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248)
◈ 248화. 심연의 공간
화령의 영주 일가가 머무는 태천각의 최상층.
활짝 열린 창문 앞에 선 백설하는 종종걸음으로 정문을 나서는 단려화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보인다.
백설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팔불출이 따로 없구나.”
뒤에 선 연소정이 진땀을 닦았다.
“다시 모셔올까요?”
“아니. 되었다.”
창문을 닫은 백설하가 그녀에게 물었다.
“네가 본 광룡은 어떤 사람이더냐?”
잠시 생각하던 연소정이 말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평생 화령을 위해 살아오신 영주님과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물론 다른 부분도 많지만요.”
백설하가 생각에 잠기자 연소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나고자 하신다면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백설하는 고개를 저었다.
“중차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때가 아니구나.”
진무립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는 대강 알고 있다.
사사로운 일로 대사를 그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래. 이번 일이 끝난 뒤, 그들이 떠나기 전에 만나보는 것이 좋겠구나.”
* * *
철썩.
흘러가는 물결이 바위에 부딪혀 바스러진다.
연기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물거품 사이로 새하얀 무언가가 솟아오른다.
“큭.”
짧은 신음과 함께 나타난 인물은 바로 성유기였다.
힘겹게 뭍으로 걸어온 그가 강변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나직이 토해내는 숨결에 혈향이 짙게 배어난다.
“쿨럭!”
울혈을 토해낸 성유기는 즉시 가부좌를 틀고 내상을 다스렸다.
흑무(黑霧)에서 튕겨져 나오는 순간 단소룡의 마지막 일권이 가슴을 직격한 것이다.
내리쬐는 오후의 햇살에 흠뻑 젖은 무복이 빠르게 말라간다.
잠시 후,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성유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괴물은 괴물이로구나.’
단소룡도 그렇고 황천패도 그렇다.
둘은 마치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단소룡에게서 희망을 보았다는 것이다.
‘놓치지 마라. 화윤.’
한때 적으로 만난 사이였기에 그들이 작심하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잘 안다.
화윤은 분명 자신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돌아서던 성유기의 귀로, 그리우면서도 가슴 아픈 목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성유기! 하늘이 무섭지도 않더냐!”
별안간의 목소리에 성유기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흐르는 강물만이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후후후.”
성유기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백건.”
가슴을 후벼 파던 목소리는 바로 죽은 친구의 것이었다.
“여전히 나를 원망하는 것이냐?”
대답이 들려올 리 없다.
그저 도도히 흐르는 장강의 물소리만이 그의 귓속을 파고들 뿐이다.
“네 등에 칼을 꽂은 내가 이제 와서 속죄한들 네 마음이 안식을 찾을 수는 없겠지.”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이 모순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가 하지 못한 것을 대신하는 것이 성유기가 선택한 속죄의 방식이었다.
돌아선 성유기가 강둑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네 대신 천수를 누릴 생각은 없다. 그러니 조금만 지켜봐다오. 지옥 불에 떨어질 날이 그리 멀지는 않을 테니까.”
* * *
임표가 각별히 신경 써준 덕분에 진무립 일행은 부족함 없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전각의 뒤편으로는 십 장 폭의 연무장이 있었고 지하에는 심법을 수련하기 위한 별실까지 존재했다.
당천과 다른 동료들이 연무장에서 밀린 수련을 재개하는 사이.
지하 별실에 틀어박힌 진무립은 지그시 눈 감은 채 허공에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슈우우우…….
은은한 서기가 그의 주변을 감싸는 가운데 허공을 움켜쥔 손 모양이 시시각각 변한다.
검과 창, 도와 봉, 활과 소검을 쥐어가는가 하면 장력을 발출하듯 활짝 펼치기도 하고 주먹을 쥐기도 한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팔천영신공이다.
천천히 손을 움직이는 진무립의 귀로 그리운 음성이 스며든다.
‘팔천영신공은 고작 여덟 개의 무공으로 적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다.’
화령의 초대 영주, 천룡 한사운의 성천투공(成天鬪功)에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무공.
무성(武成)이 창시한 팔천영신공의 진정한 묘리는 창시한 본인조차 끝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오묘하다.
‘나는 볼 수 없었다. 황운천은 그릇이 되지 않아 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라면 가능하다.’
천음지체를 타고난 진무립에겐 누구보다 뛰어난 머리와 막대한 내력이 있다.
그의 스승은 진무립이라면 누구도 가보지 못한 경지에 오르리라 확신했다.
