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age member of the mandol has returned RAW novel - Chapter (54)
54화 아니 나도 잡혔어요
“설마 윈 씨도 여기 와 계실 줄은 몰랐어요.”
윈의 비주얼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무척 뛰어났다.
다만, 역대 《뮤직탱크》 진행자의 이미지와는 살짝 거리감이 느껴졌다.
시청자의 연령층을 고려해 늘 풋풋하고 상큼한 아이돌을 진행자로 발탁하곤 했는데, 힐끗 올려다본 윈의 외관은 며칠 굶주린 호랑이 같았다.
잔근육이 적당히 잡힌 팔다리를 제외하곤 전체적인 체구는 슬림했지만, 눈동자만큼은 여지없이 육식동물의 눈을 하고 있었다.
“나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어.”
딱히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윈은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이른 아침, 윈은 연습실에서 아귀몬의 필살기를 모티브로 한 비보잉 기술을 만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시리우스 멤버들에게 붙잡혀 밴 뒷좌석에 내동댕이쳐졌고, 그대로 영문도 모른 채 B 본부까지 끌려오게 된 것이다.
“……왠지 남 일 같지 않네요.”
“선우,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탈출하는 게 좋겠어.”
“탈출이라뇨?”
“내가 관찰한 바로는 이곳은 쓸모없는 아이돌 멤버를 처분하는 장소 같아. 선우의 등장으로 확신했지.”
내 존재로 확신하지 말란 말이다!
“그런 게 아니라,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뮤직탱크》 MC 오디션을 보러 온 거예요.”
“오디션?”
“아무도 말 안 해 줬어요?”
“내가 다가가면 다들 슬금슬금 도망치길래.”
어흑, 안쓰러워서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무대에서 띠부띠부씰이 흩날리는 바람에 윈의 문신 조폭 의혹은 잠들었지만, 그 후로 알게 모르게 돌아이 취급을 받는 듯했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야.”
“윈 씨는 하나도 안 떨려요?”
“오디션이라면 데뷔 전에도 질리도록 보러 다녔어. 그리고…….”
윈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동료와 함께라면 어떠한 고난도 두렵지 않아.”
“뒤지몬 명대사죠?”
“역시 선우야. 파워 뒤지몬 83화 명대사를 기억하고 있다니.”
윈은 손바닥으로 입술을 틀어막으며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멋대로 감동하지 마. 그런 거 아니야.
일행으로 의심받고 싶지 않아서 거리를 두려던 그때, 《뮤직탱크》 연출을 맡고 있는 서 피디가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섰다.
저마다 제 할 일을 하던 아이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피디님, 안녕하십니까!”
“비주얼 멤버들만 모아 둬서 그런가? 오디션장이 아주 환하네.”
뒤따라 들어온 스태프가 앞에서부터 차례로 대본을 나눠 줬다.
기껏해야 카메라 테스트일 줄 알았는데, 대본을 쓱 훑어보니 분량이 꽤 많았다.
그중에서도 ‘애드리브’라 표시된 부분에 눈길이 갔다.
흐름을 보면 노래나 춤을 춰야 하는 것 같은데…….
“앞으로 20분 후에 남녀 한 팀씩 짝지어서 오디션 진행하겠습니다.”
제한 시간 20분, 그 안에 완벽하게 대본을 암기해야만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연습이 한창이었다.
아무래도 남녀가 번갈아 대화를 주고받아야 하는 만큼, 일면식이 있는 아이돌끼리 서로의 연습 상대가 되어 주고 있었다.
“저기…….”
어깨너머로 들리는 조심스러운 음성에 나는 뒤를 돌아봤다.
“괜찮다면 같이 맞춰 보지 않을래?”
“그, 남자 둘이 맞춰 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나요? 윈 씨.”
그건 그냥 집단적 독백이잖아.
다른 아이돌들이 짝을 이뤄 연습하는 동안, 윈과 나는 나란히 앉아 국어책을 낭독했다.
그리고 20분 뒤.
“오디션 진행합니다. 먼저 몬스터키즈 의현, 베리즈 샐리 나와 주세요.”
묵직한 떨림 속에서 오디션이 시작됐다.
