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326)
◈ 326화. 의(義), 악(惡)
도래하는 새벽과 함께 고요한 정적에 휩싸인 무림맹의 후원.
고즈넉한 가산이 소복한 휜 눈을 덮어가는 가운데, 희게 물든 처마 아래로 누군가 뽀얀 손등을 내밀었다.
안개처럼 흩어지는 입김과 손등에 와 닿는 차가운 감촉에 비로소 실감이 난다.
‘겨울이구나.’
꽃비처럼 내리는 눈을, 투명한 눈에 담고 사색에 빠진 여인은 바로 은수련이었다.
겨울이 온 지 벌써 달포가 지났음에도 돌아볼 여유가 생긴 지금에서야 겨울을 인지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돌이켜보니 정말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구나.’
헛웃음을 짓던 그녀의 고개가 우측 모퉁이 너머로 돌아간다.
“일찍 일어났구나.”
차분한 새벽 공기 속에 하얀 입김을 흩어내는 인물은 서진환이었다.
아직은 캄캄한 새벽.
하늘을 슬쩍 쳐다본 서진환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직 교대 시간까지는 반 시진이나 남았으니 들어가서 조금 더 눈을 붙이거라.”
“충분히 쉬었습니다.”
천천히 고개 저은 그녀가 벽에 등을 기대며 쪼그려 앉는다.
서진환이 그 곁에 나란히 앉으며 말했다.
“여유가 생겼구나.”
“전쟁이 끝났으니까요.”
“그게 아니다.”
“네?”
서진환은 그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네 얼굴에 전보다 여유가 생겼다는 말이다.”
“아.”
“보기 좋아.”
순간 은수련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양 무릎에 느긋하게 두 팔을 얹은 서진환이 깍지를 끼며 말했다.
“주군과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말 숨 가쁘게 달려왔다.”
“결국 주군께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진무립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직도 자신들은 천하를 떠돌며 숨어 살아야 했을 것이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들이 있는 곳은 천하 무림의 한복판인 무림맹.
과거라면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동쪽 하늘이 아련하게 밝아오는 가운데 서진환이 입을 열었다.
“새삼 다시 느끼게 되는구나. 우린…… 정말 대단한 분과 함께해 온 거야.”
은수련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대주께서는 그런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솜털이 뽀송뽀송한 아이가 갑자기 찾아와 자신들에게 빛을 보여줄 테니 따라오라고 했을 때.
헛웃음을 흘리며 덤볐던 서진환은 진무립에게 순식간에 나가떨어졌었다.
옛 기억이 떠오르자 서진환이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 이야기는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대주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
붉어진 서진환의 얼굴이 묘한 정적 속에 평온함을 되찾아간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마침내 고즈넉한 후원에 서광이 비치며 교대 시간이 찾아왔다.
서진환은 품에서 작은 서신을 꺼냈다.
“총사께서 주시더구나. 받거라.”
“그게 무엇입니까?”
“휴가증이다.”
“총사께서 우리에게 휴가를 주셨다는 말입니까?”
“주군께서 미리 작성해 총사에게 맡겨두신 모양이다.”
“아.”
“그래도 주군께서 깨어나시기 전까진 자릴 비울 수 없지.”
전쟁이 끝나고 벌써 열하루째, 진무립은 아직도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진무립이라면 반드시 자신들의 곁으로 돌아올 테니까.
은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할지 생각은 해두고 있었다.”
서진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주군께서 깨어나시면, 나는 우리의 역사가 시작된 그곳에 다녀올 생각이다.”
역사가 시작된 곳.
그곳은 진무립과 만났던 장소를 말함이다.
“은곡…… 입니까.”
“그래.”
빙그레 웃은 서진환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와 함께 다녀오지 않겠느냐?”
“…….”
이 순간, 눈앞의 서진환이 아니라 공여소의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눈을 크게 뜨고, 여유를 갖고 기다리세요. 그리하면 언젠가 상대가 그대의 마음을 알아주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귀에 담아두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짧은 정적 끝에 자리에서 일어난 은수련이 서진환과 마주 서며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녀를 향한 서진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질 때, 담장 밖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무림맹에 복귀한 뒤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진무립을 만나고자 이곳을 찾아왔었다.
그러나 깨어나지도 않은 진무립을 만나고 돌아간 이는 거의 없었다.
“내가 다녀오지.”
흰 눈을 밟고 걸어간 서진환이 대문을 열었다.
“지금은 손님을 받지…….”
“저예요.”
서진환의 말을 끊고 싱긋 웃는 여인은 바로 단려화였다.
그녀의 좌우로 판천라마와 당천이 보인다.
진무립이 좀처럼 깨어날 기미가 없자 그녀가 두 사람을 데려온 것이다.
세상 모든 이를 거절해도 그녀만큼은 예외다.
한 걸음 물러선 서진환이 더없이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드십시오. 소저.”
“고마워요.”
입가에 떠오른 그녀의 미소가 후원에 드리운 서광만큼이나 밝게 빛났다.
적막에 사로잡힌 단출한 방 안.
약 냄새가 짙게 풍기는 침상 위로 전신에 침을 빼곡하게 꽂은 진무립이 보인다.
단려화의 긴장된 시선 속에.
침상 옆에 앉은 당천이 가만히 눈을 감고 진무립의 맥을 잡았다.
‘맥은 정상. 혈맥의 상처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황천패를 상대로 모든 힘을 쏟아붓고도 동료들을 지키고자 몰려드는 마인들을 단신으로 상대한 진무립이다.
