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95)
◈ 195화. 군자는 세 번을 권한다
“음혼귀영공이라고?”
난공불락의 요새 화령도.
음혼귀영공은 그곳을 유일하게 침입했던 살성 음조성의 무공이다.
고개를 끄덕인 설지량이 금성우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답했다.
“대들보에 숨어 문주와 제 대화를 엿듣더군요. 만일 같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저도 눈치채기 어려웠을 겁니다.”
적에게서 혼백마저 감출 수 있다는 음혼귀영공이다.
같은 무공으로 상대보다 더욱 높은 경지를 이룬 설지량이었기에 특유의 공기를 감지할 수 있던 것이다.
“음. 그놈들의 동료인가.”
관제묘에서 팔성의 무공으로 자신과 싸웠던 세 명의 사내.
지금 중원무림맹의 의방에 누워있는 그들의 동료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조금 전에 저를 따라왔던 자도, 주군과 싸웠던 사내들도 상천일 가능성이 큽니다.”
상천 역시 오대표국처럼 은곡의 무공을 익혔다.
보고를 받은 운화결이 소문을 적극적으로 차단해온 탓에 아직 중원무림맹에선 모르는 사실이었다.
“의방에 머무는 놈들은 비각의 부각주와 친분이 있으니, 비각이 보낸 감시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확실합니다.”
“비각과 상천이라, 그놈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면 변수가 생길 수도 있겠어.”
“사흘입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무인들을 모아 출정하면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겠지요.”
예상치 못한 산동의 격변으로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으나 설지량은 완벽한 대책을 세웠다.
일단 개봉만 벗어난다면 인적 없는 길로 이동해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
전쟁이 시작되면 그런 소문은 아군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적의 공작으로 몰아갈 수 있다.
설지량이 말을 이어갔다.
“이틀 뒤 저녁, 홍월루의 별채에서 중검문주에게 백영단화를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운화결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다.
“감시가 붙어있는데 그런 얘길 했단 말이냐?”
설지량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감시가 붙어있으니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 * *
“이거 참 내 눈이 의심스럽군. 당신들 정말 나와 같은 사람 맞소?”
은은한 탕약 냄새가 흩어지는 의방의 별실.
적모개가 황당한 얼굴로 묻는 것은 세 사람의 상태가 두 달여 만에 완쾌되었기 때문이다.
도신을 손질하던 육군명이 히죽 웃었다.
“두 달이면 푹 쉬었지 뭘 그렇게 놀라?”
이어서 용추가 시큰둥하게 말한다.
“나를 너 같은 호인과 똑같이 보지 마라.”
“범인이겠…….”
용추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쯧쯧쯧. 무식하긴. 범과 호는 같은 말이다.”
“…….”
아닌 걸 아는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적모개의 얼굴이 구겨지자 용추가 아차 싶은 얼굴로 말했다.
“아아, 타인의 무지를 섣불리 지적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군. 미안하다.”
왠지 그 말이 더욱 재수가 없다.
‘충격을 죄다 머리로 흡수했나.’
한숨을 삼킨 적모개가 유대하에게 물었다.
“이제 어떡할 거요?”
“복호채주께서 오고 계십니다. 그분이 개봉에 도착하면 함께 떠날 겁니다.”
“복호채주라면……. 그 흑백독화(黑白毒花)를 말하는 것이오?”
흑백독화 이하빈에 대한 소문은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상천이 천하 산적을 일통할 당시, 근방에 악명을 떨치던 복호산 산적을 단신으로 쓸어버린 고수.
아름다운 외모 속에 비정한 눈빛이 있고 적에겐 절망의 어둠을 선사하며 약자에겐 백합처럼 자애로운 여인.
흑백독화는 그녀의 도움으로 풀려난 사람들이 붙여준 무명이었다.
“그렇습니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대별산에서 딱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그녀가 남긴 강렬한 인상은 쉽게 잊을 수 없었다.
이번엔 유대하가 물었다.
“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좋지 않은 겁니까?”
적모개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떠오른다.
“그렇게 되었소. 사흘 뒤 출정이라더군.”
