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19)
◈ 119화. 오만과 방관의 대가
무초걸의 죽음으로 마침내 모든 상황이 끝났다.
시산혈해의 참혹한 현장.
쏟아지던 비는 잠시 그쳤으나 질퍽거리는 붉은 땅은 내딛는 발을 끊임없이 붙잡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여승들은 죽은 동료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진무립은 서진환에게 해약을 복용시키고 그의 곁에 주저앉았다.
함께 서진환을 살피던 단려화가 피에 젖은 면사를 걷었다.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의 시신을 거둔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요.”
“그런 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담담하게 말하는 진무립의 씁쓸한 빛이 스치듯 사라졌다.
그녀는 피에 젖은 전장을 피해 진무립의 등에 기대앉았다.
“너무도 슬픈 하루네요.”
“저들이 자초한 일이다.”
“냉정해.”
“알잖아. 나는 원래 그런 인간이야.”
진무립의 어깨에 수많은 생명이 걸려있다는 걸 그녀도 안다.
“내 사람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난 얼마든지 냉정해질 수 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작게 입을 벌렸다.
“알아요.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걸. 그냥 해본 소리예요.”
그 말을 끝으로 말 없는 시간이 길게 이어진다.
질퍽거리는 발소리, 작은 흐느낌과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만이 두 사람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태양을 가린 먹구름은 시간의 흐름마저 무뎌지게 만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쿨럭!”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서진환의 복면이 검붉게 물들어갔다.
진무립과 단려화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복면 위로 드러난 다소 창백한 그의 얼굴이 반갑게 눈에 들어온다.
“괜찮으냐?”
“괜찮아요?”
여승들에게서 돌아앉은 서진환은 피에 젖은 복면을 벗었다.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비록 어려운 전투 중에 암습을 당했다지만 모시는 주군 앞에서 쓰러진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고개 저은 진무립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무사하면 됐다.”
따뜻한 그 말이 더욱 쓰리게 가슴을 파고든다.
면사를 갈아쓴 단려화는 옷자락을 찢어 서진환에게 내밀었다.
“복면. 다시 쓸 거죠?”
서진환은 사양하지 않고 옷자락을 받았다.
그리곤 그것으로 입을 닦더니 품에서 슬그머니 새 복면을 꺼내썼다.
단려화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정말 못된 사람이네.”
“…….”
실소를 흘린 진무립이 보자기에 싼 무초걸의 머리를 챙겨 일어났다.
“움직일 수 있겠나?”
서진환은 검에 베인 다리를 움직여보았다.
“신법이라면 문제없습니다.”
“무리할 건 없다. 천천히 돌아가 보자.”
“예.”
처마 밑을 벗어나 계단을 내려온 세 사람 앞에 자소가 다가왔다.
“아미타불. 인사가 너무 늦었구려. 빈승은 본사의 장문인 자소라고 하오.”
그녀가 빈승이라 칭하며 자신을 낮춘 것은 진무립을 아미의 은공으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자소의 대제자 정화가 다가왔고 시신을 모두 수습한 여승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오늘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본사를 구해주신 은공의 은혜에 마음으로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나이 어린 여승부터 정심원의 노승들까지 가리지 않고 다가와 합장을 취했다.
뒤늦게 달려온 청심당주 정묘가 공손히 예를 갖췄다.
“오늘, 이곳 금정봉에서 의협의 기치를 보여주신 세 분의 활약을 가슴에 깊게 새기겠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진무립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왠지 심상치 않은 느낌에 단려화가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진무립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걸린 뒤였다.
“오해가 있군. 나는 의협의 기치를 세우고자 이곳까지 온 게 아니오.”
한숨을 삼킨 단려화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정묘를 비롯한 여승들의 얼굴에 의문이 번졌다.
“그럼 무슨 이유로 소승들을 도와주셨단 말입니까?”
“하나는 서장에서 온 손님에게 인사를 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진무립의 두 눈이 자신을 바라보는 여승들을 담았다.
“두 번째는 바로 사대거파의 일원. 아미파에게 반성하고 참회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지.”
과거를 반추한 자소는 착잡한 얼굴로 눈을 감았으나 아직 젊은 정묘는 그렇지 못했다.
“참회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오늘의 참사가 이유 없이 벌어진 것 같소? 아니지. 모두 그대들이 자초한 것이오.”
정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눈앞에서 제자를 잃고 사형제를 잃은 이들에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나치십니다!”
“지나치다?”
진무립은 실소를 흘렸다.
“생각해보시오. 사천맹이 제 역할을 했다면 오늘날의 참사가 벌어질 수 있었을까?”
