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466)
466화 일오, 흑암의 노예 (1)
푸드드득-
밤의 밀림에서 알 수 없는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참사교의 본단.
암벽을 파고들어서 만든 건물의 창가에서 그게 보였다.
일오.
그는 흑암의 곁에서 흑암을 보좌하는 시종이자 하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그는 흑암의 곁을 지켰다.
아마, 아직 얼굴에 수염도 나지 않았던 소년일 때부터였다.
일오는 산적의 아들이었다. 그것도 채주의 아들.
그렇다고 대접받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산적 채주가 납치한 여자였다.
듣자 하니 원래는 제법 고귀한 태생의 규수였다는데, 알 길은 없었다.
술에 취한 아비가 그의 어머니를 때려죽였기 때문이다.
일오는 산적 졸개로 살 수밖에 없었다.
아비에 대한 원한은 깊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 무력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삶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중원에서 산적질을 하려면 눈이 좋아야 하는 법인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홀로 길을 걷는 무인 한 명을 잘못 건드렸다.
그는 맨손으로 산적들을 전부 찢어 죽였다.
수십 명의 산적이 고깃덩어리가 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일오가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하나였다.
그 와중, 도망치던 채주의 등에 칼을 찍었기 때문이다.
산적채를 몰살시킨 무인, 흑암은 일오에게 함께 가겠냐고 물었다.
그래서 일오는 여동생의 손을 잡고 그를 따라갔다.
참으로 별 것 없는 이야기였다.
마치 통속소설에서나 나올 듯한 형편 좋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일오라는 개인에게 그것은 분명 구원이었다.
그가 참사교에 몸을 투신한 대가로 여동생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었다.
흑암은 자신의 곁을 지키는 일오에게 봉록을 꽤 많이 주었다.
일오로서는 돈을 쓸 일이 없었으니, 전부 남경에 사는 여동생에게 부쳤다.
여동생과는 서신을 종종 교환한다.
그녀는 괜찮은 다루를 차려서 살고 있는 듯했다.
그 이후로 거의 만나지 못했지만, 일오는 적어도 여동생이 잘 살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다만…….
참사교의 계획이.
흑암의 계획이.
설마 그런 것일 줄이야.
일오의 행복도, 여동생의 행복도 어차피 무상한 것이었다.
모두 사라지는 바에야.
울적했으나. 그렇다면 일오는 흑암의 뜻을 저버리기로 결심했는가.
아니, 아니었다.
그와 여동생의 삶은 어차피 덤으로 주어진 행운이었다.
원래라면 산적채에서 개처럼 구르다 죽던지, 어딘가의 감옥에서 썩어 죽었을 삶이었다.
일오는 끝까지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로 결정했다.
그래, 이를테면 차를 우리는 것 같은 일들.
형산자락에서 흑암은 앞으로 차를 우리지 말라 명하였다.
하지만 이곳 남만에 온 뒤, 그는 또 차를 찾았다.
이유는 일오도 알 것 같았다.
“일오입니다.”
일오는 흑암의 거처 앞에서 기별을 전했다.
그의 손에 들린 쟁반에는, 찻잔이라기보다는 주발이나 대접에 가까운 것이 올라가 있었다.
답을 받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코를 찌르는 듯한 쇠 냄새.
“차가운 차를 우려 왔습니다.”
일오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주군에게 말하였다.
흑암이 앉아 있었다.
거인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거대해진 흑암의 모습은, 또 한 번 변해 있었다.
“……이리 다오.”
내민 손에는 털이 북슬북슬했다.
일오는 눈을 내리깔았다. 사람의 발 대신, 거무튀튀한 발굽이 달려 있었다.
보지 않고 찻잔을 건넬 수는 없었기에, 그는 다시 시선을 들었다.
흑암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름 준수했던 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앞에 있는 것은, 구리로 된 뿔이 달린 괴물이었다.
흉악한 이빨이 삐죽삐죽 드러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괴물.
흑암은 찻잔을 잡아 단숨에 들이켰다.
저런 형상이 된 뒤, 그는 끊임없는 갈증을 느꼈다.
그 모습을 일오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주군은 강하다. 너무도 강하다.
아마, 현재 참사교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강하리라.
