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72)
72화 결자해지(結者解之) (1)
이강은 눈을 비볐다.
그의 눈은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어제 너무 눈물을 많이 흘린 탓이었다. 물론 이강이 운 것은 아니었다.
불사신검이 손녀인 백영령을 끌어안고 같이 눈물을 흘렸다. 이강의 눈이 붓는 것도 당연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네.’
역시 빙의의 후환이 몸에 남았다. 이강은 얼굴을 찡그려서 뻐근한 몸을 풀었다.
「크험, 미안하다.」
‘그냥 고맙다고 하시면 됩니다.’
「고, 고맙구나.」
사실 이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여태까지 먹은 영약이 있으니 죽지는 않겠구나 각오하고 빙의를 시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후유증은 여태까지와 달리 버틸 만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여태의 빙의와는 달리 이번에는 무공을 쓰지 않았기 때문 같았다.
무리하게 기혈을 잇거나 검술을 쓴 것이 아니라 그저 말을 할 수 있도록 목소리만 빌려준 정도였다.
다행히 이강은 당장 다음날 열린 대회의에 참가할 수 있었다.
상석에는 태상장로가 앉아 있었다. 오늘은 장막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표정은 역시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분명 그녀의 분위기는 조금 바뀌었다.
이전에는 고집스러움과 냉혹함이 느껴졌던 것에 비해 지금은 여유로움이 엿보인다.
불사신검과 그녀 간에 잘못 매였던 매듭은 어제 분명 느슨해졌다. 그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여태까지와는 다를 것이다.
“가주의 말에 앞서, 한 가지 공표할 것이 있다.”
태상장로는 가주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백영령은…….”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렸다.
이곳은 장로원이 아니라 적룡전이었다. 장로회의가 아니기에 총관을 포함한 여러 가신들도 함께 배석했다.
“오늘 밤 자정을 기점으로 태상(太上) 장로로서의 지위를 반납하겠다.”
청천벽력같은 선언이었다.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태상장로란 가문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 가주에 준하는 권한이 있는 위치였다.
원래는 그런 직위가 없었는데, 워낙 백영령의 업적이 컸기에 이례적으로 부여된 자리였다. 그런 권한을 스스로 반납한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가주 백류산이 일어서서 태상장로에게 예를 표했다.
“태상장로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백 세가 넘어서까지 가문에 삶을 바친 어른에 대한 예우였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다른 장로와 가신들 역시 가주를 따라 예를 표했다.
이강 역시 두 손을 모으고 예를 표했다.
그의 옆에는 백하준이 엉거주춤 형의 동작을 따라 했다.
“읏.”
그러더니 가슴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린다.
“넌 그냥 서 있어.”
“으응.”
백하준의 부상은 거의 회복되었다. 천운이 따랐을까. 아니면 이강이 그에게 먹인 영단이 효험을 낸 것일까. 하준은 다행히 후유증을 겪지 않았다. 오히려 내공이 더 늘어났다고 했다.
“긴장되냐?”
“조금.”
“진작 해야 했던 일이었어.”
“그런가…….”
하준은 평소보다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허리춤에는 새로운 검을 하나 차고 있었다. 얼마 전에 화영서에서 새로 얻은 한철검이었다.
소가주가 될 자에게 수여되는 그 검이다.
태상장로을 향한 예를 마무리한 후, 가주 백류산이 고개를 돌렸다.
“백하준은 올라오라.”
가주가 하준을 불렀다. 하준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더니 이강을 한번 돌아보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뚜벅뚜벅 중앙으로 걸어 나가 가주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소자, 부름을 받았습니다.”
백류산이 자신의 막내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오래전부터 하준을 소가주로 책봉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장로원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태상장로가 이강을 소가주로 점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내심 포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태상장로는 마음을 뒤바꾸었다.
태상의 직위를 반납하기 전 마지막으로, 그는 가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선조들의 이름 아래. 대 백씨세가의 39대 가주로서 천명한다.”
가주 역시 공식행사 외에는 입지 않는 화려한 장포를 걸친 상태였다.
“오늘, 내 아들 백하준을 소가주로 책봉한다.”
이미 이야기가 된 일이었기에 장로들은 놀라지 않았다. 그저 약속된 대로 두 손을 모아 들 뿐.
가주의 아래에 서 있던 총관이 붉은 천에 싸여 있던 술잔을 건넸다.
“공자님.”
하준은 얼른 잔을 받아들었다.
그 앞으로 다가온 백류산이 제례에 쓰는 백주를 따라 주었다.
“마시거라.”
