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27
27화 OFF (3)
“한유진 씨?”
김성한은 테이블 너머의 남자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남자, 한유진의 손에서 떨어진 술잔이 데구르 구르다 접시에 걸려 멈췄다. 쏟아진 술이 테이블 아래로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괜찮습니까?”
묻는 말에 한유진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어 깊게 한숨을 내쉰다.
“김성한 씨.”
그가 연거푸 한숨을 흘리며 숙였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반쯤 풀린 눈에 붉어진 피부가 누가 봐도 거하게 취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많이 취한 모양입니다. 이만 일어나죠.”
“아뇨, 잠깐만요.”
한유진이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취한 것치곤 정확한 발음에 선명한 목소리라 김성한은 순간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 정말 취한 거 맞나.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요?”
“예. 하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어요. 아, 진짜 왜 이런, 이따위의…….”
무어라 작게 중얼중얼하던 한유진이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진심으로 하기 싫다는 표정이라 대체 뭘 하려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자세히 말해 주면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도와… 음, 아뇨. 그냥 가만히 앉아 계셔 주세요. 웃지 말고요. 저 미친놈 취급하지도 말고요. 그냥 평소처럼 근엄하게 앉아 계시면… 네.”
그러고는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뱉는다.
한유진은 숫제 울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로 피처 잔의 얼음을 꺼내어 달아오른 뺨에 대고 문질렀다. 제 딴에는 정신 차리려고 하는 짓인 듯했다.
“이건 진짜 제 진심이 아닌데요, 김성한 씨.”
“예.”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진지하게 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정말 이러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데 지금 이 기회에 반드시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김성한은 무심코 자세를 바로 했다. 분명 취해서 저러는 것 같긴 한데, 술주정이라기엔 또 너무 멀쩡하게 말하고 있었다.
혹시 정말로 중요한 속내를 털어놓으려는 것은 아닐까.
요 며칠 그가 봐온 한유진은 품고 있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해연 길드장의 친형이라는 확실한 신상 정보가 없었더라면 정체가 의심스러웠을 정도였다. 갓 각성자 등록을 마친 사람이라기에는 너무 많이 알고 있고 너무 능숙하게 행동했다.
그렇기에 취중에, 경계심이 벗겨져 나간 지금 이 순간에, 그가 해야만 한다는 말에 귀가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성한 씨.”
“예.”
한유진의 입술 끝이 작게 떨린다. 망설이던 그가 드디어 속마음을 내뱉었다.
“사랑합니다.”
“…네?”
김성한은 30여 년 평생에 가장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고막에 내리꽂힌 한 마디가 뇌로 바로 연결되지 못하고 주위만 빙글빙글 맴도는 듯했다.
이어 터져 나온 감정은 불꽃놀이처럼 색색이 다양했다.
당황스럽고도 어이없으며 우습기도 했다. 기대가 폭삭 무너지며 허탈한 기분이 들었지만 동시에 저 남자도 취하면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인간적인 친근감도 느껴졌다.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나 유쾌했다.
“진짜 고백하는 게 술주정이었군요.”
김성한은 뒤늦게 튀어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이 그거였다면 하셨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죠.”
“해야 할 일이요? 아, 참.”
한유진이 또 마른세수를 했다.
“제가 혹시,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재차 진지하게 물어오는 모습에 결국 웃음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김성한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했습니다.”
“진짜요? 이런 미친. 아니, 성한 씨에게 한 말은 아니고요. 근데 제가 사랑한다는 소리 했습니까?”
“예.”
“진짜요? 근데 왜… 아, 있네? 언제 됐지.”
뜻 모를 말을 하더니 하하하 허탈하게 웃는다. 김성한은 그런 한유진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와 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처음이다. 분명 처음인데, 그런데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저렇게 술에 취한 모습을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다.
아니, 분명히 보았다.
김성한은 자신의 기억 속을 헤집었다. 그리 오래된 기억은 아니었다. 이 년 전쯤에도 봤었다. 그보다 더 전에도, 자신이 어릴 적에도.
‘…할아버지.’
불현듯 떠올랐다. 김성한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할아버지.
약주 얼근하게 취하면 매정한 아들이 버리고 간 손주에게 사랑한다 말하며 허허 웃던 빼빼 마른 노인.
