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rongest He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133
◈ 최후의 승자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핏물이 번져 붉은 강을 이루고 발자국이 새겨져 긴 행렬을 이었다.
그 위로 덩그러니 놓인 건 수십 구의 시체들.
말단 제자, 태자 항렬, 군막과 같은 고수들까지.
망산의 생명이 덧없이 무너져 부스러기처럼 늘어져 있었다.
“……더는 도망칠 수 없다.”
그 비극의 한 챕터 속에서 태허가 처절하게 선언했다.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손아래 사제들과 함께였다.
아직 어리고, 배움이 부족한 이가 다수였다.
참극에 두려움과 슬픔을 함께 느끼는 이들.
끌어올 수 있는 전력의 마지노선이었다.
“지독하군, 지독해. 대체 어디까지 쫓아올 셈이냐?”
“네놈을 벽에 박제할 때까지. 당장 그 계집을 내어놓아라.”
“역시 기회가 있을 때 죽였어야 했나.”
쏟아지는 빗속에 마주한 건 백일태였다.
그는 축 늘어진 링을 안고 망산을 헤매었다.
길잡이가 되어줄 링이 정신을 잃었으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막아서는 제자들과 맞서기를 한참.
결국, 산속에 묻어버렸던 태허에게 뒤를 잡히고 만 것이다.
“저 계집이 네게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때의 요행 따위로 으스대지 마라. 너 같은 하찮은 놈은 절대로 날 이길 수 없어.”
“산의 선자라 하여 한때는 고매하다 여겼다. 하지만 이리 와서 경험해 보니 시장판 노름꾼보다 못하더군. 네놈은 날 하찮다고 평가할 자격이 없다.”
“감히 밖의 쓰레기 주제에.”
“그럼 너는 쓰레기에 얻어맞은 폐기물인가?”
“죽여주마!”
분노한 태허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백일태도 경시하지 않고 전력으로 맞섰다.
두 사람은 숨이 닿을 거리까지 바짝 붙어서 주먹을 주고받았다.
백일태는 취한 듯 움직이던 때보다는 힘이 부족했으나, 태허도 정상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호각으로 수십 합을 싸웠다.
“불가능해! 불가능해! 고작 저런 쓰레기에게!”
“비켜! 너 같은 놈하고 싸우고 있을 시간은 없다.”
“으……으으으! 인정 못 한다!”
하지만 자세하게 뜯어보자면 백일태가 반수 정도 우위였다.
어찌 되었든 그는 링을 안고 있으니까.
한 손을 묶고 싸우며 호각인 셈이었다.
이는 태허도 알고 있는 사실.
그것이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당장 천겁진을 펼쳐라!”
“처, 천겁진이요?”
불같은 목소리에 주변 무인들이 당황했다.
천겁진은 망산의 합진 중 하나로 위력이 발군이었다.
다만, 이 천겁진은 제압용이 아닌 살상용.
링이 필요한 그들 입장에서는 쓰기 좋은 수단이 아니었다.
“닥쳐! 명령이다! 조금 흠집이 나도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극지체일 뿐. 계집의 팔이 잘리든 흉터가 생기든 알 바 아니다.”
“……완전히 미쳐버렸군.”
“닥쳐라, 쓰레기. 여기는 망산이다. 우리는 천외천의 존재라고. 너 같은 하찮은 놈을 죽이는 건 벌레를 손끝으로 누르는 것과 같아.”
“그 고귀하신 분들의 선택이 이런 건가. 그런 주제에 잘도 스스로를 선인이라 칭하는군. 너희에게는 염치라는 것도 없나?”
백일태의 지적에 몇몇 무인이 얼굴을 붉혔다.
아직은 양심이 남아 있는 앳된 이들이었다.
“감히 사형도 아닌 저런 쓰레기의 말에 수긍하는 거냐!?”
“하, 하지만 하나를 상대로 이리 합공하는 것은……커억!!”
슬그머니 반론하던 어린 무인의 어깨가 태허의 손짓에 뚫렸다.
고통스럽게 주저앉는 모습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또 반대하는 놈이 있나? 어디 말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해봐.”
“…….”
결국, 모든 입은 닫히고 태허의 바람대로 천겁진이 펼쳐졌다.
무서운 기세가 사방에서 밀려왔다.
링을 안은 백일태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기절한 그녀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도망치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어찌 한 번 뽑은 칼을 그냥 거둘까.”
입술을 깨물며 링을 등에 돌려서 업었다.
넝마 같던 외투는 잘게 찢어서 둘을 묶는 끈으로 사용했다.
이젠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상태였다.
주먹을 쥐고 호흡을 골랐다.
“와라. 신교의 막내 제자 백일태다.”
