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41
연애학원 장학생, 그 남자
“아니, 한국에 무슨 뱀파이어가 있다고⋯.”
병원 복도를 걷던 초원은 벽에 걸린 십자가를 곁눈질했다. 골목마다 있는 게 교회고 십자가인 곳에 뱀파이어라니 말도 안 됐다.
유럽은 요즘 뱀파이어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들었지만 거긴 마늘을 잘 안 먹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마늘을 알감자처럼 구워 먹고 온갖 요리에 한주먹씩 턱턱 넣는 나라에 뱀파이어에 물린 시체라니⋯.
“뭐, 어쩔 수 없죠. 확인만이라도 해 달라니까.”
어깨를 으쓱한 현우는 얼굴에 ‘아, 짱 귀찮아.’가 쓰여 있는 초원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귀찮아하는 것도 귀엽다. 저도 모르게 그는 초원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앗, 만지지 마요.”
초원이 얼굴까지 찡그리며 몸을 피하자 현우는 머쓱해졌다.
“미안⋯.”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 변했다. 전에는 서로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였는데, 이젠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무뚝뚝한 구석은 있는 여자였지만 지금은 그 결이 다르다. 투명한 벽이 생긴 느낌이라고나 할까.
난감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그가 뭘 깨달았는지 표현하고 싶어도 저렇게 거리를 두는 사람에겐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나한테 화난 거 있나?’
깨어난 날, 초원의 따가운 눈빛을 불현듯 떠올린 현우는 아차 싶었다. 설마, 그것 때문일까?
지하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 초원이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좀처럼 원하는 게 안 찾아지는지 낮게 투덜대더니 초콜릿을 꺼내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니면 그냥 그날인가?’
“아, 오셨네요.”
“김영욱 경위님, 오랜만에 뵙네요.”
초원과 현우는 번갈아 가며 마포경찰서 김 경위와 악수를 했다. 김 경위는 경찰청에 접수된 특이 현상을 특관청으로 인계하는 일을 했다.
“제가 보내 드린 건 다 보셨죠?”
“네.”
올해 수도권에서 발견된 외국인 변사체 여러 구에서 패턴을 발견했다는 김 경위가 수사 자료를 보낸 게 저번 달이었다.
20~30대 사이인 변사체는 미국, 일본, 독일 등 국적도 발견 장소도 제각각이었지만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홀로 한국을 방문했다는 점과 시신에 혈액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경동맥에 구멍 두 개가 나 있다는 점.
“그거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시신 안치실 앞을 오가는 병원 직원들을 곁눈질하며 김 경위가 물었다.
“글쎄요⋯. 한국은 그런 생물이 살 만한 데가 못 되는데⋯.”
두꺼운 수사 자료를 끌어안으며 초원은 겸연쩍게 웃었다. 초원의 말이 맞다는 듯 현우도 옆에서 거들었다.
“저희 청 생기고 나서 뱀파이어 건은 한 번도 접수된 적 없거든요.”
“그래도 일단 오늘 수습된 시신 한 번 보시고 판단하시죠.”
김 경위가 안치실로 향하는 문을 열자 두 사람은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있는데도 서늘함에 몸을 떨던 초원은 코트 깃을 단단히 여몄다. 시신 안치실이 싸늘한 탓인지, 눈앞의 백인 남자가 기괴할 정도로 핏기가 없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신원은 확인됐나요?”
현우의 물음에 김 경위는 고개를 저었다.
“나체로 발견돼서 신원은 아직 모르고요. 발견 장소 주변에서 증거 수집은 해 뒀는데 쓸 만한 게 나올까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번엔 한강이 아니었나 보네요.”
다른 시신들은 거의 한강에서 발견되어 쓸 만한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물어서 생긴 거라면⋯.”
목에 뚫린 구멍을 유심히 관찰하던 초원이 고개를 들었다.
“타액이 묻어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렇죠. 안 그래도 샘플 채취해서 국과수에 보내 놨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거기도 일이 산더미인 데다가 연말이라⋯.”
초원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일산 연구소로 보내면 더 빨리 결과를 받아 볼 수 있겠지만 아직 특이 생물 짓이라고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덜컥 일을 넘겨받아 버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결과 나오면 알려 주세요.”
이렇게 마무리 멘트를 뱉고 한 발짝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현우가 시신의 머리 쪽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킁킁대기 시작했다.
“뭐 해요, 선배?”
“여기 와서 한 번 맡아 봐요.”
얼굴을 찡그리던 초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다가갔다.
“냄새나지 않아요?”
“흠⋯. 그렇네요.”
시신의 머리카락에서 옅은 향냄새가 나고 있었다.
“어디 제사나 초상집이라도 다녀왔나?”
“외국인이 여기까지 와서 제사나 초상집엘 왜 가요?”
