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29)
◈ 129화. 소문
황혼이 내린 광활한 고원이 점점 붉게 물들어간다.
구릉 위로 솟구치는 괴로운 비명과 날카로운 쇳소리, 능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과 자욱한 혈향의 조화가 붉은 저녁노을과 황홀하게 어우러진다.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 노을을 등진 사내의 손에 마지막 남은 혈의인의 목이 잡힌다.
“컥!”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사내, 백면혈소 대중경의 눈이 무저갱의 어둠보다 까맣게 빛났다.
“혈야광인의 실험장.”
“나는…… 모른다.”
“그럼 아는 걸 말해봐라.”
대중경의 손을 움켜쥔 혈염대주 자사루가 피를 토하며 웃었다.
“크크큭……. 재미있군.”
“부하들이 다 죽었는데 재밌나?”
목을 쥔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컥!”
“지옥에서도 재밌게 즐겨봐라.”
투툭.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목이 부러진 자사루의 몸이 축 늘어졌다.
카아악-!
머리 위로 흑조의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진다.
하늘을 둥글게 선회하는 영물의 눈에, 석양에 녹아내리는 광활한 대지와 붉게 물든 전장이 한눈에 담긴다.
구릉을 중심으로 사방에 널브러진 오백여 구의 시신.
정상에 서 있는 백여 명의 혈귀들은 세 명의 승려를 호위하듯 둘러싼 채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대체…….’
판천라마를 보필하는 환혼사자 완사계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서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따라붙은 은밀한 눈은 이곳 탕거평(湯巨平)에 도착할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알면서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한 명을 죽이면 두 명째가 따라붙었고 그놈을 죽이면 또 다른 눈이 따라붙었으니까.
이곳에서 적과 마주쳤을 때만 해도 틀렸다고 생각했었다.
상대는 혈교의 부대 중 네 번째로 고강한 혈염대.
대주인 금혈진검(禽血震劍) 자사루는 자신조차 쉽게 볼 수 없는 고수.
다섯 구의 혈야광인과 스무 구의 무혼광인까지 동반한 적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경과 상천의 힘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조장급 무인들은 물론이고 직위 없는 말단 무인조차 어지간한 중소방파 대주 이상의 무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끝날 때까지 고작 한 시진.
상대를 궤멸시키는 동안 대중경의 부하들은 고작 열 명의 사상자밖에 내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해진 완사계의 귀로 무령사자 손야탁의 전음이 꽂힌다.
[상천의 힘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상천의 인식은 이들도 들어 알고 있었다.
산적과 무인의 경계에 위치한 집단.
분쟁을 싫어하며 대화를 우선시하고 무력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자들.
손야탁은 입을 다문 완사계에게 재차 말했다.
막을 방도가 없다.
완사계는 고개를 저었다.
[이들에게 그런 욕심이 있었다면 황량한 서장보다 중원을 먼저 접수했을 것이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판천라마의 침묵 속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대중경은 죽어가는 부하의 앞에 앉아 있었다.
“많이 아프냐?”
“감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약관을 갓 지난 앳된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드리운다.
“아무래도 살아서 돌아가긴 틀린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구나.”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우린 천주님의 뜻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되겠지요.”
사천 무림을 도와 혈교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더 많은 이들이 상천을 인정하게 될 터.
진정한 무림의 구성원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상천의 이상에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대중경은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리될 거다. 우리의 형제와 가족들이 마음 놓고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청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죽음이 상천의 이상에 밑거름이 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천주님께 안부 전해주십쇼.”
대중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괴로운 침묵 속에 만개하지 못한 꽃이 사그라든다.
둥글게 둘러싼 무인들 너머에서 판천라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보아라.”
좌우로 갈라진 무인들 사이로 걸어온 판천라마는 품에서 목탁을 꺼냈다.
‘마음 놓고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날이라.’
이들에게도 자신처럼 꿈과 이상이 있다.
그는 자신을 돕고자 서장까지 와서 꺼져버린 불꽃에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탁…… 탁…….
경건한 목탁 소리와 함께 불경을 암송하는 판천라마의 목소리가 나직이 퍼져 나간다.
* * *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큭.”
정신을 차린 당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전신을 갉아먹는 듯한 통증이 물밀듯 밀려온 까닭이다.
‘내가 만월천비를…….’
실전에선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던, 수련할 때조차 성공한 적이 없던 초식이다.
