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age member of the mandol has returned RAW novel - Chapter (55)
55화 빼앗기다
– 열려라, 짐승농장!
– 서울 광진구의 한 빌라 앞, 범상치 않은 개인기를 지닌 아이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제작진.
뭐야, 이 내레이션.
최하준 이 자식, 또 티브이 볼륨 최대치로 높여 놨나 보네.
콧등을 찡그리며 베개로 귓구멍을 틀어막던 그때.
– 녀석이 있다!
방송국 피디로 보이는 남자와 카메라맨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나는 잠이 덜 깬 부스스한 얼굴로 문 앞을 바라봤다.
카메라맨은 내 얼굴을 클로즈업했고, 나는 반박자 늦게 이불을 끌어 올렸다.
“여기 이분이 유인원 흉내를 낸다는 아이돌 멤버인가요?”
누구신데 저희 숙소에서 헛소리를 남발하고 계시나요?
너무 놀라서 입술을 벙긋거리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도겸이 형이 사육사처럼 인자하게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하하.”
“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도겸이 형은 야생동물 대하듯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선우야, 방송국에서 취재하러 온 분들이셔. 어제처럼 한번 울어 볼래?”
“우?”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방송국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정확한 검증을 위해 유인원 전문가를 초청했습니다!
그러자 등산복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비좁은 방 안으로 꾸역꾸역 기어들었다.
“우!”
“……지난 30년간 유인원을 연구해 왔지만, 이렇게 완벽한 성대모사는 처음입니다.”
유인원 전문가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울음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이분이 유인원을 흉내 내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는지 말이죠.”
“…….”
저기, 죄송하지만 노력한 적 없는데요.
“흉내라고 부르기도 송구스러울 지경입니다. 이분은 이미 유인원 그 자체입니다.”
뭐지, 온 마음을 다해 칭찬하고 있는데 왠지 불쾌해.
– 제작진이 준비한 특별 선물! 진짜 유인원을 데려왔습니다!
유인원 전문가의 등 뒤로 복슬복슬한 갈색 털이 엿보였다.
혹시 나 지금 꿈꾸고 있는 건가?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빌라에 유인원이 나타난다고?
“우끼?”
발 디딜 틈 없는 방 안으로 긴팔원숭이가 걸어 들어왔다.
긴팔원숭이는 나를 향해 검지를 내밀었고, 나는 홀린 듯 손끝을 맞댔다.
찌릿찌릿.
2평 남짓한 방 안에서 인류와 유인원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방송국 사람들과 유인원 전문가는 감동의 눈물을 터뜨렸다.
– 극적인 상봉, 녀석들끼리도 서로 통하는 눈치인데.
“리더분께 여쭙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예정인가요?”
“저도 방금 결심이 섰는데요. 슬프지만 선우를 자연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뭐야, 멋대로 방생하지 마.
나는 유인원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 선우야, 자연으로 돌아가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누구 맘대로 돌려보내는데!
나는 안 가! 1티어 아이돌이 될 때까지 여기서 꼼짝도 안 할 거라고!
“커헉!”
나는 짐승농장 방청객의 환호성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잠옷으로 입은 뒤지몬 티셔츠가 투명하게 비칠 만큼 땀이 흥건했다.
눈을 굴려 옆을 바라보자, 품 안에 원숭이 인형이 얌전히 몸을 뉘고 있었다.
“으아악!”
나는 괴성을 내지르며 악몽의 원인을 냅다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힌 원숭이 인형은 툭 하고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방구석에서 《What? 인류의 진화》를 읽던 병철이가 쓸쓸한 눈으로 원숭이 인형을 내려다봤다.
“내가 본가에서 가져온 애착 인형인데…….”
“벼, 병철아.”
“우리 엄마 이름을 따서 희정이라고 지었어.”
끼야아악, 의도치 않게 쓰레기 짓을 해 버렸잖아!
