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16
“네.”
“내일 울릉도로 가서 인계해야 하는데 인어가 여자라서 여자 요원이 한 명 따라가야 할 것 같아요. 혹시 모르니까⋯.”
“아, 네.”
청에서 드디어 인어를 확보한 모양이다.
“참, 양어진 씨 알죠?”
초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물고기랑 대화하는 남자. 홍 주임이 작년 말에 채용 추천했었잖아요.”
“아, 네.”
그제야 금붕어에게조차 멸치로 불린 남자가 떠올랐다.
“그 사람 지금 부산지청에서 일하는데, 서울로 와서 내일 같이 울릉도로 갈 겁니다. 통역으로.”
“아,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새벽 세 시에 홍 주임 집으로 데리러 가면 될까요?”
‘그렇게 일찍?!’이라고 외치는 속마음과는 달리 몸은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바로 퇴근하세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초원은 반쯤 혼이 나간 채로 팀장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느닷없이 1박 2일 울릉도 출장이라니⋯. 그것도 인어를 데리고, 팀장이랑⋯.
“무슨 일이야, 홍 주임?”
멍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오자 병훈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인어요. 내일 울릉도 가서 넘겨주는데 여자 요원도 따라가야 한대요. 새벽 세 시 출발이래요, 하하.”
초원은 우는 얼굴로 웃으며 노트북을 끄고 짐을 챙겼다.
“뭐? 인어 확보했대?”
“그런가 보죠.”
“홍 주임 보고 따라오래요? 새벽 세 시는 너무 했다.”
옆에서 현우가 안쓰럽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휴⋯, 그러게요. 그래도 난 지금 퇴근한다는 거⋯. 금요일에 봐요.”
초원은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둔 재킷을 집어 들고 사무실 복도로 향했다.
“반건조 오징어 사 와! 호박엿도!”
몸을 휙 돌린 초원은 팀장실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목 긋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본인의 헛소리가 팀장실까지 들렸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친 병훈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새벽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발끝을 내려다봤다.
‘빨간 리본 펌프스는 이런 출장에 신기에 너무 귀여운가? 편해서 신긴 했는데⋯.’
5월 초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검은 슬랙스와 빨간 펌프스 사이로 드러난 발목과 발등이 살짝 시렸다.
‘갈아입을까?’
시계를 봤다. 새벽 2시 58분. 바로 앞이지만 올라가서 갈아입고 오긴 너무 늦었다. 자취방 창문을 올려다보며 고민하는데 자동차 엔진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팀장님, 칼 같으시네.’
검정 세단이 초원의 앞에 서더니 팀장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위험한데 안에서 기다리지⋯.”
“괜찮아요. 나온 지 1분 정도밖에 안 됐어요.”
초원이 들고 있던 토트백을 향해 팀장이 손을 내밀었다. 가방에는 하룻밤 자는 데 필요한 짐이 들어 있었다. 팀장이 트렁크 문을 열더니 건네받은 토트백을 넣었다.
트렁크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갈 줄 알았던 그가 조수석까지 와 문을 열어 주었다. 초원은 생각지도 못한 공주님 대접이 어색해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히터를 틀어 둔 건지 시트가 따뜻했다.
“이제 양어진 씨 서울역에서 픽업하고 성남에 있는 안가로 가서 인어를 태울 겁니다.”
운전석으로 와 앉은 그가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네.”
시동이 걸리고 차가 미끄러지듯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핸들을 잡고 있는 구릿빛 손을 초원은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늘은 꿈을 안 꿨다. 일찍 일어난 탓인가? 이제는 너무 자주 꾸니까 감흥이 덜하기도 했다.
“잘 잤어요? 평소 리듬대로 못 자서 피곤할 텐데.”
“아뇨, 저녁 일찍 먹고 9시부터 푹 잤더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6시간도 채 못 잔 거네.”
“팀장님은 잘 주무셨어요?”
“난 대충 눈 좀 붙였어요.”
“일이 많으셨나 봐요. 운전하셔야 하는데 피곤하시겠다.”
“괜찮아요. 익숙하니까. 그나저나 아침은 먹었어요?”
“아뇨. 입맛이 없어서⋯.”
“그럼 이따가 휴게소에서 맛있는 거 사 줄게요. 소고기국밥 좋아해요? 맛있는 데 아는데⋯.”
“네!”
따끈한 소고기국밥을 생각하자 초원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도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팀장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차는 서울역에서 어진을, 성남 모처에서 인어를 태우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인어는 옷을 입고 있으니 20대 인간 여자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유독 창백한 피부와 노란 눈동자, 손가락을 벌리면 보이는 작은 물갈퀴만 빼고.
