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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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도시에서 직접 고용한 게 아니라, 대리인이라는 사람과 계약한 허술한 용병이라면 좋겠는데요.”
“그, 그렇네요. 그러길 바, 바라보죠.”
베르데는 아멜리아를 따라가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아멜리아야 자신보다 이런 일을 훨씬 많이 해봤겠지만.
대체 그 ‘역할극’이라는 게 뭔데?
헛간을 떠나기 전, 아멜리아가 자신에게 해준 이야기는 딱 하나뿐이었다.
-바, 발렌타인에 도착하면 우, 우리는 연인인 걸로 하죠.
-네? 연인? 연인을? 저랑?
-자, 잠깐만 그런 척하는 거니까요. 어, 어쨌든 그런 배경으로 알아두세요.
연인이라.
베르데는 조금 앞서가는 아멜리아의 뒷모습을 슬쩍 훑었다.
물론 젊은 연인이 집안의 반대를 피해서 다른 마을이나 도시로 도망가는 일은 흔히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설정으로 경비병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가족이나 친척도 아니고, 하필 연인이라는 설정을 고른 이유가.
‘……서, 설마.“
설마…….
나한테 조금 관심이 있나?!
베르데는 갑자기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평소 아멜리아가 자신에게 유독 박하게 대한다는 인상은 있었다.
베르데가 본인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맞는 말을 하면 옆에서 발끈하는데 어떻게 사이가 좋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멜리아는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언제부터였지?
갤로에서 공작님이 드러눕고, 자신과 아멜리아가 환자들을 치료할 때부터였나?
하긴, 그때 좀 많이 붙어 있기는 했어!
붕대 달라고 했는데도 군말 없이 주고!
평소 같으면 ‘그 옆에 있는 바구니에 든 건 붕대가 아닌가요?’ 같이 핀잔을 줬을 텐데!
그럼 진짜 그때부터였나?
아, 그럼 갤로 주민들을 밖으로 대피시키면서 슬쩍 싹튼 동지애가 치료소에서 호감으로……?
베르데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공작님과 사이좋게 서로 높임말을 쓰는 걸 보고 그녀 역시 평민이 아니라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 나 같은 놈이랑? 어째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기는 했지만, 베르데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어깨를 폈다.
그래, 나 정도면 의젓한 숙녀가 반할 만도 하지.
어디 가서 이렇게 실력 좋은 의원 못 만난다고.
게다가, 공작가에 조금만 몸을 담그면 나중에 퇴직금도 두둑하게 받아서 개인 의원을 차릴 수도 있었다.
얼굴도 나쁘지 않아, 직업도 번듯해.
인성도 뭐 이 정도라면 그럭저럭 평균이지.
하 참. 나 참. 고백은 언제쯤 하려나.
여자가 이렇게 적극적인 거 나쁘지 않긴 해.
평소에도 은근히 다혈질적인 면이 있더라니 말이야. 이렇게 진도를 빠르게 빼려고?
아이 참. 이것 참. 난감하네, 난감해.
분명 발렌타인에 들어가면 둘이 있는 시간이 생길 텐데.
그때 은근슬쩍 나에게 마음이 있다고 어필할 계획인 걸까?
남녀 간의 애정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도 않는다더니, 이렇게 교활하고 깜찍한 짓을 하긴!
베르데는 어느새 히죽거리며 머릿속으로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 3명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그의 팔을 안는 감각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네. 맞아요. 저, 저희가 집안 반대를 피해서. 바, 발렌타인에 있는 친척에게, 모, 몸을 의탁하려고.”
아멜리아였다!
그녀는 베르데가 진짜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팔을 꼬옥 붙들고 있었다.
팔이 조금 아프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 와서 보니 아멜리아의 머리도 자신의 어깨보다 살짝 위에 있어서 키도 딱 적당했다.
아멜리아의 가련한 얼굴이 베르데를 향했다.
“그렇지, 자기?”
“응? 어, 응? 뭐, 뭐라고요?”
“여, 여기에 자, 자기 친척이 있다고 했잖아. 그렇지?”
아 맞다.
베르데는 눈앞에서 엄중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경비병 두 명을 보고는 헛기침했다.
“그으럼, 우리 애기. 발렌타인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뭐냐. 우리 숙모님께서 보살펴 주실 거야.”
“다, 다행이다. 마, 마을에서는 크, 큰일이 많았지만 여기라면, 분명, 마음 편하게 사, 살 수 있을 거야.”
“그럼. 당연하지. 오빠만 믿어!”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베르데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팔에 매달리는 여자라는 존재를 느끼며 감격에 가까운 행복에 젖었다.
