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88)
◈ 88화. 미지의 영역으로
운룡각의 중앙 전각에서 조촐한 연회가 열렸다.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의 산해진미도, 시끌벅적한 풍악과 무희의 춤사위도 없었으나 연회장의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밝았다.
적지에서 수행한 극비 임무.
그간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한 이들에게 술과 고기로 가득한 상차림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고원에서 적장과 겨루시던 그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지.”
“그러게 말일세. 소문으로 들었을 때만 해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상상 이상이었어.”
적의 수장과 단신으로 상대하며 적진까지 견제하던 여유는 절대 후기지수들이 보일 만한 무공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네들 그거 보았나? 마도림 출신 조장들도 입을 쩍 벌리더군.”
“하하하. 저들도 총대주의 무공을 목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고 하네.”
전우들의 이야기에 마도림 무인들은 얼굴을 붉혔다.
“사실 본 림에서도 소공자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겁니다.”
“대검문이 무너지기 전까지 소공자에 대한 인식은 이곳 사천맹과 크게 다르지 않았소. 그분께서는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일을 해내시고 모두의 인정을 받게 되셨지.”
“그건…….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군.”
금호대의 조장들이 멋쩍게 웃었다.
갑작스럽게 운룡각에 배치될 때만 해도, 광무대에 무인들을 빼앗겼을 때만 해도 진무립을 인정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정반대의 상황이다.
누구도 진무립을 인정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진무립의 이름이 화제에 오르자 조용히 배를 채운 당중호가 밖으로 나갔다.
곁에 앉아있던 국철영은 씁쓸한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진무립과 함께 하는 동안,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국철영은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그간 등한시하던 중소방파의 무인들, 성에 차지 않던 금호대의 무인들과 마도림의 무인들까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대하다 보니 그들 또한 자신과 다를바 없는 무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국철영은 당중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길 바랐다.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가지는 마라.’
* * *
서장에서 복귀한 무인들은 누적된 피로 탓인지 꼬박 하루 밤낮을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치료차 맹의 의각에 들어간 천무대는 이틀째 나오질 않았고 운룡각의 무인들도 숙소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었다.
대체 천무대와 운룡각의 무인들은 서장에서 무슨 임무를 하고 돌아온 것인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천무대가 절반 넘게 돌아오지 못했단 말인가?
알려진 사실은 맹주와 일부 부대가 서장에 넘어가 위기에 빠진 무인들을 구출해왔다는 것뿐.
맹주의 중목원조차 공식 발표가 없었기에 무인들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내리쬐는 햇살이 새벽 서리를 걷어가는 아침.
중앙각의 문을 열고 나온 동초개가 잔뜩 찡그린 채 기지개를 켰다.
“으으……. 죽겠네.”
돌아오고 이틀이나 지났음에도 좀처럼 쌓인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출출한데 뭐 좀 없나?”
동초개가 배를 슥슥 문지르고 있을 때, 우측 숙소에서 육군명이 나타났다.
“집에 안 가냐?”
“거지한테 집이 어딨어요. 재워주고 먹여주는 곳이 바로 내 집이지.”
“분타주가 걱정하지 않을까?”
“앗차!”
정신이 번쩍 든 동초개가 눈을 부릅떴다.
“소공자한테 나 집에 간다고 전해줘요!”
운룡각을 뛰쳐나온 동초개는 헐레벌떡 정문으로 내달렸다.
그때 등 뒤에서 왠지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쫓아왔다.
“개방의 소형제! 거기 잠시 멈춰보시오!”
동초개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개방의 소형제!”
이번에도 멈추지 않았다.
정문을 넘어선 순간, 뒤에서 뭔가 휙 날아와 동초개를 추월하더니 삼 장 앞에 툭 떨어졌다.
이번에는 멈췄다.
“엇? 누가 이런 곳에 돈을?”
동초개는 바닥의 은자를 게 눈 감추듯 품에 넣었다.
그때 뒤에서 쫓아온 누군가가 동초개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이보시오. 소형제.”
“뭡니까?”
뒤를 휙 돌아본 동초개가 잔뜩 경계하며 말했다.
“이건 내 거요!”
그런데 왠지 상대가 낯이 익다.
숨을 고르며 멋쩍게 웃는 상대는 전날 사천맹의 정문에서 마주쳤던 위사였다.
“소형제. 돈 달라는 게 아니니까 잠시 이야기 좀 합시다.”
“흠흠. 뭐요?”
“우선 자리를 좀 옮깁시다.”
정문을 슬쩍 돌아본 위사, 정충은 동초개를 이끌고 정문에서 멀어졌다.
그는 성도로 이어진 숲길에 접어든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소형제. 이번에 운룡각의 무인들과 서장에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소.”
동초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소만. 갑자기 그건 왜?”
정충의 얼굴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혹시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소?”
“고작 그게 궁금해서 날 쫓아온 거요?”