어떤 천신도 지금의 흑암을 상대로 승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강하다는 이랑진군도, 제천대성도, 나타태자도.
심지어 그들이 한 번에 덤비더라도 분명…….
“차를 더 우릴까요?”
일오가 조심스레 그리 말했다.
흑암은 손을 저어서 그것을 물렸다.
그러자 어찌해야 할지, 나가야 할지도 알지 못하는 일오는 가만히 있었다.
흑암은 조용히 그런 일오를 보았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의 하인은 제 주군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흑암은 조용히 생각했다.
‘나약하다.’
일오를 보면, 아니 그와 같은 인간들을 보면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하나같이 나약하기 그지없다.
종종, 그런 나약함을 극복하고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 있었다.
그 먼 옛날 이후 환생을 반복해 온 흑암은 그런 무인들과 친히 겨뤄 보는 것을 즐겼다.
가능성을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을.
허나, 그런 짓들도 지금에 와서는 전부 무용한 일이다.
그저 여흥이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일오라는 멍청한 소년과 그 여동생을 거둔 것도 여흥일 따름이었다.
허나, 생각보다 오래 부려먹었다.
흑암은 왕이었다. 왕은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부리는 위치였다.
백성이 왕을 따르는 일은 당연하기에, 대가를 안겨 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흑암 본인은 왕이 아니었다.
왕이 아닌 그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사람을 부릴 수는 없는 법이다.
흑암의 정신상태는 이전보다 불안정해졌다.
쉽게 폭급해지고, 피를 갈구했다.
사실 마시고 싶은 것은 찻물 따위가 아닌 피.
최근 변덕이 늘었던 그다.
갑작스런 결정도, 그러한 정신상태에 기인한 것이다.
“너는 오랫동안 나를 섬겨 왔다.”
“허나 대가를 준 적이 없군. 원하는 것이 있느냐?”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저를 구해 주시고 제 여동생을 사람답게 살게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일오가 깊게 읍했다.
그 공손한 태도는 분명 진심이었다.
“네가 여동생을 만난 것이 얼마나 되었지?”
“……십일 년입니다.”
“오래되었군.”
흑암은 잠시 뜸을 두고 말했다.
“가라.”
“네 여동생을 만나러 남경으로 가거라.”
“그게 무슨. 저는 끝까지 당신을 모실 생각이었습니다!”
일오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무례한 일이었지만 흑암은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더 이상 내게 필요가 없다.”
일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차를 우리는 것이 임무라고?
한심하기 그지없는 소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차라도 우리는 것이다.
일오는 무공도 평범한 수준이었고 차력마저 쓰지 못했으니.
흑암이 물이나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게 된 이후부터는 그러한 존재가치마저 사라졌다.
“떠나라, 지금 당장.”
“남경으로 당장 출발하면 일주일 정도는 그곳에서 머무를 시간이 있겠지.”
하나 남은 혈육과 세상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는 기회.
일오의 목울대가 꿈틀했다.
“가라!”
흑암이 갑자기 호통을 쳤다.
일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비칠비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몸으로 깊게 절했다.
그러고는 마치 혼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으로 흑암의 거처를 떠났다.
아무리 일오의 능력이 보잘것없다지만, 제 몸 간수는 할 수 있을 터.
그는 흑암의 명을 따라 당장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리 제 하인을 떠나보낸 흑암은 가만히 침묵했다.
교주, 귀령, 망혼과 달리 흑암의 역할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가만히 대기하고 있다가 혹시나 찾아올 방해자들을 무찌르면 될 일.
그리 고개를 숙이고 있던 흑암이 시선을 올렸다.
벌레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흑암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고, 그는 누군가의 이름을 외쳤다.
“도철!”
도철(饕餮).
그것은 궁기, 도올, 혼돈 등과 더불어 사흉(四凶)이라 불리던 전설적인 괴물의 이름이었다.
이곳 참사교 본단에 그런 괴물이 존재했던가.
흑암의 분노를 그대로 받은 벌레는 산산조각 나서 떨어졌지만, 곧 천장의 틈에서 진액과 벌레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이 곧장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
흑암의 모습도 인간 같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꿈틀대는 그 형상은 정말 괴물 같았다.
“그 옛 이름은 그만 부르지. 망혼이라는 이름을 쓴 지가 벌써 몇천 년인데.”