그냥 이참에 아멜리아와 발렌타인에서 신혼을 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는데.
베르데가 한참 헤벌쭉하게 있을 때였다.
일순 날카로운 목소리가 베르데의 귀를 후려쳤다.
“……자, 자기야. 지금 어, 어딜 보고 웃고 있어?”
“어?”
“저, 저 사람 보고 웃었어? 자기 어떻게 그, 그럴 수 있어? 마을에서 그 버릇은 고치겠다고 약속했잖아?”
“어? 뭐? 아냐, 아닌데?”
“자긴 늘 그, 그렇게 말하면서 무, 무마하려고 하잖아!”
아멜리아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녀는 베르데의 팔을 휙 팽개치고 마구 따졌다.
“여, 옆집에 있던 애도 그렇게 꼬, 꼬드긴 거 내가 모, 모를 줄 알았어?! 건너편 바, 방앗간 집은 어떻고! 자기는 매, 맨날 이런 식이야!”
“아니, 아니 나는!”
“자기가 겨, 결혼하자고 해서 믿었어! 어, 어쨌든 저, 정착하면 그 바람기도 전부 사라질 거라고 미, 믿었다고! 그런데 지금 발렌타인에서조차 경비원에게 한눈을 파, 팔기나 하고!”
아닌데! 아닌데요! 이거 대체 무슨 설정이야!
베르데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아멜리아는 가혹하게 베르데를 몰아붙였다.
“내, 내가 진짜 모를 줄 알았어? 으흑, 정말 모, 모를 줄 알았냐고! 사, 사실 마을을 벗어난 것도, 전부 당신이 술집에서 그 남자와……! 으흐흑!”
“그, 그런 적 없어!”
술집이라니! 남자는 누굴 말하는 건데! 보통 여자 아니냐고!
베르데는 어버버하다가 경비병과 문득 눈이 마주쳤다.
경비병들의 엄격한 태도는 어디 가고, 지금은 경악과 아멜리아에 대한 동정이 스멀스멀 엿보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분명 안으로 사람을 들이면 안 된다고…….”
“아니, 여기 젊은 연인인데. 여기 친척이 있대.”
“그런데 남자 쪽이 남녀 안 가리고 좀 바람기가…….”
“뭐? 어휴, 이게 다 무슨…….”
심지어 아멜리아가 소리 지르는 걸 듣고 온 동료 경비원에게 속삭이며 무슨 상황인지 정리해주기까지 했다.
베르데는 당황했다.
역할극이라는 게 설마 이런 걸 말하는 거였냐?
아멜리아는 눈물을 흩뿌리며 외쳤다.
“이, 이런 식으로 하면, 자기 어머니한테 보, 보내는 지원, 나도 이젠 못 해드려!”
“무슨 어머니! 뭔데!”
“우, 우리 결혼하는 조건으로, 자, 자기 어머니께 내가 땅이랑, 집이랑 드리기로, 했었잖아! 자기가 어, 어머니 노후가 걱정된다면서……!”
베르데는 기함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랑 편지 한 통 주고받은 적 없는데 어머니는 무슨 어머니!
경비병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여자가 잘사나 봐.”
“이건 남자가 좀 잘못했네.”
“아니 들어봐, 남자가 아까 마을에서도…….”
“어이, 무슨 일이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저쪽까지 소란이 다 들려.”
“여기 연인이 마을에서 도망쳐왔는데…….”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 연애 싸움을 구경하는 경비병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이목 한 번 제대로 끈 아멜리아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흐느꼈다.
“자기가, 자기가 그렇게 약속해준다고 해서, 나, 나는 다 믿고, 나는!”
“그, 진정해봐. 애기야. 오빠가 그럴 생각으로 한 게 아니라.”
“그럼 무, 무슨 생각으로 한 건데? 무슨 생각으로 나, 남에게 푹 빠져 있었느냐고!”
“당연히 오빠는 애기 생각밖에 없지!”
우선 이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해야 했다.
베르데는 최선을 다해서 쓰레기가 된 자신의 평판을 회복하려 했으나,
“그, 그럼 내가 어제 발렌타인에서 뭐 사달라고 했는지 기, 기억해?”
“……어. 그게 말이야. 술, 술이었나? 와인?”
“자, 자기는 바보야! 내가 사달라고 한 건 발렌타인 특산품 증류주 중에서도 18년산이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경비병 몇 명이 쯧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어렴풋이 ‘우리 아내는 저거 기억 못 하면 엄청 화내는데’ 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베르데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멜리아에게 필사적인 시선을 보내며 빌었다.
