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70)
◈ 170화. 적모개와 제갈문
하루 밤낮에 걸친 의화전은 다음 날 정오에 끝이 났다.
지친 몰골로 대전을 나선 적모개는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중원삼가와 소림, 무당이 중립을 지키는 가운데 다수의 동의로 결과가 나왔다.
중원무림맹과 천하오대표국의 일시적인 동맹.
당면한 목표는 상천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흑조로 미리 전해놨으니 소공자도 예상은 하고 있겠지만 일단 소식은 전해야겠지. 서두르자.’
적모개가 의방으로 걸음을 돌릴 때였다.
[부각주. 내 집무실로 와주십시오.]귓속으로 젊은 청년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비각주 제갈문이 눈짓을 하고 있었다.
[아 바빠죽겠는데 귀찮게.] [그럼 나중에라도 좋습니다.]기겁한 적모개의 입에서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이런 시벌. 생각이…….’
적모개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고쳤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전음이 샌 모양입니다. 금방 가겠습니다.]제갈문은 빙그레 웃었고 적모개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멀찍이 선 명가홍이 사라지는 두 사람에게 묘한 눈길을 던졌다.
“고생이 많으셨소이다. 함께 한잔하러 가십시다.”
넉넉한 풍채를 가진 양척방주 목충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주변으로 뜻을 함께하는 수장들이 서 있는 것을 보니 거하게 회포를 풀려는 모양이었다.
“유문주가 해월루를 빌려두었답니다.”
명가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그 전에 잠시 들를 곳이 있으니 먼저 가서 기다리시구려.”
“너무 늦지 마시구려.”
짧게 인사를 나눈 명가홍이 어딘가로 모습을 감췄다.
중원무림맹의 전각은 사천맹과 달리 대부분 단층이거나 복층이 대다수였다.
대부분의 건물이 높이보단 너비가 길어 유사시 무인들이 곧장 창을 넘어 뛰쳐나갈 수 있는 구조였다.
비각주 제갈문의 집무실도 마찬가지였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넓은 마당이 들어오는 가운데 적모개가 도착했다.
“춥지 않습니까?”
“시원합니다. 앉으십시오.”
제갈문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본가에 가신 일은 잘 해결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갈세가의 소가주인 제갈문은 이틀 전 부친과 함께 맹으로 복귀한 참이었다.
“큰일은 아니고 그저 집안의 작은 행사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제갈문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손을 내뻗었다.
탁.
활짝 열린 창문이 순식간에 닫히며 실내에 어둠을 드리웠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중검문주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적모개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쪽에서도 굳이 숨기려 들지 않는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대놓고 나섰다는 것은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것과도 같다.
“중요한 것은 오대표국이 우리 중원무림맹을 이용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입니다. 자칫하다간 본 맹이 일선에서 오대표국의 방패가 될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제갈문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각주에 오른 인물답게 당면한 상황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적모개가 말했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이 바로 그것입지요. 이 시점에 손을 내민 것으로 보아 그런 의도가 있다 한들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비각은 화무신검이 중검문주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밀약의 증거를 찾아야 중검문과 함께하는 방파를 설득할 수 있고 불필요한 충돌을 막을 수 있습니다.”
“중검문주에게 사람을 붙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던 제갈문은 고개를 저었다.
“광한검 명가홍은 무림 칠군에 속하는 고수. 그를 감시할 만한 무인이 비각에는 없습니다. 만일 그가 감시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되려 역풍을 맞을 일입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중원무림맹은 의화전을 열어 의사를 결정할 만큼 수평적인 구조.
만일 중소방파의 지지를 받는 중검문주를 사찰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중원삼가에 대한 불신만 깊어질 것이다.
방도를 고심하던 적모개의 뇌리에 불현듯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는 바로 은무대였다.
‘게다가 중원무림맹과 관련이 없는 그들이라면 들키더라도 꼬리를 밟힐 리가 없다. 다만 그들은 소공자의 허락이 있어야 움직일 텐데.’