머리를 부비던, 등을 토닥여 주던 주름진 나무토막 같은 손이 선명히 떠오른다.
‘…나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사람인데. 나도 취했나.’
A급 헌터가 이런 평범한 술에 취할 리 없건만 취기 탓을 해버릴 만큼 엉뚱한 생각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을 보며 일흔 노인을 떠올리다니. 착각에도 정도가 있었다.
하나 그 이상한 괴리감은, 이내 강력한 힘에 의해 지워지듯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의 훌륭한 보호자였던 노인에 대한 짙은 감정만을 남기고서.
물론 한유진이 김성한의 진짜 할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다.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이따금 떠올리며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혈육조차 쉽게 믿지 못한다는 세상에서 완벽하게 안전하다 느껴지는 존재는 심히 유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유혹을 뿌리칠 이유는 제거당했다.
김성한은 미소 지었다.
“많이 취하셨어요.”
그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한유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김성한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죄송하지만 제가, 사랑한다고 말을 해야 하거든요.”
“말하셨습니다.”
“아… 말했구나. 말했다고요? 젠장, 그게 아니고요…….”
김성한은 연신 헛소리를 늘어놓는 취객의 팔을 붙잡고 부축해 일으켰다.
한유진은 의외로 비틀거림 하나 없이 멀쩡하게 걸음을 옮겼다. 사랑타령과 맛이 간 눈만 아니면 취한 줄 까맣게 모를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닌데.”
“괜찮습니다.”
“괜찮으시다니 딱 한 마디만 더 할게요.”
딱 한 마디만, 하고 진지하게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사랑합니다.”
이번에도 웃어넘기려 했다. 하지만 김성한은 문득 떠올렸다.
어릴 때와 다르게 머리가 굵어지고 체면을 중시하는 딱딱한 인간이 된 자신이, 노인의 술주정을 매번 대답 없이 흘려넘겨 왔었다는 것을.
“…저도.”
그래서 십대 때 이후 입에 담은 적 없는 말을 꺼내었다.
“사랑했습니다.”
할아버지.
* * *
…머리가 깨진 것 같았다. 어떤 미친 새끼가 깨진 틈새로 손을 넣어 뇌를 찰싹찰싹 신나게 두들기고 있는 듯도 했다.
그런 헛생각이 들 정도로 골이 띵하고 마구 쑤셔댔다. 머리가 아프다.
내 대가리. 미친. 잠들기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 기……. 젠장.
“으 이 멍청, 아으… 윽… 머리야…….”
소리치며 일어나려다 말고 도로 베개 위에 얼굴을 묻었다. 주, 죽을 거 같아…….
‘그러니까… 스킬을 껐지.’
이런 미친. 패시브 스킬이 왜 꺼져. 아니, 애초에 시스템이 이건 패시브 스킬이랍니다~ 한 건 아니지만. 그냥 사람들이 이거 패시브네 한 거지.
그래도 꺼지다니. 으으, 일단 다시 켜야겠다.
‘독 저항 스킬 켜져라.’
…뭐지. 반응이 없다.
‘왜 안 돼? 독 저항 스킬 ON. 안 들리냐, 시스템?’
여전히 메시지창은 떠오르지 않았다. 뭐야, 설마 영구적으로 꺼진 건 아니겠지. 그럼 진짜 천하의 바보짓을 해 버린 건데.
‘독 저항 스킬 켜지라고, 독 저항 스킬 ON!’
좀 켜져—
[독 저항(L) 스킬이 활성화됩니다.]메시지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두통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쇳덩이 몇 개쯤 얹혀 있는 듯하던 몸뚱이도 가벼워진다. 와, 스킬 효과 좋구나. 숙취까지 해결해 주네. 과연 전설급이었다.
‘그런데 이거, 패시브 스킬은 두 번 말해야 끄고 켤 수 있는 건가?’
일종의 안전장치 같은 걸까. 확인해 보기 위해 독 저항… 은 절대 끄면 안 되고 공포 저항 스킬을 꺼 보았다.
‘공포 저항 스킬 꺼져라, 공포 저항 스킬 꺼져라.’