“…….”
진무립의 싸늘한 눈빛이 자소에게 꽂혔다.
“사대거파의 무인들이 공을 세우러 떠날 때 중소방파의 무인들은 말똥, 새똥을 치우고 짐이나 나르고 있었다. 무능한 자가 맹주랍시고 사천 무림을 좀먹는 동안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 아미파가 가진 영향력을 과연 올바른 곳에 사용했는가?”
날카로운 일침이 여승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틀어박힌다.
누구 하나 입을 열어 반박하지 못하는 것은 이들도 듣는 귀가 있어 사천맹의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림이 고작 백 명 남짓한 숫자로 무림의 존경을 받는 것은, 천하대전에서 멸문을 각오하고 무림을 지키고자 싸웠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한 점 부끄럼 없이 그들과 같은 불제자라 할 수 있겠는가?”
진무립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대들은 오만했다. 오늘 금정봉에 흐른 피는 아미가 사천 무림의 혼란을 방관한 대가다!”
가슴을 후벼 파는 외침이 금정봉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형용할 수 없이 무거운 침묵 속, 마지막 말을 마친 진무립은 여승들을 비집고 산문으로 향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토록 당당할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단려화는 서진환과 함께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진무립 일행이 산문을 떠난 뒤.
제자들의 참담한 표정을 본 자소는 허탈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봤다.
“내가…… 인생을 헛살았구나.”
대제자 정화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스승님.”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아. 오늘의 혈사는 모두 나의 업보인 게야.”
사천맹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들 중 자신보다 잘 아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남의 일처럼 생각하며 그릇된 것을 바로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참회의 기회라.’
씁쓸한 얼굴로 생각을 거듭하던 자소는 정심원주 성허를 돌아보았다.
“사숙.”
성허는 복잡한 얼굴로 자소를 바라보았다.
“불제자도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에서 배워나가는 법이야.”
“옳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알면서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겠지요. 소질에게 바로잡을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입니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깃든다.
“아미를 부탁합니다.”
* * *
하산하는 진무립의 곁으로 단려화가 바짝 따라붙었다.
“초상집에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진무립이 피식 웃었다.
“내가 틀린 말을 했나?”
“바른말이에요.”
“잘 아는군.”
잠시 멈칫한 단려화는 인상을 구겼다.
“……이게 아닌데.”
서진환이 진무립에게 말했다.
“최근 사천에 기묘한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떠도는 소문이 한두 가지냐? 뭘 말하는 거야?”
슬쩍 단려화의 눈치를 살핀 서진환이 속삭이듯 말했다.
“광룡(狂龍)의 곁에는 언제나 광녀(狂女)가 함께한다. 이런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까 들으니 아미의 제자들도 이미 아는 눈치였습니다.”
“다 들려요.”
단려화의 눈매가 사납게 올라갔다.
“지금 누구 놀려요? 한판 붙어볼까요? 난 죽기 직전까지 패줄 자신 있는데.”
“…….”
왠지 모르게 점점 자신의 무명에 걸맞게 변해가는 단려화였다.
아미산을 벗어난 그들이 숲길에 접어들 무렵, 전방에서 맹렬한 속도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은무대의 부하들을 본 서진환이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오는군.”
한달음에 달려온 은서련이 황망하게 부복하며 말했다.
“멀리 흩어져 있던지라 조금 늦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일어나라. 지금부터 할 일이 많다.”
몸을 일으킨 은수련은 서진환의 창백한 안색을 보곤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쳤습니까?”
“별거 아니다.”
그때 단려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오고 있어요.”
그녀의 예리한 감각에 왠지 익숙한 기운이 감지된 것이다.
진무립은 몸을 숨기려 하는 은무대를 제지했다.
“괜찮다.”
상천은 공식적으로 공위맹과 손을 잡은 상태.
비단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지금 이들의 존재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잠시 후, 저 멀리 비탈길에서 회색 가사를 걸친 자소가 나타났다.
신법을 전개해 달려온 그녀는 낯선 무인들의 존재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다가왔다.
진무립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은공의 말씀이 틀리지 않소. 오늘 본산에서 벌어진 일은 그간 세상사에 눈과 귀를 틀어막고 살아온 대가라오.”
반장을 취한 그녀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은공께서는 아미에 참회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시었소. 이 기회를 놓친다면 빈승은 부처를 찾을 자격조차 없는, 아집에 찌든 늙은이가 될 것만 같구려.”
단려화가 미간을 좁히며 작게 말했다.
“그 말씀은…….”
자소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싸우고자 하외다.”
단려화의 고개가 진무립을 향해 휙 돌아갔다.
