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71)
◈ 171화. 오로지 나만을 위해 내린 결정
밤이 내린 동진상단의 장원.
쌓인 눈에 부딪힌 달빛이 사방으로 은은한 빛을 퍼트렸다.
새하얀 눈 위에 족적을 새기며 나아간 흑의인이 고즈넉한 별채의 입구로 들어섰다.
번을 서던 녹사대원이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어디에서 오셨소?”
“곡부에 계신 총사께서 보내셨소.”
흑의인은 상천의 인장을 꺼내 보인 뒤에야 진무립의 처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천주님을 뵙습니다.”
단려화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진무립이 몸을 돌렸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모든 상단에 상천의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반응은?”
“연진상단과 강서상단은 은밀히 총사와 만나길 요청했고 금동상단은 내부에서 논의를 거듭하는 모양입니다. 그 외 작은 상단 일부는 본 천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으나 대다수는 추이를 조금 더 지켜보려는 듯합니다.”
연진상단과 강서상단, 그리고 금동상단은 동진상단과 비슷한 규모의 상단이었다.
“제령상단은 어떠하냐?”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진무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표대가 이곳에 묶여 있는 이상 본 천의 영역을 무사통과할 표행은 없을 것이다. 길을 틀어막고 계획대로 진행하도록 일러라.”
“명을 받듭니다.”
흑의인이 나가자 단려화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설마 당신이 직접 태산표국에 다녀온 것도 백표대의 발을 묶어놓기 위함이었나요?”
그녀에게 웃어 보이던 진무립이 고개를 흔들었다.
‘요즘 너무 웃어.’
과거의 자신에 비하면 부쩍 미소가 잦아진 것이 사실이었다.
그는 슬며시 미소를 감추며 말했다.
“내가 아니었어도 백표대는 움직이지 못했을 거다. 시평뿐만 아니라 천유와 하진 역시 충분히 경계할 만한 실력을 보여줬으니까.”
단려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낮에 잠시 오성방 근처에 다녀왔는데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더라구요. 백표대의 감시를 눈치챈 것 같아요.”
“눈치채지 못했더라도 쉽게 움직일 수 없을 거다. 태산표국의 전투를 보고 돌아갔으니 말이야. 제남에서 뭔가 벌어질 거라는 건 다들 감지하고 있겠지.”
“이대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단려화는 묘한 괴리감을 느끼며 말끝을 흐렸다.
“분명 좋은 일인데 좋지 않은 일이네.”
상단과 방파들의 입장에선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게 좋은 일이다.
그러나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상천의 입장에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곤란하다.
“갑자기 우리가 왜 악당이 된 것 같죠. 악당은 분명 태산표국이어야 하는데.”
진무립은 실소를 흘렸다.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무림에 절대 선과 절대 악은 없다. 이곳에선 내 편을 들어주면 선이 되는 것이고 반대가 악이 되는 것이지.”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부친 또한 싸울 상대를 택할 때 선악이 아닌 적과 아군으로 구분했으니까.
한결 마음이 놓인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무립.”
비워진 잔에 뜨거운 차가 다시금 채워진다.
잔을 든 진무립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래.”
입술을 달싹인 그녀는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째서 날 이용하지 않지요?”
입을 다문 진무립은 그녀의 말에 담긴 속뜻을 파악하려 애썼다.
무엇이든 어렵지 않게 익히고 배우던 천음지체의 공능도 왠지 그녀와의 이야기엔 통하지 않는 것만 같다.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도 충분히 이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천에서부터 이곳까지, 그녀에게 믿고 일을 맡겼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것 말고요.”
고개 저은 단려화는 복잡한 눈빛으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당신과 상천이 바라는 이상. 만일 당신이 부탁했다면 나는 아버지께 말씀드려 상천을 무림의 구성원으로 인정해달라고 했을 거예요.”
찻잔의 다향이 일렁이는 촛불처럼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방 안.
진무립은 불빛에 붉어진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웃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당신은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나를 이용했다면 더 빠른 길로 갈 수도 있었을 거예요.”
만일 신룡과 화령이 상천을 인정한다면 지금보다 수월하게 무림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았을지 모른다.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니야.”
진무립이 고개를 젓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왜죠?”
“내 목적을 위해 그대를 이용한다면 다신 당신을 볼 수 없을 테니까.”
