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age member of the mandol has returned RAW novel - Chapter (10)
10화 아이돌, 계속 같이하자
입안에 맴도는 숨이 뜨거웠다.
머금고 있던 숨을 내뱉자, 쌔액쌔액 듣기 싫은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째서일까. 푹신한 솜이불을 덮고 있는데, 전신에 쇠붙이를 매달고 있는 것처럼 살갗이 쿡쿡 아려 왔다.
“아주 환자 납셨네.”
몽롱한 정신으로 음성의 근원지를 쫓는다.
체온계를 손에 든 지호가 침실 문턱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죽을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어.”
대답 대신 앓는 소리를 내자, 지호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귓구멍에 체온계를 쑤셔 박았다.
삑, 삐삑.
짧은 기계음을 끝으로 지호는 체온계를 거두어 갔다. 그러곤 체온계를 눈으로 쓱 훑는다.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지호는 사납게 미간을 좁히며 발끝으로 내 몸을 툭툭 건들었다.
“야, 일어나. 병원 가게.”
“……몇 도인데.”
“38.8도.”
“……그 정도면 괜찮아.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아마 《주간 마이돌》 촬영 때문이겠지.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극심한 긴장감에 시달리다가, 촬영이 끝난 후에 경직됐던 근육이 이완되며 몸살이 찾아온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철저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미래소녀 멤버의 연락처를 손에 넣은 최하준 때문에 화병이 난 걸지도 모른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 상태 창을 띄웠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지호야, 나 좀 자고 싶어. 문 좀 닫아 주라.”
지호는 나를 향해 궁상이란 궁상은 다 떤다며 투덜거렸고, 나는 가물거리는 두 눈을 힘없이 내리감았다.
실로 오랜만에 만끽하는 고요함이었다.
얇은 벽 너머엔 멤버들이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득한 우주에 홀로 고립된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땐, 나는 비좁은 아동용 침대에 누워 있었다.
팔다리는 짤막했고, 치약 자국이 희끗희끗 번진 하늘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또다. 또 그 꿈이다.
[더는 못 살겠어.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 [잘됐네. 누구는 좋아서 너 같은 여자랑 살아 주는 줄 알아?]어릴 적,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을 때면 어김없이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벌이를 하셨기에 두 분 다 퇴근이 늦어지곤 했는데, 집에서 얼굴만 마주쳤다 하면 질리도록 말싸움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베개로 귀를 틀어막고서 꼬박 밤을 지새웠다.
[엄마, 저 수학 학원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친구들이 전부 거길 다녀서…….] [넌 대체 누구를 닮아서, 나만 보면 돈 빠져나가는 소리만 하는 거야.]두 분 다 자신의 커리어에 목숨을 걸 만큼 극성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이 부유한 측에 속하는 건 또 아니었다.
나는 제대로 된 학원 한번 다녀 보지 못했고, 하교 후엔 집에서 TV를 보거나 친구에게 빌린 만화책을 읽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아빠, 저 오늘 방학식이었어요. 내일부터 겨울 방학인데, 방학 때는 전처럼…….] [어차피 네 이모 집에 갈 거잖아. 그런 건 네 엄마한테 물어봐.]방학이 되면 난 항상 일방적으로 이모 집에 맡겨지곤 했다.
이모는 늘 따뜻하게 나를 반겨 주셨고, 집에는 내 또래의 사촌이 셋이나 있었기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인스턴트 식품이 아닌, 갓 만든 따끈따끈한 음식을 매일같이 먹을 수 있었다.
씻고 나선 깨끗하고 보송보송한 잠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난 방학이 싫었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화목한 식탁 앞에서 나는 언제나 소외감을 느꼈다.
이상적인 가정이었기에 끼어들 틈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벽이 너무도 견고하고 빽빽했다.
[이모, 내일이 개학인데 엄마랑 아빠한테서 연락 안 왔어요?] [선우야, 그게 말이야…….]열두 살 봄, 나는 겨울 방학이 끝나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겼던 결혼 생활은 끝을 맞이했고, 그들의 부산물이었던 나는 철저하게 유기됐다.