허공을 휘젓는 두 손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진다.
‘속도만으로는 부족하다. 힘을 더해야 해.’
움직이는 손에 힘이 붙으며 주변의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팔천영신공은 단소룡에게 깨진 무공이다.
복령천주가 세상을 집어삼킬 야욕을 드러냈다면 분명 그 이상의 것을 가져왔을 터.
그의 그릇된 야망에서 가족들을 지키자면 자신 또한 그 이상의 것을 준비해야 한다.
팔천영신공을 터득한 순간부터 틈날 때마다 벽을 넘기 위해 연구해왔다.
그 어떤 방어도 무력화할 수 있는 완벽한 공격.
스승은 팔천영신공의 극의를 터득한다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진무립도 같은 생각이었다.
한참을 움직이던 진무립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상 수련으로 넘어갔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여덟 가지 무공이 차례로 섬광을 흘리며 사방을 거침없이 휩쓸어 간다.
단순히 심상 수련일 뿐임에도 진무립의 주변 공기가 끓어오를 듯 요동쳤다.
단전의 내력은 실제 무공을 펼치는 것처럼 전신 세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모든 무공을 차례로 점검한 진무립은 두 개의 무기를 양손에 쥐고 칼춤을 추듯 극성의 보법을 전개했다.
‘검.’
생각과 동시에 육병흑궤에서 빨려 나온 검이 손아귀에 차가운 촉감을 전달할 때였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어둠 속에서 순백의 가사를 걸친 노승이 나타났다.
“이제야 왔구나.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멈칫한 진무립의 눈이 살짝 커졌다.
“스승님?”
그간 수도 없이 심상 수련을 해왔으나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환상인가?’
노승은 마치 진무립의 생각을 짐작한 것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환상이 아니다.”
“실체란 말입니까?”
“네게 기신봉진대법을 펼칠 때, 대법에 나의 사념을 심어두었다. 네가 진심으로 벽을 넘고자 할 때 나타나도록 말이다.”
“대법은 오래전에 풀렸을 텐데요.”
“그렇지. 만일 네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내 사념도 소멸하고 말았을 것이야. 언제 오나 기다리던 참이었다.”
노승은 모처럼 만난 제자에게 반가운 미소를 보였다.
“네가 정말 고생이 많았구나.”
자애롭던 눈빛과 따스함으로 가득한 목소리는 자신의 착각이 아니다.
왠지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으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켜보고 계셨습니까?”
노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지 않아도 안다. 너는 책임감이 강한 아이였으니 많은 것을 어깨에 짊어지려 했을 것이야. 분명 고단한 여정이었을 게다.”
진무립은 뿌옇게 흐려지는 눈동자를 손으로 덮었다.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노승은 안쓰러운 눈길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 마음을 어찌 모를까.
자신이 잘못 뿌린 씨앗으로부터 시작된 일.
자신을 대신해 그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제자다.
그저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미안하지만 사념이 유지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단다. 시작하자꾸나.”
진무립은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립아. 핵심은 귀접이다.”
귀접은 사물을 끌어당기는 묘리.
육병흑궤의 무기가 진무립의 손에 빨려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내력의 흐름을 유지하며 회수와 발출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 나와 함께 백라자수(白拏磁手)를 만든 너라면 그 느낌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백하진에게 전수한 백라자수는 귀접을 극대화한 흡자결로 상대의 초식에 틈을 만드는 무공이다.
“가겠다.”
말이 끝나는 순간 꺼지듯 사라진 노승의 신형이 정면에서 나타났다.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쏟아지는 검초의 향연.
카카카캉!
불꽃 튀는 네 번의 충돌 끝에 두 사람의 신형이 반대 방향으로 주르륵 미끄러진다.
진무립은 멀어지는 스승을 향해 검을 내던졌다.
쐐애액!
스승의 검신이 자신의 검을 쳐내기 직전.
일직선으로 쏘아지던 검이 궤적을 틀었고 어느새 진무립의 손에는 도가 쥐어져 있었다.
“연사비도(聯死飛刀)의 묘용을 상기하거라!”
한천유에게 전수한 연사비도는 비도술의 정수를 총체화한 신공.
연사비도의 정수를 깨우친 진무립은 손에서 떨어진 무기의 통제권을 잃지 않았다.
진무립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히는 순간, 스승의 곁을 화살처럼 스쳐 가던 검신이 느려지며 허공에 둥실 떠오른다.
‘하나.’
