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160
(159)
남자는 자신을 ‘보잘것없는 신관’이라고만 소개했다.
태양처럼 찬란한 금발과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소박한 소개인 것 같지만,
남자도 남자의 사정이 있을 것 같아 아멜리아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저, 정리해보자면, 용무가 있어서 바, 발렌타인에 머무르고 있었다가, 정신을 차리니까, 성주의 저, 저택서 깨어났다고요?
남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그가 당했을 일을 생각해 보면, 납득이 아예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멜리아 본인도 염소를 쫓아가다가 정신을 잃었으니까.
“저택에서 이, 일어났을 때, 수, 수상했던 점이라던가. 그런 건 어, 없었나요?”
“수상한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그게?”
“제가 일어났을 때는 성주 저택의 객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몸이 이상하지 않아서 서둘러 떠나려고 했는데, 그게. 그러니까, 아까 숙녀분의 뒤를 쫓던 이들과 비슷한 복장의 사람들이.”
“사람들이?”
“…….”
왜 말을 자꾸 하다가 마는 걸까.
아멜리아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남자를 보다가 문득 그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음란하고 끈적하게 더듬던 손길까지.
아멜리아는 그가 말하려던 것을 바로 이해했다.
“그, 그리고 나서?”
“당연히 거부했습니다. 명색이 신을 모시는 자인데 그렇게 정결치 않은 행동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후로 몸이 무거워지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멜리아도 처음에 온통 시뻘건 침대 위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몸이 가볍지 않다고 느꼈다.
분명 그들이 몸을 이완시키는 향을 태웠거나, 무슨 장난을 쳐뒀겠지.
그녀는 서서히 무거워지는 제 팔을 억지로 움직여 근육을 풀어주려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가 아는 건, 저를 쫓아오던 이들이 ‘피의 딸’이라고 스스로 칭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드,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없습니다.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신성하지 못한 이름인데요.”
“이, 이들이, 성주의 저택을 저, 점령하고 마음대로 사,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대체 성주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먼저 탈출했을까요?”
“그,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새, 생각해요.”
물론 평범한 영지였다면 발렌타인 도시의 폐쇄령을 내리고 성주 혼자 도망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귀족은 도시에 위협이 닥친다면 한낱 주민을 구하는 것보다 도시를 봉해 위협 요소를 가둔 채로 자신만 빠져나가는 쪽을 선택할 테니까.
하지만, 여기는 왕실 직할령.
성주가 독단적으로 도시의 개방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
분명 왕실을 대리하는 자격을 지닌 대리인과 논의를 거쳐서 결정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대리인도 편지로 전하지 않았는가.
‘발렌타인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직접 오라’고.
대리인이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피의 딸’들이라면?
발렌타인이 ‘피의 딸’이라 불리는 이단에게 점거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주와 대리인이 힘을 합쳐 ‘피의 딸’들에게 대항하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성주와 대리인은 둘 다 아직 발렌타인에 억류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지만, 현재로서는 그쪽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아멜리아는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멀어졌던 소리가 다시 조금씩 커지는 걸로 봐서는 자신과 이 남자를 찾아서 저택을 수색하는 것 같았다.
이를 어쩐다.
단둘이서 탈출을 감행하기에는 저쪽 인원이 너무 많았다.
정면승부는 어림도 없으니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게 가장 좋았다.
그러기 위해서 이 저택의 구조도를 상세히 알아야만 했고, 한 성주가 머무는 저택 구조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서, 성주님을 찾죠.”
“발렌타인의 성주를요?”
“가, 가능하다면요. 당장은 저들에게 대, 대항할 방법이 어, 없어요. 그러니 성주님을 찾아서, 몰래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을지 아, 알아봐야 해요.”
남자는 성주를 찾자는 말에 놀란 표정이었지만, 잠시 생각해 보더니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성이나 저택은 만일을 위해서 숨겨진 통로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언뜻 들은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숙녀분.”
“호,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 신관님은 서, 성주가 어디에 있는지……?”
“제가 알고 있었다면 바로 숙녀분께 말씀을 드렸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저도 알고 있는 게 없어서요.”
이단에게 쫓기면서 동시에 성주가 있을 곳을 찾아내야 한다니.
아멜리아는 한숨을 참지 못하고 내쉬며, 방 안에 장식되어 있던 촛대 두 개를 잡아챘다.
하나를 남자에게 내밀자 남자는 양손으로 묵직한 촛대를 받았다.
유사시에는 이 촛대가 그들을 구명할 동아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멜리아는 밖에서 들리는 소란이 조금 잦아들 때를 기다려 슬쩍 방을 나섰다.