도철이라 불린 괴물의 정체는 바로 호교사령 중 망혼이었다.
전설로 전해지는 사흉 중의 하나가 바로 망혼의 정체였다.
“할 짓이 그리 없어 나를 염탐했나.”
“할 짓이 없는 건 당신 같군. 교주가 이 일을 안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런 상황에 교도를 밖으로 풀어 주다니.”
“일오 그놈은 내 하인이다. 감히 왈가왈부 하지 말라.”
망혼이 낄낄 웃었다.
“큰소리치지 말지, 그것이 오히려 초라해 보이니까.”
흑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망혼이 슬금, 조금 물러났다.
“싸우러 온 것은 아니니까 할 말만 전달하겠다. 천기가 이상해. 며칠 내에 당신이 움직일 일이 생길 수도 있어.”
“그럴 일이 생기면 알아서 한다.”
“흐, 그러길 바라지.”
망혼의 몸이 바람처럼 흩어졌다.
무수한 벌레들의 군집이 된 그는 어디든 자유롭게 움직였다.
비좁은 창살들을 통과하여 순식간에 제 거처로 돌아온 망혼.
다시 사람의 형태를 취한 그가 누군가를 불렀다.
“십칠령.”
그러자 어둠 속에서 인영 몇 개가 떠올랐다.
십칠령(十七靈), 그 옛날 폐기했던 은잠귀들 대신 새로 만들어 낸 망혼의 수족들이었다.
“흑암의 노예가 본단을 나가고 있을 것이다. 찾아서, 죽여라.”
그리 말한 망혼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어딜 감히 혼자 사람인 척이야. 깔끔히 처리하고 묻어. 흑암 그놈이 알아채지 못하게 죽이기 전에 뭐가 붙어 있는지 잘 검사해라.”
십칠령들은 두 명만 모여도 초절정 고수를 죽일 수 있다.
홀로 본단을 떠나는 일오를 잡아 죽이는 것은 잘 익은 감을 따 먹는 것보다 쉬울 터.
십칠령 넷이 스르륵 녹아들 듯 사라졌다.
“날이 밝아지면 나가지?”
보초를 서던 교도가 일오에게 말했다.
얼굴을 붕대로 감고 있는 교도.
너덜너덜 뜯어진 붕대 너머로 뱀의 비늘 같은 피부가 보였다.
아마 뱀 요괴에게 차력을 빌린 자일 것이다.
“아니요…… 지금, 지금 떠날 겁니다.”
여전히 얼굴이 창백한 일오가 그리 말했다.
그가 흑암의 하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흑암의 명을 받아 떠나겠다는 그를 막을 사람 역시 없었다.
“그러든지.”
보초 또한 진심을 다해 일오를 막은 것은 아니었다.
일오는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의 눈은 평소처럼 맑지 않았다.
흑암을 떠나게 된 것은 절반은 그의 의사, 나머지 절반이 언령(言令)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돌아갈 것이다.
남만을 빠져나가 남경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을 여동생을 만나, 세상의 마지막을 함께 보낼 것이다.
그런 생각이 일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밤의 밀림을 홀로 걷는 것은 미친 짓처럼 보이지만, 지리에 익숙한 무인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일오는 수풀을 헤치며 길을 나아갔다.
왼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이런 밀림에서 쓰기 좋은 박도를 잡았다.
촤악, 촥.
원래 길이었던 곳이지만, 겨우 며칠 만에 박도를 쓰지 않으면 못 지나갈 정도로 수풀이 자라 있었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길을 내던 일오가 우뚝 멈췄다.
앞에 있는 어둠. 그 안에서 무언가를 본 것이다.
“……거기.”
산짐승일까.
일오가 횃불을 그 방향으로 들이댔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을 조용히 노려보던 중이었다.
일오는 순간 횃불을 떨어뜨릴 뻔했다.
저 깊은 어둠 너머로 사람의 안광이 번쩍였다.
그리고, 차가운 손이 일오의 입을 덮었다.
“네놈은 누구냐.”
그 손의 온도보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
일오가 흠칫 놀랐다.
그를 제압한 이는, 바로 이강이었다.
“……참사교도인가?”
“왜 저렇게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나온 거지.”
어둠 속에서 청림도들이 천천히 몸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