[공포 저항(L) 스킬이 취소됩니다.]오, 꺼지네. 시스템은 왜 이런 걸 알려 주질 않는 거냐. 하여간 누가 만들었는지 불친절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이라도 사용 설명서 좀 첨부해 줘.
‘그런데 어제… 완전히 취해서는 엉뚱한 소리 한 건 아니겠지.’
정신이 맑아지자 걱정이 덜컥 들었다.
일단 여기는 길드 기숙사실의 내 침실이다. 그리고 옷은… 잠옷이군. 누가 갈아입힌 거지. 혹시 토했나.
침대 옆 탁자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하루가 지났고, 오전 열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부디 내가 얌전히 정신을 잃었었기를.
기도하며 상태창을 열고, 내 새끼가 최고 스킬을 확인해 보았다.
지속 시간 3일
이미 감화된 대상은 키워드 없이 사용 가능
동일 대상에게 중복 사용 불가
동일 대상에게 재사용 대기 시간 30일
키워드: 사랑한다
※ 대상이 키워드의 효과를 인지하고 있을 시 적용 불가
감화 완료 대상자 (4)
한유현(S), 유명우(F), 박예림(S), 김성한(A)]
…하하하, 미친.
김성한이 있네. 왜 있지. 시스템 오륜가. 오류라고 해 줘.
‘…그래도 스킬에 대한 건 말 안 한 모양이지.’
취중에 다 털어놓았다면 김성한에게 스킬 적용이 안 되었을 테니까. …설마 소급적용 안 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헛소리 안 했길 빈다, 제발.
나는 일어나 앉아 다시 휴대폰을 켰다.
‘확인해 보긴 해야 하는데…….’
전화하기 싫었다. 고백하는 게 술버릇이라고 말해 놓긴 했지만 진짜 취해서 사랑… 한다는 소리를 해 버릴 줄이야.
…그냥 얌전하게 한 번만 말하고 말았겠지? 쓸데없는 소리는 안 했겠지?
마른침을 몇 번 삼키고 나서 비장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괜찮아. 별일 없었을 거야. 괜찮…….
[네, 김성한입니다.]“아, 안녕하세요, 성한 씨.”
목소리가 절로 가늘게 떨렸다. 십 년 만에 만난 첫사랑이랑 통화할 때도 이렇게까진 안 떨릴 거다.
“저기, 혹시 제가, 어제… 얌전히 집에 들어갔습니까……?”
그렇다고 해 줘, 제발.
휴대폰 너머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발. 불길하다.
[취하신 것치고는 멀쩡하셨습니다.]“그, 그래요?”
어휴, 진짜 다행…….
[제게 사랑한다는 말을 서른 번쯤 한 것만 빼고요.]…서른 가지 자살법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미친, 무슨 짓을 한 거야. 딱 한 번만 더 과거로 돌려보내 주면 안 되나. 신이시여, 제발. 술 취한 멍청이를 샷건으로 날려 버릴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실례가… 무척이나… 정말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목소리를 쥐어짜내듯 말했다. 미쳤지, 진짜. 미쳤어. 한유진, 이 미친 새끼야. 한 번만 말하면 되는 것을 서른… 젠장.
목덜미가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쪽팔려 죽겠다. 이미 반쯤은 죽은 거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진짜, 진짜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많이 불쾌하셨을 텐데,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예?
순간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자, 잠깐만? 불쾌하지 않았다니, 무슨 소리야. 나 같으면 시발 이 미친 새끼가 취하려면 곱게 취하지 하고 걷어찼을 텐데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고?
…설마 그쪽 취향이셨습니까.
등골이 쭈뼛해졌다. 차라리 화를 내라. 왜 괜찮다는 거냐. 제발 화내 주세요. 미친놈 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저, 저기… 그래도, 장소도 그렇고… 기분 좋지는 않으셨을 텐데…….”
김성한이 웃었다. 웃지 마, 소름 돋아.
[다른 사람이었다면 귀찮고 불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뭐.
휴대폰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음, 이런 소리 이상하게 들릴 거라 생각은 합니다만.]…지금이라도 던질까. 이, 이상하게 들릴 소리가… 뭔데.
[어째서인지 한유진 씨를 보고 있으면, 돌아가신 조부님이 떠오릅니다.]…네? 뭐, 뭐요? 조부님?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