하준은 공손하게 술잔을 들이켰다. 한잔을 비우자 태상장로가 또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장로원의 지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들이켰다.
속이 홧홧하고 얼굴이 뜨거웠다.
하지만 하준은 멍하니 있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 순간이었다.
“조상님들께 향을 피우고 술을 올리거라.”
아버지의 나지막한 지시로 그는 향로에 향을 올렸다. 앞에는 선조들의 석상이 하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준은 석상들을 돌아보다가, 불사신검의 석상을 바라보고 그쪽에 술잔을 올렸다.
뒤를 돌아보자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하준은 그들 중에서 형 이강을 찾아냈다.
“백씨의 이름이 천세(千世) 동안 이어지길.”
가주의 담백한 선언에 가신들이 화답했다.
환호와 축복 속에서 하준은 이강과 눈이 마주쳤다. 이강이 빙긋 웃고, 그제야 굳어 있던 하준 역시 활짝 웃을 수 있었다.
하준은 오늘 소가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 말은, 이강이 드디어 장손으로서의 의무를 벗어던졌다는 말이 되었다.
“휴우. 이제 한시름 덜었네.”
하준이 소가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강이 청림으로 가기 때문이었다.
급작스러운 소가주 책봉식 이전에 이강의 청림행 역시 허락을 받았다.
「녀석, 세가의 가주라는 것이 얼마나 존경받는 일인데, 그리도 하기가 싫더냐.」
어차피 몸을 고치기 위해서는 청림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불사신검은 그런 핀잔을 주었다.
이강은 어깨를 으쓱함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허리춤에는 검 한 자루가 매여 있었다.
당연하지만 유성아였다. 장로원에 걸려 있는 것이 가품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태상장로와 가주는 이강이 유성아를 맡도록 허락했다.
장로원에 걸어 둔 것이 가짜였다고 밝히는 것도 망신이었으니, 이 일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함구령이 떨어졌다.
그 덕택에 숙원이 풀린 불사신검은 이강과 함께할 수 있었다.
「령이 저 아이가 웃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줄이야. 허허허.」
불사신검은 미소를 짓는 태상장로를 보며 눈가를 훔쳤다. 태상장로의 독기가 빠진 것처럼 불사신검 역시 성격이 유해졌다.
그는 손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보며 말했다.
「하하핫, 보아라.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고 귀엽지 않느냐?」
‘저한테는 증조할머니세요.’
「하하하하!」
저리 좋아하니 이강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요즘 들어 문제가 생겼으니.
「그래, 죽어 지내다가 이런 일도 오고…….」
‘어.’
「후회는 많았으나, 돌이켜 보면 늘 감사함이 많았던 일생이었다. 그래…….」
불사신검의 모습이 빛나면서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이강은 화급하게 허리춤의 검집을 두드렸다.
‘성불 멈춰요!’
「어엇, 그, 그랬지.」
숙원이 풀린 불사신검이 하루에도 한두 번씩 성불해 버리려고 하는 것이 문제였다.
‘청림에 가서 제 몸 고칠 때까지는 참아야죠. 천영검식도 다 가르쳐 주고.’
「알고 있다. 미안하다, 미안해.」
불사신검이 성불해서 영력을 남기고 간다고 해도, 이강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청림에 갈 때까지는 불사신검이 지상에 남아 주어야 했다.
입맛을 다시던 불사신검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렇게 청림에 가 버리게 되면 조금 아쉽겠구나.」
‘뭐가요.’
「백진태 그놈 말이다.」
이강은 조용히 소가주 임명식을 지켜보았다.
숙부 백진태는 처형이 결정되었다.
죽이기는 좀 그렇고, 단전을 폐하고 양팔의 근맥을 끊어서 교화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당사자인 백진태가 거부했기에 처형은 피할 수 없었다.
「마무리는 네 손으로 지었어야 했는데.」
불사신검의 목소리에서는 잔혹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강은 부정하지 않았다. 복수의 허무함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봤지만 공감하지 않았다. 죽은 소화와 하인들에 대한 원한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강이 순순히 말하자 불사신검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이강의 성격이 무른 편은 아닐 텐데, 생각보다도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 * *
백씨세가의 외원(外苑).
그중 사람의 발길이 가장 뜸한 곳을 꼽자면 역시 뇌옥(牢獄)일 것이다.
세가가 관청도 아닐진대 뇌옥이 있다는 것은 백씨세가의 힘이 그만큼 드높다는 이야기였다.
뇌옥을 지키는 간수들은 잔뜩 긴장해서 근무를 섰다.
무려 가주의 동생이자 적룡단의 단주인 백진태가 갇힌 것이었다.
