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233)
◈ 233화. 단려화의 고민
창밖으로 어둑한 하늘을 확인한 운화결이 조용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봇짐 안에 옷가지를 차곡차곡 챙길 무렵.
지여령과 함께 들어온 임교영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상공. 조금이라도 쉬어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전신이 식은땀으로 흥건하다.
운화결은 고개 저었다.
“움직이려면 지금뿐이다. 더 늦으면 그들과 접촉하기 어렵다.”
소문을 확인했다면 곧장 팔존의 흔적을 지우고자 사람을 보낼 터.
여기서 더 지체하다간 그들과 접촉할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다.
운화결은 덜덜 떨리는 손을 쳐다봤다.
‘처참하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꼴로 나타난다면 의심하지는 않을 거다.’
무림 말살의 계획이 무너진 순간 살아갈 의지까지 잃어버렸다.
남은 미련이라곤 그저 임교영의 안전뿐.
진무립이 그녀의 안전을 약속했기에 모든 걸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순간 들려온 임신 소식은 꺼져가던 생명의 불꽃에 기름을 끼얹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온다.’
임교영과 배 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까지 꿇었다.
부모를 데려가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야망까지 빼앗아간 잔혹한 세상이다.
그러나 그 세상이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살아야 할 이유를 선물했다.
“거기 있나?”
그는 서진환의 기척마저 느끼지 못할 만큼 쇠약해진 상태였다.
허공에서 시꺼먼 인영이 연기처럼 나타났다.
힘겹게 돌아선 운화결이 죽립을 푹 눌러썼다.
“떠날 것이다.”
복면 위로 드러난 서진환의 눈동자가 문을 향해 돌아갔다.
곧이어 문이 열리며 마찬가지로 복면을 착용한 금성우가 나타났다.
“찾으셨습니까. 대주.”
“이자를 개봉 밖까지 데려다주고 와라. 조용히.”
고개 숙인 금성우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예.”
* * *
개봉 외곽의 객잔.
밤이 찾아오는 시간이었음에도 떠들썩한 객잔의 분위기가 진무립과 단려화를 맞이했다.
얼큰하게 취한 취객들이 목청을 키우는 가운데 두 사람은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았다.
단려화는 여전히 미안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내가 사겠어요.”
진무립이 씩 웃는다.
“그럼 가장 비싼 것으로 하지.”
안면에서 미안한 감정이 샥 사라진다.
“음. 그냥 반씩 낼까요?”
“…….”
점소이를 부른 단려화는 죽엽청 두 병과 간단한 안주를 주문했다.
빈 잔이 채워지고, 채워진 잔이 비워져 가며.
그녀의 얼굴에 무르익은 시간만큼 옅은 홍조가 떠오른다.
“무립.”
“그래.”
“만일 놈들이 있는 곳을 알게 된다면 어떡할 거예요?”
“당연히 쳐야겠지.”
역시 예상했던 대답이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예요.”
“수십 년 만에 가까스로 우리가 설 땅을 만들었다. 나는 저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내가 하지 않으면 더 큰 위기가 닥칠 거야.”
순간 단려화의 눈동자에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은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지금까지 해온 것만으로도, 이룩한 것만으로도 진무립은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초의 목적을 이뤘음에도 진무립의 눈은 어느새 다음 목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사람은 나를 위해서도…… 이렇게 움직여 줄까?’
대놓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요?”
“뭐가?”
주위를 슥 살핀 단려화가 자라목을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요.”
운화결을 살려둔 걸 말하는 모양이다.
진무립은 움켜쥔 잔을 바라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지.’
운화결이 복령천과 접촉할 방법을 설명했을 때, 잠시 그를 살려두고 이용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머리와 달리 가슴이 그것을 거부했다.
전투 중에 죽은 부하도 있을뿐더러 목적을 위해 여자를 인질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더니 당초 생각했던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
진무립이 말했다.
“괜찮을 거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금성우가 운화결을 데리고 개봉을 벗어났을 것이다.
‘인환과 가장 친하게 지내온 사람은 너였지.’
그래서 금성우에게 그 일을 맡겼다.
잔을 들이켜는 진무립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떤 선택을 내리든 책임은 내가 진다. 네 마음 가는 데로 해라.’