한계 이상의 힘까지 끌어쓰며 초식을 성공시킨 여파가 뒤늦게 찾아온 것이다.
곧이어 벌컥 열린 창문으로 진설란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대주?”
“여기는…… 어디지?”
물론 달리는 마차 안이라는 것은 안다.
진설란은 당천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었다.
“중경으로 가고 있어요.”
“그렇다면 역시 맹은…….”
차마 끝맺지 못한 혼잣말은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몰락을 목도했으니 딱히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순간 그의 뇌리에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당천의 상체가 튕기듯 솟구쳤다.
“당가는 어떻게 됐지? 아버지는?”
“물론 피해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가주께서는 무인들과 함께 이곳에 계세요.”
“아아.”
안도와 함께 잠시 잊었던 육신의 통증이 되살아난다.
“진공자가 위기에 빠진 당가를 구했어요. 그가 아니었다면 당가도, 퇴각하는 무인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가.”
이젠 놀랍지도 않다.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을 몇 번이나 해낸 녀석이니까.
천천히 몸을 누인 당천이 나직이 말했다.
“빚을 졌구나.”
진설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답했다.
“우리 모두가요.”
노을 진 저녁 무렵,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작은 마을을 지나치더니 작은 숲 앞에서 멈춰섰다.
적모개와 동초개는 마도림 성도지부의 무인들과 함께 지친 말을 마차에서 분리했다.
마부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얼 하십니까?”
적모개가 고삐를 잡으며 대꾸했다.
“조금 전 지나친 마을에 쌩쌩한 말을 준비해뒀소. 말을 교체할 것이오.”
이곳에 오기 전부터 퇴각로를 계산한 적모개는 여러 마을에 튼튼한 말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허!”
마부들의 입에서 탄성인지 한탄인지 모를 소리가 튀어나온다.
말을 교체한다는 것은 제대로 쉴 시간도 없이 또 달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노을을 등진 백여 필의 말이 안장에 거지와 식량을 싣고 달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사결제자 초복개가 말을 세우며 훌쩍 뛰어내렸다.
“분타주.”
“고생했다.”
무인들이 바쁘게 식량을 내리고 말을 교체하는 가운데 적모개는 초복개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건은 어떻게 됐느냐?”
초복개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적모개의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만났단 말이냐?”
“예. 생각보다 돈이 엄청 많이 들긴 했지만 성공했습니다.”
“얼마나?”
“은자 천만 개를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알겠다고 했지요. 내 돈 나갈 것도 아닌데.”
주변을 두리번거린 적모개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잘했다. 잘했어.”
구수한 냄새가 숲속에 퍼지며 지친 무인들의 허기를 자극한다.
사천맹의 혈투로부터 이틀.
지난 전투의 여파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던 그들은 간신히 기운을 차린 참이었다.
허겁지겁 식사를 마친 무인들은 조용히 심법을 운용하며 텅 빈 단전을 채워갔다.
밤이 깊은 시각, 무인들이 하나둘 자리를 찾아 누울 무렵이었다.
공터에 둘러앉은 당조와 자소, 구양무는 나직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설마 혈마가 당가로 올 것을 예측하고 있었단 말인가?”
당가를 떠나 사천맹까지 직진했다면 분명 정예를 이끌고 온 무천극과 마주쳤을 것이다.
당조는 지금에서야 성도를 지나 멀찍이 돌아오라고 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구양무가 답했다.
“예측한 게 아니라 끌어들인 거라고 봅니다.”
“끌어들였다?”
주변에 누운 무인들의 귀가 쫑긋거리는 가운데 자소가 당조에게 물었다.
“생각해보시게. 자네가 혈마라면, 지금의 사천에서 가장 위험한 무인을 누구로 꼽겠는가?”
대답은 구양무의 입에서 나왔다.
“광룡은 서장에서 적사곡을 불태우고 적의 추격대를 전멸시키며 우리 천무대를 구했습니다. 더불어 아미산에서는 적의 소교주를 죽이고 당가까지 구해냈지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지금까지 혈교가 입은 손실은 전부 그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자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행방이 혈마의 귀에 들어가면 당가로 올 것이라 확신했던 게야.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짜낸 계책인 게지.”
“만일 혈마와 당가에 나타났던 정예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저승에 있을 겁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감탄만 나온다.
