮쳐지던 공주님을 구하고 춤을 췄지. 아, 키스는 받지 못했다네. 공주님이 좀 매정하셔서.”
미쳤냐, 키스를 왜 해. 시발스럽게 정신 나간 대답에 유현이의 냉랭하던 표정에 금이 갔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동생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듯 나를 돌아보았다.
“어… 헛소리긴 한데, 사실이기도 하고…….”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참 어이가 없었다. 저게 다 실제로 벌어진 일이 맞다니. …아니 진짜 어쩌다 저렇게 되어 버린 거냐. 이게 다 성현제와 리에트 때문이다. 태생 S급 둘만으로도 이 꼴인데 둘이나 더 남았다니. 벌써부터 뒷골이 당겨 온다.
설마 이번보다 더한 막장 드라마를 찍게 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용이었어!”
리에트가 한쪽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끼어들었다. 그런 그녀 앞으로 송태원이 다가가 수갑을 내밀었다.
“불법 계약서 매매와 밀입국, 그리고…….”
송태원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성범죄 쪽으로—”
“아, 아뇨! 갑자기 무슨 말씀을…….”
눈치 더럽게 빠르네. 송태원이 쓸데없이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헌터는 스탯 등급이 성별보다 앞서기에—”
“네, 알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최소한 동생 없는 곳에서 말하자. 한숨을 삼키며 눈꼬리를 잔뜩 치켜올리고 있는 리에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리에트.”
“응, 자기야. 좀 피해 있을래?”
뭘 하려고. 물론 순순히 수갑 찰 생각은 전혀 없겠지.
“위법은 위법이니까 얌전히 따라가.”
“내가 왜?”
“여기서 사고 치면 진짜 영영 입국 금지당할걸. 나한테 몬스터 새끼 맡기고 싶거든 제대로 처벌받아. 난 불법 루트 안 받을 거니까 깨끗한 손으로 정식으로 맡기라고. 어차피 S급 헌터니까 징역은 안 살잖아.”
“으으으음, 알았어.”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리면서도 순순히 두 손을 내민다. 맡길 몬스터가 대체 어떤 녀석일까. 보통 마수는 아니겠지.
리에트를 무사히 검거한 송태원이 살짝 감격이 깃든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쉽게 리에트를 잡아갈 수 있을 줄은 몰랐겠지. 그에 더해 노아도 눈이 초롱초롱하다.
자, 이제.
“유현아.”
“성현제는 습격받을 거 모를 리 없었을 테고, 형도 알고 있었어?”
“대략은.”
작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집에 가 있어.”
나 보내고 나서 뭐 하려고. 굴비두릅과 성현제를 노려보는 유현이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절대 말로 할 분위기는 아니다. 성현제 저 인간도 피할 리는 만무하고. 지금도 봐라, 눈이 웃고 있다.
어쩌지, 어쩐다, 안 가겠다고 버텨 볼까. …3분 내로 들려 나가는 미래가 떠오르는군. 으으으.
“…같이 가자.”
“뭐?”
“너한테 따로 말해 줄 것도 있고, 그리고 또…….”
또, 또…….
“…불안해서 그래.”
나는 피해자다. 용한테 납치도 당했고 다리도 다쳤고 관광가이드는 완전 사기꾼이고. 유현이 옆을 스쳐 지나가 피스 머리 위의 삐약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릉대며 몸을 붙여 오는 피스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멀쩡해 보여도 진짜 멀쩡한 건 아니거든.”
공포 저항 스킬 덕분에 겨우 버티고 있는 거라고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반쯤은 사실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스탯 F급이 감당할 만한 일들은 아니었지.
“그러니 같이 가 주면 안 될까? 다른 사람들도 많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믿는 사람은 유현이 너잖아.”
차마 얼굴 보고 말할 순 없어서 삐약이와 눈을 마주했다. 우리 삐약이, 언제 봐도 귀엽기도 하지.
“…알았어.”
넘어왔다. 역시 착한 내 동생.
“이대로 끝내겠다는 건 아닙니다.”