남자는 지나치게 담대한 숙녀를 따라 멈칫거리며 뒤를 따라나섰다.
“아, 아래로 가보죠. 지하실에 성주님을 가둬 두었을 가능성이 노, 높으니까.”
“숙녀분께서는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야 가, 가르쳐준 사람이 이, 있었으니까요.”
“예? 누가요? 어째서입니까?”
“그, 그런 게 있어요! 수다 떨지 말고 빨리 가요!”
* * *
발렌타인 성주의 거처는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아기자기한 구조와 복잡한 설계 때문에 비슷한 규모의 저택보다 훨씬 더 많이 돌아다녀야 했다.
게다가 중간에 ‘피의 딸’을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쓸데없는 싸움을 최대한 피하기 위함이었지만,
아무리 열심히 몸을 숨긴다고 해도 내부에 포진한 ‘피의 딸’을 만나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저기다!”
“쫓아가, 놓치면 안 돼! 자매들을 불러, 미혼(迷魂) 의식을 준비해!”
‘피의 딸’ 대부분은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따금씩 드물게 남성 신도도 존재했다.
지금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추격하는 두 명의 신도처럼.
신관은 이를 악물고 달렸지만, 복잡한 복도의 길을 다 외우지도 못했거니와 점점 다리가 둔해지고 있었다.
추격자와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며 이러다가 잡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
함께 탈출하기로 약속했던 여자가 신관의 옆구리를 확 밀었다.
“으악!”
그대로 벽에 충돌한 신관은 아멜리아에게 무슨 짓이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벽에 붙은 자신의 위로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덮이자 입을 다물었다.
두꺼운 직물 너머로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 잠시 여기에, 숨어 있어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여기에 있으라니요!”
신관이 항의했지만 가녀린 목소리의 주인은 오히려 태피스트리를 다듬고 조각상을 앞에 끌어다 놓으며 그를 위장시키고 있었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마, 만나요.”
아래층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아마 가기로 했던 지하를 목적으로 한 것 같았다.
그제야 신관은 그녀가 스스로를 미끼 삼아서 자신을 구해줬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던 건가?
신관의 얼굴이 수치로 한 번 더 붉게 물들었다.
신관이라고 하지만 그 역시 남성은 여성을 배려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렇기에 더더욱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감히 숙녀를 미끼로 삼아서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다니.
그게 설령 그 자신이 바랐던 일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혼자서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하던 신관은 문득 제 다리에 감각이 거의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커다란 태피스트리와 조각상 뒤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주물러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마음은 급한데,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니.
난생처음으로 이런 상황을 마주한 신관은 어디 화풀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겨우 어찌저찌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그는 곧바로 태피스트리를 들추고 뛰쳐나와 여자가 갔던 방향으로 향했다.
하필 쫓아오던 게 남자라서, 미끼가 된 게 그녀라서.
여자가 결국 잡혀갔다면? 그녀를 구해야만 했다.
신관은 비틀거리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한참 동안 여자와 ‘피의 딸’ 추격자를 찾아다니던 신관이 정말 그녀가 도로 잡혀간 게 아닌지 겁에 질렸을 때.
그는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는, 분명히.
신관은 최악의 가능성을 떠올리며 냄새를 따라갔다.
그 끝에서 그가 본 것은 붉은 원피스였다.
복도의 끝, 거대한 정물화 그림이 걸려 있는 곳에서 여자는 지저분하게 붉은 물이 든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손에 들린 촛대도 붉은색으로 덕지덕지 칠해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추격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여자의 피인가?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었다.
쏟아진 액체를 듬뿍 흡수해 축축해진 카펫에 여자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신관은 놀라서 여자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보, 보시다시피.”
머리를 신관에게 기댄 여자가 힘겹게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추격자들을 가리켰다.
여자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혹시, 겁에 질렸던 건가……?
신관은 대뜸 인상을 찌푸렸다.
혼자서 쫓기다가 막다른 길에 몰렸다면 충동적으로 촛대로 추격자들을 내리찍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라면 기절시키는 정도로 멈췄겠지만, 칼 하나 쥐어본 적이 없던 여인이 힘을 조절하기란 어려웠겠지.
공포를 느끼는 인간이 얼마나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는지 알고 있던 신관은 혼자서 착각하고 납득했다.
“일어날 수 있으세요? 제가 부축해드리죠.”
“고, 고맙…….”
여자의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지탱하며 두 사람은 다시 목적지로 향했다.