개봉을 벗어나, 성벽의 그림자를 따라 움직이는 금성우는 재차 진무립의 전언을 상기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의 눈빛은 품 안에 넣은 비수 못지않게 섬뜩했다.
‘인환.’
은무대에 들어오기 전부터 함께 해온 친구의 죽음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지금의 운화결은 마음만 먹으면 일초반식 안에 죽일 수 있다.
숲에 접어든 금성우가 천천히 발을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겠지.”
복수심을 삼킨 목소리가 나직이 깔린다.
“그래.”
천천히 돌아선 운화결이 짙은 어둠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품 안의 비수를 움켜쥔 금성우가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운화결의 미간이 좁아졌다.
등 뒤의 살기가 오싹하게 등골을 파고들었으나 지금의 몸 상태론 반응할 겨를조차 없었다.
‘여기서 죽을 순 없다.’
가까스로 돌아선 그가 팔을 내뻗는 순간.
서걱!
날카로운 예기가 소매를 스치더니 소맷자락이 나풀거리며 흘러내린다.
금성우는 그것을 낚아채며 차갑게 돌아섰다.
손목 아래를 확인한 운화결이 물었다.
“죽일 생각이 아니었나?”
“내 복수는 이것으로 끝이다.”
진무립이 어떤 생각으로 그를 보내는지 안다.
여기서 죽인다면 당장 마음은 편해질 것이다.
그러나 살려서 보낸다면, 이자가 제 역할만 해낸다면 훗날 동료들이 흘릴 피를 줄일 수 있다.
“……반드시 우리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잊지 마라. 복령천이 천하를 집어삼킨다면 우리와 손을 잡은 너는 물론이고 네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도 지킬 수 없게 될 테니까.”
마지막 말을 남긴 금성우는 미련 없이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운화결이 작게 중얼거렸다.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라.”
왠지 진무립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다.
‘그 주군에 그 부하인가.’
이제는 저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저들이 이토록 필사적으로 싸워온 것은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운화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교영. 다녀오마.’
* * *
비각이 사용하던 건물은 온전히 상천과 손님들을 위해 제공되었다.
맹으로 복귀한 진무립을 처소에서 판천라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찾아올 때도 됐지.’
진무립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오래 기다렸나?”
“많이 바쁜 모양이더군. 우선 축하의 말을 전해야겠지.”
“인사가 늦었군. 내 부하를 구해줬다고 들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왕유는 분명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도주하던 살존을 처리한 것도 판천라마였으며 단려화의 위기를 사전에 감지한 것도 그였다.
진무립의 활약에 빛이 바랜 감이 있으나 그가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었다.
진무립은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고맙다.”
판천라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서장을 탈환하게 도와준 은혜를 갚았을 뿐이다.”
싱긋 웃은 진무립이 물었다.
“듣자 하니 이쪽에서 연락하기 전에 나를 만나러 오고 있었다던데.”
“그랬지.”
“천산의 일인가?”
“역시 머리가 좋군.”
판천라마는 흡족한 듯 옅은 미소를 보였다.
이곳까지 상의하러 온 보람이 있다.
“서장을 거쳐 천산으로 들어가는 철과 쇠가 부쩍 늘어났다. 서장에 파견한 감시도 늘었지.”
진무립이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있을 것 같지?”
“늦어도 일 년. 서두른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거다.”
“생각보다 여유가 있는 건 아니로군. 마교의 교주는 어떤 자인가?”
“천산은 근 백여 년에 걸쳐 분열과 통합을 반복한 탓에 외부로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지금의 교주는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하고 교인을 하나로 만들었지. 그게 천하대전 직후의 일일 것이다.”
“아직 젊겠어.”
“그렇지. 실혼인을 가진 혈마 무천극조차 천산으론 눈 돌릴 생각은 못 했으니 능력이 있는 건 분명하다.”
판천라마는 이어서 혈교의 실혼인에도 복령천이 관여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물을 한 모금 들이켠 판천라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문제는 천산이 복령천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진무립은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왠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역시 아비와는 다른 놈이로군. 시류를 읽을 줄 알고 융통성도 있어.’
천하대전 당시 황운천은 천산까지 다녀왔음에도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자신의 실력에 거만할 정도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무립이 물었다.