나는 짐승처럼 엉금엉금 기어 원숭이 인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님, 죄송…… 얼레?”
자고 일어났더니 성대가 돌아왔다.
목소리를 내도 ‘우, 우끼’하는 울음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자, 이층 침대 위층에 누워 있던 지호가 중얼거렸다.
“뭐야, 다시 사람 말 하네? 재미없게.”
“내 아픔을 재미로 삼지 마!”
아차, 팔자 좋게 말싸움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서둘러 겉옷을 챙기며 말했다.
“대표님 지금 사무실에 계시겠지?”
“지금 가면 사무실에 도겸이 형도 있을걸? 조금 전에 불려 갔어.”
“나도 잠깐 나갔다 올게.”
예정대로라면 블랙시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야 할 프렘을 YMJ 엔터테인먼트에 빼앗겨 버렸다.
실은 어제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장 김 대표를 찾아갔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우, 우!’ 뿐이라서 대화가 불가능했다.
성대가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오늘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숙소에서 빠져나와 NARAK 엔터테인먼트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문고리를 잡아 돌린 순간, 문 너머에서 도겸이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저한테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웬만한 일에는 인상 한번 쓰지 않고 웃어넘기는 도겸이 형이었다.
그런 형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몹시 격양되어 있었다.
“그 돈, 저를 위한 돈 아니에요. 본인 죄책감 좀 덜어 보겠다고 준 거니까.”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있구나. 그래도 너희 아버지신데.”
“하, 글쎄요. 저를 숨기지 못해서, 죽이지 못해서 안달인 사람을 부모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아, 가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허락 없이 멋대로 형의 가정사를 엿듣고 싶지 않았기에 급히 손을 떼어 냈다.
그러자 문고리에서 ‘덜커덕’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엿 됐다……!’
도망치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문이 활짝 열렸다.
올려다본 그곳엔 도겸이 형이 살갑게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선우야, 왜 그러고 서 있어. 어서 안으로 들어와.”
“아, 그게…….”
“형은 대표님하고 이야기 다 끝냈어. 다음 달 스케줄 표 받았거든.”
형은 손에 들린 스케줄 표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사무실 안 공기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이 상황에서 느닷없이 디렉터 이야기를 꺼내라고?
내가 선뜻 입을 열지 않자, 김 대표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왜,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다름이 아니라, 저희 다음 앨범 디렉터요. 누구를 고용하실 생각인지 대표님 의견을 여쭙고 싶어서요.”
점찍어 둔 디렉터를 YMJ 엔터테인먼트에 빼앗겨 버렸으니.
소식을 접했다면, 김 대표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웬 디렉터?”
김 대표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총괄 프로듀서인 내가 이미 그 역할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네?”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였다.
“정 못 믿겠으면 너희 다음 달 스케줄 표 확인해 보던가. 내 능력이 부족했다면 방송국 러브 콜도 없었겠지.”
설마 김 대표 이 자식, 자기가 잘나서 블랙시즌이 잘 팔린다고 생각하는 건가.
블랙시즌이 유명 디렉터 없이도 상승세를 타고 있는 건 당신 때문이 아니다.
그건 바로 나, 나 때문이라고!
내가 시스템의 힘을 빌려서 탈선 직전의 멤버들을 바른 선로로 이끌고 있단 말이야!
“디렉터를 고용할 마음이 조금도 없단 말씀인가요?”
“그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블랙시즌이 예정보다 이르게 성장하게 된 탓에 김 대표가 디렉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인지도의 문제가 아니에요. 블랙시즌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예요.”
블랙시즌의 데뷔 싱글 《지켜 줄게》는 풋풋한 소년 컨셉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컨셉 외에는 어떠한 함축적 의미도 담겨 있지 않았다.
미성년자만 넷인 그룹에서 소년 컨셉이라…….
김 대표로선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언제까지고 소년 컨셉을 유지할 순 없잖아요. 당장 저랑 지호만 해도 곧 성인이에요. 게다가…….”
