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Coming of Shinken RAW novel - Chapter 21
021/ 백설-2
“..라덴?”
보고를 들은 루아노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입술을 반쯤 벌리고서 보고를 올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역시 루아노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덴. 판타지아에서 발할라로 넘어 온 플레이어들 중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5년 전 라덴이 판타지아 투기장에서 세웠던 전적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캐삭빵에 패배해서 게임을 접기는 했지만, 라덴은 판타지아에서 하나의 전설이었다.
“..단순히 이름만 같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루아노스는 빠르게 시스템을 조작했다. 그녀는 저장해 두었던 영상을 틀고서 가늘게 뜬 눈으로 그것을 노려보았다. 그 외에도, 지금은 동영상 사이트에서 내려갔던 영상도 재생시켰다.
“..이름만 같은 놈이라 하기에는, 움직임이 너무 좋아.”
루아노스가 확보하고 있는 라덴의 영상은 둘이다. 레벨 7의 라덴이 검사와 메이스 탱커와 싸우는 영상. 그리고 이빨의 길드원 다섯과, 레벨 20이 넘는 검사를 죽이는 영상.
루아노스는 한참 동안 그 영상을 노려보았다. 이미 몇 번이나 돌려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았다.
‘닮았어.’
왜 눈치 채지 못했지? 그야, 마음속으로 아니라고 이미 결론을 내려놓았으니까. 하지만 이름이 ‘라덴’이라는 것을 들으니 그 부정이 박살난다.
레벨 10이 쓸 수 있는 스킬은 많지 않다. 라덴의 움직임을 보면 백호무술관에서 뭔가 다른 스킬을 익힌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것을 감안한다고 쳐도 직접 공격에 사용하는 스킬은 4개.
‘나머지는 스킬이 아니야.’
몇 개 되지 않은 스킬을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실전에서 응용하고 있다. 스킬을 펼쳐야 하는 상황을 정확히 짚어내고, 조금의 미스도 없이 스킬을 연계한다. 스킬 외의 회피 동작도 군더더기가 없다.
‘초심자의 움직임은 절대 아니야. 라덴이라면.. 그래. 라덴이라면 가능하지. 레벨이 10도 안 되는 아바타를 들고서 저렇게 싸울 수 있어. 라덴이라면.’
5년 전, V-스포츠에서 라덴과 레이크의 PVP를 방송했을 때. 루아노스는 현장에서 직접 해설위원을 맡았었다. 당시 그녀는 라덴이 아닌 레이크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아노스가 라덴을 싫어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라덴을 좋아했다. 팬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패배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지. 설마 그렇게, 진짜로 캐릭터를 삭제할 줄은 몰랐지만..’
내려놓았던 장죽을 들어 입술에 물었다. 골몰히 생각에 잠기면서 연기를 호흡했다. 발 빠른 놈들이 백호무술관의 플레이어가 라덴이라는 사실을 파악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빨은?”
“20명 정도 보내려고 합니다만.”
“그 정도면 되겠네. 그리고 내가 직접 가야겠어.”
루아노스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 말에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가시겠다는 말입니까? 지금 당신이 자리를 비운다면 벨라프릭스 레이드가..”
“어차피 흑접은 벨라프릭스를 레이드할 수 없어.”
루아노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실렸다. 그녀는 목덜미에 새긴 나비 문신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불칸 길드와 대치하고 있을 뿐이지. 불칸과 정면에서 부딪힌다면 흑접의 패배야. 그렇다고 내가 루카스, 그 개새끼를 잡을 자신도 없고.”
루아노스는 담담히 그것을 인정했다. 불칸. 랭킹 5위인 하이 랭커 루카스가 이끌고 있는 길드다. 지금 루아노스의 흑접은, 벨라프릭스의 궁전의 최종 보스인 벨라프릭스를 목전에 두고서 불칸과 경쟁 중이었다.
“불칸과 대치하고서 시간을 끌어 봤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어. 당장은 불칸이 뒤통수를 맞을까 조심하고서 벨라프릭스에게 돌입하지 않고 있지만.. 루카스의 성격으로 일주일 정도면 많이 참은 거지. 아마 곧 돌입하던가, 그 전에 우리를 정리하려고 들 걸.”
“하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결국 여기서 버티고 있어 봐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차라리 깔끔하게 물러서는 것이 보기 좋을 거야.”
루아노스는 거기서 말을 잠깐 멈추었다. 손톱을 잘근거리면서 씹던 루아노스는 살짝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래. 일단 루카스와 직접 담판을 지어보는 것이 나겠군. 물러나는 대신에 뭔가 더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이빨은 어떻게 할 까요?”