그 후로 아빠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엄마는 반년에 한 번꼴로 이모 집에 들러 양육비를 주고 떠났다.
이모와 이모부는 상냥한 분들이었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친자식에게 쏟는 애정만큼 나를 아낄 순 없었다.
나는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겉돌았고,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내일모레 수능 칠 녀석이 장래 희망이 없으면 어떡해.] [뭐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퉁명스럽게 답하자, 담임 선생님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잘하는 게 뭔데.] [없어요.] [그럼, 좋아하는 게 뭐야.] [없어요.]말 그대로였다.
확실히 그맘때쯤 친구들은 진로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내 미래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잘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었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한선우, 너 이모 집에 얹혀산다며.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보호자 상담을 진행해야 하는데…….] [적어서 낼게요. 이번 주 내로 제출하면 되는 거죠?]이 이상 이모에게 민폐를 끼치는 건 죽어도 싫으니까, 어떻게든 장래 희망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에 운명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거기 학생, 아이돌 해볼 생각 없어?]처음으로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반반한 낯짝 덕분에 길거리 캐스팅을 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 저 장래 희망 정했어요.] [뭔데,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아이돌이요.] [너, 잘 생각해야 한다. 나도 학생 때 개그맨 한다고 설치다가 삼수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얼마 전에 캐스팅받았거든요. 조만간 거기서 데뷔할 거예요.]아이돌이 되겠다 말하니, 이모와 이모부는 무척 기뻐해 주셨다.
처음으로 나를 자랑스럽다고 말해 주셨고, 사촌 형제들 또한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계기야 어찌 됐든, 나에게 꿈이 생긴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대표님은 대체 저 새끼의 어디에 꽂혀서 영입한다고 한 거야?] [형, 척 보면 척이죠. 얼굴 말곤 별 볼 일 없잖아요.] [그니까 말이야. 저 새끼 음치, 박치, 몸치잖아. 좀 반반하긴 해도, 그 엄청난 단점을 무마할 만한 외모는 아니잖아.] [음, 그럼 그냥 그거 아니에요? 잘생긴 깍두기.]물론 멤버들이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연 건 아니었다.
특히나 경계심이 많은 지호와 하준이에겐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나 좋든 싫든 우리는 한 팀이 되었다.
우리는 밤새 살을 부대끼며 연습에 몰두했다.
한 지붕 아래 모여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소속감이 강렬하게 나를 휘감았다.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동료, 아니 가족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데뷔 초만 해도 한마음 한뜻이라고 생각했던 멤버들이 제각기 미쳐 돌기 시작했다.
[지호 너 말이야. 오늘 팬 사인회에서 팬들한테 너무 차갑게 군 거 아니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팬이잖아.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답해 주면 안 될까?] [어차피 때 되면 다른 아이돌로 갈아탈 애들한테 무슨 말을 더 해 줘야 하는데?]어떤 멤버는 겸손함을 잃어버렸고.
[병철아, 요새 어울려 다니는 사람들 말이야. 괜찮은 사람들인 거 맞지?] [왜 갑자기.] [화장실에서 우연히 엿들었는데, 소문이 좀 안 좋은 사람들 같아서…….] [Shut the f*ck up, 형이 내 엄마야? 수납멤버 주제에 일일이 참견하지 마.]어떤 멤버는 정직함을 잃어버렸으며.
[하준아, 올해만 해도 네 번째 열애설이야. 너보고 연애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잖아. 기사만 안 나게 조심 좀 해 줘. 응?] [꼬우면 형도 연애하든가. 아, 이제 알겠네. 지금 배알 꼴려서 그러는 거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그냥 블랙시즌 평판이 걱정돼서…….] [뭣하면 내가 소개라도 시켜 줘요? 허우대만 멀쩡하면, 좋다고 지갑 여는 여자들이 널리고 널렸거든요.]어떤 멤버는 순수함을 잃어버렸다.
