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792
791화 안개와 바다와 기억 (5)
“…얼른 내 뒤로 숨어요.”
현재의 한유진이 목소리를 낮추며 성현제에게 손짓했다. 저 한유진이 또 다른 성현제를 인식하면 꿈에서 깨어나고 말 것이다. 순순히 한유진의 뒤로 간 성현제가 그의 정수리에 턱을 얹었다.
“나름 노력은 해보았네만 많이 남는군.”
“확 잘라 버리기 전에 머리라도 가리십쇼. 빨래 바구니라도 뒤집어쓰든가요.”
그러는 사이 회귀 전의 한유진이 포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주위의 풍경이 확 뒤바뀌며 길게 뻗은 복도가 나타났다.
“인테리어 바꾸셨나 보네.”
바닥을 두들기는 목발 소리를 뒤따르며 현재의 한유진이 중얼거렸다. 약간 긴장한 기색이었다. 반면에 기억 속 한유진의 표정은 차가웠다. 솟아나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이를 악문 채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이윽고 너른 홀이 나타났다. 길게 굽어지는 계단 위쪽도, 갈라지는 또 다른 복도의 입구도 모두 불이 꺼져 캄캄하다. 오직 홀 너머 중앙에 난 아치형 입구에서만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라 손짓이라도 하듯.
한유진은 잠시 멈추어 섰다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아치 문 안쪽은 천장이 까마득히 높은 응접실이었다. 한쪽 벽면은 산의 일부를 떼어 온 것처럼 암석과 나무, 풀 따위로 꾸며져 있었다. 그 앞으로 자갈을 깔고 작은 실내 정원을 만들어 놓았다. 다른 쪽으로는 너른 소파와 테이블이 보인다. 조명은 약간 어둑하고 은은했다.
“매번 거절하더니 오늘은 순순히 왔군.”
잘그락. 자갈이 구둣발 아래 미끌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실내 정원의 경계선 밖에 멈춰 선 한유진이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성현제로부터 퍼져 나오는 묵직한 압박감. 보통 사람이라면 무심코 뒷걸음질 치고 말 기세가 피부를 찔러왔다.
“…송태원 실장님은.”
한유진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 또한 떨림이 느껴졌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소식이 느린 건가.”
성현제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액정 위로 손가락이 느릿이 움직인다.
“바로 나오는군.”
휴대폰이 돌려지고 사이트 메인에 뜬 기사가 보인다. 두 명의 한유진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각성자 관리실장 송태원 사망. 현재의 한유진이 짧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때의 기억이었다. 송태원이 목숨을 잃은 직후의. 성현제가 다시 휴대폰을 돌려 화면을 스크롤했다.
“던전 안에서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 아직 나와 관련된 기사는 없군.”
“…세성 길드장님!”
한유진이 버럭 소리쳤다. 성현제의 손에서 휴대폰이 버려지듯 던져졌다. 나무줄기에 부딪치고는 자갈 위로 덜그럭 나뒹군다. 금빛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죽었어.”
잘그락. 성현제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자갈과 자갈이 부딪친다. 한유진이 본능적으로 흠칫거렸다. 도망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억누르며 버티고 섰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지.”
잘그락. 짓밟힌 자갈이 소리를 낸다. 한유진의 몸이 더 크게 움찔거렸다. 자갈이 깔린 경계선 안쪽으로 소리가 멈췄다. 한 걸음의 간격.
“이것 하나를 제외하곤.”
성현제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한유진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한다.
“아직 서툴지만.”
다른 쪽 손이 장갑 끝을 잡고 천천히 당겼다. 희게 드러난 피부 위로 검은 그림자가 희미하게 어리기 시작했다. 한유진이 아는 것보다 훨씬 옅고 약한 그림자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가물가물 흔들리고 있다.
“알아보겠나.”
스며드는 약탈. 한유진의 눈동자가 떨렸다. 타인의 스킬을 빼앗았다는 말은 들은 적 없었다. 일시적으로 약화시키거나 그 능력을 복사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니 설마.
“유산이지. 내게 남겨진.”
“…성현제!”
한유진의 발이 경계선을 넘었다. 목발이 내동댕이쳐지고 노기를 담은 손이 성현제를 향해 뻗어졌다. 금안은 무심하리만치 잠잠했다. 한유진의 손이 성현제에게 닿기 직전 긴 다리가 들어 올려진다. 그대로 퍽, 덤벼드는 몸뚱이를 흔들림 하나 없이 가볍게 걷어찬다.
“큭!”
한유진이 응접실 바닥을 굴렀다. 소파가 있는 곳까지 길게 미끄러지다가 멈췄다. 성현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곧은 자세로 몸을 일으키는 한유진을 바라보았다.
“송태원 실장님을, 어떻게 한 거야!”
“너무 흥분했군.”
한유진이 다리를 끌며 다시 성현제에게로 다가갔다.
“왜 당신이 그걸-!”
