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rongest He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73
◈ 천년빙정
안나는 수십 벌의 옷을 골랐다.
전부 한 번씩 갈아입으며 거울에서 확인하기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자신의 모습이 기뻤다.
빙궁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까.
역시 서울에 오기를 잘했다.
히죽 웃는 웃음에 진심이 서렸다.
“다 골랐어요?”
“응. 이거 전부 안나가 가져가도 되는 거야?”
“계산은 이미 끝냈어요. 이제 이 옷들은 전부 안나 거에요.”
“지아는 좋은 사람이야.”
수십 개의 쇼핑봉투를 보며 안나가 힘껏 웃었다.
두둑이 쌓인 봉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이래서 티비에서 보면 다들 쇼핑을 하는구나.
새삼 문명의 진리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끝난 거냐?”
“아, 태상문주님. 오래 기다리셨죠?”
“지루함에 누아와 해도가 죽어가는구나.”
“아하하. 죄송해요.”
경계 하는 것도 잠시뿐.
누아와 해도는 지루함에 늘어졌다.
그나마 선물이라고 안기남 등의 옷을 고른 것이 기특하다면 기특한 노릇이다.
“저기, 천마.”
“왜 그러지, 빙궁의 아이야?”
“이거 옷. 고마워. 잘 입을게.”
“돈은 청아가 쓰고 있다만.”
“지아가 그랬어. 다 천마 덕에 사는 거라고. 받으면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고 배웠어. 그러니까 안나는 감사의 인사를 할게.”
“그래. 잘 배웠구나.”
그제야 긴장했던 안나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아직은 천마를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녀 눈에 천마는 보고 있어도 보기 어려운.
괴상한 존재였다.
“옷을 다 골랐다면 가까운 곳에서 배나 채우자꾸나. 그쪽, 빙궁 아이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제가 안내할게요.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어요.”
“빙궁 아이야. 못 먹는 음식이라도 있더냐?”
“없어. 안나는 북극곰하고 고래도 먹는걸.”
“그래. 한참 잘 먹을 나이지.”
“……”
이지아가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이 대화에서 상식을 꺼내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안나도 뒷머리를 긁적이며 ‘안나는 너무 먹어.’라며 머쓱해 하고 있으니까.
그게 대화의 문제가 아닌데.
“해도야, 누아야 밥 먹으러 가자.”
“밥! 밥이다!”
“크릉!”
차라리 이쪽이 낫다.
이지아가 대화 선택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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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구와구.
그 단어가 어울리는 먹성이었다.
안나는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요리를 쓸어 담았다.
전체고 메인이고 상관없었다.
나오는 족족 입에서 쑤셔 넣었다.
얼마나 먹성이 좋은지 코스에 추가를 하다못해, 새롭게 코스요리를 시켜야 했다.
“하하. 서울의 요리 맛있다.”
“마,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응. 북해빙궁의 요리는 너무 단순하다. 퍽퍽하고 소금 맛 밖에 안 나. 이렇게 맛있는 요리가 많은데.”
“빙궁에 사람이 적은 거냐?”
“전부 스무 명. 밖에는 좀 더 살긴 하지만, 안에 살고 있는 건 그게 전부야.”
궁, 이라는 이름치고는 적은 숫자.
천마가 술을 홀짝이며 안나를 바라봤다.
몸 안에서 흐르는 기운이 여전히 이질적이었다.
“빙궁의 위치가 천년설원이더냐?”
“어? 빙궁의 위치도 아는 거야?”
“흠. 그런 거였나. 그리 생각하면 이해가 되긴 하는구나.”
“뭐가?”
“네 이질적인 기운 말이다.”
천마가 포크로 테이블을 툭 두드렸다.
묘한 힘의 파동이 끝에서 퍼져, 안나가 있는 곳까지 이어졌다.
이건 공격적인 힘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어, 어떻게 그걸 알고 있어?”
“극음체인 빙궁의 아이가 양강지기를 품고 있어서 이상하다, 생각했다. 너희가 따르는 산의 선인도 마찬가지로 극양의 기운을 사용하더냐?”
“그건……”
“감히 산의 일을 묻는 것이냐!”
순간, 벼락같은 외침과 함께 레스토랑 벽면이 원형으로 터져나갔다.
콘크리트와 유리가 비처럼 쏟아졌다.
자칫 주변마저 휘말릴 수 있는 상황.
이지아가 화화결을 널게 펼쳐서 여력을 모두 한곳에 가두었다.
파편은 뭉쳐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좋구나.”