왠지 그가 쌀쌀맞게 내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무립은 예상 밖으로 조용히 돌아섰다.
“가시죠.”
스스로 반성하고 참회하고자 한다면 막을 이유는 없다.
자소는 그제야 진심 어린 미소를 보였다.
“고맙구려.”
멈췄던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다.
신법을 전개하기 시작한 진무립에게 단려화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청성?”
자소도 궁금했는지 귀를 쫑긋거린다.
진무립은 고개를 저었다.
“거긴 이미 늦었다.”
자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거창하게 시선을 끌어놓고 청성을 놔둘 리 없습니다. 지금부터 달려가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은?”
진무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성은 끝납니다.”
* * *
콰아앙!
굉음과 함께 산산 조각난 산문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크아악!”
청성의 산세에 거친 비명이 메아리친다.
사천맹에서 지원을 왔던 무인들도, 청성파의 무인들도 소문을 따라 아미로 이동한 상태.
고작 오륙백에 불과한 제자로 수천이 넘는 혈교도를 막는 건 역부족이었다.
솟구치는 비명에 타오르는 전각, 제자들의 피로 가득한 상청전(相天殿) 앞마당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자, 장문인! 피하셔야 합니다!”
고중선은 피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장문인이 사문을 두고 어디로 피한다는 말이냐!”
우르르 몰려온 일대제자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외부에는 아직 본파의 제자들이 많습니다. 후일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장문인께서 쓰러지시면 청성은 그야말로 끝입니다!”
적도를 바라보는 고중선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그럴 수 없다!”
그때 상청전의 마당으로 붉은 장포를 걸친 무천극이 나타났다.
전신에서 발산하는 절대자의 기도는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오싹하다.
무료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무천극이 고중선을 발견했다.
“그대가 청성의 장문인인가?”
고중선의 전신에서 청명한 기운이 솟구치더니 도복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놈!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를 벌레 보듯 깔아보던 무천극은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
“곧 죽을 늙은이가 목청 하난 기가 막히는구나.”
“갈!”
분기탱천한 고중선은 지면을 박차고 전방으로 치달았다.
고중선의 주름진 손이 검파를 잡아가는 순간이었다.
꺼지듯 사라진 무천극이 우측에서 나타나더니 전방을 향해 폭사했다.
좌측으로 돌아간 고중선의 부릅뜬 눈에, 제자들에게 쏘아지는 무천극의 등이 보인다.
“이놈! 도망치는 것이냐?”
팟!
지면을 강하게 찍은 고중선이 방향을 틀어 무천극의 후방으로 맹렬하게 치달았다.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낮춘다.
그 순간 전방으로 내뻗은 무천극의 좌수에서 검붉은 장력이 폭발하듯 쏘아졌다.
파앙!
강렬한 파공성을 남긴 장력이 운집한 제자들에게 쏘아졌다.
눈을 부릅뜬 대제자 정다견이 버럭 소리쳤다.
“방검(防劍)!”
다섯 명의 제자들이 일제히 전방을 향해 일제히 검극을 내지른다.
슈우욱!
검붉은 혈천장과 다섯 자루 검극이 맞닿는 순간.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조각난 검신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쿨럭!”
피를 토하며 휘청거리는 제자들에게 무천극의 혈무검(血霧劍)이 육중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멈춰라!”
어느새 지척까지 접근한 고중선의 검신이 혈무검을 막아간다.
곁을 힐끔 쳐다본 무천극이 조소를 흘렸다.
“아둔하다.”
제자들을 공격한 것은 미끼.
혈천장에 힘을 뺀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무천극의 발끝이 지면을 강하게 찍는다.
그러자 제자를 지켜가던 고중선의 검신이 허공을 갈랐고, 방향을 튼 혈무검이 그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함정!’
알아차렸지만 너무 늦었다.
서걱!
고중선은 다급하게 내력을 복부로 집중시켰으나 치명상을 면할 수는 없었다.
“쿨럭!”
시뻘건 피가 왈칵 쏟아진다.
무천극의 입가에 살기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잘 가시게. 아둔한 영감.”
혈무검 밑으로 내지른 태산 같은 일장이 고중선의 전신으로 쏟아진다.
대제자 정다견이 피를 토하며 처절하게 외친다.
“스승님!”
고중선의 두 눈에 짙은 회한이 번졌다.
‘아아. 청성은…….’
쿠아아앙!
경천동지할 폭음이 청성산의 하늘로 용솟음친다.
아미의 참사로부터 고작 하루 반나절이 지난 날.
사천 무림을 지탱하던 네 개의 기둥 중 하나인 청성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