“사흘이면…….”
이하빈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과 비슷한 시간이다.
그때 기척을 감지한 유대하들의 고개가 천장으로 향했다.
이어서 나직한 목소리가 적모개의 귀로 스며들었다.
[각주께서 부각주를 급히 찾으십니다.]“알겠소. 금방 가리다.”
자리에서 일어난 적모개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아직 사흘이 더 남았으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겠소.”
돌아서는 적모개의 어깨 너머로 유대하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분타주.”
멈칫한 적모개가 고개를 돌렸다.
“말씀하시오.”
유대하가 빙그레 웃었다.
“우린 분타주를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용추와 육군명까지 씩 웃자 적모개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요.”
그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노심초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타주께서 우릴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자책할 필요도 없고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질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우리는 분타주를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가슴에 스며든다.
적모개는 급히 시선을 거두며 돌아섰다.
“가보겠소.”
그가 나가자 육군명이 유대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언변이 제법 많이 늘었는데?”
“마도림 역사상 최연소 대주가 바로 나였다.”
육군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흘이라, 짧군. 우리도 나갈 채비를 해야겠어.”
이곳에 더 머물다간 적모개의 부담이 가중될 것이다.
“그 전에 여길 나가자.”
시선을 교환한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방을 나선 적모개의 걸음이 빨라진다.
‘친구라.’
정말 모처럼 듣는 가슴 뛰는 단어다.
역모에 가담한 스승으로 인해 사천의 한직으로 밀려난 뒤로는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의식도 못 한 사이에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친구. 이 전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보겠소.’
가슴에 결연한 각오가 새겨지며 마음이 조급해졌다.
빠른 걸음으로 비각에 들어선 적모개는 즉시 제갈문의 집무실을 찾았다.
“저를 찾으셨습니까?”
예를 갖추는 적모개의 눈에 주인환과 금성우가 담긴다.
‘설마 뭔가 찾았나?’
적모개는 저들이 전쟁을 막을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왔기를 간절히 바랐다.
예로 화답한 제갈문이 자리를 권했다.
“앉으십시오.”
“예.”
창문을 확인한 제갈문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명문주를 감시하던 두 분 대협께서 중요한 정보를 가져오셨습니다.”
적모개의 눈이 기대에 반짝거렸다.
“그게 무엇입니까?”
제갈문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빠르게 풀어놓았다.
“명문주를 찾아갔던 자가 금성표국주에게 돌아가는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이틀 뒤 저녁, 개봉 홍월루에서 양측이 뭔가를 주고받을 모양입니다.”
적모개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게 정말입니까?”
주인환과 금성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 명가홍이 운화결에게 뭔가를 받는다면, 그것을 빌미 삼아 전쟁을 미루고 동맹 과정을 재조사할 계기로 만들 수 있다.
적모개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됐다!’
자신을 친구라 불러주는 이들을 위해.
이 전쟁을 막을 결정적인 단서가 나타났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현장을 덮친다면 발뺌하지 못할 겁니다.”
“감찰은 집행원의 권한입니다.”
“중검문주의 입김이 닿은 집행원은 절대 나서지 않을 겁니다.”
“진정하십시오.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갈문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 시험을 통과한 두 분의 능력에는 한 점 의심도 없습니다. 다만, 확인하고자 합니다.”
주인환은 그가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눈치챘다.
“확답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제가 지켜보기 시작한 시점부터 대화가 끝날 때까지 별달리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부탁대로 보고 들은 것을 전했을 뿐, 판단은 각주께서 내리십시오.”
은무대의 역할은 이것으로 끝이다.
제갈문의 침묵이 길어지자 참지 못한 적모개가 결단을 촉구했다.
“출정까지 사흘이 남았습니다. 막고자 한다면 기회는 그때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갈문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드러난 정보만 놓고 보자면 확실히 전쟁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찜찜함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비각은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고 그것을 토대로 계획을 수립하는 기관.
‘정보의 진위를 가릴 여유가 없구나.’