처음에는 세 사람을 경계하던 인어는 어진이 말이 통한다는 걸 알고 화색이 됐다. 하지만 그 화색은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나자 정색으로 바뀌었다.
‘차멀미라도 하나?’
초원은 뒷좌석에 앉은 어진에게 물었다.
“어디 불편하시대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진이 인어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아픈 데 없다 하시는데요.”
‘그런데 왜 그러지? 인어는 우리랑 표정이 다른가?’
어진이 다시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인어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 해요?”
“아, 그냥 제가 어떻게 여기 취직했는지 말씀드리고 있었어요.”
아⋯. 왜 인어가 정색하고 창밖을 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진 씨, 인어 아가씨 좀 쉬시게 조용히 가는 게 좋겠네요.”
“아, 네.”
운전하던 팀장이 뭐가 웃긴 건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초원은 머쓱해져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어 아가씨라니⋯. 어색했지만 달리 부를 말이 없었다. 어진이 인어의 이름을 말해 줬지만 초원으로선 도저히 발음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뻥 뚫린 새벽 고속도로를 막힘없이 달리던 차가 휴게소로 진입했다. 차가 멈추자 인어가 손에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꼈다. 넷은 차에서 내려 휴게소 푸드 코트로 들어갔다. 새벽 5시라 휴게소는 한산하다 못해 스산했다.
초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인어는 잡식성인가?’
인어가 소고기국밥을 후루룩 들이마시는 진귀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뜨끈한 국밥이 들어가자 졸렸다. 피로를 참고 운전하는 팀장을 생각해서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자면 안 되는데 말이다.
‘차라리 여기 수다쟁이 어진 씨를 앉힐 걸 그랬나?’
초원은 운전하는 팀장의 옆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피곤하면 자요.”
팀장이 시선을 도로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졸린지 어떻게 알았을까?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가?
“아뇨, 저 안 피곤한데요.”
“눈이 반쯤 감겨 있는데?”
팀장이 초원의 얼굴을 흘끗 보더니 말했다.
“이거 다 뜬 건데요.”
“아닌 거 다 아는데?”
“원래 새벽엔 이 사이즈예요.”
도로 저 먼 곳을 바라보던 팀장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어진 씨, 거기 담요 안 쓰면 홍 주임 주세요.”
“아, 네.”
초원은 군소리 없이 어진이 주는 담요를 받아 덮었다. 포근하니까 졸음이 절로 몰려왔다. 무거워서 내려오는 눈꺼풀을 깜빡깜빡하는데 팀장이 조수석 시트 히터를 틀었다.
“팀장님, 안 피곤하십니까? 이렇게 새벽같이 포항까지 운전하시려면 피곤하실 텐데⋯.”
초원은 선잠이 들었다가 어진의 목소리에 살짝 눈을 떴다.
“괜찮습니다.”
“장거리 운전 자주 하십니까? 차는 되게 새 차 같고 좋네요. 몇 년 식입니까?”
초원이 창가로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웅크렸다.
“양어진 씨. 홍 주임 자게 조용히 가죠. 어진 씨도 피곤하면 눈 좀 붙이세요.”
“아, 예. 저는 괜찮습니다.”
초원은 눈을 감은 채로 풋 웃었다.
정말 기묘하고 기분 좋은 꿈을 꿨다.
사막 한가운데 숨겨진 오아시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선 마을과 야자수.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자 잠들었던 마을이 화려하게 눈을 떴다.
이국적인 음악 소리와 낯설지만 입에 침을 고이게 하는 음식 냄새, 아름다운 여인들의 향수 내음이 길거리를 가득 채웠다.
지나가는 누구나 고개를 돌아보게 만드는 미인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남자들을 유혹하고 있었지만, 이 남자의 눈은 오로지 초원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 이끌려 어느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아늑한 침실 안에는 폭신한 비단 쿠션이 잔뜩 놓여 있었고 계피와 오렌지 향이 알싸하게 감돌았다.
아치형 창문 밖으로 그림처럼 펼쳐진 오아시스를 등불을 밝힌 조각배가 점점이 수놓고 있었다.
“초원 씨⋯.”
등 뒤에 선 팀장이 두 손으로 초원의 허리를 감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겨우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온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얇은 천 너머로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그의 몸이 느껴졌다. 초원은 뒤로 손을 뻗어 부드러운 천 위로 그곳을 어루만졌다.