겨우 도착한 지하의 입구 근처에는 다행히도 추격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죄인을 가두거나, 혹은 물품을 저장해두는 용도로 쓰이는 지하는 썰렁하고 캄캄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펴봤다.
사방이 암흑이라 눈으로 보기 어려운 탓에 신관이 살짝 입을 열었다.
“누구 계십니까?”
정적.
“저희는 저택을 점령한 이들이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침묵.
신관이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옆으로 비어있는 창고와 쇠창살이 달린 공간이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 안에서 그림자가 어룽거리자 신관은 그림자를 구출하기 위해 바로 쇠창살에 달라붙으려고 했다.
그러나 줄곧 헐떡거리며 힘겹게 움직이던 여자가 그를 잡아당겼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안에.”
안에 있는 게 왜?
신관은 다시 감옥 안을 들여다봤다.
그제야 그는 안에 있는 그림자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러 개가 하나로 꽉 결집한 그림자들.
그림자들의 집합체에서는 울음과 비슷한 소리와 작은 비명이 각기 다른 목소리로 나고 있었다.
으적거리는 소리와 물소리가 섞였다.
신관은 혼란스러워서 한 걸음 물러나서 다른 감옥을 찾았다.
그 안에서는 기어 다니는 것, 뒤엉킨 것, 낳는 것, 태어난 것, 없어진 것, 그러고도 남은 것이 전부 굴러다니며 움직이고 있었다.
식욕, 색욕, 죽음, 잉태, 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모독적이며 모멸적이었다.
이런 게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
존재한다는 확률조차 생각해 보지 않았다.
저 안쪽까지 이어지는 감옥마다 전부 이런 것들이 들어차 있단 말인가?
신관의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야 해, 불경한 장소를 떠나야 해.
하지만 미처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위태롭게 서 있던 여자가 풀썩 쓰러졌다.
신관은 여자를 안아 들고 흔들었지만,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타인의 피와 땀으로 여자의 슈미즈가 축축해져 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됩니다, 성주를 찾아야……!”
성주는?
감옥에서 엉켜서 굴러다니는 것들 사이에 있을까? 그걸 분간할 수 있을까?
신관이 입술을 세게 깨무는 동시에 지하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며,
거기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왔다.
수많은 손들이 신관을 억지로 무릎 꿇리고 머리를 땅에 처박게 만들었다.
타박타박, 가벼운 발소리가 그의 앞에 멈추었다.
“잘도 도망쳤구나. 하지만 너희가 찾던 성주는 여기에 없어.”
그 독을 품은 수선화 같은 여자.
‘피의 딸’의 일원임이 분명한 여신도는 소름 끼치게 매력적인 미소를 그렸다.
“그를 보고 싶어?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성주님을 소개해드려야겠지.”
“성주님을 네놈들이 데리고 있는 거냐?”
“그럼. 아주 귀하게 모시고 있단다. 그와 여자를 ‘거기’로 데리고 가.”
‘거기’?
정신을 잃은 여자와 함께, 신관은 신도들에게 의해서 질질 끌려갔다.
잠시 후 그들이 당도한 곳은 3층의 화려한 문 앞이었다.
신관이 알기로는 이런 문을 달 수 있는 건 오직 저택의 주인뿐이었다.
“혹시 여기가-”
신관이 제대로 질문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품위 있는 문양이 새겨진 카펫이 깔린 바닥으로, 핏빛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원을 둘러싼 반원으로, 방의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관이 고개를 들자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해골만큼 비쩍 마른 이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만 몇 올 남은 노인네일진대, 그의 얼굴은 뒤틀린 기묘한 미소를 간직한 채 굳어 있었다.
신관이 멍하게 그것을 보고 있는 동안에, 여신도가 문양을 가로질러 다가가 노인네의 시신을 어루만졌다.
“먼저 인사를 드려야지. 그토록 뵙고 싶어 하던 성주님이잖아.”
“그, 그가 성주님이시라고?”
그럴 리가.
신관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럴 리가 없다! 이미 죽은 사람을 성주님이라고 하다니, 발렌타인의 성주를 모독하는가!”
“그럴 리가 없잖아. 분명 살아있을 때까지는 성주의 신분으로 나와 독대한 사람인걸. 죽기 직전까지도 유언으로 좋다고 소리를 지를지언정 후임을 임명하지 않았으니, 여전히 성주인 셈이지.”
“독대? 유언?”
여신도는 신관의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절묘하게 매끈한 피부와 탐스러운 입술을 가진 그녀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여신도가 웃었다.
“왕실령 대리인의 자격으로 발렌타인에 머물고 있던 아나이스. 그리고 네게 어머니를 잉태시킬 여인의 이름이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