고개를 든 초원은 현우의 엉뚱한 소리에 피식 웃었다.
“뭐, 강남에서 ‘도를 아십니까’한테 끌려가서 제사라도 지냈나 보죠.”
이제는 김 경위까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전혀 기죽지 않은 현우는 초원이 들고 있던 수사 자료를 뺏어 들더니 무언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향 마음에 들어요?”
“네?”
집으로 가는 길, 택시 안에서 창밖만 보던 초원은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현우를 바라보았다.
‘시체에서 나는 향이 왜 마음에 들어?’
초원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 눈만 깜빡였다.
“내가 준 향수 말이에요.”
“아⋯.”
그제야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초원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맡아보기는커녕 열어 보지도 않았다. 향수는 종이 백에 담긴 그대로 방구석 어딘가에 놓여 있었다.
향수는 그냥 향수일 뿐이라고, 그냥 친한 직장 동료가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눈 딱 감고 쓸 수도 있었을 거다. 초원이 여전히 혼자였다면.
기껏 선물해 준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승준이 알면 불쾌해할 테니 빨리 처리해야 했다. 그렇다고 그 비싼 걸 버리긴 아까우니 신정 때 언니에게 주려는 생각이었다.
느닷없이 초원을 향해 몸을 기울인 현우가 코를 킁킁댔다.
“근데 왜 안 써요?”
“지금 쓰던 거 다 쓰고요.”
창 쪽으로 몸을 피하던 초원이 어정쩡한 미소를 짓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집 근처에 초밥집 새로 생겼던데.”
“그래요?”
현우의 말에 초원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며 관심을 보였다.
“별점 괜찮던데 가 볼래요?”
“아뇨, 괜찮아요.”
언제 가자는 건지 말도 안 했는데 초원은 거절부터 했다. 초밥이라면 마트에서 할인 스티커를 붙이는 시간을 외우고 다닐 정도로 초원이 사족을 못 쓰는 건데 말이다.
“초원 씨, 나한테 섭섭한 거 있죠?”
“네? 아뇨.”
“그때 엄마가 연주 덕에 나 깨어났다고 했을 때 초원 씨 화난 것 같았는데.”
“아, 그거요? 괜찮아요.”
초원은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꺼내는 건가 싶었다. 그때는 화가 났지만 지금은 홀랑 까먹고 있던 일이었다.
“미안해요.”
“괜찮다니까요. 모르시니까 그렇게 말하실 수도 있죠.”
“근데 난 아니까. 엄마는 멋모르고 연주 덕이라고 했지만 난 알잖아요. 다 초원 씨 덕분인 거. 늘 고맙게 생각하는 거 알죠?”
대답 대신 생긋 웃는 초원을 보니 현우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때 이 미소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초원은 알까?
“병실에 누워 있을 때, 초원 씨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요.”
묘한 말에 초원은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이내 저 말도 늘 그랬듯 별 의미 없으리라 생각하며 넘겼다.
“초원 씨가 곁에 있어 줘서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몰라요.”
“다행이네요. 난 괜한 민폐인가 싶었는데.”
“민폐는 무슨⋯.”
민폐? 혹시 엄마가 그만 찾아오라고 눈치를 준 걸까? 현우에게 엄마가 했던 말을 떠올려보니 그랬을 법도 했다.
‘아이고, 그 아가씨는 왜 자꾸 찾아오는지. 혹시나 연주랑 마주쳐서 괜한 의심 받을까 봐 얼마나 신경 쓰인 줄 알아? 아니,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밤에 또 찾아올 건 뭐니? 눈치도 없지.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랐네. 연주가 별소리 안 해?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해.’
하지만 연주도 초원의 이야기를 현우에게서 익히 들어 아는데 별소리를 할 리가 있나. 오히려 반가워했으면 했지.
“어⋯, 혹시 우리 엄마가 기분 나쁜 소리 했어요?”
“아뇨.”
초원은 이렇게 대답했지만 현우는 안 했으면 우리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됐어요. 사과할 일 없다니까요.”
“엄마가 뭐라고 했든 신경 쓸 거 없어요. 연주도 그런 사이 아니고. 아, 그날 안은 건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그런 거지만, 이젠 깔끔하게 정리하려고요.”
초원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왜 횡설수설하며 연주와의 사이를 저에게 해명하는 걸까? 정리하든 말든 초원이 알 바 아닌데. 그냥 혼자 하는 각오 같은 건가?
“아, 뭐, 잘됐네요. 선배도 선배 인생 살아야지. 과거에 언제까지나 매여 있을 순 없으니까요.”
초원은 잘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곤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럼 초밥 먹으러 갈래요?”
“네? 나 저녁 약속 있어요.”