“하아⋯.”
그의 낮은 신음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허리를 잡고 있던 두 손이 점점 위로 올라오더니 봉긋한 가슴을 스쳤다. 초원은 숨이 턱 막혔다.
긴 손가락이 드레스 앞섶의 단추를 하나씩 풀자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구릿빛 두 손이 보드라운 젖가슴 위로 착 감겼다. 익숙한 손길로 옷을 하나씩 벗긴 그는 초원을 두 팔로 안고 쿠션이 잔뜩 깔린 침상에 눕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아니면 이 남자의 열기에 취한 걸까?
팀장의 열렬한 애무를 받고 있자니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괜찮아요?”
“네⋯.”
그가 열에 달뜬 눈으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다 촉촉한 입술을 포개었다. 그 순간 다리 사이로 굵은 무언가가 파고들어 왔다.
침상이 어지러이 흔들리고 끄트머리에 위태로이 걸쳐 있던 쿠션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초원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남자의 뜨거운 두 눈만을 황홀하게 들여다볼 뿐이었다.
“초원 씨⋯.”
가쁜 숨 사이로 그가 이름을 불렀다. 이 세상에서 이 남자만이 아는 그녀의 이름을.
“네⋯.”
“사랑해.”
“으음, 팀장님⋯.”
“네?”
초원은 눈을 번쩍 떴다.
빨간 펌프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울릉도 가는 길, 팀장의 차에서 잠들었다는 게 생각났다.
“왜 불렀어요?”
팀장은 여전히 운전대를 잡은 채, 꿈에서만큼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여기 어딘가요?”
“포항이요. 거의 다 왔어요.”
“그렇구나⋯.”
초원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팀장님. 혹시⋯, 제가 잠꼬대 같은 거라도 했나요?”
속으로 ‘제발 아니라고 해 주세요!’를 외치며 물었다.
“아뇨. 코도 안 골고 조용히 잘 자던데⋯.”
“아, 그렇구나⋯.”
안도한 그녀는 다시 시트에 기대고 담요를 턱까지 끌어 올렸다.
“아, 자다가 웃긴 하던데⋯. 무슨 좋은 꿈 꿨어요?”
팀장이 초원을 흘깃 바라보며 슬며시 웃었다.
‘울릉도는 왜 울릉도일까? 울렁대서 울릉도일까?’
멀미약을 먹었는데도 효과가 없었다. 아니, 약을 먹어서 이 정도인 걸까?
통로 너머에 앉은 경북지청장과 초자연적개체관리실장은 멀미를 안 하는지 아까부터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른쪽 끝에 앉은 어진은 TV를 보고 있었고, 어진과 초원 사이에 앉은 인어는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었다.
‘멀미는 나만 하네⋯.’
초원의 왼쪽에 앉은 팀장은 피곤했는지 배가 출발하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그녀도 억지로 눈을 붙일까 하다가 이번에는 ‘팀장님⋯.’으로 안 끝나고 ‘팀장님, 거긴 안 돼요.’로 끝날까 봐 자는 걸 포기했다.
‘‘사랑해.’라니 내 잠재의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 그렇게 외로운가? 마음 없는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을 정도로?’
초원은 곤히 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엿봤다.
‘난 이 남자랑 연애라도 하고 싶은 걸까?’
조승준 팀장이 그녀에게 어떤 사람인가 묻는다면 초원은 주저 없이 ‘존경하는 상사’라고 했을 것이다. 팀장이 일하는 걸 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셨지?’라는 감탄을 할 때가 많았다. 언젠가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언젠가 팀장과 사귀고 싶다’, ‘사랑에 빠지고 싶다’ 이런 생각은 요즘도 해 본 적 없었다. 마음은 한결같이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그가 주인공인 야릇한 판타지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그 사건의 부작용일 뿐이겠지.
몸과 마음이 이렇게 따로 노는데 ‘사랑해.’라니.
잠재의식은 뭘 말하려는 걸까?
드디어 울릉도에 도착했다. 겨우 네 시간이었을 뿐인데 흔들리지 않는 땅에 발을 딛는 느낌이 어색했다. 초원은 시원한 공기를 잔뜩 들이마셨다.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
일행은 지청장과 실장을 따라 고급 요트가 늘어선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이건가?”
“어, 이거네.”
두 간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요트에는 멋들어진 글씨체로 ‘Dragon Palace IV’라고 적혀 있었다.
‘드래곤 팰리스라니⋯. 말 그대로 용궁 4호네.’
요트 안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내다보더니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청에서 왔습니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