“감사합니다, 태상문주님.”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 밖을 바라봤다.
뻥 뚫린 벽면 너머로 거구의 남자가 안을 쏘아보고 있었다.
“숙부!”
그를 알아본 건 안나였다.
놀람과 반가운 중간 정도 되는 반응이었다.
“소주! 여기가 어디라고 빙궁을 비우고 나온단 말입니까!?”
“나, 나도 보고 싶었단 말이야. 티비로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돼. 서울도 구경하고 여기 천마라는 사람하고도……”
“어허! 궁의 소주라는 분이 어찌 그런!”
“우……”
안하무인 같던 안나지만 거한에게는 아니었다.
빙제 여백천.
어릴 적부터 부모 대신 자신을 키워 준 사람이다.
유일하게 그만큼은 존경하고 따랐다.
“그쪽도 그리하오, 천마.”
“흠?”
“아무리 그대가 궁과 힘을 겨룬 적이 있다 한들, 아이 아니오. 이리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있으면 잘 다독여 돌려보낼 것이지. 한술 더 떠서 콧바람을 넣어 주면 어쩌라는 거요!”
“옷가지 몇 벌과 식사 한 번이었을 뿐이다.”
“어허. 알만한 분이. 우리 같은 극지의 무인들은 그리 풀어지면 끝이오. 하물며 소주 정도 되시는 분이 그렇게 풀어지면 나머지 무인들은 어쩌란 말이오!”
“재미있는 아이구나.”
천마가 빙그레 웃었다.
숱한 인물을 만나 봤지만 이렇게 무인의 정석으로 자신에게 대적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큼. 됐소. 소주는 내가 데리고 갈 것이니, 그리 아시오. 옷가지와 이곳에서 먹은 음식값은 궁에서 계산하여 갚겠소.”
“수, 숙부님!”
“조용히 하시오! 소주가 사라져서 궁의 이들이 얼마나 걱정인지 알고나 있는 겁니까!?”
“그, 그래도 이제 왔는데 그냥 돌아가는 건 싫어. 난 궁 밖을 경험해 보고 싶단 말이야!”
“어림없는 소리외다. 빙궁의 인물은 빙궁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게 법도입니다.”
“법도가 아니라, 구명줄이겠지.”
“……!”
천마의 말에 처음으로 여백천의 말문이 막혔다.
“극한의 음한지기에 양강지기가 섞여 있기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헌데, 그 위치가 천년설원이라면 이해가 되더구나.”
“대체 뭐가 이해된다는 말이오?”
“천년빙정. 그 도움으로 살아남았던 것 아닌가?”
“……”
천마가 짧게 코웃음 쳤다.
아주 오래전, 빙궁이 멸망으로 치달은 이유에도 이 천년빙정이 개입되어 있다.
같은 일의 반복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결국 여운설 그 아이가 날 속인 셈이구나.”
“조사를 알고 있는 거요?”
“알다마다. 그 아이의 부탁으로 내가 빙궁을 멸망시켰는데.”
“……천마. 정말로 그 천마요?”
“네가 아는 천마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빙하선녀 여운설의 정인이 누구였냐고 묻는다면 본좌가 맞다.”
“저, 정인이요!?”
뒤늦게 튀어나온 건 이지아의 물음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었다.
“오래된 이야기다. 그 아이 바람대로 빙궁을 벗어나 밖을 누리게 도와줬으나……”
“천년빙정의 저주로 마녀가 되어 모든 걸 파괴했다.”
“그래. 천년빙정이 빙궁의 적의를 빨아먹고 기물이 되어버린 탓이지. 모조리 미쳐서 서로가 서로를 죽였다. 여운설, 그 아이는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내게 부탁을 했지.”
“빙궁을. 천년빙정을 없애 달라고.”
“잘 알고 있구나. 저 아이는 모르기에 역사를 제거했다 생각했는데.”
“소주께서는 아직 모를 뿐이오.”
여백천의 목소리는 꽤 가라앉아 있었다.
그로서는 굳이 밝히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숙부. 그럼 우린 우리를 한 번 멸망시킨 적 있는 기물을 두고 무공을 연마했던 거야?”
“……과거와는 다르오. 적의의 누적을 막기 위해 빙궁의 숫자를 제한했을 뿐.”
“그것뿐이 아닐 텐데? 극음지기를 제한하는 건 극도의 양강지기. 네가 모시는 산의 선인 아니더냐?”
“……선자에 대한 언급은 더이상 하지 마시오.”