운동화 끝이 다시 한번 정원의 경계선을 넘는다.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한유진의 몸뚱이가 내던져지듯 바닥을 나뒹군다.
“나라도 사과할까.”
현재의 한유진 뒤의 성현제가 작게 속삭였다. 대답 대신 발등을 밟혔다.
“그걸 가지고 있어!”
“유산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유산?”
한유진이 다시 일어났다. 비틀거리면서도 기는 죽지 않았다. S급 헌터 앞에서 본능적으로 떨고 있음에도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다. 이번에는 성현제의 손이 한유진의 목을 잡아챘다.
“헉, 커헉!”
“진정해, 한유진 씨.”
엄지로 숨통을 지그시 내리누르다가 던져 놓아준다. 실내정원의 밖에서 한유진이 크게 휘청이다가 결국 주저앉았다. 몇 번이고 괴롭게 콜록콜록 기침을 토해낸다.
“내가 강제로 빼앗을 순 없는 스킬이니.”
“그럼, 콜록, 송태원… 실장님께서…….”
“내가 나로서 남을 수 있도록. 유산이자 선물이지.”
한유진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눈가가 붉어졌으나 젖어들지는 않았다. 그대로 앉아있어도 되는 것을 고집스럽게 다시금 일어선다. 경계선 밖에서 성현제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내밀어진다. 절로 밀려드는 두려움에 움찔거렸으나 한유진은 피하지 않았다. 성현제의 손끝이 자국이 남은 목을 가볍게 건드렸다.
“들을 건가.”
“예.”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성현제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오래된 이야기지.”
옛날 옛적에. 초승달은 하얀 아이를 자신의 요람에 품었습니다. 기억을 지워 새로운 세상에 보내어 적당히 차오르면 데려와 다시 지워 보내고. 던전에서 초승달과 직접적으로 충돌한 덕분에 성현제는 상당수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어렴풋이 불쾌하게 느껴지던 자신의 처지를. 성현제는 한유진에게 설명해 주었다.
“송태원은, 월식은 나를 완전한 죽음으로 이끌 유일한 힘이라 하더군.”
희미한 그림자가 어린 손을 두 개의, 아니 네 개의 시선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실패하였고 작고 여린 희망으로 남았지.”
“세성 길드장님께서는…….”
한유진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송태원 실장님의 약탈로, 스스로를.”
“글쎄. 우선은 내게 쌓인 것들을 정리해 보려 시도할 생각이야.”
성현제가 미소 지었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보이는 생기 있는 표정이었다. 그렇다 해도 짙은 무기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였지만.
“살아가길 바란다는 말을 들어 버렸으니, 노력 정도는 해야지.”
성현제를 바라보던 한유진이 시선을 내렸다. 고개를 약간 돌린다. 서서히 젖어 든 눈이 몇 번이고 깜박였다. 송태원이 죽었다는 소식은 기사로 보았다. 당연히 믿지 않았고 이곳으로 왔다. 성현제의 말에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이제는 실감이 났다.
“…그렇군요.”
“시선을 피해 줄까.”
“처음 겪는 일도, 아닙니다. 익숙합니다.”
“과음은 좋지 않아. 홀로 마시는 것은 특히나.”
한유진은 타인 앞에서는 매번 꿋꿋하게 굴었다. 매정하단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홀로 있을 때 무너졌다.
“그래서.”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른 한유진이 다시 성현제를 올려다보았다.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평범한 F급에게.”
성현제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속사정을 털어놓을 리 없었다. 한유진이 입술을 잠깐 잘근거렸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해연과 관련되진 않을 겁니다.”
“그럴 일 없어. 내게 필요한 것은 한유진 씨뿐이니.”
한유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제가요?”
별다른 능력도 없는 F급인데. 당황하는 한유진을 바라보며 성현제가 벗었던 장갑을 다시 꼈다.
“양육자 칭호.”
“그건 그리 쓸모 있는 칭호가 아닙니다. 아시겠지만요.”
양육자 칭호 시리즈는 여럿이고 한유진만이 가진 S급짜리 외엔 널리 알려져 있었다. S급 칭호 ‘양육자’의 마지막 보답을 제외하곤 능력치도 큰 차이가 없었다.
“제 칭호 등급이 높긴 해도 하루 동안 10%의 추가 성장 버프를 주는 게 고작입니다.”
“시스템을 믿지 마.”
“예?”
“던전과 각성자가 나타나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 칭호와 스킬은, 특히 그 자신의 자질에서 비롯된 것들은 사용하지 않아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어.”
“사용하지 않아도요?”
과거의 한유진만이 아닌 현재의 한유진 또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한유진 씨 또한 마찬가지더군.”
“제가…….”
“확인하기 꽤 까다로웠지만, 한유진 씨가 피보호자로 인식하는 상대는 스킬을 쓰지 않아도 성장 버프가 주어졌어.”
“저, 정말이요?”
“범위는 넓지 않아서 바로 곁에 있어야만 영향을 끼치는 듯하지만. 뿐만 아니라 각성 등급 상승에도 도움을 주더군.”