이번 일은 상천에게도 중요한 일인 만큼 잘 이야기하면 도움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공자는 제남에서 분명 뭔가를 벌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겐 시간이 필요할 거야. 은무대를 이용해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흔쾌히 허락해줄 거다.’
적모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방도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개방의 무인입니까?”
적모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의방에서 회복하는 지인들의 동료입니다. 본 맹이나 개방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이들이지요. 실력은 확실하니 그들에게 부탁한다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제갈문은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비각의 눈을 속이고 제 인장을 가져갈 수 있는 인물이라면 허락하겠습니다.”
그 말은 비각주의 집무실에 아무도 모르게 침투해 각주의 인장을 가져가야 한다는 말이다.
“부탁해보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제갈문은 일어나는 적모개를 잡았다.
“부각주. 한 가지 묻겠습니다.”
나직한 목소리와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다.
적모개는 일어나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씀하십시오.”
“혈천대전(血川大戰)에서 상천의 무인들과 함께하셨었지요.”
혈천대전은 중원무림맹에서 사천의 전쟁을 명명한 것이다.
‘갑자기 이걸 묻는 이유가 뭐지? 설마 그들의 정체를 눈치챈 건가?’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의혹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적모개는 내심을 감추고 말했다.
“그랬었습니다.”
“그들의 무공은 어땠습니까?”
“강합니다.”
“그걸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한때 세상에 이런 소문이 돌았었지요.”
옅은 빛이 새어드는 실내, 은은한 어둠 속에서 제갈문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상천의 모태는 은곡이며 무면산왕의 진정한 정체는 죽은 팔황문주 황운천의 아들이다.”
한순간 주변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걸 진짜 믿는 건 아닐 텐데.’
적모개가 물었다.
“그런 소문이 돌긴 했습지요.”
“부각주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천이 등장한 지 고작 삼 년 남짓.
그들은 고작 일 년 반 만에 천하 산적을 일통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다.
제갈세가에서는 그간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안팎으로 노력했으나 작은 소득조차 거두지 못했다.
명가홍의 의도와는 별개로 일단 의화전의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상천에 대해 알아두고자 하는 것이다.
적모개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들에 대해 전부 아는 것은 아니지만 혈천대전에서 그들이 은곡의 무공을 사용한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면산왕의 부친이 황운천이 아니라는 것에는 이 목을 걸 수도 있지요.”
제갈문은 마치 진위를 파악하듯 적모개의 두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거짓은 아니야. 그러나 뭔가 알고 있는 것은 분명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무면산왕의 출신에 대해 이토록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적모개는 분명 아는 게 있었다.
‘캐묻는다고 말해줄 것 같지는 않군.’
비록 오랜 시간 한직에 있었다곤 하나 그 역시 개방의 일원.
말 못 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중원무림맹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제갈문은 애써 미소 지었다.
“어찌 되었든 의화전의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상천에 대해 알아두고 싶었습니다. 부각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믿지요.”
적모개는 히죽 웃었다.
“저도 사실 그들과 처음 만났을 때는 그게 가장 궁금했습니다.”
“부각주께서는 만일 그들과 오대표국이 전쟁을 벌인다면 어느 쪽에 승산이 있으리라 보십니까?”
“저는 오랜 세월 사천에만 틀어박혀 있던지라 오대표국의 진정한 힘을 잘 모릅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적모개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불알 두 쪽을 걸어야 한다면 저는 상천에게 걸겠습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적모개는 정중히 예를 갖추고 집무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제갈문은 닫혔던 창문을 다시 열었다.
“불알 두 쪽을 건다. 가진 전부를 걸어도 좋을 만큼 확신이 있다는 것인가.”
중얼거리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맺혔다.
* * *
개봉의 북적이는 거리.