적모개의 말처럼 뭔가를 확인하고 움직이기에 사흘은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현장을 덮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다면 월권으로 문제가 될 수 있겠으나 이대로 지나치기엔 너무도 아까운 기회다.
‘그래. 작은 것이라도 좋다. 치졸해 보여도 좋다. 은자 하나라도 건네받는다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라도 전쟁을 막아야 한다.’
선대가 피와 땀으로 이룩한 평화다.
출정이 사흘 앞까지 다가온 지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망설임을 정리한 제갈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월루를 덮칩시다.”
* * *
차분한 밤공기가 개봉의 거리에 내려앉는다.
왁자지껄한 취객들의 대화마저 고요해진 객잔.
넓은 객실의 창문을 연 유대하는 한적한 거리를 눈에 담았다.
이틀 전, 중원무림맹을 떠난 유대하 일행은 개봉의 객잔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육군명이 천장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숨어있을 거야? 이젠 다 나았다니까?”
금성우의 고저 없는 음색이 귓속을 파고든다.
“이게 우리의 임무요.”
적모개의 부탁을 완수한 두 사람도 이들을 따라온 것이다.
“깐깐하긴.”
침상에 드러누운 육군명이 발끝을 까딱거리며 물었다.
“복호채주는 언제 오는 거야?”
그녀가 오기로 한 이상 섣불리 개봉을 벗어나면 길이 엇갈리고 만다.
세 사람은 지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환이 답했다.
“늦어도 내일 아침 전에는 도착할 것이오. 한 가지 당부를 하자면, 그분 앞에선 절대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주인환이 아는 이하빈은 상관의 전형과도 같은 여인.
그녀라면 육군명의 가벼운 말투와 행동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육군명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은무대가 임무 아닌 일에도 조언을 하는 건 처음 보는군.”
“…….”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사내다.
육군명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렇지! 내일이면 다시 산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그 전에 방탕하게 놀아보는 건 어때?”
서책을 읽던 용추가 점잖게 말했다.
“군자는 방탕함과 거리를 둔다.”
육군명의 눈이 가자미눈으로 변한다.
얼마 전부터 서책을 읽더니 군자라는 말에 꽂혀있는 용추였다.
“……그럼 넌 여기서 쉬어. 난 대하와 기루에 다녀올 테니까.”
유대하가 떨떠름한 얼굴로 쳐다봤다.
“왜 나를 끌고 가는 거냐?”
“혼자 가긴 그렇잖아. 네가 낼게.”
“말이 좀 이상한데.”
“돈은 전부 네가 갖고 있잖아. 가자. 산에 가면 당분간 이럴 기회도 없다니까?”
의방에 머무는 두 달간 술은 일절 입에 대지도 못했다.
육군명의 말처럼 복호채에 가면 눈치 보느라 술 마실 여유도 없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유대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조금만 마시고 오자.”
“탁월한 판단이야.”
육군명은 고개를 들어 은무대에게 물었다.
“같이 한잔하자.”
“됐소.”
“안 마실 거면 따라오지 마. 흥이 깨지니까.”
“…….”
짓궂게 웃은 육군명이 유대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용추야. 우리 다녀온다. 집 잘 지켜라.”
서책에 고개를 고정한 용추가 곁눈질하며 물었다.
“기루에 가는 거냐?”
“그래.”
“군자는 세 번을 권유한다.”
“나는 군자도 아니고 세 번까지 할 생각은 없어.”
“그럼 두 번 권유해도 된다.”
“다녀올게.”
“할 수 없군.”
용추가 못 이기는 척 일어나자 육군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군자는 방탕함과 거리를 둔다며?”
서책을 내려두고 장포를 두른 용추가 사뭇 비장하게 말했다.
“오늘 하루, 군자를 포기한다.”
객잔을 나선 세 사람은 육군명을 따라 캄캄한 골목에 접어들었다.
육군명의 걸음이 제법 익숙하자 유대하가 의아한 듯 물었다.
“뭐 알고 가는 거냐?”
“오는 길에 봐둔 곳이 있다.”
“어딘데?”
고개 돌린 육군명이 흰 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홍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