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766
1107화 마지막 장 이후의 이야기 (2)
평상복 차림으로 순시에 나선 경국 황제는 서호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3일 동안 범한과 두 차례에 걸쳐 아무런 소득 없는 대화를 나눈 뒤에 황제 이승평과 섭완은 서호 옆에 있는 범씨 집안 저택을 떠나 소주 쪽으로 향했다.
경국 조정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들만이 범한이 서호 옆 저택에 은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강남로 총독 자리에 있는 설청 역시 범한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승평은 즉위에 오른 뒤 경국 7로 총독들을 교체하면서도 강남로만은 건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강남로가 경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유능한 설청을 이용해 서호에 은거해 있는 범한을 견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말발굽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한참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이승평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 홍죽을 데리고 황궁을 나가셨을 때 짐은 스승님이 가장 미워하는 수령 태감을 왜 데리고 갔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네……. 그런데 이제 보니 홍죽은 애초부터…… 그의 사람이었던 거야.”
미간을 살짝 찌푸린 이승평은 범한은 스승님이라 칭하지 않고 그 사람이라고 말했다. 홍죽의 정체가 밝혀지자 명의상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군왕인 그는 불안감과 분노를 느꼈다.
“그가 궁안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숨겨 뒀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기야 그러니 자유롭게 황궁을 드나들 수 있었던 게지. 황궁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 부황께서는 결국에는 그에게 질 수밖에 없었던 거네.”
옆에 있는 섭완은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처음에 그는 황제 폐하가 조정에 숨어 있는 범한 쪽 세력을 철저하게 숙청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의 상황을 통해서 섭완은 은거하고 있는 작은 범 대인이 경국을 넘어 천하 전체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에 지금의 상황에서는 상대방을 숙청한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푸른 말 위에 앉아 있는 이승평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짐도 알고 있으니 입 밖으로 내뱉을 필요는 없네. 짐은 어려서부터 스승님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스승님이 어떤 성정을 가진 사람인지 잘 알고 있네. 그리고 어마마마께서도 짐이 다른 생각을 하는 걸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실 거야.”
이승평이 고개를 돌려 섭완은 바라보았다. 섭완은 지금 조정에서 가장 유능하게 자신을 보좌하는 충신이었다. 이승평은 스승님이 자신을 보좌해 주기를 원하는 건 사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그가 큰일을 일으키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달갑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이승평은 용상에 앉은 지도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어린 시절 범한에게 배우면서 품었던 두려움, 경외심, 감격, 그리고…… 숭배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이런 복잡한 감정을 떠올리던 그가 복잡한 눈빛으로 관도 옆에 심어진 푸른 나무 너머 동남쪽 화려한 봄풍경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스승님이 없었다면, 짐은 용상에 앉지 못했네.”
조정 문신 관리들은 범한이라는 이름에 여전히 강렬한 살의를 품고 있었지만, 천하 백성들은 범한에게 별다른 분노를 품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준 물건들 곳곳에는 크게 항주회를 뜻하는 항(杭) 크게 새겨져 있었다.
* * *
서호 옆에서 사는 삶은 평화롭고 안락했다. 범한은 이미 몇 년 동안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올해 봄날의 안정은 황제 폐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망치고 말았다.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한 마음에서 벗어난 범한은 이승평이 떠난 뒤 새벽 신선한 이슬을 맞으며 정원 안을 한가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딸 아이는 이미 커서 서서히 세상 이치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요새는 사사를 따라 매일 힘들게 글공부하고 있었다. 담주에 있던 어린 시절 범한을 도와 《석두기》를 여러 차례 필사한 사사는 글씨체가 상당히 아름다웠기에 범한은 딸 아이가 악필이 될까는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이렇게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범한의 뒤를 따라 말없이 걸어오던 임완아가 외투를 그의 어깨에 걸쳐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공기가 찹니다.”
“어제 몇 시까지 마작을 한 겁니까?”
범한이 음흉한 눈빛으로 임완아를 바라보며 빈정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최근 사사는 아이들에게 책 읽는 법을 가르쳐주는 일을 맡고 있는 반면 임완아는 가끔 항주회 장부를 살펴보는 것 외에 딱히 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평소에 마작을 두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서 살고 있었다.
