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294)
◈ 294화. 혈꽃
후드득.
나뭇잎을 스친 빗방울이 강변의 숲을 차분히 적셔간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한 자루 검을 쥔 운화결은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콰콰콰콰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리고 대기가 진동한다.
지켜보던 구홍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 정도였단 말인가.’
필생의 각오로 불굴의 투지를 불태우는 운화결은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허공을 가득 채운 검영과 검광이 부딪치며 비산하는 기파가 암기처럼 쏟아진다.
쿠콰콰콰!
경천동지할 전투 속에, 운화결의 전신에는 빠르게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유성의 쾌검이 운화결을 점점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간격을 벌린 두 사람이 나직이 숨을 골랐다.
검신을 가지런히 늘어뜨린 주유성의 눈에 이채가 번졌다.
“과연 제법이구나. 주군께서 탐낼 만한 재능이야.”
팔천영신공의 위력은 다양한 무기를 활용해 변화무쌍한 공격으로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운화결은 육병백궤의 무기조차 없는 상태에서 검 한 자루 들고 자신에게 맞서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가쁜 숨을 몰아쉬는 어깨.
전신이 피로 물든 운화결은 아직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어둠 가득한 자신의 삶에 빛이 되어준 여인.
그녀와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보폭을 넓힌 주유성이 자세를 낮추며 지면과 수평하게 검신을 든다.
“네 끝도 성유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유성의 전신에서 활화산 같은 기세가 줄기줄기 솟구친다.
그와 동시에 운화결의 지친 육신에서도 서릿발 같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드드드드드…….
두 사람이 발산하는 가공할 기세에 대지가 진동하고 수풀이 몸을 떨었다.
“받아봐라.”
쾅!
거칠게 지면을 박찬 주유성이 일직선으로 쏘아지며 검극을 내질렀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운화결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팔사검해(八蛇劍海).’
주유성의 검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한 번의 실패를 목도한 황천패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 새로운 무공을 창안한 것이었다.
쏴아아!
빗방울을 튕겨낸 검신에서 여덟 가닥 섬광이 파생되더니 마치 뱀처럼 휘어지며 폭풍처럼 몰아친다.
탓!
무령경천보를 전개한 운화결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흔들리며 쏟아지는 공격을 피해간다.
콰콰콰콰콰!
잔상을 꿰뚫은 검영이 운화결의 주변을 초토화시킨다.
팔사검해가 무서운 것은 단순히 검초의 현란함만이 아니었다.
눈을 현혹하는 환초에 벼락같은 쾌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 될 듯한 살기가 더해진 그의 공격은 상대를 압도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슈우욱!
폭풍처럼 몰아치던 검영이 흔들리는 운화결을 쫓아가 기어코 옆구리를 꿰뚫었다.
“큭.”
억눌린 신음을 토해낸 운화결은 회수하는 그의 검신에 검극을 붙였다.
치잉!
날카로운 검극이 그의 검극을 가까스로 스치며 허공을 꿰뚫는다.
제대로 맞대지 못한 건 주유성의 검이 출수보다 회수가 더 빠른 탓이다.
절대 빈틈을 보이지 않는 주유성의 무공은 그야말로 완벽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전투에 절대라는 것은 없다.
운화결은 투지를 불태우며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슈우우우!
일직선으로 쏘아지던 검신이 사방으로 흔들리더니 수십 개의 잔상을 흩뿌린다.
그에 맞춰 주유성은 왼발을 뒤에 박은 채 검극을 내지르며 손목을 흔들었다.
콰콰콰콰콰쾅!
흩어지던 검영이 주유성의 검극에 가로막혀 새하얀 기파를 쏟아냈다.
치고 빠지길 반복하는 두 사람이 좁은 공터를 완벽하게 활용하며 일진 공방을 이어갔다.
멀찍이 물러난 구홍이 미간을 좁혔다.
‘역시.’
운화결의 무공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
그러나 상대하는 주유성의 무공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태산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운화결에게 알리지 않고 주유성의 말에 따른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만일 지금도 그와 함께했더라면 자신의 목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을 거다.
스걱!
어깨에서 피가 튀어 오르며 기묘한 기운이 육신으로 침투한다.