당조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정말 그는…….”
놀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자리에 누워 귀를 쫑긋거리던 무인들의 입도 슬며시 벌어졌다.
그간의 일을 대강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듣고 보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전공이었기 때문이다.
짧은 휴식이 끝나자 일행은 잠시 멈췄던 행보를 재개했다.
수장들이 이야기했던 진무립의 행보는 빠르게 무인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희망 섞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그들에게 진무립의 이야기만큼 좋은 소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혈마가 갑자기 사라진 게 진공자의 유인책이었다고?”
“그렇다는군.”
“적이 당가에 들이친 것도 당가의 무인들을 꾀어낸 다음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렇지. 당가의 지원대가 함정에 빠지는 것을 막은 진공자가 광룡대와 함께 매복한 무인들을 궤멸시키고 당가까지 구했다는 거야.”
“그 뒤에 우리까지…….”
진무립의 활약상이 알려지자 암울한 분위기가 조금씩 걷혀가며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전을 선명하게 스쳐 갔다.
“광룡(狂龍)은 우리에게 광룡(光龍)이 되었군.”
“그래. 그와 함께라면 반드시 혈교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야.”
그 말은 자신들의 간절한 바람을 섞은 것이기도 했다.
사문의 비보와 사천맹의 몰락.
한순간에 돌아갈 곳을 잃고 지독한 상실감에 빠진 이들에겐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으리란 희망이 필요했다.
광룡 진무립은 무명의 의미처럼 점차 이들의 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달리는 마차를 호위하던 단려화의 귀에 술렁이는 무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광룡(狂龍)은 광룡(光龍)이 되었는데 나는?’
천하에서 천중일화(天中一華)로 불리는 자신이 이곳에선 그냥 미친년이다.
심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복면 위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그녀의 눈이 문득 동초개와 마주쳤다.
움찔한 동초개가 고개를 돌린다.
‘내가 뭐 잘못했나?’
출발 직전, 몰래 품에 숨긴 육포가 왠지 마음에 걸린다.
슬며시 옷깃을 여미는 동초개의 귀로 단려화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이리 와봐요.]목소리에서 냉기가 풀풀 풍긴다.
동초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울상을 지으며 마지못해 달려갔다.
“조금 나눠줄 테니 모른 척해주세요.”
“무엇을?”
영문모를 얼굴로 되묻는 단려화의 눈앞에 손가락 두 마디만큼 떼어낸 육포가 나타났다.
그녀는 가자미눈을 뜨고 동초개를 쳐다봤다.
“이건 언제 또 숨겼대.”
“이게 아닌가.”
슬며시 눈치를 본 동초개는 짐짓 태연하게 육포를 감췄다.
“그럼 뭡니까?”
“……해줘야 할 일이 있어요.”
그녀가 품에서 은자 하나를 꺼내자 동초개의 눈이 반짝거렸다.
“뭔데요?”
주변을 두리번거린 단려화는 극비사항을 누설하는 사람처럼 전음을 보냈다.
[이번에 나도 열심히 싸웠단 말이에요. 그런데 누군 광룡(光龍) 소릴 듣는데 나는 여전히 미친년이라는 게 말이 돼요?] [그,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나도 앞 글자를 빛 광으로 바꿔서 소문내줘요. 성공하면 은자 두 개 더 줄게요.]잠시 고민하던 동초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분명 다른데 왜 그게 그거 같지.’
광룡의 앞 글자가 달라지는 건 체감이 확 달라지는데 광녀는 앞 글자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공돈이 생기는 일을 마다할 필요는 없다.
되묻는 그녀의 손에서 은자가 샥 하고 사라진다.
[명을 받듭니다요.]소문을 내는 것만큼은 자신 있는 일이다.
슬금슬금 속도를 늦춘 동초개가 무인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번 일에 진공자의 곁을 따르는 유소저의 활약도 엄청나다고 들었는데요.”
“우리도 들었소이다. 아미와 당가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고 하더군.”
“혈야광인의 목까지 베었다고 들었다오.”
고개를 끄덕인 동초개가 단려화를 슬쩍 살피더니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뒤를 힐끔 쳐다본 단려화는 흡족한 얼굴로 신법에 전념했다.
이날 광녀(狂女)는 광녀(光女)가 되었고.
그녀는 소문이 완전히 퍼진 뒤에야 비로소 무엇이 잘못됐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