“집안사람들의 수준이 떨어져서 몇 판 하고 그만뒀어요.”
임완아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도 이제는 스무 살이 훌쩍 넘은 젊은 부인이었지만, 웃을 때는 여전히 얼굴은 햇살처럼 맑고 부드러웠고, 크고 동그란 눈동자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수정 구슬처럼 반짝였다.
“둘째가 돌아온 뒤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봅시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사철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제 어장이 아버님의 전갈을 가지고 왔었어요. 그런데 그때 상공이 황제 폐하와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중요한 일을 방해할까 봐 알리지 못했어요.”
어장은 검은 옷을 입은 호위를 말하는 거였다. 퇴직한 전임 호부 상서인 범건을 오랫동안 따랐던 그는 범씨 가문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이었다. 임완아의 말을 들은 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아버지가 계시는 쪽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뇨, 아무 일 없어요. 할머니께서 상공을 보고 싶어 하시니까 담주에 한번 다녀오라는 말을 전하신 거였어요. 상경성에서 돌아올 사철이도 항주까지는 내려오기 힘들 거예요.”
임완아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갔다 오죠. 사철이 그놈도…….”
말을 하던 범한이 갑자기 한숨을 쉬며 말을 멈췄다.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임완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예전에 썩 괜찮은 계획을 세워뒀었거든요. 셋째가 황제가 되면 사철이도 경도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 호부상서가 되어 셋째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탓에 친동생인 사철이도 이번 생에는 경도에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기 힘들어졌어요.”
“이미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아요. 그리고 어장이란 사람이 아버님을 대신해서 십가촌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물어봤었어요.”
“계획에 따라 천천히 해야지요.”
범한이 미소를 거두고는 침착하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조정도 알고 있는 이상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요. 셋째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여전히 어렸을 때처럼 여물지 못했더군요. 분명 마음속으로는 걱정이 돼서 죽을 지경인데 말을 분명하게 하지는 않으니 나도 말을 많이 할 수 없는 거지요.”
“폐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틀 동안 상공이 폐하를 대하는 태도는 정말 문제가 있었어요. 섭완이란 사람의 얼굴이 죽상이 되는 게 보이지도 않았던 거예요?”
임완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비록 상공과 폐하의 관계가 평범한 황제와 신하 관계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이제 한 나라를 책임지는 황제 폐하이신 데 최소한 체면은 생각해주셔야지요.”
범한이 ‘하하’ 소리를 내며 웃으며 말없이 임완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반평생을 노력한 끝에 마침내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게 되었어요. 그 애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지요.”
그렇다. 지금 천하에서 범한의 무릎을 꿇게 할 사람은 없었다. 범한은 북제 황제 앞에서든 경국 황제 앞에서든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었다. 만일 범한이 이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면, 두 황제는 오히려 그의 진심을 의심하게 될 거였다.
“황제 폐하도 이제 컸으니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부부 두 사람이 대나무 숲 깊은 곳 흰색 돌이 놓여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누는 범한의 입가에는 복잡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작년에 대 내관이 황궁에서 쫓겨났을 때 저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요. 황제 폐하가 제 체면을 생각해준 거예요.”
“후계상을 다시 중용하는 일에 대해서도 말이 나왔지만.”
범한이 대나무 숲을 지나 흰색 돌이 쌓여 있는 곳에 멈춰 서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안될 일이지요.”
그의 말은 간단했지만 의심할 수 없는 단호한 힘이 담겨 있었다. 임완아가 멍하니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은거해 있는 상공이 대놓고 나랏일을 간섭하는 말을 하는데도 이상한 것 없다는 듯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경제가 세상을 떠난 뒤 몇 년 동안 조정이 범한이 가진 힘을 모두 몰수한 것처럼 보였지만, 내막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범한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막강한 힘을 동원해 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왕씨는 이미 퇴직했지만, 자월은 아직 경도에서 일하고 있으니, 이 일은 그에게 맡기면 되겠네요.”
“상공은 그동안 경도 조정일에 간섭해오지 않았잖아요? 왜 이번에는 이렇게 하려는 거예요? 폐하께서 진노하실까 걱정도 되지 않는 거예요?”