턱을 매만지던 진무립이 뭔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자네는 천산이 복령천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내가 죽인 살존이라는 자에게서 알아냈다.”
서장을 나서기 전까지는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
확신이 생긴 것은 살존 표설중에게 금강적사안으로 확인한 다음이었다.
“다른 것은 알아낸 게 없나?”
“금제가 걸려있더군.”
“금강적사안에는 상대의 금제를 푸는 방법도 있다고 들었는데.”
판천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동하기 전이라면 가능했겠지. 그만한 자에게 금제가 걸려있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 놈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있었다.”
순간 판천라마의 눈이 금빛으로 빛나며 입에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대표국을 이용해 중원에…… 공백을…… 천산이…… 화령도…….”
뚝뚝 끊기며 내뱉는 그 말은 살존 표설중의 마지막 말이었다.
‘오대표국을 이용해, 중원에, 공백을, 천산이, 화령도?’
진무립의 영민한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단어를 조합하니 몇 개의 가능성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후후후.”
낮게 깔리는 웃음소리에 판천라마가 눈을 빛냈다.
“뭔가 알아냈는가?”
“그래. 아무래도 일간 화령도에 한번 다녀와야겠어.”
판천라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진무립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안심할 수 있다.
“서장을 너무 오래 비워뒀다. 이만 돌아가지.”
“잠깐.”
일어나던 판천라마가 멈칫하더니 다시 앉았다.
“뭔가?”
“만일 그들이 서장에 들어올 기미가 보인다면 싸우지 말고 사천으로 넘어가라.”
서장은 너무도 멀뿐더러 포달랍궁은 혈교와의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온전히 수습하지 못했다.
일이 벌어지고 도우러 간다면 전투는 끝나있을 확률이 높다.
“본 궁을 내주란 말인가?”
“집 지키는 게 부질없다는 것은 한 번 경험하지 않았나?”
“음.”
나직이 침음한 판천라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그러지.”
판천라마를 배웅한 진무립이 처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달빛이 머무는 앞뜰에 나와 하늘을 올려보는 여인이 있었다.
“후우.”
깊게 내쉬는 그녀의 한숨에 복잡한 기분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바로 단려화였다.
“려화.”
움찔한 단려화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어요?”
“방금.”
진무립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고민이 있으면 감추지 말고 털어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묵직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단려화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린다.
“고민이요?”
진무립은 그녀를 직시하며 말했다.
“요즘 진심으로 웃질 않더군. 당신은 활짝 웃는 게 매력인데 말이야.”
별안간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단려화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진무립은 마당 한쪽으로 걸어가 작은 바위에 손을 붙였다.
슈우우우…….
그러자 바위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따뜻한 온돌로 변했다.
진무립이 자리를 권하며 웃었다.
“잠깐 앉을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려화는 작게 끄덕이며 바위에 앉았다.
그녀와 나란히 앉은 진무립이 물었다.
“전투 중에 설지량을 쫓아갔었지. 그놈에게 무슨 얘길 들은 거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머리 굴리기를 좋아하는 놈이다.
분명 단려화에게 한 소리 하고 죽은 것이 분명했다.
‘어떡하지?’
그녀는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뭐 있어? 잠도 같이 잔 사이에…….”
화들짝 놀란 단려화가 벌떡 일어나며 진무립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 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래요?”
그녀의 손을 밀어낸 진무립이 짓궂게 웃었다.
“그러니 속 끓이지 말고 털어놓으라고. 계속 입 다물고 있으면 천하에 소문이 퍼지게 될 테니까.”
순간 움찔한 단려화가 목소리를 깔았다.
“그런데 대체 우리가 언제 같이 잤다는 거예요?”
“오고 가며 같이 노숙한 적이 한두 번인가?”
“……이 인간이.”
주먹을 부르르 떨던 그녀가 체념한 듯 자리에 앉았다.
왠지 그의 농담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그래. 그에게 상의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하겠어.’
진무립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운화결과 임교영을 살려줄 때도 그랬으니까.
결심한 그녀가 작게 입을 열었다.
“일 년 뒤에 소화산에서 복령천주와 마교의 교주가 회동을 갖는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