“…….”
어색한 정적 속, 촛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붉어져 간다.
식어가는 차를 단숨에 들이켠 진무립은 문을 열고 나직이 말했다.
“이건 상천을 위한 것이 아닌, 내가 처음으로 오로지 나만을 위해 내린 결정이다.”
마지막 말을 남긴 진무립이 닫히는 문 너머로 사라져간다.
이윽고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며 문이 닫혔을 때, 그녀는 비로소 힘차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아아.”
그는 자신의 뛰는 가슴 속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더불어 그의 가슴에도 자신이 스며들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확신했다.
* * *
파직.
달빛 내린 순백의 연무장에, 그보다 더욱 새하얀 손날이 흩날리는 눈송이를 바스러뜨린다.
절묘하게 완급을 조절하는 보법, 새겨지는 족적이 늘어가며 연무장 전역의 눈을 휩쓸어갔다.
백하진의 눈빛이 겨울처럼 차게 빛나는 순간.
쉬익- 파앙!
내지르던 손날이 장으로 변하며 파공성을 터트렸다.
‘더욱 날카로워져야 한다.’
온 힘을 다했음에도 놈의 뱃가죽조차 뚫지 못했다.
내공은 하루아침에 상승하는 게 아니다.
그날의 악몽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초식을 더욱 날카롭게 갈고닦아야 한다.
질끈 깨문 입술에서 떨어지는 시뻘건 핏방울이 움직이는 자리마다 방울져 흘러내렸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담장 아래.
“지켜보다가 주화입마 걸리겠네.”
소복이 눈을 덮어쓴 한천유가 그답지 않게 인상을 찡그렸다.
“야.”
“방해하지 마라.”
“너 설마 무림 초출 주제에 진심으로 청금환에게 이길 생각이었냐?”
그 말에 백하진의 발이 우뚝 멈춰섰다.
“질 것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하는 무인도 있나?”
“네 눈으로 봤잖아.”
“뭐라고?”
“양산채주께선 이길 생각으로 그날의 전투에 임하셨나?”
“…….”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백하진은 할 말을 잃었다.
한천유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건방 떨지 마. 너나 나나 곡에서나 최고였지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 줄 알아?”
지옥 같은 은곡의 수련 속에서 두 사람은 언제나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쟁해왔다.
지금과 같이 기적 같은 성장에는 서로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한천유에게서 시선을 거둔 백하진은 아련한 눈동자를 하늘로 돌렸다.
“나는 지는 게 싫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기억 속 피처럼 붉게 물들어간다.
두 사람은 본래 산적이 아니었다.
화전민촌에서 태어난 이들이 열 살이 되던 때였다.
마을에 들이닥친 산적들은 이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부모를 잃고 산채에 납치된 두 사람은 노예처럼 일하며 곁눈질로 무공을 훔쳐 배웠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렀을 때.
두 사람은 복수하고자 채주를 암습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로잡혔다.
상천이 나타난 것은 포박된 두 사람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무인들을 이끌고 온 거련채주 연길상은 압도적인 무용으로 저항하는 자를 모조리 처단했다.
그날 산채는 상천의 손에 떨어졌고 연길상의 엄청난 신위를 목격한 두 사람은 자처해서 은곡에 들어간 것이다.
마치 생각을 공유하듯 과거를 회상한 한천유는 슬픈 눈으로 읊조렸다.
“그때와는 달라. 우리가 패한다고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야. 우리의 뒤에는 천주님이 계시니까.”
“그래도 나는 지고 싶지 않다.”
“역시 너랑 나는 안 맞아.”
“…….”
* * *
눈 덮인 고즈넉한 장원의 밤이 점점 깊어져 간다.
불 꺼진 내원의 심처.
먹 냄새 가득한 집무실에 다섯 사내가 모여 앉았다.
무거운 정적 속, 머리에 서리가 내려앉은 노인이 탄식을 내뱉었다.
“허. 난제로다.”
“방주님. 태산표국이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은곡의 무공을 익힌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서풍방주 심이관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분명 도영과 함께 지켜본 이들이 있었다고 했었지. 그들은 어찌하고 있다던가?”
외당주 정봉이 무겁게 대답했다.
