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rongest He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75
◈ 아픈 진실의 끝
안나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오랜만에 푹 잔 기분이었다.
턱이 빠져라 하품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 보는 장소였다.
“……여기는 어디지?”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무언가 기억이 흐릿했다.
식사 자리에서 과음이라도 했던 걸까?
그러면 조금 부끄러운데.
괜히 볼만 양손으로 감싸고 웃었다.
“해도, 해도. 일어났어.”
“크릉. 크릉.”
“가서 지아한테 말해야 할까?”
“크릉!”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안나가 풀쩍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해도와 누아가 깜짝 놀라서 벌렁 넘어졌다.
놀란 듯 눈이 동그랗게 뜨여 있었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누아는 경계를 하는 거다.”
“크릉. 크릉!”
“경계? 안나를? 왜?”
“너는 위험하니까. 누아는 위험한 걸 경계해야 한다.”
누아가 해도 위에 앉아서 손가락질했다.
그 당당함은 마치 장군과 같았다.
“안나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야.”
“아니야, 엄청 위험하다. 어제도 아빠가 안 막아주었으면 지아가 다쳤을 거야.”
“어제?”
“기억 못하는 거냐? 안나는 바보다.”
“안나, 바보 아니야!”
버럭 외치는 안나에 누아가 뒤로 물러났다.
몸을 해도 품으로 잔뜩 웅크려 경계하는 태도도 잊지 않았다.
안나가 머쓱함에 볼을 긁었다.
“소리쳐서 미안. 그래도 안나는 위험하지 않아.”
“방금도 소리쳤는데.”
“화나게 하니까 그러지. 안나는 평소에 굉장히 착하고 조신해. 궁에서도 다들 칭찬했어.”
“안나는 가출한 거 아니었어?”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고.”
안나가 에둘러 화제를 회피했다.
그리고 그대로 방을 벗어나 복도로 나왔다.
긴 복도 좌우로 넓은 뜰이 자리하고 있었다.
맨발로 후두둑 달려서 뜰로 뛰어들었다.
“와! 풀이다, 풀!”
“풀이 신기하냐?”
“응. 응. 빙궁 주변은 전부 얼음과 돌뿐이거든. 티비에서 보던 풀밭을 발견하고 꼭 발로 밟아보고 싶었어.”
“헤. 빙궁이라는 곳 엄청 딱딱해 보인다.”
“많이 딱딱해. 사람도 엄청 적어서 지루해. 다들 안나가 나가지 못하게 감시도 했어.”
“누아도 비슷했다. 누아도 작은 통에 갇혀 있었는데, 사람들이 못 나가게 막았다.”
“작은 통?”
안나가 풀밭에 누운 채 고개만 빠끔 들었다.
해도에 몸 실은 누아가 느긋하게 다가왔다.
“응. 누아는 실험체였다. 작은 통에 갇혀서 움직이지 못했어. 아빠가 누아를 구해주긴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 실험체? 영화에서 나오는?”
“응. 누아는 누에 괴이와 인간의 혼종이다. 봐봐, 이렇게 누에실도 뽑아낼 수 있다.”
누에실을 쭉 뽑아내는 누아의 모습에 안나가 입을 떡 벌렸다.
“비, 빙궁에서는 괴이를 가지고 연구하는 건 불법이라고 배웠어. 누가 이런 건데?”
“이상한 과학자들이었어. 근데, 아빠는 그 사람들이 산의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해.”
“산? 설산의 선자들 말이야?”
“웅. 자세하게는 모르겠어. 어느 산에선가 명령을 내려서 과학자들이 움직인 거래.”
“그럴 리가 없어. 설산의 선자들은 엄청 착해.”
“아니야. 누아는 이미 몇 번이나 봤는걸. 산에 사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못됐어.”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으르렁거렸다.
궁에서 머물 때면 가끔 찾아와 말벗이 되어주는 설산의 사람들이 위로였다.
그들을 욕하는 누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취소해!”
“취소 안 해! 누아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하니까!”
“이익!”
순간, 안나의 발끝에서 냉기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뜰의 수풀이 얼어붙어 바스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고얀 것. 뜰에 구멍을 낼 셈이냐.”
“노복!”
때를 맞춰 나타난 건 노복이었다.
빗자루로 안나를 밀쳐내고 냉기를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뜰 전체가 얼어붙는 건 막을 수 있었다.
“너, 너는 누구야!?”
“노복이다. 신교의 문지기지. 손님이면 손님답게 얌전히 있을 것이지, 왜 뜰은 망치고 있는 거냐?”
“안나는 고의로 그런 게 아니야.”
“다루지 못하면 쓰지 못함만 못하다. 재주가 그럴지언데, 고의가 아니라는 말로 끝낼 셈이더냐?”
“지, 진짜로 고의가 아니었어.”
“끝까지 변명뿐이구나.”
“우……”
안나가 입술을 댓발 내밀고는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이곳에는 자기편이 한 명도 없는 기분이었다.
“아직 어리고 고집스럽구나. 이런 아이를 지키기 위해 굳이 그런 귀찮음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는지.”