“왜? 그 양강지기가 네 목줄이기 때문이냐?”
“감히―!”
여백천의 출수는 매우 기습적이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냉기의 해일이 몰아쳐 주변을 모조리 얼려버렸다.
숨마저 얼릴 것 같은 냉기였다.
“소주! 뭐 하는 겁니까!?”
하지만 그 냉기는 안나에 의해서 막혔다.
그녀의 움켜쥔 주먹에서 새하얀 냉기가 흘러나와 여백천의 냉기를 짓눌렀다.
거대하고 거칠었다.
“끝까지 듣게 해 줘!”
“소주, 이건 궁의 일이오! 외인과 함께 나눌 이야기가 아니외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천년 전의 천마라면 궁과도 밀접한 사람이잖아. 나는 남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소주, 이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궁의 호법으로서 소주를 강제로라도 데려가겠습니다.”
“나는 안 갈 거야!”
“벌은 추후에 받겠습니다!”
여백천도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
칼날처럼 벼려져 안나의 사방을 포위하는 냉기.
반경 십 수 미터가 통째로 빙판으로 변했다.
이지아가 훌쩍 물러나 주변으로 전해지는 피해를 초능력으로 막아섰다.
‘여력만으로 이정도라고?’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여백천의 냉기는 초능력마저 스며 들어갈 정도로 시렸다.
“너무해! 한빙신공을 사용하다니!”
“소주께서도 한빙장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이익!”
안나의 몸 주변으로 새파란 냉기가 알갱이로 뭉쳤다.
알갱이는 하나하나 손짓에 따라 진동하더니, 일제히 앞으로 쏟아졌다.
한빙신공의 빙하탄이라는 무공이었다.
마치 산탄총에 맞은 듯 전면이 쑥대밭이 됐다.
“십 성 공력이라니! 이렇게 나오면 곤란합니다!”
“가기 싫어! 가기 싫어! 가기 싫다고!”
“떼쓴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궁의 문제지 외인이 참견할 문제가 아닙니다!”
“듣기 싫어!”
순간, 안나의 발밑에서 어마어마한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건 지금까지의 냉기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바닥이 얼어붙고 대기마저 냉기에 잠식됐다.
심지어 여백천마저 감히 대응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소주, 제어하십시오!”
“난……난 가기 싫어. 가기 싫어!”
콰드드득.
냉기가 형태를 이루며 주변을 옥죄었다.
이지아가 힘을 쥐어짜 확산을 막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입가에 피가 흐르고 손을 부르르 떨렸다.
“그만 되었다. 물러나거라.”
천마가 나선 건 그 무렵이었다.
그는 이지아의 어깨를 잡아 가볍게 뒤로 물리고 냉기의 해일을 손아귀로 움켜쥐었다.
하얀 벽이 그 앞에서 출렁거렸다.
“한빙신공. 아니, 이건 빙마공이로군. 그리 독하게 당했으면서도 버리지 못하다니.”
혀를 차며 냉기를 조금씩 당겼다.
서리가 말려 들어가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었다.
천마가 선 자리 주변 1미터 안쪽만 봄과 같은 전경이었다.
“오, 오지 마! 이건 아파! 다치고 말 거야!”
“본좌를 무어라 보는 것이냐? 투정을 부리고 싶다면 얼마든지 부려 보거라.”
“위……험.”
“배려는 너 같은 아이가 할 것이 아니다.”
천마는 그대로 냉기의 벽을 뚫고 지나가 안나의 이마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새하얀 광휘가 쏟아져 나왔다.
이건 냉기이나, 냉기의 경계를 넘은 힘이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무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야 했다.
“옳거니. 쏟아내고 나니 잡스러운 기운이 보이는구나.”
냉기의 확산을 억제하는 화산 같은 기운이 있었다.
그건 과거 크리스에게서 보았던 양강지기였다.
안나의 극음지기와 균형을 맞추며, 동시에 그녀를 제어하는 수단이었다.
천마는 이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냉기와 열기가 동시에 그를 압박했다.
“운설, 그 아이의 후손이라면 조카와 같다. 이제부터는 내가 맡을 터이니 넌 개입하지 말거라.”
천마는 이 힘을 억지로 뜯어냈다.
냉기가 꼬리를 말고 양강지기는 연기로 변했다.
통제되지 않는 힘이 날뛰는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천년빙정의 한기라 해도 천마진기 앞에서는 그저 꼬리 만 강아지일 뿐.
“옛적에 이리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 가득한 혼잣말을 남긴 채.
쓰러지는 안나를 품에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