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69)
◈ 169화. 상천의 대계
전투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태산표국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좀처럼 가실 줄을 몰랐다.
표사들이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는 가운데 대전에 국주와 대표두들이 집결했다.
시종일관 무섭게 인상을 쓴 청금환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누가 보고 갔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느냐?”
좌황이 답했다.
“예. 그늘진 곳에서 일부는 복면까지 쓰고 있던 터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수시로 비도가 날아다니는 탓에 느긋하게 한곳을 지켜볼 여력도 없었을 것이다.
청금환조차 시평의 봉술에 휘말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을 정도였다.
그 모든 것이 놈들의 계략이라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주먹을 부르르 떤 청금환은 가까스로 치미는 살기를 억눌렀다.
마음 같아선 모조리 살인멸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표국의 문을 닫을 생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제남 인근의 상단과 방파에 감시를 붙여라. 소문이 새어 나오는 곳이 있다면 그곳을 정리한 뒤 상천의 소행으로 위장한다.”
흑면수 구표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라리 동진상단에 머무는 무면산왕부터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놈이 정면으로 싸운다면 모를까 그대로 도망친다면 잡을 수 있겠느냐?”
그의 무위를 똑똑히 지켜본 대표두들은 차마 답을 할 수 없었다.
“상천과 오대표국은 앙숙이다. 세상이 우리가 낸 소문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놈들이 우릴 음해하는 말도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소문을 원천봉쇄하는 게 우선이다.”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총단을 나선 백표대가 은밀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스름한 어둠 속, 호흡마저 감춘 채 지켜보던 은무대원은 조용히 그 뒤를 추격했다.
‘정복이 아니라 변복까지 한 것을 보면 감시인가.’
둘이 한 조가 되어 감시하던 은무대는 즉시 상단에 소식을 전달했다.
* * *
새벽 공기와 함께 정적이 스며든 방 안.
은은하게 진동하던 공기가 천천히 중심으로 이동하더니 번뜩이는 두 개의 불빛 속으로 빨려들었다.
“후우.”
내력을 갈무리한 백하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족하다.’
시평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권성의 무공을 사용하는 청금환은 천하십대고수에 버금가는 고수.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건만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서진환이 조금 더 늦게 개입했다면 분명 어디 한 곳은 부러졌을 것이다.
분한 마음을 곱씹은 백하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을 거다.’
비참한 이 기분을 다시 느낄 바에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온 백하진의 눈앞에 불안한 듯 사방을 살피는 한천유가 있었다.
“뭘 하는 것이냐?”
움찔한 한천유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때 서진환이 나타났다.
“회의다. 너희도 참석하라는 명이시다.”
아직 정식으로 직책을 맡은 것은 아니었으나 두 사람은 은곡에서 함께 나온 녹사대를 이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즉시 포권을 취했다.
“예.”
진무립의 처소에 일행의 수뇌들이 집결했다.
서진환이 진무립의 뒤에 시립한 가운데 시평과 단려화, 백하진과 한천유가 차례로 착석했다.
한천유와 눈이 마주친 단려화가 싱긋 웃었다.
“한소협. 푹 잤어요?”
움찔한 한천유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여자는 선녀의 탈을 쓴 악귀야.’
그는 절대 드러낼 수 없는 속내를 감추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진무립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시평.”
“예. 주군.”
“양산채 무인들은 어디에 있지?”
“제남성 동남쪽 야산에 은신처를 마련했습니다. 부르면 이각 안에 도착할 겁니다.”
“그들을 열 명씩 열 개 조로 나눠 어제 전투를 지켜보고 간 상단과 방파 인근에 숨겨라. 은무대가 소식을 전해줄 거다.”
“알겠습니다.”
한천유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천주님께서 계신 이곳을 공격하는 게 아닙니까?”
“오더라도 이곳은 가장 마지막이 될 거다. 지금 놈에게 중요한 것은 소문이 퍼지는 걸 막는 것이다.”