우뚝 선 고목의 기세였다.
#
천마는 아주 오랜만에 탈력감을 느꼈다.
모든 힘이 사라져 몸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들끓던 천마진기마저 지금은 꼬리를 말고 깊게 가라앉았다.
“……군막은 죽은 건가.”
그런 그 앞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모두가 밤색 피풍의 차림에 허리춤에는 금색 띠를 둘렀다.
기세가 깊고 무겁게 정돈되어 있었다.
“내 주먹에 의해서. 복수를 원하는가?”
“과욕이 그 친구의 명을 재촉했군. 아니다, 천마. 우리는 너와 싸우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무리는 천마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태을. 네놈이 헛바람을 불어넣은 거냐?”
대신 숨죽이고 있던 태을에게 감정을 드러냈다.
“죄, 죄송합니다. 고분의 무공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음에 제가 장로께 넌지시 제안을…….”
“그 입을 닫거라.”
“컥.”
남자의 손짓에 태을의 입이 닫혔다.
무형의 기운이었다.
그 위세는 군막보다 나으면 나았지 모자라지 않았다.
“산 안에서도 생각이 갈리는 건가?”
“세상천지에 안 그런 곳이 있던가. 이리 작은 땅에서조차 다툼과 균열은 존재하네.”
“무극진기를 탐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그 힘은 우리의 것이 아니네. 탐할 이유가 없지.”
천마는 남자의 답에서 묘한 기색을 읽었다.
그것은 달관한 도인의 그것과는 다른, 어딘가 선을 긋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무극진기의 주인을 알고 있는 듯한 기색.
“고분의 주인을 알고 있는가?”
“글쎄. 안다고 하면 아는 것이고 모른다고 하면 모르는 것이지. 다만,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처신이라고 생각하네. 과욕은 언제나 화를 불러오는 법이니까.”
“조금 더 자세한 답을 요구한다면?”
“천마. 그대만은 못하지만, 우리도 일가를 이룬 자들이네. 본래의 목적이 따로 있다면 경중을 따질 줄은 알겠지.”
“그렇군.”
천마가 짧게 수긍했다.
모든 걸 걸고 싸울 장소는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의문의 해소보다 어린 제자가 먼저였다.
“그쪽, 못난 제자는 받아가도 되겠는가?”
“행동에 대한 결과는 아직 지지 않았다만.”
“양보해 준다면 그대의 제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네.”
“원래 가졌어야 할 것으로 흥정을 하는군.”
“어쩌겠나. 못나도 제자인 것을. 야비해 보이더라도 너그러이 넘어가 주게나.”
천마가 짧게 고민하고 태을을 넘겼다.
누차 말하지만, 지금은 어린 제자가 우선이었다.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안내하지. 따라오게나.”
“가는 길에 이름이나 알았으면 좋겠군.”
“구검. 아홉 번째네.”
어딘가 독특한 울림이었다.
#
허덕임 속에 이어진 싸움이었다.
흐른 피와 땀이 비와 섞여서 바닥을 적셨다.
비명은 빗소리에 섞인 지 오래.
남은 건 처절함 뿐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크윽. 빌어먹을 놈. 징하군.”
헐떡이는 백일태를 보며 태허가 질린 듯 중얼거렸다.
천겁진으로 합공한 지 벌써 수십 분.
죽이고도 남을 시간인데도 백일태는 아직도 버티고 있었다.
되레 합진을 이루던 무인들이 지쳐갔다.
“하아. 하아. 겨우 이건가?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
“건방진 놈. 목이 잘린 뒤에도 그럴 수 있나 보자.”
“이 동네 선자들은 혓바닥으로 정하나?”
“죽여!”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공세에 더해지는 살기에 백일태가 이를 악물었다.
솔직히 체력은 이미 한계.
버티고 있는 건 오직 등 뒤의 링 때문이었다.
“……큭!”
그러기를 수 분.
풀린 다리에 휘청거리던 백일태가 어깨에 검을 맞았다.
억지로 검면을 쳐서 이격은 막았으나 상처가 깊었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공수에 조금씩 손해가 늘어났다.
“흐흐. 끝이 머지않았다, 쓰레기.”
“…….”
비웃음에 답할 힘도 없었다.
늘어진 링의 몸을 겨우 받치며 숨만 몰아쉬었다.
이대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
차라리 태허만을 노리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래도 이성적이니까.
어쩌면 누군가 구하러 올 수도 있고.
“슬슬 네 목을 받아가야겠다.”
“흐읍―!”
순간, 매고 있던 링을 바닥으로 던지며 백일태가 뛰었다.