“어둠 속이라 누가 있었는지 자세히 보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금동상단의 무인만 알아보았다기에 낮에 다녀왔으나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머리가 복잡하겠지. 복잡할 게야.”
심이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입단속은 단단히 했겠지?”
“그건 염려치 마십시오.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안에 있는 사람이 전부입니다.”
정봉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천장에서 시꺼먼 인영이 뚝 떨어지더니 매섭게 검초를 흩뿌렸다.
“앗!”
부릅뜬 심이관의 노안에 짓쳐 드는 검극이 빨려들 듯 확장된다.
쌔액!
반응할 여유조차 없는 쾌검이 죽음의 그늘을 드리우는 순간.
콰직!
창문을 박살 낸 검신이 순식간에 날아들어 상대의 검신을 튕겨 냈다.
카앙!
예고 없는 난입에 흑의인이 뒤로 밀려나는 순간, 허공에서 또 한 명이 뛰어내렸다.
“방주 일가를 제거해라.”
쇠를 긁는 듯 섬뜩한 목소리와 동시에 흑의인의 검이 서진환을 향해 쏘아졌다.
‘적어도 조장 이상은 되겠군.’
검극에 담긴 기세가 상천의 일반 무인들을 상회한다.
짓쳐 드는 흑의인의 검광이 다섯 가닥으로 갈라졌다.
물러나지 않고 돌진한 서진환의 검신이 반원을 그려갔다.
카카카카캉!
검하직천공으로 받아친 서진환은 심이관을 공격하는 흑의인에게 암기를 발출했다.
쐐애액!
“칫.”
심이관의 목을 찔러가던 흑의인은 낭패한 눈빛으로 암기를 쳐냈다.
카앙!
귓전을 울리는 날카로운 쇳소리에 서풍방 수뇌들이 정신을 차렸다.
“쳐라!”
심이관을 필두로 네 명의 무인이 일제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서진환은 즉시 심이관에게 전음을 보냈다.
[수비에 치중하시오!]저들 다섯이 뭉치더라도 백표대원 하나를 감당하기 어렵다.
은곡의 무공을 익힌 자와 중소방파 무인의 차이는 그만큼이나 컸다.
노도와 같이 흐르는 내력이 서진환의 검극을 통해 쏟아져 나온다.
슈슈슈슉!
상하좌우 가릴 것 없이 쏟아지는 장대비 같은 공격에 흑의인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네놈은 누구냐!”
서풍방에 이와 같은 무인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상대를 거칠게 몰아붙이던 서진환이 차갑게 말했다.
“저승에 가서 황운천에게 물어봐라.”
서걱!
번뜩이는 검광이 허공에 시뻘건 혈선을 그어냈다.
서진환은 즉시 서풍방 수뇌들이 싸우는 흑의인에게 몸을 날렸다.
“물러나시오.”
탈출로가 막힌 흑의인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네놈, 설마 태산표국이냐?”
서진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상천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술수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고작 그 정도에 속겠는가. 백표대의 잡졸.”
서진환의 소매가 흔들리더니 촛불이 훅 꺼졌다.
방에 깃든 어둠 속, 차갑게 눈을 빛낸 서진환의 검이 상대의 사각에서 치솟았다.
카앙!
가까스로 일검을 튕겨 낸 상대가 반동을 이용해 창밖으로 몸을 날릴 때였다.
창문 밑에서 잿빛 검광이 솟구치더니 흑의인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서걱!
섬뜩한 소음과 함께 시뻘건 피가 역류하는 폭포수처럼 치솟는다.
순식간에 전투가 종료되자 서풍방 무인들은 요동치는 가슴을 억눌렀다.
고개를 흔들어 현실을 직시한 심이관이 서진환에게 정중히 예를 갖췄다.
“고맙소. 대협께서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린 쥐도 새도 모르게 당했을 것이오.”
서진환은 담담하게 포권을 취했다.
“할 일을 했을 뿐이오.”
외당주 정봉이 다급하게 물었다.
“바, 방주님. 습격이 있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심이관은 미안한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협께서 낮에 은밀히 찾아와 백표대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려주셨네. 밤에 자네들을 소집한 것은 등 뒤의 비수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지.”
“허!”
서진환이 경악한 그들에게 말했다.
“태산표국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요. 이제 시작일 뿐이니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