“무슨 소리야?”
“널 되찾기 위해 군이 동원됐다. 지금 저택 밖은 온갖 무기들로 도배되어 있지. 이게 다 널 지키기 위한 문주님의 선택이었다.”
“안나를? 왜?”
“네가 문의 손님이기 때문이지. 자세한 내용은 올라가서 듣거라. 문주님께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안나가 일어나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걸었다.
답은 듣고 싶었다.
#
한서휘가 윤무락의 앞을 막아섰다.
계급상으로는 해서 안 될 일이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대장님, 무력은 안 됩니다.”
“비켜라, 한서휘. 이건 어디까지나 공무다. 네 친분이 개입될 일이 아니야.”
“대장님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관은 능력자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한다. 암묵적인 조례입니다.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면 크게 틀어질 뿐입니다.”
“흥. 헛소리. 능력자라고 해서 국민이 아닌 건 아니다. 국민이라면 나라의 법을 따라야지. 건방지게 어디서 소환 명령을 거부해?”
윤무락은 코웃음 치며 한서휘를 지나치려 했다.
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황궁의 지원 정도로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뭐?”
발걸음을 세운 한서휘의 말.
윤무락이 믿고 있던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전에 있던 괴이 사태에서 궁의 전력이 투입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민간세력이 군부와 접촉해서 대대적으로 활동하는 건 법에 어긋납니다. 알고 계시겠죠?”
“하.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들은 전부 군에서 양성한 정예들이다.”
“그렇다면 신원조회를 요청해도 되는 것이겠죠? 그 모두가 군의 정예라면 대한민국 국적이 있을 테니까요.”
“한서휘. 선 넘지 마라.”
“선은 대장님이 넘고 계십니다. 방위군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건 군법에도 저촉됩니다. 공과 사를 구분해 주시죠.”
한서휘는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군이 민간 능력자에게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굴러간다.
겉으로 보는 것과 다르게 국가의 치안은 많은 부분에서 민간 능력자에 기대고 있다.
선을 넘으면 피해 보는 건 결국 보통 사람들이다.
“……한서휘. 이번 일은 기억해 두겠다.”
“살펴 가시기를.”
결국 윤무락이 한 걸음 물러났다.
동원했던 방위군을 뒤로 물리고 소수의 녹서스 인원만을 남겨 두었다.
“한 대령님. 이대로 해결 될 것 같습니까?”
“아니. 조만간 다른 방법을 쓸 거다. 그 전에 일을 해결해야지.”
한서휘는 뒷짐을 진 채 저택을 바라봤다.
결국, 해결의 키는 한 사람이 쥐고 있다.
“그분과 만나봐야겠다.”
천마.
항상 일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
안나가 눈을 깜박였다.
내용이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빙궁이 어떤 이유로 유지되었고, 한빙신공 등의 부작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설산이 기운을 잡아준 이유가 무엇인지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우리를 사냥개로 쓰려 한 거라고?”
“빙정을 통한 극음지기는 그냥 두면 폭주하는 폭탄과 같으니까. 거부할 수가 없는 목줄이다.”
“하, 하지만 그냥 선의로 해 준 걸지도 모르잖아.”
“정말로 선의가 있었다면 네가 한빙신공을 익히게 뒀을 리 없다.”
“……”
한빙신공이나 빙마공이나 모두 빙정의 기운을 쓴다.
이건 힘을 위해 몸 안에 독을 쌓는 것과 같다.
정말로 선의로 기운을 잡아 준 거라면 이를 막았어야 옳다.
“그럼 뭐야. 산도 빙궁도 모두 자기들 욕심에 그랬다는 거야? 산은 우리를 이용하고 빙궁은 힘을 얻기 위해서?”
“무가이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넌 선택권을 가지지도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네 재능이 포기하지 못할 만큼 빼어났던 것도 큰 몫을 했겠지.”
“숙부. 저 말이 모두 사실이에요?”
안나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여백천에게 물었다.
그가 ‘저건 거짓말이야.’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래야 평생을 믿었던 빙궁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을 테니까.
“미안하오, 소주.”
하지만 여백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기대와 달랐다.
고개 숙여 시선조차 피하는 모습은 죄에 대한 무거움이었다.
안나가 휘청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 나빠. 다 거짓말쟁이야.”
“소주……”
“소주라고 부르지 마! 결국 날 이용했을 뿐이잖아! 빙궁의 힘이 되길 바랐어!? 산의 사냥개가 되는 한이 있어도!?”
“그건……그건 아니오. 우리는 그저 소주의 재능에 반했을 뿐이오. 소주라면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을까. 어쩌면 빙정의 굴레조차 넘지 않을까. 어리석은 희망이라 해도 그것만이 방법이었소……”
여백천의 변명에도 안나는 진저리를 쳤다.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닥부터 스멀스멀 냉기가 퍼져서 주변의 온도를 내리기 시작했다.
“소, 소주. 진정하시오.”
“다가오지 마!”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
얼음이 창이 되어 여백천의 턱밑에 닿았다.