무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유현이가 성현제를 사납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야 되레 실망스럽지. 형님 잘 달래 놓고 연락해 주게. 아니면 같이 와도 좋고. 두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꺼져 가는 불에 부채질하지 마라, 망할 인간아. 다행히 유현이는 더 말 않고 돌아섰다.
“노아 씨, 혼자 돌아가실 수 있죠?”
“…네.”
어째서인지 시무룩해진 대답이 돌아왔다. 누나 수갑 찰 때까지만 해도 기분 좋았는데, 왜 또 울적해진 거지. 작아진 피스를 데리고 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내 집이 아닌 유현이 집이었다. 명우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다 보니 효도중독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기엔 유현이 집이 더 편했다. 명우한테 출몰 지점 좀 정해 놓으라 해야겠다. 대체로 거실이긴 한데 가끔 엉뚱한 데서 튀어나오기도 하니.
“야, 너 그거…….”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불도마뱀이 천자락을 야금야금 삼키고 있었다. 한동안 신세 졌던 성현제의 셔츠다.
“돌려줘야 하는데.”
하지만 말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반쯤 삼키기도 했고. 잘 먹네.
“이리 와서 앉아 봐.”
소파로 가며 유현이를 불렀다. 피스가 당연하다는 듯 내 무릎 위로 올라오고 삐약이도 그 위에 자리 잡았다.
“삐약이는 왜 데려온 거냐?”
“쫓아오기에.”
유현이가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셔츠를 다 먹어치운 도마뱀이 동생의 몸 위로 기어오른다.
“효도중독자와 한 계약, 아직 그대로인지 확인해 봐.”
내 말에 유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형이 어떻게… 설마 성현제 그 자식이—!”
“내가 물어봤고 대답해 준 거다. 그리고 시스템과 아는 사이인데 까맣게 몰랐겠냐.”
그쪽에선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지만. 재차 계약 확인해 보라고 재촉하자 인벤토리에서 계약서를 꺼내 든다. 성현제의 것과 비슷한 흑색 판이다. 도마뱀 새끼 죽었는데도 해지되지 않았군.
“지금 해주해 줄게.”
“하지만 형 저주 저항은 L급이잖아.”
“이 계약서, 저주독룡왕의 주인 상대로는 스킬 효과 두 배 적용되거든. 성현제 상대로 시험도 해 봤어. 팔이랑 눈이 걸려 있었는데 멀쩡하게 풀리더라.”
“그건 좀 아쉽네.”
“넌 대가가 뭔데?”
“…두 눈.”
…이 망할 놈의 자식이.
“야! 한유현!”
“잠깐만, 형! 그러다 형이 다쳐!”
실제로 등짝 후려친 손이 저려 왔다. 손목도 약간 쑤시고. 유현이가 포션을 내밀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땐 아직 어리기도 했고, 까다로운 조건도 아니었으니까. 성현제도 팔과 눈을 걸었다며.”
“그 인간이야 사지를 다 걸든 말든 내 알 바 아니고. 너 진짜—!”
“형도 나 속이고 던전 가서 다쳤잖아.”
“그냥 다리만 좀 찔렸을 뿐이야. 눈이랑 같냐. 그것도 두 개 다, 야, 너!”
분에 못 이겨 발을 구르자 피스가 유현이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삐약이도 삐약삐약거렸다. 그러자 유현이의 도마뱀도 마주 쉭쉭거린다.
덕분에 조금 진정이 되는군.
“계약부터 풀자. 이리 와.”
팔을 뻗어 유현이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허나 막상 계약을 어기게 하려니까 입이 잘 안 떼어졌다. 괜찮겠지. 성현제도 멀쩡했으니까.
망할 도마뱀 새끼, 왜 하필 눈을 두 개 다 걸어. 성인도 못 된 어린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죽이기 전에 어떻게든 협박해서 계약부터 해지하게 할 걸 그랬나.
“형?”
“그, 준비됐으니까 말해.”
“효도중독자에 대해 알고 있어.”
파직, 작은 소리와 함께 꺼내 놓았던 계약서가 부서졌다. 황급히 유현이의 얼굴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멀쩡하지?”
“멀쩡히 잘 보여.”
“두 번 다신 그런 미친 짓 하지 마라.”
“응.”
일단 한시름 돌렸고. 이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을 해 줘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