“고작이 아니오.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천무대가 그렇게 돌아왔는데 궁금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소? 나만이 아니라 사천맹에 발 딛고 사는 무인이라면 모두가 궁금해하는 화제일 거요.”
“음.”
정충을 위아래로 훑어본 동초개는 씩 웃었다.
“갑자기 목이 좀 마른 데.”
정충도 마주 웃었다.
“갑시다!”
* * *
마도림의 성도 지부.
아침부터 서고를 정리하던 적모개가 혼잣말을 했다.
“빨리 와야 할 텐데.”
진무립의 부탁으로 사천맹에 소식을 전한 적모개는 곧장 총단에 전서를 띄운 상태였다.
사결제자 여덟 명이 한 번에 실종된 사건은 개봉의 총단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일.
혈야광인의 일도 있으니 조만간 사람을 보내올 것이 분명했다.
‘남만에 파견한 제자들은 곧 돌아올 테고…….’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며 무거운 서책을 옮기던 적모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 철딱서니 없는 놈은 대체 운룡각에서 뭘 하길래 안 오는 거야?”
이결제자에게 서고 정리를 시킬 수는 없는 일, 동초개라도 돌아와야 일이 수월할 텐데 소식조차 없으니 부아가 치밀었다.
서책을 내려두고 밖으로 나온 적모개는 우르르 몰려나가는 이결제자들을 볼 수 있었다.
“니들 어디 가냐?”
“동사형이 돌아오셨대요!”
“이 새끼. 대체 뭘 하다가 이제 온 거야?”
“아직 안 왔는데요?”
“조금 전에 왔다고 했잖아?”
“오긴 왔는데 여기가 아니라 객잔으로 갔습니다.”
“…….”
적모개는 잔뜩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앞장서.”
성도 북문 안쪽의 성양객잔.
대로변에 자리한 객잔답게 평소에도 많은 이들이 오가는 곳이었지만 오늘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가득했다.
재미있는 것은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층까지 사람이 가득했음에도 입을 여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는 것이다.
“거기서 소공자가 갑자기 발을 멈추더란 말이오. 상대는 무려 오백의 대군! 마치 장판교를 틀어막은 장비를 보는 것 같더라니까?”
좌중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오오…….”
“거기 이 층! 난간에 너무 붙지 마시오. 떨어지겠어.”
“자꾸 말 끊지 말고 속 시원히 쭉 얘기해보시오.”
동초개가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목이 말라 죽겠는데 속 시원히 말이 나오겠소?”
“거참. 이보게. 여기…….”
동초개는 잽싸게 말을 가로챘다.
“화주 말고.”
“동야주로 한 병 가져오게.”
한쪽 구석에서 은근히 귀를 기울이던 점주는 직접 술 한 병을 들고 뛰어왔다.
“술값은 안 받을 테니 이야기나 끝까지 해보시오.”
마주 앉은 정충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거지가 아니라 매담자로 나서도 성공하겠군.’
그래도 동초개가 말을 기가 막히게 하는 덕분에 전낭 속 은자는 지킬 수 있었다.
동초개는 술을 꼴깍꼴깍 들이켜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까지 했더라.”
누군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오백의 대군.”
“그렇지. 천무대는 말했다시피 함정에 빠진 탓에 싸울 상태가 아니었소. 그들을 지키며 싸우는 건 불가능했단 말이야. 당연히 우리 소공자께서도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계셨겠지. 거기서 소공자가 뒤를 돌아보며 외치더군.”
벌떡 일어난 동초개는 마치 진무립에 빙의한 사람처럼 목청을 키웠다.
“돌아보지 말고 가라!”
그 비장한 외침에 좌중의 눈이 반짝거렸다.
“오!”
“크으! 진정한 사내로군.”
“마도림이 다시 예전의 위상을 되찾을 날도 머지않은 듯하이.”
씩 웃은 동초개는 두 팔로 몸을 감쌌다.
“이건 직접 들어본 사람만 알지. 그때 진짜 온몸에 전율이 일더라니까?”
동초개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분께서는 우리더러 가라고 했지만 내 어찌 소공자의 오른팔 된 사람으로서 그냥 갈 수 있겠소? 거기서 당당히 외쳤지. 나는 죽어도 소공자와 함께 죽을 것이오!”
“허허! 동형도 진정한 사내로군.”
“암. 사내라면 응당 그래야지.”
쏟아지는 칭찬과 탄성 속에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거기서 죽지 그랬냐?”
갑작스러운 말에 흥이 깨진 동초개는 인상을 구겼다.
“누가 기분 잡치는 소릴 하는 거요? 나 그냥 가오?”
그때 인파를 비집고 적모개가 나타났다.
“가라. 이 새끼야.”
“…….”
갑작스러운 적모개의 등장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동초개가 은근히 말했다.
“이리 앉아서 한 젓가락 들어요.”
“당장 안 나와?”
눈을 부라리는 적모개의 앞을 덩치 큰 장정들이 가로막았다.
“당신, 누군데 맥을 끊는 거야?”