“서량에서 대기하라고 그래. 내가 신호를 주기 전에는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하고. 괜히 압력을 넣었다가 다른 길드가 채가게 할 수는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이빨을 대기시키고서 서량에 유입되는 외부 플레이어를 확인하라고 전해.”
루아노스는 그렇게 명령을 하고서 친구목록을 열었다.
불칸의 길드장인 루카스는 접속 중이었고, 루아노스는 한참 동안 그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 지를 고민했다.
*
맹호박투, 호왕진산, 유유호령, 대호격타, 호환백섬. 백설이 직접 보여주었던 백호의 무술.
스킬로서 전수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라덴의 스킬목록에는 저 다섯 가지 스킬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스킬로 전수받는다면 곧바로 사용할 수야 있겠지만,
“일단 맨 몸으로 해.”
백설은 그런 무술관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스킬로 바로 배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냐? 일단 스킬 없이 맨 몸으로 하고, 이게 뭔지 이해하는 것이 먼저야. 낡아 빠진 말이지만 무는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솔직히 뭔 말인지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덴은 무인이 아닌 플레이어였으니까. 그래도, 일단 가르치는 대로 하기는 했다.
질풍연각을 주먹으로 펼칠 수 있는가?
답은 NO다. 질풍연각은 발로 사용하는 스킬이다. 발로 사용하라고 만든 스킬을 주먹으로 펼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렇게 만든 스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맨 주먹을 휘두를 수밖에 없다. 라덴은 이를 악물고서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실제 몸이 아닌 아바타라고는 해도, 피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바타의 피로는 힘, 체력, 민첩. 이런 전반적인 스탯의 영향을 받는다. 지력과 마력에 더 많은 투자를 한 마법사 캐릭터가 빠르게 지치는 것이 그 때문이다.
현재 라덴의 레벨은 11. 힘이 36, 민첩이 26, 체력이 23이다. 백호의 새끼 호랑이 칭호 덕에 민첩 스탯이 +5가 붙었고, 라덴의 총 스탯은 동 레벨 플레이어보다 높다.
하지만 지친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주먹을 휘두르면 지칠 수밖에 없다. 빠르게, 더 빠르게. 맹호박투는 질풍연각의 원류다. 첫 타격을 기점으로 해서 점점 빨라지고 위력이 오르는 질풍연각을 맨 주먹으로 펼치는 것이 맹호박투다.
하지만 스킬 없이 맨 주먹을 휘두르는 이상, 휘두르는 횟수가 늘수록 몸은 지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빠르게 하려고 해도 빠르게 되지가 않는다. 휘두르는 주먹이 무겁다. 입 안에서는 단 내가 폴폴 풍겼다.
“다음. 호왕진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백설이 지시했다. 그 말에 라덴은 이를 악물고서 발을 크게 들어올렸다. 호왕진산. 그것을 생각하면서 발을 내리 찍었다.
아주 작게 땅이 울렸다. 발 구름 한 번에 지진을 일으켰던 백설의 호왕진산과 비교하자면 어린애 발걸음도 안 되었다. 너무 세게 내리 찍은 탓에 무릎이 비명을 질렀다. 확인해 보니 체력이 크게 줄어 있었다. 한계까지 몸을 움직이다 보니 체력이 줄어드는 것이다.
“땅을 찍지 말고, 앞으로 걷어 차.”
백설이 지시했다. 그 말에 라덴은 욱신거리는 다리를 앞으로 크게 뻗어 냈다. 자세를 잡지 못한 몸이 휘청거렸다.
“내가 발로 땅을 찍었다고 해서 호왕진산이 무조건 발로 땅을 찍는 기술은 아니야. 무술이라는 것은 어떻게 쓰기에 따라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다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백설은 보란 듯이 발을 들었다. 꽈아앙!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걷어찼는데도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네 사형들도 그런 식으로 내 무술을 계승한 거야. 청아는 주먹보다 다리를 쓰는 것을 선호했고, 그렇게 맹호박투는 질풍연각이 되었다. 유의는 호왕진산을 철산포로 바꾸었고.”
“..나도 그렇게 하라는 겁니까?”
라덴이 헐떡거리며 물었다. 그 말에 백설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플레이어한테는 아무래도 무리지.”
그는 우선 그렇게 선을 그었다.
“다만, 알아두라는 거야. 몸이 안된다면 마음으로라도 알아라.”
라덴은 그 말을 당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백설은 땀을 뻘뻘 흘리는 라덴을 보면서 작게 혀를 찼다.
“일단 좀 쉬어라.”
백설의 말에 라덴은 크게 숨을 내뱉으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신 몸뚱이가 욱신거리고 있었다. 일부러 줄이지 않은 고통센서가 한계에 아슬한 고통을 전해주고 있었다. 아니, 사실 고통은 버틸 만 하다.