쌍화탕을 들이켜고 있던 도겸이 형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지금 저 형 얼굴이 상큼해 보여요?”
“왜 가만히 있는 내 뼈를 때리지? 하하.”
김 대표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누가 계속 소년 컨셉으로 밀고 나가겠대? 컴백할 때마다 바꾸면 되잖아.”
“단발성 컨셉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차라리 세계관을 만드는 건 어떨까요?”
과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렘은 껍데기뿐이었던 블랙시즌에 세계관을 부여했다.
세계관 속에는 스토리가 있었다. 각 앨범은 스토리를 이어 나가는 수단이었다.
앨범마다 곡의 분위기와 의상 컨셉 스타일링이 바뀐다고 해도 세계관은 변동하지 않는다.
“그 왜, 메테오만 해도 지구 멸망 직전에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 우주를 모험하고 있잖아요.”
“톱 아이돌 전부가 세계관을 가진 건 아닐 텐데? 어쭙잖게 따라 할 바에야 없는 게 나아.”
“대표님 말씀대로 세계관 없이도 대중성이 강한 곡으로 인기몰이하는 그룹이 있긴 해요.”
다만, 블랙시즌이 신생 기획사 신인 타이틀을 벗고 비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렘의 디렉팅.
그리고 프렘이 세계관의 축으로 설정했던 핵심 멤버 지호의 역량 덕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프렘의 역할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블랙시즌의 의상 컨셉 스타일링을 비롯해 앨범 커버 디자인, 로고, 영상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다음 앨범 타이틀곡 작곡가는 구하셨어요?”
과거, 우리는 프렘의 인맥을 통해 작곡가 사운드 크로우로부터 미니 1집 타이틀 곡을 받았다.
1년에 많아야 두세 곡만 작곡한다고 알려진 사우든 크로우가 블랙시즌을 위해 만든 곡.
《에고이스트(Egoist)》, 블랙시즌의 운명을 뒤바꾼 곡이다.
이대로 가다간 블랙시즌의 세계관과 타이틀 곡을 YMJ 차기 보이 그룹에 빼앗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너희 데뷔곡 써 준 작곡가가 얼마 전에 데모곡을 보내왔어. 들어볼래?”
김 대표는 노트북을 펼쳐 곧바로 데모곡을 들려주었다.
가제는 《Hot Blood》.
– 콱 물어, 한 마리 금수처럼
숭고한 만찬
Oh 아무리 마셔도 질리지 않아
뜨거움을 내게로
Give it to me
Hot Blood
– 꿀꺽 삼켜, 맛볼수록 탐하게 돼
짙은 중독
Oh 더는 헤어 나올 수 없어
강렬함을 내게로
Give it to me
Hot Blood
잠자코 데모곡을 듣던 도겸이 형이 슬그머니 운을 뗐다.
“내가 듣기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선우 네 생각은 어때?”
“……나쁘지 않아요.”
말 그대로 나쁘지 않았다. 좋아서 감탄할 정도가 아니라 딱 나쁘지 않은 정도.
우리의 데뷔곡 《지켜 줄게》와 마찬가지로 중소 기획사에서 무난하게 뽑아낸 곡 같았다.
김 대표는 식은 믹스 커피를 들이켜며 이야기했다.
“데모곡을 듣자마자 생각이 났거든. 뱀파이어 컨셉이 딱이라고.”
《Hot Blood》와 뱀파이어 컨셉.
올드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내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자, 김 대표는 종이컵을 구기며 지껄였다.
“그렇게 불만이면 선우 네가 해 보던가. 그 디렉팅이라는 거.”
“……디렉터, 정말 고용 안 하실 거예요?”
“그래.”
“제가 괜찮은 디렉터 목록을 추려 볼게요. 그래도 대표님 결정에 변함이 없다면, 그때는…….”
나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김 대표를 주시했다.
“제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