“자꾸 방해하면 참지 않을 거요.”
적모개는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씩 웃은 동초개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럼 이야기를 마저 하겠소!”
* * *
성도의 객잔에서 시작된 소문이 날개 달린 듯 퍼져나가고 있을 때, 운룡각의 지하연무장에선 베일 듯 섬뜩한 기운이 요동치고 있었다.
쉬익!
내지르는 일검에서 파공성과 함께 얼음장보다 차가운 기운이 쏘아진다.
‘빨라.’
단려화는 상체를 비틀어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우측으로 미끄러졌다.
그러자 갑자기 진무립의 은광검에서 불같은 기운이 치솟더니 움직이는 그녀를 바짝 뒤쫓아왔다.
단려화는 즉시 검신을 끌어당겨 은광검을 비껴 쳐냈다.
치잉!
선명한 쇳소리와 함께 손목을 타고 뜨거운 기운이 밀려든다.
단려화는 즉시 내력을 끌어올리며 후방으로 미끄러졌다.
‘정순한 내력을 가진 내가고수가 아니라면 병기를 맞대는 것조차 어렵겠어.’
얼음장보다 차가운 기운이 솟구친다 싶다가도 한순간에 용암처럼 뜨거운 기운이 샘솟아 연무장을 휩쓸어간다.
구석에서 지켜보던 용추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전과 달라지셨다.’
이전의 진무립이 한 초식에 한 가지 기운만을 사용했다면 지금은 두 기운을 번갈아 쏟아내고 있었다.
음양의 두 기운을 충돌 없이 능수능란하게 제어하기 시작한 것이다.
탓!
지면을 박찬 진무립의 검이 무수한 잔영을 남기며 전광석화같이 쏘아졌다.
경화사검 사검주유의 초식.
쏴아아아!
해일이 밀려드는 소리와 함께 갈라진 수십 가닥 검영은 초승달 같은 궤적으로 그녀를 덮쳐간다.
‘이렇게까지 할 거예요?’
‘받아낼 수 있잖아?’
진무립과 눈빛으로 대화를 나눈 단려화는 지면에 깊은 족적을 새기며 멈춰섰다.
‘쓰는 수밖에.’
단전에서 솟구친 정순한 내력이 움켜쥔 검파로 물밀 듯 쏟아진다.
비스듬히 자세를 낮춘 그녀는 검황 천영의 독문무공, 천인검(穿人劍) 무광백파(無光百波)의 초식을 준비했다.
지켜보는 모두의 눈에 흔들리는 그녀의 팔이 사라진다는 착각이 드는 순간.
채찍처럼 휘어지는 진무립의 검영에 형체를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거칠게 충돌했다.
쿠콰콰콰콰콰쾅!
조각난 검영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일진광풍이 몰아치는 장내에는 연신 벼락 치는 굉음이 터져 나온다.
보기 드문 쾌검의 고절한 공방.
용추의 곁에서 지켜보던 육군명은 탄성을 터트렸다.
“와, 장난 아닌데?”
보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수준 높은 비무에 개안을 하는 기분이었다.
반대편에 서 있던 유대하도 입을 쩍 벌렸다.
‘다, 단소저가 저 정도의 고수였어?’
비록 진무립이 본신 무공을 사용한 게 아니라지만 방금 보여준 초식은 결코 쉽게 당해낼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가장 놀란 것은 단려화였다.
‘말도 안 돼.’
무광백파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 완벽한 환검의 오의다.
지금까지 이 초식을 완벽하게 막아낸 사람은 단 두 명.
천룡의 감각이라고 일컫는 육감의 소유자인 부친과 오라버니밖에 없었다.
그런데 육감을 갖지 못한 진무립에게 모든 검초가 틀어막히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문 단려화는 팔을 흔들어 검초의 숫자를 한계까지 늘렸다.
까가가가강!
쏟아내는 무형의 검초가 늘어났으나 견고한 검영의 그물에 막혀 나아가질 못한다.
치열한 공방 끝에 이윽고 두 사람의 마지막 검초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콰앙!
육중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주르륵 밀려났다.
지켜보던 육군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더 하다간 누구 하나 다치겠어. 거기까지 하자.”
“그러지.”
진무립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려화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치였으나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숨 막히는 비무의 끝.
나직이 호흡한 진무립은 차분히 내면을 관조했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모든 것을 쏟아냈음에도 음양의 기운이 날뛰려 드는 기미가 없다.
틈만 나면 서로를 잡아먹으려 들던 이놈들이 수십 년 만에 상대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머지않아 기신봉진대법이 풀린다면 서로를 인정한 두 기운은 서서히 하나로 융화될 터.
그리되면 단전 깊숙한 곳에 봉인한 막대한 양의 내력이 마침내 봉인을 풀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단계는 스승에게 이야기만 들어왔던 미지의 영역.
자신조차 어떤 힘을 갖게 될지 아직 모른다.
진무립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싱긋 웃었다.
‘기대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