운화결은 한층 강하게 내력을 끌어올려 그것을 떨쳐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부릅뜬 눈에 담긴 검극이 채찍처럼 휘어지더니 복부를 노려온다.
운화결은 검을 사선으로 그으며 뒤로 물러났다.
슈욱!
피륙에 상처를 낸 그의 검극이 순식간에 회수되더니 벼락같이 다리를 찔러왔다.
허공에 검을 던지고 슬쩍 뛰어오른 운화결이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해냈다.
또다시 순식간에 회수된 검이 경이적인 속도로 짓쳐 든다.
그때 운화결의 상체와 하체가 맹렬하게 회전하더니 폭포수처럼 뚝 떨어진 발이 주유성의 검신을 내리찍었다.
치잉! 쾅!
검신을 스친 발이 지면을 내리찍으며 땅거죽이 솟구쳐 올랐다.
시야를 가린 흙더미 사이로 새하얀 검광이 불쑥 튀어나온다.
운화결은 좌장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쳤다.
쾅!
손등을 관통한 검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주유성의 신형이 흙더미를 뚫고 쇄도했다.
운화결이 물러나지 않고 원선지벽을 펼치는 순간이었다.
“아직도 잔재주를 믿고 있느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주유성은 머리 위에 떠오른 붉은 구름을 놓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쐐애액!
한줄기 붉은 섬광이 벼락같이 내리꽂히는 순간.
허공에서 빙글 회전한 주유성은 놀랍게도 떨어지는 혈옥비를 검면으로 후려쳤다.
콰아앙!
궤적이 비틀린 섬광은 공교롭게도 운화결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컥!”
운화결의 신형이 포탄에 적중한 바위 파편처럼 튕겨 나간다.
어느새 지면을 박찬 주유성은 수풀을 뚫고 날아가는 운화결을 놓치지 않았다.
흔들리는 운화결의 동공에 주유성의 살기 가득한 미소가 떠오른다.
“성유기에게 안부 전해라.”
쌔애액!
일직선으로 쏘아진 검광이 운화결의 가슴으로 쏘아진다.
운화결은 온 힘을 다해 두 손을 뻗으며 단전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혈맥을 타고 올라오는 내력은 평소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단전에 꽂힌 자신의 검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윽!’
이를 악문 운화결의 눈에 원을 그려가는 자신의 손등이 보인다.
손과 손 사이로 투명한 빛무리가 모이는 순간.
콰아앙!
마지막 방패를 사정없이 분쇄한 검극이 운화결의 가슴을 관통했다.
“컥!”
목구멍을 타고 역류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온다.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는 운화결의 눈에, 숲의 앙상한 나뭇가지가 아닌 먹먹한 하늘이 담긴다.
등 뒤로는 서늘한 장강의 물줄기가 거침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문득 짧게 스쳐 간 인연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 떠오른다.
‘내겐 편안한 죽음도 사치다.’
악인을 자처한 그는 악인다운 죽음을 바랐다.
하지만 운화결이 바란 죽음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교영.’
그리운 얼굴이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 번져간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며 나를 그리고 있을까.’
돌이켜보면 아쉬운 것투성이다.
자신과 비슷한 어두운 과거를 가진 그녀다.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렸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어둠 속에서 구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자신의 어둠으로 끌어들였을 뿐이다.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먹구름 가득한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는 순간.
쐐애액!
여덟 방향에서 쏟아진 가공할 검광이 운화결의 전신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콰콰콰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피어난 혈꽃이 내리는 비에 섞여 흐드러졌다.
* * *
살랑이는 눈송이가 마당을 희게 물들여가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담한 장원의 지붕을 덮은 눈처럼 천지가 새하얀 적막감에 사로잡혔다.
끼이익.
살짝 열린 창문으로 화사한 미모의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오늘은 제법 눈이 많이 내리네요.”
투명한 눈에, 투명한 눈을 담은 여인은 바로 임교영이었다.
“아가씨. 찬 공기는 산모에게 좋지 않습니다.”
어느새 뒤로 다가온 지여령이 그녀에게 잔소리를 했다.
임교영이 배시시 웃으며 사정했다.