유일한 내 편이었던 멤버는 야속한 약속만 남겨 두고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나는 또 혼자가 됐다.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구질구질한 미련만 잔뜩 남아서.
[포기하고 싶지 않아.]진정 신이 존재한다면 간곡히 묻고 싶었다.
어째서 내게 그 흔한 재능 하나 쥐여 주지 않고, 방대한 우주와도 같은 연예계에 나를 유기했는지.
그토록 모질게 나를 굴리고, 내 전부를 빼앗아 놓고선, 다시금 그 세계로 나를 돌려보낸 이유가 뭔지.
목이 쉬도록 묻고 싶었다.
“야, 일어나 봐.”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지호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 먹어. 해열제 사 왔으니까.”
“……못 일어나겠어.”
“진짜 사람 귀찮게 하네.”
지호는 내 입안으로 해열제 두 알을 쑤셔 넣고서, 정수기 생수통 교체하듯 내 입에 페트병을 꽂았다.
500mL짜리 생수를 전부 마시고 나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커헉! 주, 죽을 뻔했어.”
“아쉽네. 이참에 그냥 죽지 그랬어.”
아픈 사람한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괜스레 서러워져서 눈시울을 붉히자, 지호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기다려 봐. 도겸이 형이 죽 끓인다고 난리 치다가, 냄비 다 태워 먹고 죽 사러 갔으니까.”
“……하준이랑 병철이는?”
“하준이는 약속 있다고 나갔고, 병철이는 내내 너 보살피다가 지금은 시험공부하고 있어.”
“……돌대가리가 무슨 공부를 한다고?”
“컨셉에 충실해야 한다나, 뭐라나.”
남병철, 역시 지독한 컨셉 충이구나.
문제아 컨셉일 땐 사고만 치고 다녔으면서, 이젠 진정한 너드로 거듭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짓다가도, 한편으론 없던 기력이 다시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나로 인해 블랙시즌의 미래는 변화하고 있다.
“……지호야, 내가 전보다 더 열심히 할게.”
“그래, 넌 좀 열심히 해야 해.”
“……열심히 할 테니까, 우리 같이 계속하는 거야. 아이돌.”
내가 수납멤버 타이틀을 벗고, 홀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진 멤버들의 힘이 필요했다.
그 후론 너희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 이거야. 후후후.
속으로 음산하게 웃자, 지호는 복잡 미묘한 얼굴로 대답했다.
“헛소리할 거면 잠이나 자.”
* * *
강변역 인근 테크노마트 앞 건널목.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도겸이 포장 구매한 전복죽을 딸랑딸랑 손에 들고 있다.
열이 펄펄 끓는 선우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도겸아.”
숙소 앞에 다다랐을 때쯤,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사무실에서 이야기 좀 하자. 잠깐이면 되니까.”
NARAK 엔터테인먼트 대표, 김 대표가 말을 붙여 왔다.
손에 들린 전복죽을 멀거니 내려다보던 도겸이 마지못해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김 대표는 별다른 언질 없이 흰 봉투를 쓱 내밀었다.
“너한테 알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봉투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수표 몇 장이 들어 있었다.
도겸은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개의치 말고 받으세요. 그 사람한텐 이 정도 돈은 껌값이니까요.”
“…….”
“용건 다 끝나셨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강 피디가 그러던데, 촬영장에서 꽤 소란을 피웠다면서.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너는 조심 좀 해야 하지 않겠어?”
특별 취급이 넌더리가 나서, 도겸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왜요? 그 사람 아들답게 좀 더 점잖게 굴었어야 했나요?”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다.
“선우가 많이 아파요. 이만 숙소로 가 볼게요.”
김 대표의 대답을 듣지 않고, 도겸은 전복죽을 챙겨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섰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러나 아기 새처럼 자신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동생들이 있기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손에 들린 전복죽은 아직도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