그사이 짓쳐 든 스승의 도신이 시꺼먼 흑광을 줄기줄기 쏟아내며 폭포수처럼 떨어진다.
보폭을 벌린 진무립은 그 즉시 흑단벽의 초식을 펼치며 좌수를 뻗었다.
쿠콰콰콰쾅!
벼락 치듯 쩌렁쩌렁한 굉음이 고요한 심상의 세계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장대비 같은 공세를 완벽하게 틀어막은 진무립은 스승이 다음 초식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한 발을 내디디자 진무립의 신형이 물줄기처럼 뻗어 나가더니 순식간에 스승의 정면에 나타났다.
치켜든 도신이 은은하게 빛나는 순간.
쐐애액!
압천경세의 초식이 스승을 두 동강 낼 기세로 떨어졌고.
슈욱!
밑에서 솟구친 스승의 도신이 진무립의 도를 거칠게 후려쳤다.
콰앙!
폭음과 함께 손을 벗어난 진무립의 도신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회전한다.
‘둘.’
허공에 떠오른 무기의 숫자다.
진무립은 놓친 도에 집착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좌수에는 육병흑궤에서 솟구친 흑창이 쥐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선으로 움직인 스승이 움켜쥔 주먹을 내질러 올 때.
피리리릭!
진무립의 움직임에 따라 회전하는 창대가 송곳처럼 날카로운 권영을 모조리 튕겨낸다.
타다다다다당!
접전이 벌어질 때마다 손에 쥔 무기가 허공에 떠오르며 다른 초식으로 매끄럽게 이어진다.
시간마저 무감각하게 느껴지는 심연의 세계.
숨 막히는 접전 속에 제자를 상대하는 노승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내 눈은 정확했다.’
진무립은 천재다.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깨우치며 실수를 지적하면 완벽 그 이상으로 보답한다.
한평생 천재로 불려온 자신의 재능은 진무립의 무재 앞에선 작은 조약돌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새 허공에 떠오른 무기는 다섯 개로 늘어났고.
미끄러지며 간격을 확보한 진무립의 좌장에 막대한 내력이 운집했다.
노승은 끝이 다가옴을 직감했다.
“훌륭하다.”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이겠지요.”
말이 끝나는 순간, 좌장에서 쏟아져 나온 극일화(極一化)의 장력이 해일처럼 덮쳐 오며 생로를 차단했다.
멈춰선 노승이 사방을 훑었다.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네 개의 시뻘건 운무와, 머리 위로 혈옥비 특유의 혈무가 동시에 핏빛 장대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노승의 눈가에 짙은 주름이 번졌다.
“혈천비(血天飛)가 좋겠구나.”
불길한 이름이지만 이보다 어울리는 것은 없다.
고개를 끄덕인 진무립의 손에는 어느새 흑궁과 네 대의 화살이 들려 있었다.
“그리…… 하겠습니다.”
대답하는 진무립의 입가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턱을 타고 떨어지는 핏방울이 지면에 부딪히는 순간.
쐐애애애애액!
고막을 찢어발기는 파공성과 함께 네 대의 화살이 공간을 꿰뚫었고 노승의 전방위를 지키던 혈무가 시뻘건 장대비를 퍼부었다.
“역시 훌륭하다.”
핏빛 물결이 일렁이는 무성(武成)의 눈동자에 빨려들어 간다.
자신이 인정한 유일한 후계자.
진무립에게 모든 것을 넘겨준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유일하게 후회하지 않는 것이었다.
진무립은 피를 머금고 웃었다.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래. 너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이야.”
무성의 희미한 미소가 혈무에 가려지는 순간.
쿠아아아앙!
경천동지할 폭음이 천지를 뒤덮었다.
기겁한 동초개가 어쩔 바를 모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으어어어!”
무너질 듯 몸을 떠는 전각.
지하에서 시작된 굉음에 이어 지축이 갈라질 듯 비명을 내지르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놀란 무인들이 다급하게 거리로 뛰쳐나왔다.
읽던 장부를 들고나온 금릉원주 사마진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했다.
“지진인가?”
“아니다.”
고개 돌린 곳엔 차가운 눈매가 인상적인 중년인, 화성원주 천영이 있었다.
“원주님.”
눈을 가늘게 뜬 천영이 외총관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순수한 내력이다.”
그때 두 사람의 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섬에 언제 이런 괴물을 데려온 것이냐?”
대지의 진동이 잦아듦과 함께, 단소룡을 알아본 무인들이 일제히 예를 갖췄다.
“영주님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