“방에만 있자니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언제 어디서나 운화결과 함께했던 그녀에게 안가에서의 생활은 답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나다닐 수 없는 자신의 처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녀의 마음을 잘 아는 지여령이 슬며시 곁에 앉았다.
“듣기로는 전쟁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고 합니다.”
임교영이 반색하며 쳐다본다.
“정말인가요?”
이 전쟁만 끝나면 운화결과 함께 중원을 떠나 조용히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
지여령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 안가를 지키는 무인에게 사정해 밖의 상황을 대강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전쟁이 끝나면…….”
“그분께서 돌아오시겠지요.”
임교영은 한층 밝아진 얼굴로 하늘을 응시했다.
“지금 그분은 어디에 계실까요? 내리는 눈을 그분께서도 보고 계실까요?”
비록 몸은 떨어져 있으나 이런 것이라도 그와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여령이 옅은 미소로 말했다.
“물론 그분께서도 같은 하늘을 보고 계실 겁니다.”
* * *
장강을 끼고 세워진 대치현은 호리병처럼 들어간 자호의 입구였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장강을 낀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던 이곳은 하루에도 수백 척의 배가 드나드는 거대한 도시로 변모했다.
모두가 화령이 자호의 섬에 터전을 잡은 덕분이다.
대치현의 사람에게 화령은 은인과도 같은 존재.
외부인이 마을에 들어서면 즉시 화령의 지부에 알리는 것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다.
사전에 그 사실을 들어 알고 있던 경형은 은잠술을 전개한 채 은밀히 마을에 스며든 상태였다.
‘슬슬 소문이 들려올 때가 됐는데.’
강남의 소문이 다른 곳보다 유독 빠르다는 것도 알고 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면 아마 곧 소문이 도착할 것이다.
포구의 짐 더미 사이에 숨어있던 그는 드나드는 배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내리는 비가 추적추적 포구를 적시는 가운데 커다란 상선이 포구에 접안했다.
포구를 지키던 사내가 큰 목소리로 외친다.
“풍령상단의 배요! 관계자들은 나오시오!”
포구 옆에 세워진 건물에서 피를 피하던 일꾼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빠르게 배를 드나들며 짐을 옮기는 사이 넉넉한 체구의 상인이 포구로 내려왔다.
상인이 포구를 지키던 사내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그간 잘 지냈는가?”
사내가 활짝 웃으며 예를 갖췄다.
“유대인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큰 상행이 있어 다들 안휘로 떠났거든.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있는가.”
“하하하. 그럼 그 또한 풍령상단의 복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야 그렇네만…….”
말끝을 흐리는 상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상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전쟁이 벌어진 모양일세. 정명문과 사영방이 불타올랐다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네. 뒤늦게 마을 사람들이 들어가 봤네만 산 사람을 찾지 못한 모양이야.”
순간 숨어있던 경형의 귀가 쫑긋거린다.
‘시작됐구나!’
십이사령의 힘은 강남의 중소방파 정도는 순식간에 지워버릴 만큼 가공하다.
두 곳이 불타올랐다면 다른 곳도 비슷할 것이다.
은밀히 포구를 빠져나온 경형이 순식간에 마을을 빠져나갔다.
비에 젖은 산 능선의 숲속.
높은 나무에서 번을 무인이 즉시 양무화를 찾았다.
“단주님. 일조장이 돌아옵니다.”
“음.”
커다란 나무 밑에서 눈을 감고 있던 양무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목을 좌우로 꺾은 그가 굳은 몸을 풀고 있을 때 마을에 갔던 경형이 돌아왔다.
“단주님.”
양무화가 예를 갖추는 경형에게 물었다.
“시작됐나?”
고개를 든 경형의 눈이 반짝거린다.
“예. 정명문과 사영방이 불타올랐다는 소문입니다. 머지않아 다른 곳의 소문도 도착할 듯합니다.”
어느새 다가온 당명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이제 시작이로군요.”
양무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야.”
움직여야 할 때는 소문이 들려왔을 때가 아니라 화령이 구원을 위해 움직인 다음이다.
그로부터 한 시진 뒤.
깊은 산중에 짙은 어둠이 깔릴 무렵, 화령도를 주시하던 이조장 문자양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