수문장표 염자공과 위사들이 죽은 이상 정보가 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진무립은 조금 전 표국을 감시하던 은무대에게 백표대가 제남의 상단과 방파를 주시한다는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
광범위하게 감시를 시작했다는 건 정확히 누가 다녀갔는지 모른다는 반증이었다.
“소문이 새나가는 곳이 있다면 백표대가 움직일 거다. 그걸 막아야 한다.”
“그냥 태산표국을 먼저 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양산채가 합류한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것 같은데요.”
백하진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그럴 것이었으면 어제 국주를 죽이셨을 거다.”
“아, 그랬지.”
그제야 지난밤의 계획을 떠올린 한천유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진무립이 말했다.
“절대 먼저 태산표국을 쳐서는 안 된다. 인근 상단과 방파를 지키며 버티고 버티는 것이 이번 계획의 핵심이다.”
이번 계획에는 한 가지가 아닌 복합적인 의도가 섞여 있었다.
그중 핵심을 눈치챈 시평이 무릎을 쳤다.
“주군. 설마 때가 온 겁니까?”
진무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단려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때요?”
시평이 답했다.
“상단과 방파를 감시한다는 것은 소문이 샐 경우 그곳을 지워버리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겠죠.”
“우리가 그것을 완벽하게, 지속적으로 막아준다면 머지않아 우리는 선(善)이 될 것이고 표국은 악(惡)이 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해지는 것이지요.”
시평은 진무립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상천이 사람들의 인식에 완전한 선으로 자리 잡았을 때, 우리 스스로 출신을 밝힌다면 세상에 우리를 손가락질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아!”
탄성을 터트린 한천유도, 언제나 냉소적이던 백하진에 서진환의 입까지 쩍 벌어졌다.
진무립이 설명을 덧붙였다.
“표국이 아무리 감시를 해도 우리가 저들을 지키는 이상 언젠가 소문은 퍼진다. 은곡 출신의 표국이 정체를 감추고자 무고한 자들을 공격한다. 반면 상천은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렇다면 세상은 은곡이 다 같은 은곡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단려화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의 꿈이 이뤄지는 것이로군요!”
진무립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존재를 인정받는 것에서 그쳐선 안 돼. 확실한 무림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아야 우리의 꿈이 이뤄지는 거야.”
진무립은 안심하기 이르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시평과 서진환의 생각은 달랐다.
당당한 무림의 구성원이 되어 세상을 활보하겠다는 원대한 꿈.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 죽음의 위기를 버텨내며 살아온 그들에겐 무엇보다 바라던 꿈이다.
진무립은 언제나 자신들과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 앞에 멈춰섰다.
“주군. 흑조가 도착했습니다.”
“가져와라.”
문을 열고 들어온 은무대원이 흑조가 가져온 서신을 전하고 나갔다.
단려화가 물었다.
“어디에서 온 건가요?”
“개봉이다.”
진무립은 서신을 활짝 펼쳤다.
「명월(明月) 초하루. 중원무림맹에서 의화전이 열릴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나 혼자 막기에는 역부족일 것 같은데. 행여 결과가 나쁘더라도 개인적으로 정보를 전할 테니 너무 걱정은 마십쇼.」
구불구불한 필체는 적모개의 것이었으며, 명월 초하루는 바로 내일이었다.
* * *
중원무림맹의 거대한 대전에 중원 각지의 수장들이 집결했다.
위사영이 맹주로 취임하기 직전까지, 맹의 방향과 계획을 논의하던 의화전이 다시 열린 것이다.
“갑자기 의화전이라니…….”
“듣자 하니 오대표국이 손을 내밀어 왔다더군. 흑전원의 인정을 받은 상천에게 함께 대응하자고 하는 모양일세.”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네만 오대표국을 믿을 수 있겠소?”
“그렇지. 현실적으로 우리와 이권이 겹치는 것은 오대표국일진데.”