가벼워진 몸만큼 태허의 예상을 넘어선 속도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두 주먹을 태허의 가슴에 쑤셔 넣었다.
퍼엉.
손끝이 찌르르 울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미안하지만, 이 아이도 제자인 터라.”
“……!?”
하지만 그 주먹이 닿은 건 태허가 아니었다.
어느새인가 나타난 구검이었다.
둘둘 만 소매로 주먹을 막아 충격을 흘렸다.
태허와 백일태의 표정이 극으로 갈렸다.
“장로! 하, 하하하! 장로께서 도와주러 오셨군요!”
“그건 아니다.”
“네?”
얼빠진 태허의 얼굴 뒤로 몇 사람이 더 다가왔다.
대부분은 구검의 일행이었으나, 한 사람은 아니었다.
피로 절어버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인물.
“스, 스승님!?”
바로 천마였다.
“고생이 많았다.”
“그, 그 피는 어찌 된 겁니까?”
“말하자면 길다. 황가의 아이는 무사한 거냐?”
“아.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쓰러진 뒤로는 깨어나질 않아요.”
천마는 그대로 링에게 다가가 손목을 쥐었다.
기의 흐름이 앞뒤 상황을 알려 주었다.
‘목숨을 걸었군.’ 링은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천마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서 백일태에게 건넸다.
“널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오뢰진기에 내부가 상해서 다시는 무공을 익히지 못할 수도 있어.”
“고, 공주님이 절 위해서?”
“그래. 그러니…….”
“뭐 하는 거야!? 장로님 당장 저 계집을 확보해야 합니다! 저 계집이 없으면 무극진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천마의 말 틈으로 태허가 발악적으로 끼어들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무언가 이상했다.
장로와 천마가 같이 온 것부터 말이 안 됐으니까.
“네놈이 우리 아이를 이 모양으로 만든 놈이구나.”
“컥!!”
순간, 천마의 흡자결에 태허가 끌려갔다.
움켜쥐는 순에 숨골이 막히고 내공의 순환이 억제되었다.
“천마. 이 아이도 제자요. 서로 손해 본 것이 있으니 일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집시다.”
그러자 구검이 다시 나섰다.
태허를 쥔 천마의 손을 지그시 누르며 권유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강렬하게 충돌했다.
“물러나라. 본좌가 한 번 양보한 것은 상황이 다급하였기 때문. 내 아이를 다치게 한 원흉을 내버려 둘 것 같으냐?”
“충분히 이해하나, 망산의 제자요. 죽어간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이번만큼은 물러나 주시오.”
“그리 말하면.”
파르르르.
천마의 손이 강하게 떨렸다.
힘을 주어 막던 구검이 흠칫 놀라며 물러났다.
피어나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본좌가 수긍하며 물러날 것 같았나?”
“으, 으음. 서로 공멸하자는 것이오?”
“내 것을 건드리면 그 정도의 각오는 했어야지. 얄팍한 장사에 놀아주는 것도 한 번이면 족하다.”
“당신…….”
천마의 번들거리는 눈빛에 구검이 입술을 씹었다.
적당한 협상이나 회유로 물러날 눈빛이 아니었다.
비록 상처 입었다고는 하나 천마는 천마.
싸움에는 득보다 실이 컸다.
“좋소.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지. 다만, 나도 스승 된 입장에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으니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무엇이지?”
“태허, 저 아이와 그대 제자를 겨루게 합시다. 승자가 원하는 대로 결착을 짓는 것으로.”
백일태는 지켰고 태허는 그나마 낫다.
구검 나름대로의 승부수였다.
“일태야. 어찌 생각하느냐?”
“……제가 싸우게 해 주십시오. 저자는 제 손으로 직접 처리하고 싶습니다.”
“좋다. 네 바람대로 해주마.”
“감사합니다, 스승님.”
고민은 없었다.
링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누이며 앞으로 나섰다.
각오는 전보다 더 단단했다.
물러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으니까.
“스승님, 제가 이기면 이름을 하나 지어 주시겠습니까?”
“끝까지 지킨다면 네게 호(護)라는 이름을 주마.”
“그 이름. 반드시 받아가겠습니다.”
믿어주는 스승 앞에서 물러남 따위는 없었다.
태허의 당황스러운 얼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비, 빌어먹을! 나 혼자라고 네놈이 이길 것 같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네놈은 내 상대가 아니야!”
“아니.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상대가 아무리 많아도. 난 너한테 지지 않아.”
“뭐?”
“애초에 너와 나는 각오가 다르니까.”
백일태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산과 같은 기세가 풍겼다.
태허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쯧.’ 구검의 혀 차는 소리가 앞일을 예견하는 듯했다.
“목숨. 걸어라.”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