“애기야. 미안해. 오빠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만 좀 숙모님께 가서 쉬고…….”
“오빠가 이렇게 구는데 내가 어떻게 오, 오빠의 숙모님을 뵐 수 있어? 됐어! 오빠는 자시만 생각하는바, 바람둥이야. 여기서 끝이야!”
아멜리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울면서 경비병들을 지나쳐 도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워낙 돌발적인 일이기도 했고, 경비병들은 우는 여자를 차마 잡을 엄두를 못 냈다.
그 자리에는 허망한 얼굴로 아멜리아의 뒷모습을 보던 베르데와 싸움 구경하러 모인 경비병들만 남았다.
경비병 중 나이가 좀 있는 한 사람이 베르데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는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지만 말이야. 사실 며칠 전부터 사람들의 도시 출입을 금하란 명령이 있었다네. 그래도 아내 될 사람의 마음은 풀어줘야 할 거 아닌가. 한 시간 내로 데리고 나오게.”
“……예,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좀 행실 바르게 살고. 젊은이가 벌써 그러면 못 써.”
“……예…….”
들어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숨어다니면서 추적을 따돌릴 수는 있겠지.
이렇게 어찌저찌 발렌타인으로 들어가게 된 베르데와 아멜리아였다.
물론 베르데의 사회적 위신과 달콤한 망상은 박살이 난 채였다.
* * *
“경비병이 다 몰려가는 걸 보니 성공한 모양입니다.”
“진짜? 그걸 어떻게 했대.”
나중에 아멜리아에게 무슨 역할극 했는지 물어봐야지.
아멜리아와 베르데와 찢어진 우리는 입구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지점에 와 있었다.
벽에서 조금 떨어져 몸을 숨기고 있다가, 경비병이 도시의 거대한 아치형 입구로 달려가는 걸 보고 벽으로 막 다가간 참이었다.
레안드로스는 벽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나를 안은 채로 물었다.
“높은 곳은 무서워하십니까?”
“무섭지는 않은데, 지금 떨어지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서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워.”
지난 회차 언젠가, 레안드로스와 기도원 도박장으로 침입했던 일이 떠올랐다.
레안드로스는 맨몸으로 충분히 올라갈 수 있었던 것 같았는데.
하필 지금은 나를 안고 있는 탓에 양팔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역시 도움닫기를 해서 훌쩍 올라가려나.
아니, 아무리 레안드로스가 높게 뛸 수 있다고 해도 이렇게 높은 벽은 무리지.
내가 고개를 들어서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높이인데.
어떻게 나까지 데리고 가려나 걱정이 되어서 그를 쳐다보니, 레안드로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그렇다면 높은 곳도 괜찮으시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상관은 없는데- 우와악!”
레안드로스가 갑자기 뛰어올라서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거센 흔들림이나 충격은 없었다.
슬쩍 실눈을 떴을 때, 레안드로스는 벽을 따라 오르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서는 작은 고드름이 달린 두꺼운 얼음 발판이 생겨나 그의 체중을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이건…….”
“꼭 전투에서만 쓰라는 법은 없으니 말입니다. 다양한 활용처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너 꼭 겨울X국 엘X 같다.”
“X사가 뭡니까? 사람의 이름입니까?”
“그런 게 있어.”
물론 이쪽은 여왕님이 아니라 우락부락한 기사님이기는 한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수월하게 벽을 타 넘어서 안에 착지했다.
경비병이 금세 돌아올 것 같아서 재빠르게 주변인가로 숨어든 우리는 좁은 골목길에 멈췄다.
고작 짐짝처럼 들려있기만 했는데 벌써 몸이 축축 처졌다.
성으로 돌아가면 또 한동안 침대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놀드 영애와 베르데가 숙소를 확보할 때까지 잠시 대기하겠습니다.”
“몇 시간 남았지?”
“해가 뜰 때까지입니다.”
5시간에서 6시간 정도 남았겠군.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 좀 내려줘. 눈만 감고 있을게.”
“바닥에 누우실 작정이십니까?”
“그럼 안 돼?”
“안 됩니다.”
섬기는 주인을 바닥에서 재울 수는 없다는 레안드로스의 주장에, 나는 그에게 기대서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쪽잠으로 피로를 푼 후 우리는 아멜리아와 베르데와 만나기로 했던 여관으로 향했다.
침대만 있으면 어떻게든 더 쉴 수 있겠지.
그런 기대를 품고 여관으로 향했지만 정작 거기서 목격한 건.
“왜 밖에 나와 있어?”
굳게 문이 닫혀 있는 여관과,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아멜리아와 베르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