육신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뜬 당천이 단려화에게 말했다.
“전투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은 만큼 육신이 기나긴 휴식에 들어간 모양이오.”
그것 외에는 자신의 의술로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때 등 뒤의 판천라마가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다.”
고개 돌린 단려화의 눈에 금빛으로 물든 판천라마의 눈동자가 담긴다.
만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무공.
금강적사안이 펼쳐진 것이다.
금안으로 진무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판천라마가 이내 내력을 회수하며 말했다.
“꿈을 꾸고 있구나.”
단려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꿈이요?”
“그대는 걱정할 것 없다. 꿈과 현실에 절반쯤 발을 걸치고 있으니 머지않아 깨어날 것이다.”
돌아선 판천라마가 문고리를 잡아가며 말했다.
“돌아가기 전에 인사는 해둬야겠지. 처소에서 기다릴 것이니 깨어나면 말해다오.”
“고마워요. 불존.”
작게 끄덕인 판천라마가 방을 나서자 당천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심신을 보하는 약을 만들어 오겠소.”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당소협. 아니, 이젠 가주님이라고 해야 할까요?”
당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선 당소협이 낫겠군.”
단려화는 자신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은 진무립의 여인.
다른 이들에겐 몰라도 진무립과 그 주변인들에겐 예전의 당천으로 기억되고 싶다.
문턱을 밟은 당천이 슬쩍 고개 돌리며 말했다.
“모든 것이 끝나면 술 한잔하자던 약속. 나는 기억하고 있다. 무립.”
나직한 목소리가 진무립의 귓속을 스며들었다.
기화요초가 만개한 아담한 동산.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무릉도원의 평상 위엔 진무립과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결국 해냈구나.”
인자한 미소로 따스한 눈길을 건네는 노승은 바로 그의 스승이었다.
진무립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누굽니까?”
노승의 거친 손이 진무립의 손등을 쓸어내린다.
“그래그래. 너라면 해낼 줄 알았지.”
천하에 군림했던 팔황과 그들의 후신인 팔황문에 복령천까지.
자신이 뿌린 씨앗으로 인해 수백 년간 불안에 떨어온 무림이다.
다행스럽게도 마지막으로 거둔 제자가 잘못된 굴레를 완전히 걷어내 주었으니 이보다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진무립이 말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자신이 아는 제자다운 말에 노승은 빙그레 웃었다.
“네 덕분에 평화를 되찾은 무림은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중요하단다. 무립아.”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듯하자 진무립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예.”
노승이 물었다.
“의(義)란 무엇이며 악(惡)이란 무엇이냐.”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정사가 모호한 세상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행복뿐입니다.”
“네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구나. 하지만 이제부턴 너도 알아야 할 것이다.”
순간 노승의 두 눈에 짙은 회한이 스치듯 사라졌다.
노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림을 이끄는 위치에 있는 자가 의와 악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어둠에는 또 다른 악이 피어날 것이다.”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하던 진무립이 물었다.
“스승님이 생각하는 의와 악은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내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지. 하지만 내 나름대로 생각해본 것은 있지.”
노승이 이어서 말했다.
“나는 남겨진 사람의, 남겨질 자의 슬픔을 이해하는 마음이 의(義)요. 그렇지 못한 마음은 악(惡)이라고 생각되더구나.”
“남겨진 사람의 마음이라…….”
모호한 말이지만 왠지 알 것도 같다.
“고민해보겠습니다.”
노승은 맑은 미소로 답했다.
“너라면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진무립의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모든 것이 끝나면 술 한잔하자던 약속. 나는 기억하고 있다. 무립.’
곧이어 손등에서 따스한 감촉과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립. 언제 일어날 거예요?’
그 말에 진무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늦으면 왠지 잔소리를 들을 것 같군요. 이제 가봐야겠습니다.”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인 노승도 진무립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를 만나서, 나는 정말 좋았다.”
촉촉해진 노승의 눈시울처럼, 그 말에 진무립의 눈가에도 뿌연 습막이 번져간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무립은 무겁게 끄덕이며 웃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스승님.”
“어서 가보거라.”
포권을 취하는 두 손 너머로 노승의 형상이 점점 투명하게 흩어져 간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정말 고맙구나. 내 제자야.”
아련한 목소리가 귓속을 선명하게 파고든다.
이어서 손을 휘젓는 노승의 미소가 점점 새하얀 빛으로 물들어간다.
그렇게 번져가던 빛무리가 종국에 천지를 집어삼키는 순간, 진무립의 세상은 현실로 바뀌었다.
“무립?”
반가운 얼굴이 진무립의 동공에 한가득 담긴다.
“오래 기다린 모양이군.”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눈으로 진무립을 바라보던 단려화가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조금 더 늦었으면 잔소리를 하려고 했어요.”
빙그레 웃은 진무립이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보고 싶었다.”
나직하면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짧은 정적 끝에 소매를 내린 단려화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정말 그랬으면 빨리 일어났어야지.”
그녀의 볼멘소리에 진무립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진무립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천하를 구한 영웅의 귀환.
그가 일어나길 오매불망 기다리던 이들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병상에서 일어난 진무립이 모처럼 방문을 활짝 열었을 때였다.
문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동초개가 반갑게 웃으며 일어났다.
“소공자. 일어나계셨군요.”
그의 멋쩍은 미소 속에 담긴 것은 그리움과 슬픔이었다.
진무립의 눈동자에 먹먹한 하늘이 담긴다.
‘남겨진 사람의 슬픔을 이해하는 마음인가.’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