“그럼 내일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끈질긴 걸까? 초밥이 그렇게 먹고 싶나? 같이 갈 사람이 초원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내일도 약속 있죠. 연말인데 스케줄 꽉 차 있지. 나 인기녀인 거 몰라요? 12월에 나랑 밥 먹으려면 최소 석 달 전에는 예약해야 하는데.”
“와, 너무하다. 우리 사이에⋯.”
초원이 피식 웃더니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손가락이 핸드폰 위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선배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팀장님인 거 알죠?”
그 말을 끝으로 핸드폰에 정신이 팔린 초원을 현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다. 화난 게 아니었나? 아니면 이 정도로는 풀릴 화가 아닌 건가? 저 시큰둥한 태도는 어떤 감정에서 나온 걸까?
분명 제게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왜 연주를 정리하겠다는 말에도 남 일처럼 덤덤하게 구는 걸까? 설마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아니면 연애를 할 마음의 준비까지는 아직 되지 않은 걸까?
그리고 지금 대체 누구랑 톡을 하는 걸까? 바쁘게 손가락을 놀리는 그녀가 좀처럼 돌아봐 주지 않자 현우는 창밖으로 씁쓸하게 고개를 돌렸다.
[집이에요?]6시가 넘은 시각. 오늘은 칼퇴하고 같이 저녁을 해 먹기로 했으니 승준은 이미 초원의 자취방에 도착했을 터였다.
[응. 오는 중?] [네] [얼마나 걸리는데요?] [한 20분 정도? 잘 모르겠어요.] [흠⋯.] [근데 우리 뭐 해 먹어요?] [뭐 먹고 싶은데요?] [글쎄요. 근데 우리 집에 먹을 게 있긴 한가요?;;] [어] [뭐요?] [30대 짐승남]푸훗 웃음을 터트리던 초원은 현우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 멋쩍은 듯 고개를 숙였다.
[-_- 안 먹어요] [왜? 초원 씨가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그래서 폭*-_-*식하니까 안 돼요.] [ㅋㅋㅋㅋ] [아 쫌 진지하게! 장부터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듯] [그럼 20분 정도 있다가 마트에서 만날래요?] [그래요]초원은 마트 위치를 찍어 톡으로 보내고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누구?”
“아, 가족 단톡방이에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현우의 얼굴이 어쩐지 떨떠름해 보였다.
“초원 씨 가족은 사이좋구나. 부럽네요.”
“아, 아빠가 아재 개그를 해서⋯.”
어색한 미소를 띤 초원은 어쩐지 목 주변이 갑갑해져 목도리 아래 목걸이로 손을 가져갔다.
‘그냥 얘기해 버려?’
그렇지만 사내 연애는 안줏거리가 되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씹히고 또 씹히는 걸 익히 봐 왔다.
사실 뒷담화의 주인공이 되는 건 이미 이골이 난 초원이었다. 그러니 상사한테 꼬리친 여우 같은 년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승준이 깨끗한 척 혼자 다 하더니 뒤에서는 부하 직원한테 손댄 놈이란 소리를 듣게 할 순 없었다. 능력이 출중한 만큼 호시탐탐 약점을 노리는 내부의 적도 많을 게 분명했다. 초원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남자에게 약점이란 자신밖에 없었다.
좁은 택시 안, 라디오의 웅얼거림을 가르고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목도리 아래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초원을 현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길이 막혀서⋯.”
길에서부터 뛰어왔는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사과는 길 막은 놈들이 해야지.”
마트 입구 벤치에 앉아 있던 승준은 웃으며 초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뛰어올 필요 없었는데⋯. 잠깐 앉을래요?”
“아뇨, 아사하기 전에 장부터 봐요.”
정말 아사할까 걱정이라도 되는 듯 진지한 초원을 보고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 진짜. 내가 세 살짜리도 아니고⋯.”
카트 손잡이와 승준의 손바닥 사이에 낀 손을 비틀어 뺐지만 이내 다시 붙들렸다.
“누가 잃어버릴까 봐 잡고 있는 줄 아나?”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회사에서 멀지도 않은데⋯.”
초원은 혹시 아는 얼굴이 있나 싶어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말도 아니고 월요일 저녁 시간에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굵은 손가락이 가는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왔다.
“그리고 손 안 잡는다고 안 들키나? 같이 장 보는 것만 해도 뻔한데.”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손 안 잡고, 따로 온 사람처럼 멀찍이 떨어져 걸어도 같은 카트를 쓰는 데 누가 안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할까?
초원은 붙잡힌 손을 더는 빼지 않았다. 맞잡은 손의 온기와 손등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엄지의 감촉에 마음이 포근해졌다. 이렇게 일상을 공유하며 연애하는 기분을 만끽하는 게 몇 년 만인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