먼저 호명된 두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언뜻 보면 남매처럼 보일 만큼 그림체가 비슷했지만,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던 눈치인지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나눴다.
“시작하세요.”
서 피디의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의 표정이 돌변했다.
“의현 씨, 오늘 너무 덥지 않나요?”
“때마침 제가 무더위를 한 방에 날려 버릴 라인업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로바로 썸머 퀸 & 썸머 킹 대격돌!”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분들이 맞나요?”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짧게 한 소절 부탁드릴게요!”
두 사람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파트너처럼 멘트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대망의 ‘애드리브’.
베리즈 샐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춤과 노래를 시작했다.
– Sweet Summer Dream!
뜨거운 손을 꽉 잡아, 놓지 마
“여름이라면 빠질 수 없는 분들이죠! 포네르!”
“맞습니다! 또 청량한 트로피칼 하우스로 돌아온 분들이죠!”
곧이어 몬스터키즈 의현이 싱잉 랩을 이어 나갔다.
– 작열하는 태양 아래 너와 나
Baby 지금 바로 칵테일 한잔 어때
“토로스의 무대 먼저 만나보시죠! 뮤직 스타트!”
두 사람의 차례가 끝나자마자 나는 생각했다.
굳이 더 볼 필요가 있을까?
이미 차기 진행자는 정해진 것 같은데.
“잘 봤습니다. 다음은…….”
이다음으로 호명될 두 사람은 사실상 공개 처형을 당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뭐, 어찌 됐든 나만 아니면 된다.
“블랙시즌 선우, 미래소녀 혜원 나와 주세요.”
그렇게 나는 처형대로 끌려갔다.
더군다나 많고 많은 여자 아이돌 중에 하필 혜원 양이라니.
혜원 양은 나한테 화가 단단히 나서 눈인사도 받아 주지 않는단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일일 퀘스트 ‘우리 제법 잘 어울려요’는 물 건너갔다고 봐야겠지.
문득 퀘스트 실패 페널티가 떠올라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플레이어의 성대가 한시적으로 퇴화’
퇴화라는 게 구체적으로 뭘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뒷짐을 지는 순간.
“제가 하게 해 주십시오.”
인파 속에서 윈이 걸어 나왔다.
그러곤 내 어깨에 턱하고 손을 얹으며 이야기했다.
“블랙시즌 선우는 제 뒤지몬 파트너입니다.”
어떡하지, 멋있게 말하고 있는데 하나도 안 멋있어.
것보다 뒤지몬 파트너면 그냥 몬스터 취급이잖아.
서 피디는 ‘저 미친놈은 뭐지?’싶은 얼굴로 윈을 바라봤다.
“그래, 그럼. 둘이서 한번 해 봐.”
예상치 못한 서 피디의 발언에 흠칫 놀란 혜원 양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녀의 빈 자리를 시리우스 윈이 채웠다.
잠깐, 이렇게 되면 누가 여자 쪽 대사를 치는 거지?
서 피디가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걸 봐선 아무래도 나인 듯했다.
‘엿 됐다!’
여자 쪽 대사는 제대로 훑어보지도 않았단 말이다.
나는 빛의 속도로 대본을 컨닝한 후 이야기했다.
“윈 씨, 오늘 너무 덥지 않나요?”
“그러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윈 이 미친놈아! 단답으로 끝내면 어떡해! 대화가 중단됐잖아!
나는 팔꿈치로 윈의 몸을 콕콕 찌르며 속삭였다.
“그, 그거 아니잖아. 더 있잖아.”
“아, 한 소절 부탁드릴게요.”
끼야아악, 너무 많이 생략됐잖아!
고난도 비보잉 기술도 몇 분 만에 뚝딱 익혀 버리는 사람이 왜 대본 몇 줄을 못 외우는데!
서 피디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꿀꺽.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 Sweet Summer Dream!
뜨거운 손을 꽉 잡아, 놓지 마
궁지에 몰린 나는 울기 일보 직전인 얼굴로 춤을 췄다.
심지어 나는 포네르의 《Sweet Summer Dream》 안무를 알지 못했다.
노래 또한 상점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후렴구를 속으로 따라 부른 게 전부였다.
만일 하준이였다면 맛깔나게 소화했겠지만, 나는 베리즈 샐리의 춤과 노래를 어쭙잖게 따라 하는 게 최선이었다.