“소주……”
“오지 말라고!!”
이어지는 냉기의 폭풍.
수백, 수천의 얼음 칼날이 나선 형태로 퍼지며 사방을 찢어버리려 했다.
함부로 항거할 수 없는 거력이었다.
천마가 양강지기를 끊어버린 이상 냉기에 한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여백천이 맞서지 못하고 눈만 질끈 감았다.
“숙부……!”
“차분해지거라.”
순간, 그 앞에 나타나 냉기의 창을 막아서는 천마.
손끝에 창이 닿아 물로 녹아내렸다.
나선으로 퍼지던 냉기의 꽃도 모조리 녹아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아.’ 안나가 그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화는 났지만 해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평생을 숙부로 모셔온 사람이었다.
“빙정은 살아있는 기운의 결정체다. 네 감정에 반응하여 이처럼 폭주하기 마련이지.”
“그, 그럼 어떻게 해야 제어할 수 있는데?”
“쉬운 방법이라면 감정을 제거하는 것이다.”
“감정을 제거……?”
“감정의 요동이 없다면 폭주도 없겠지. 차가운 빙정의 근본을 생각하면 그편이 더 어울린다.”
“그건 아니되오! 소주도 사람이외다! 어찌 감정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입니까!?”
즉각 반대한 건 여백천이었다.
“해서 어려운 방법이 있다.”
“뭔데? 어려운 방법이 뭔데?”
“빙정은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드는 거다.”
“빙정을? 무슨 소리야?”
천마가 손을 뻗어서 허공의 한 부분을 쥐었다.
그러자 위로는 불꽃이 아래로는 얼음이 맺혔다.
신기하기 짝이 없는 현상.
하지만 더 놀란 건 그가 손을 치우고 나서였다.
얼음과 불꽃이 맞물린 채 유지되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한 거야?”
“극음과 극양은 결국 통하게 돼 있다. 우리가 말하는 형태의 개념을 초월하면 그 경계를 넘는 건 일도 아니지.”
“……그건 무극경(無極境)에 대한 설명 아니오?”
“제법 견문이 있군. 그래, 생사를 초월하고 난 뒤 세속의 법칙마저 벗어나면 이룰 수 있는 것이 무극경이다.”
“소주께서 무극경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이오?”
“설마. 무극경은 그리 호락호락한 경지가 아니다. 본좌 조차 천마신공이 극의에 이르렀을 때 겨우 이룬 경지이니. 저 아이에게 바라는 건 그저 편린이다.”
천마가 손가락을 튕기자 얼음과 불꽃이 한 곳으로 뭉쳐서 작은 구슬로 변했다.
“음과 양이 뒤섞인 것을 혼돈이라 칭한다. 허나, 혼돈은 인간이 감당 할 수 없는 힘이지. 그렇기에 인간은 음과 양이 섞인 채로 존재한다. 네 경우는 극음.”
구슬은 조금씩 흰색으로 변해갔다.
차게 내리는 서리는 그것이 음의 기운임을 알려주었다.
“본래라면 극음지기를 품는다 해서 문제는 없다. 음양이론에 따르자면 태음에 소양이 더해지니, 이 또한 태극이라 칭하니까.”
“하지만 천년빙정은……”
“소양조차 밀어내는 순음이다. 그렇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 인간은 이런 완전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생명이 아니거든. 산의 선인이라는 자가 순양지공으로 음기를 누른 것도 하나의 방편이었다. 허나, 이는 타인에 의한 목줄이었을 뿐이다.”
안나는 그제야 자신의 몸에서 순양지기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오롯이 냉기만 느껴지는 상태였다.
“빙궁의 아이야. 감이 오느냐?”
“……극음 속 소양. 이건 소용돌이치는 물속에 한 방울 먹물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아.”
“총명하구나. 이를 본좌는 혼태극이라 부른다. 태극은 태극이나 작은 하나의 기운이 큰 나머지 기운을 이끄는 형태이지.”
“빙정의 기운이 작은 양기를 따라서 끊임없이 돌게 하는 거야!”
“끝없는 순환으로 순음을 막는 것이다.”
안나가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이제야 길이 트이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굳었다.
“이게 가능해……?”
마치 좁쌀 하나로 바다를 이끄는 것과 같다.
빙정의 음기가 얼마나 강하고 난폭한지는 스스로 겪어봐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걸 끝없이 돌리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본좌는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결코 단시간 내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
“네가 본좌의 제자로 들어오거라.”
“아니 됩니다, 소주! 아무리 그렇다 해도 빙궁의 소주께서 타문의 제자로 들어가다니요!”
다급한 여백천의 외침에도 안나는 담담했다.
어쩐지 이리 될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거 배우면 안나는 빙정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
“원한다면, 무엇에서도.”
“응. 그럼 안나는 배울게.”
안나가 천마 앞에 무릎을 꿇고 대례를 취했다.
“제자, 안나가 스승님을 봐.”
“그래. 앞으로 널 설아(雪兒)로 부르마.”
백, 흑, 적, 청, 독. 화.
그리고 설아.
일곱 번째 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