“그러나 오대표국과는 싸울 명분이 없어요.”
“이제 막 과거의 정기를 회복한 중원이 굳이 그들과 싸울 필요도 없소.”
나직한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제법 큰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흠!”
마치 군부의 대장군을 연상케 하는 듬직한 풍채의 중년인은 중검문(中劍門)의 수장 명가홍이었다.
“그건 모르는 소리요.”
중검문은 천하대전 이후 독보적인 성장을 보인 곳으로 중원삼가의 위상을 턱밑까지 추격하는 중견방파였다.
특히나 광한검(光悍劍) 명가홍은 무림 칠군에 속할 만큼 고강한 무인으로 유명했다.
누군가 물었다.
“모르는 소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무릇 하나를 얻으면 두 개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외다. 흑전원주의 인정을 받은 그들이 언제까지나 통행세에 만족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소이까?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오. 여기선 표국의 손을 잡아야 하오.”
그에 동조하는 수장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쪽에 앉아있던 적모개는 습관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역시 쉽지 않겠구나.’
중검문은 급격히 성장하는 신흥 방파의 수장 격인 방파다.
중원삼가조차도 그들의 주장을 쉽게 묵인할 수는 없을 터.
그의 짐작대로 한쪽에 앉은 세 명의 수장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자칫 다른 의견을 냈다간 사대거파와 중소방파로 갈라진 사천맹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은무대원이 오기 전까지 누군가 몇 번이나 세 사람의 처소를 다녀갔다. 분명 내부에 금성표국과 손을 잡은 자가 있는 게 분명해.’
유대하와 육군명, 그리고 용추는 아직 의방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외부인이 의방까지 들어오는 게 쉽지 않은 이상 내부에 적이 있을 경우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토론이 활발히 오가고 있을 때, 대전의 문이 열리며 위사영과 젊은 청년이 들어섰다.
“맹주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가 기립해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예를 받으며 뚜벅뚜벅 걸어간 위사영이 중앙의 단상 위에 올라섰다.
눈빛에서 현기가 느껴지는 청년, 비각주 제갈문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며 말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맹주님께서 직접 의화전을 요청하셨습니다. 짐작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안건은 상천을 목표로 하는 오대표국과의 동맹입니다.”
제갈문은 문서로 정리해온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그의 입이 닫히기 무섭게 사방에서 의견을 개진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중원삼가의 가주들은 조용히 전음을 나눴다.
[형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황보한의 전음이 선우진의 귓속을 파고든다.
선우진은 제갈경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제갈경을 포함한 가주들은 천하대전 이전부터 호형호제하며 지내온 오랜 친우였다.
주변의 목소리를 경청하던 제갈경이 작게 입을 열었다.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오대표국이 정말 우리와 사업을 공유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내 생각도 그렇다. 그렇다면 나서서 말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소림과 무당이 언제나처럼 침묵하는 가운데 저들을 말릴 곳은 중원삼가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갈경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걸 이용해 누가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과연 저들의 의견에 그 어떤 사심도 없는지 확인해야 합니다.]제갈경은 저들의 목소리에 모종의 힘이 작용한 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작은 의혹이라도 가볍게 넘어가선 안 된다.
끔찍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그것을 확실히 파헤쳐야 한다.
[손을 잡는다고 당장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당분간 지켜보다가 문제가 생길 시 대처하는 게 좋습니다.]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구나.]세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을 때 적모개는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내통자라.’
유대하들의 정보를 캐내고자 했던 인물은 반드시 이 안에 있다.
적극적으로 표국과 손을 잡자고 하는 놈이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
현시점에 운화결이 아니라면 유대하들의 정체가 궁금할 리 없었으니까.
적모개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주변 전체를 관찰하려 노력했다.
그런데 시선은 자꾸만 열변을 토하는 명가홍에게 닿았다.
‘저 새끼. 목소리 한번 더럽게 크네.’
세작질을 저렇게 표나게 하는 놈은 처음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