“여, 여름엔 포네르!”
대사를 앞뒤로 툭 잘라먹은 것 같지만, 어찌어찌 춤과 노래를 선보였으니 반은 성공이었다.
이제 남은 건 윈의 대사뿐이었다.
나는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윈을 바라봤다.
“뭐 하는 거야, 대사.”
윈은 험상궂은 얼굴로 허공을 노려볼 뿐, 어떠한 리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깊게 주름이 잡힌 윈의 미간을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도르륵 흘러내렸다.
이 새끼, 대사 까먹었다! 백 퍼센트 까먹었어!
팔꿈치를 세워 윈의 옆구리를 세게 내리찍자, 윈은 움찔 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뮤직 스타트!”
여기서 갑자기 마무리 멘트를 친다고? 이거 실화냐?
시작과 동시에 끝나 버렸잖아요.
서 피디는 턱 끝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선우 군은 마스크가 참 좋아.”
윈 때문에 오디션은 거하게 말아먹었지만, 외모 원툴로 합격하게 되는 건 아닐지 희망에 부풀었다.
“마스크는 참 좋은데, 쓰흡.”
그렇다.
나는 마스크만 좋은 아이돌이었다.
다른 능력치는 이제 겨우 ‘F’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알림! 일일 퀘스트 ‘우리 제법 잘 어울려요’를 실패했습니다.] [퀘스트 실패 페널티를 적용합니다.]“허억!”
퀘스트 실패 통보가 이렇게 빨리 날아온다고?
가망이 정말 손톱만큼도 없단 말이야?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 퍼지며,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붉은 불빛이 내 몸을 에워쌌다.
[플레이어의 성대가 한시적으로 퇴화합니다.]그러니까 성대 퇴화가 대체 뭔데, 가창 등급이 너프되는 게 아니라면 나는……!
“우, 우……!”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아이돌 그룹 비주얼 멤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나는 인류의 퇴화(退化)를 경험했다.
“우끼끼?”
그렇게 나는 한 마리의 유인원이 되어 오열했다.
* * *
처음 맛보는 실패의 맛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고 진득했다.
오디션이 끝난 후, 나는 그 누구와도 대화를 섞지 않고 곧바로 숙소로 복귀했다.
오디션은 잘 치르고 왔냐는 멤버들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늘어놓을 수 없었다.
“형, 바나나 사 왔어. 이거라도 좀 먹어.”
바나나?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있던 나는 슬쩍 손을 뻗었다.
그러자 병철이가 내 손바닥 위에 바나나 한 개를 내려놓았다.
나는 이불 속에서 숨죽여 바나나 껍질을 까먹었다.
“우, 우끼(맛있다).”
바나나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성대뿐만이 아니라, 입맛까지 유인원이 된 건지 의심이 들었다.
“선우야, 형도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우.”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나는 입안 가득 바나나를 우물거리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도겸이 형의 품엔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크게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사무실에서 빌려 왔어.”
“우?”
“오디션 끝난 뒤로 계속 우울해했잖아.”
도겸이 형은 인자한 얼굴로 세렝게티 초원의 풍경을 보여 주었다.
“돌아가고 싶은 거지? 그리로.”
“…….”
이 사람, 나를 완전히 유인원 취급하고 있잖아.
“선우 너는 아이돌 생활을 계속해야 하니까, 영상으로라도 고향 풍경을 보여 주고 싶었어.”
형, 정말 따뜻하고 쓰레기 같은 말이에요.
텅 빈 눈으로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던 도중, 상단의 뉴스 배너가 눈에 들어왔다.
제보자 A양 측 증거가 쏟아지자 YMJ 엔터테인먼트는 꼬리 자르기를 시전하고 있었다.
손가락에 힘이 풀려서 쥐고 있던 바나나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프렘이라면 블랙시즌의 미니 1집부터 해체 직전까지 디렉팅을 도맡았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잖아.
“우, 우끼!”
비알의 운명을 비틀었기 때문일까?
블랙시즌의 인지도를 단숨에 수면 위로 끌어올렸던 디렉터를 빼앗겨 버렸다.
그것도 함부로 맞설 엄두조차 나지 않는 3대 기획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