하늘거리며 내려앉는 눈송이가 지붕을 하얗게 물들여간다.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걷던 명가홍은 골목에 접어든 순간 신법을 전개했다.
쌓인 눈길에 흔적조차 거의 남기지 않는 신법은 과연 그가 어째서 무림 칠군의 일원인지 증명하는 듯했다.
빠르게 나아간 명가홍이 작은 장원의 담장을 뛰어넘었을 때였다.
치잉.
사방에서 다섯 명의 복면인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그를 에워싸고 검을 겨눴다.
“중검문주 명가홍이오.”
그의 인상착의를 살핀 복면인들이 정중히 예를 갖췄다.
“안내하겠습니다.”
복면인을 따라 모퉁이를 돌아가니 설지량이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설지량이 싱긋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엔 간격이 너무 짧군. 국주께서는 어디 계시오?”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다른 이들이 기다리고 있어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 같군. 결과부터 말씀드리리다. 의화전은 오대표국과 손을 잡기로 했소.”
그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문주께서 힘써주신 덕분이지요.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별일 아니었소. 수평적인 관계라곤 하나 천하대전에서 이리저리 휩쓸린 중원삼가가 여전히 요직을 차지한 것에 불만 있는 자들도 많았거든. 밥값을 하지 못했으면 그들 역시 소림과 무당처럼 뒷전으로 물러나야 합당하지.”
천하대전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두 방파는 여전히 일선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설지량이 물었다.
“혹시 부탁드린 것은 알아보셨습니까?”
그의 부탁은 운화결과 싸우고 의방에 누워있는 세 사람의 출신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명가홍은 고개를 저었다.
“좀처럼 대화를 나누지 않더군. 얼마 전부터는 묘한 놈들이 지켜보는 탓에 부하들이 접근하는 것도 어려워졌소. 섣불리 뒤를 캐기보다는 맹에서 나설 때를 기다리는 게 나을 것이오.”
“신경 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대체 그들이 누구길래 그토록 신경을 쓰는 거요?”
설지량은 미소 속에 속내를 감췄다.
“과거 주군과 인연이 있는 자들이 아닌가 싶어서 조금 알아보고자 합니다.”
명가홍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수긍했다.
“어쨌든 그들이 맹을 나설 때 알려드리겠소. 그보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오.”
“물론입니다. 이미 소천단(小天團) 서른 개는 드리지 않았습니까?”
소천단은 삼십 년 내공을 상승시켜주는 영단으로 이미 중검문의 정예들이 복용한 상태.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으로 저들에게 협조하는 것은 아니었다.
명가홍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남지 않았소?”
“이번 일이 잘 끝나면 그때 약속을 지켰던 것처럼 반드시 백영단화(白瑛團花)를 넘겨드리겠습니다.”
백영단화는 이백 년에 한 번씩 싹 틔우는 북해 천빙초(千氷草)의 꽃망울을 연단한 것이다.
육신의 화기를 억누르고 탁기를 제거하며 내력을 심산유곡에 흐르는 샘물보다 정순하게 만들어주는 영단.
범인이 복용한다면 단순히 내력을 맑게 만들어줄 뿐이었으나 명가홍처럼 몸에 양기가 과도한 무인에겐 구령부화초 못지않은 천고의 영단이었다.
‘그것이 있으면 내 무공은 지금의 답보상태에서 벗어나 십대고수를 뛰어넘을 수 있다. 그리되면 중원삼가든 오대표국이든 무서울 게 없지.’
야망을 내심으로 감춘 명가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리다. 국주께 안부 전해주시오.”
흩날리는 눈송이 속에 뽀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싱긋 웃어 보인 설지량은 정중히 예를 갖췄다.
“살펴 가십시오.”
* * *
개봉에서 흩날리는 눈발은 천하를 소복이 덮었다.
중원무림맹의 의화전이 마무리될 무렵.
어둠에 스며든 흑의인이 고요한 동진상단의 담장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