그런 거물이 뇌옥에 갇히는 일은 적어도 근 백 년 동안 처음 일어나는 일이었다.
처참하게 고문을 당하더니 결국 참형(斬刑)이 결정되기까지 했다.
간수들은 긴장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흐, 흐흐…….”
백진태 혼자서 사용하는 뇌옥의 깊숙한 곳에서 웃음소리가 울렸다.
이제는 완전히 미치기라도 한 듯, 그는 시도 때도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간수들은 소름이 끼쳐 몸을 떨었다.
간수는 한차례 고개를 흔든 뒤, 방문한 하인에게 물었다.
“식사야?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왔네?”
죄인의 식사를 가져온 하인이었다.
“예에, 원래 오던 친구가 몸이 안 좋아서요. 몸살에 걸렸는지.”
“알겠어, 여기서는 내가 가지고 들어갈 테니 돌아가 봐.”
하인을 돌려보낸 간수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은 채 뇌옥 안으로 들어갔다.
피 냄새가 점점 짙어지고, 손과 발에 족쇄를 찬 백진태의 모습이 나타났다.
“식사…… 가져왔습니다.”
죄수라곤 하지만 차마 가주의 친동생에게 반말을 할 수는 없었다. 간수는 야채절임을 올린 죽 한 그릇을 백진태의 앞에 놔두고 물러났다.
백진태는 미지근한 죽을 보며 킬킬 웃었다.
손에 족쇄를 달고 있으니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식사시간에는 그것을 풀어 줘야 할 텐데, 겁먹은 간수들은 그러지를 못했다.
단전이 부서졌다고 하나 초절정 고수인 백진태가 두려운 것이었다.
“죽기 전날인데 고기라도 줄 것이지.”
목이 잘리기까지 하루 남았지만 배는 고팠다.
백진태는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였다. 기회만 온다면 다시 칼을 들고 한바탕 칼춤을 추고 싶으나…… 이제는 목이 떨어질 처지다.
그는 엉거주춤 움직여서 다리로 죽 그릇을 끌어당겼다. 그러곤 익숙해진 동작으로 손 위에 그릇을 올리더니, 허리를 구부려 죽그릇을 입에 물고 들이켰다.
야채절임과 죽을 마시듯 삼키는 것이다.
옷에 죽이 후두둑 떨어졌으나 백진태는 걸신들린 듯이 씹어 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어금니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따악!
돌이라도 씹은 것일까.
아니, 돌 정도가 아니었다. 매실 한 톨만 한 단단한 것이 씹혔다. 이빨이 깨질 뻔했다.
큭큭 웃은 백진태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꺼냈다.
붉은빛이 도는 구슬이었다. 강하게 씹었는데 금도 가지 않았다. 옥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백진태의 표정이 묘해졌다.
코로 킁킁 냄새를 맡으니 청아한 향이 나고, 혀에 대고 맛을 보니 씁쓰름한 맛이 느껴진다. 옥은 아니었다.
곧, 그는 구슬의 정체를 깨달았다.
‘피독주(避毒珠)!’
당가 무인들이 사용하는 것을 본 적 있었다. 입에 물고 있으면 독이나 미혼산에 저항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 것이 죽에 섞여서 반입되었다.
‘누가. 그리고 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지만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백진태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숭숭 빠진 앞니가 흉했다.
걸신들린 듯이 먹던 죽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몸이 상한 지금, 배가 너무 부르면 오히려 움직이기 힘들다.
대신 피독주를 사탕(沙糖) 빨 듯 입에 넣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굳은 근육을 늘려 준다. 족쇄를 풀었을 때도 곧바로 달릴 수 있도록.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믐달이 중천에 뜰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달큰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미혼산인가.’
간수가 꾸벅꾸벅 조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가 갑자기 쓰러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쿵.
바닥에 엎어진 간수는 깨어나지 못했다.
백진태는 달큰한 냄새를 맡자마자 피독주를 문 채 입으로만 숨을 쉬었다.
약간 머리가 띵한 정도를 빼고는 미혼산에도 저항할 수 있었다.
곧,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검은 옷을 입고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는 자였다.
백진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크흐흐, 넌 또 몇 호인가.”
“육호(六號)요.”
“육호? 어느새 한 명이 늘었군.”
설마, 아무리 외원이라고 해도 백씨세가의 경비를 뚫고 이곳까지 침범할 줄이야.
“흑암께서 나를 보내셨소. 일어나시오.”
뇌옥의 문을 연 복면 사내가 검을 휘둘렀다.
철컥-
백진태의 족쇄는 너무도 쉽게 잘려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