문제는 호흡이다. 호흡이 막힌다. 몸이 무겁다. 뼈 마디가 욱신거린다. 감각이 무디다.
‘무식해.’
라덴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무식한 수행이 도움이 되나? 아무리 마음가짐이 중요하다지만, 이것으로 도대체 뭘 얻을 수 있냔 말이다.
“어?”
체력을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열었을 때. 라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힘 37 민첩 22(+5) 지력 10 체력 24 마력 10
‘..스탯이 올랐어?’
오전 중에 접속하고서 정오가 지날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허공에 주먹과 발길질만 했다. 그런데 스탯이 올랐다. 힘과 민첩, 체력 스탯이 각 1씩 올라 있었다.
‘아니 스킬을 쓰지도 않았는데..’
라덴의 표정이 멈칫 굳었다. 스킬을 반복적으로 펼친다면 경험치를 얻는다. 그렇다면 스킬 없이, 단순히 아바타를 혹사시킨다면.
“..하.”
라덴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내뱉었다. 현실에서도 똑같다. 팔굽혀펴기를 반복해서 한다면 근력이 늘어난다. 계속해서 뛴다면 지구력이 늘어난다.
‘쓸데없이 리얼하잖아.’
라덴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욱신거리는 무릎을 움켜 잡았다.
아무래도 헛고생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
“불쾌하냐?”
툭 던진 물음에 유의는 머리를 들었다. 철권 유의. 백호무술관의 다섯 제자 중 첫 번째이자 맏형이다. 그는 관주인 백설과도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백설의 나이가 스물아홉이고, 유의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으니까.
하지만 둘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살아 온 나이와 비교가 되지 않는 무의 차이가.
“..무엇이 말입니까?”
“제자 다섯 중에서 네가 가장 먼저 나의 제자가 되었지.”
“그랬지요.”
유의는 살짝 머리를 끄덕거렸다. 유의가 백설의 제자가 된 것은 10년 전이다.
백설이 백호무술관의 관주가 된 것이 열일곱 때였다. 그때만 해도 백호 무술관에는 제법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 전대의 백호 관주는 백설을 차기 관주로 점찍었고, 백설이 관주가 되면서 다른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백호를 떠났다.
백설의 성격은 그때에도 지랄 맞았다. 어른을 공경하지 않았다. 백설에게 있어서 상대를 존중하는가 마는가의 잣대는 강함이었고, 당시 백호무술관에서 백설보다 강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어린 관주의 무례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백호무술관을 떠났다.
“수제자인 너에게도 모두 전수해주지 않았어. 대신에 막내에게 전수해줬지. 그것이 불쾌하냐고 묻는 거다.”
백설이 백호무술관의 관주가 되고서 2년. 백호무술관에는 백설 외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 몇몇 제자가 되고 싶다고 찾아왔었지만, 백설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유의가 백설의 제자가 되었다. 유의는 재능이 있었고, 근성도 있었다.
그래서 제자로 받았다.
“제 능력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별로 불만은 없습니다.”
“넌 NPC니까.”
백설이 낮게 웃었다. 그리고 나도. 백설은 손을 들어 유의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플레이어의 한 달은 NPC의 몇 년이라고 보냐.”
“..글쎄요.”
“두 배는 아득히 넘지. 어쩌면 세 배 일지도 모르고.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어.”
“질투하고 있지 않습니다. 생각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나는 막 화낼 줄 알았는데. 왜 자기한테는 알려주지 않았냐면서.”
“알려주셨잖습니까. 제자의 재능이 부족해서 제대로 익히지 못했을 뿐이지.”
유의는 그렇게 말하고서 웃었다. 그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주먹을 내려 보았다. 굳은살이 잔뜩 박힌 주먹에는 흉터가 많았다. 10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주먹을 뻗어 온 증거였다.
“지금의 막내는 약합니다.”
“지금은.”
“잡배들이 막내를 노렸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알아.”
“막내가 맞고 다니는 꼴을 볼 수는 없잖습니까.”
유의는 그렇게 말하고서 쓰게 웃었다.
“청아도, 무풍도, 호량도. 똑같습니다. 막내가 관주님의 차별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막내가 약하니까. 그만한 교육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닌데 말이지.”
백설은 낄낄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막내 다음은 너다.”
백설은 유의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면서 말했다.
“..관주님은?”
“너희 다 가르치고 나서. 원래 대장은 가장 나중에 나가는 법이야.”
백설은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그는 서량에서 태어났고, 서량에서 자랐다. 지금도 서량에서 살고 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서량 밖으로 나간 적은 없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별 상관없어.”
백설은 연무장 쪽으로 향하면서 대답했다.
“난 이런 NPC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