“각성 등급이요?”
한유진이 또 한번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일 환경 속 한유진 씨의 영향을 받지 않은 A그룹의 최적화 각성 비율은 5%. 영향을 받은 B그룹의 최적화 각성 비율은 15%. 약 세 배. 여전히 낮긴 해도 유의미한 차이지.”
“대체 그런 실험을 언제… 설마 그때?”
한유진이 짐작 가는 것이 있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반면에 기억이 없는 현재의 한유진은 고개만 갸웃 기울였다.
“칭호의 간접 효과만으로도 최적화 각성이 가능했다니…….”
현재의 한유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간의 경험으로 칭호와 스킬이 시스템이 알려 주는 능력만 가진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까지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한유진 씨에게 접근하기 전의 일은 자세히 조사하기 힘들었지만, 아마 예전에 비해 칭호 효과가 더 강해졌을 거야. 칭호도 스킬과 마찬가지로 사용하고 영향을 줄수록 성장하는 법이니.”
“…그래서 절 영입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최적화 각성 확률을 10% 더 올려 준다면 쓸 만한 토템이긴 하겠네요.”
그렇다고 해도 엄청난 능력까지는 아니었다. 특히 이미 각성한 상급 헌터들에게는 무의미했다.
“길드 차원에서는, 도움이 되긴 하려나요.”
한유진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해연 길드를, 한유현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나에게도.”
성현제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한유진 씨는 타인을 성장시키는 힘 그 자체이니. 내가 약탈 스킬을 성장시켜 쌓인 것들을 처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
“그, 그럴 수도 있겠죠.”
“물론 지금은 아직 약해. 그러나 앞으로 여러 각성자들을 성장시키는 것에만 집중해 양육자 칭호의 등급을 올린다면 쓸 만할 거야.”
한유진이 혼란스러운 듯 입을 다물었다. 현재의 한유진 또한 당황하며 자신의 뒤에 있는 성현제를 흘끔거렸다.
“하지만 분명 회귀 전의 성현제 씨는 절 두고 갔을 텐데요. 내가 거절했나.”
중국의 악몽 던전의 성현제는 한유진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라며 딱 잘라 말하기도 했었다.
“다만.”
회귀 전의 성현제가 미소를 머금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양육자 칭호가 성장한 후에는 내게 집중할 필요가 있어.”
“집중이라면.”
“해연 길드장이 석류알을 손에 넣었더군.”
석류알. 현재의 한유진이 움찔거리고 기억 속의 한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의 기억을 최대 4분의 1까지 원하는 만큼 지울 수 있는 아이템이지. 아직은 한 알뿐이지만 네 알을 모두 모으면 완전히 지워내는 것이 가능해.”
“그런, 아이템을… 설마…….”
한유진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짙은 노기와 슬픔이 깃들었다.
“아예… 내 기억을, 지워 버리려고… 한유현. 내가 그렇게나…….”
성현제는 굳이 한유진의 오해를 풀어 주지 않았다. 그저 지켜만 보았다. 한참 울분을 삼키던 한유진이 손바닥이 파여라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한유진 씨는 동생에게 너무 집착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야 내가 제대로 된 성장 효과를 받기 힘들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지금.”
“양육자 칭호를 충분히 성장시킨 후 기억을 지워.”
오만하게 높은 금색 눈동자가 한유진을 내려다보았다.
“이후의 일은 내가 책임지지.”
“말도 안 되는-!”
성현제의 손이 한유진의 팔을 잡았다. 그대로 정원 안쪽으로 끌어들인다. 한유진이 크게 비틀거리며 자신을 붙잡은 손에 의지해 섰다.
“내게 관여할 텐가.”
한유진이 짧게 마른침을 삼켰다. 선을 벗어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더는 한유진과는 관계없는 일이 된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탁. 자신을 붙잡은 손을 떨쳐낸 한유진이 자갈을 밟고 경계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절룩이면서 돌아서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기억이든 뭐든, 제가 제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가.”
“칭호를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세성 길드장님께서 도와달라 하시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겁니다. 하지만 저는 한유진입니다. 그리고.”
한유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현이가 뭐라 하든, 전 동생 기억을 지울 생각 없습니다. 그놈이 진절머리 내든 말든 죽어라 버틸 테니까.”
이를 꽉꽉 깨물듯 말한다. 성현제가 웃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군.”
“앞으로 언젠가는-.”
“아니. 여기까지야.”
성현제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단숨에 실내 정원을 벗어나 한유진에게로 바싹 다가간다. 불길한 직감을 느낀 한유진이 피하려 했으나 너무도 쉽게 붙들렸다.
“월식은 삼키지. 그리고 나 또한.”
성현제의 입술에 걸린 미소가 쓰게 변한다.
“차오르기 위해 삼키는 존재이니.”
“이거, 놓으십시오!”
“한유진 씨의 그 힘 또한 먹어치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야.”
한유진과 한유진이 흠칫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