“계상을 언급한 건 폐하께서 제 화를 건든 거예요…… 조정의 일에 대해서 간섭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폐하께서 조금씩 제 한계선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하려 하신다면, 저는 제 한계선을 더 앞으로 당길 겁니다.”
범한이 아내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당신보다 더 황제 폐하를 잘 이해하고 있어요. 이씨 집안 사람은 절대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죠.”
말을 마친 범한이 고개를 돌려 하얀 돌이 올려져 있는 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곳은 무덤이었다. 바로 진평평의 무덤이었다. 범한은 물과 산이 어우러진 서호 옆에 진평평을 묻어 주었다.
경제가 세상을 떠난 뒤 천하에서 범한과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은 없게 되었다. 용상에 오른 이승평도 범한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에 범한의 힘은 한없이 커져서 천하 곳곳에까지 뻗어나갔다. 과거 천하에서 가장 강력했던 군왕인 경제도 범한의 손발을 묶으려 했다가 싸움 끝에 실패했으니 지금의 이승평은 그런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범한은 손에는 천하에서 제일 큰 전장이 쥐고 있었고, 검려에 남은 여덟 명의 9품 강자들의 충성을 받고 있었다. 더구나 황실 금고에는 여전히 아주 많은 밀정과 심복들이 있었다. 하서비가 관리하는 명씨 집안은 여전히 경국에서 가장 큰 황상이었다. 범사철은 북제에서 가장 큰 규모로 황실 금고 상품을 밀수해 장사하고 있었고, 북제 황궁 안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공주는 범한의 친딸이었다…….
황궁에 연금되어 있던 영비는 수년 전에 동이성으로 갔고, 그녀를 따라서 큰 왕비와 마색색, 왕 대도독 집안 아가씨인 왕동아도 동이성으로 갔다. 작년에 경도로 돌아온 1 황자는 지금의 황제 폐하를 만났다. 지금의 동이성은 명의상은 경국에 귀속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1 황자와 범한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독립 왕국이었다.
왕동아가 화친왕부와 함께 동이성으로 가면서 왕지곤은 자연스럽게 더는 연경 대도독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섭중 대원수는 그림자와의 싸움으로 중상을 입은 데다가 황제 폐하의 서거 소식에 크게 상심해 조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힘을 쏟은 뒤 노환을 이유로 퇴직했다. 이에 경국 군대 쪽은 중심이 되었던 두 원로가 연이어 퇴직하면서 새로운 세대가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섭완은 정식으로 경도 무대에 올라 황제 폐하를 지키게 되었지만, 젊은 세대로 완전히 교체되려면 아직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범한이 황제와 완전히 평등하다 못해 심지어는 더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된 이유는 앞에서 언급된 여러 원인 외에 다른 원인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의 과거 이력과 그가 가진 강력한 무력 덕분이었다.
범한과 가까운 사람들은 천하에 아주 큰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모든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누군가가 범한을 공격할 생각에 그물 중 어느 한 부분을 건든다면 범한은 즉각 상황을 파악하고 상대를 공격할 수 있었다.
천하 사람들은 모두가 범한이 얼마나 강력하고 무정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천하는……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 * *
범한이 가만히 진평평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이슬에 젖은 하얀 옥석을 말없이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사실 범한은 며칠 동안 절름발이 노인의 무덤을 찾아가지 않았었다. 어제 과거 일들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오늘도 찾아오지 않았을 거였다.
지금 범한은 너무나도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의 부하, 가족, 친구들도 모두 안락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사천립과 상문은 이미 혼인했다. 과거 포월루에서 상문을 지키겠다고 나섰다가 범한의 손바닥에 맞아 날아갔던 협객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이에 두 사람은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즐거운 삶을 살고 있었다.
삶이 즐겁고 안락해질수록 범한은 무덤 속에 있는 진평평이 쓸쓸해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밖에 있는 하얀 옥석이 노인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어두운 그림자를 완전히 가려주었지만, 범한의 마음은 조금도 위안을 얻지 못했다.
진평평의 무덤에는 비석이 없었다. 다만 옆에 돌에 시가 한 수 새겨져 있었다.
담주 하늘에 외로이 떠 있는 배 하나, 스승과 벗이 함께 떠도는구나. 사직에 어찌 유일하게 성씨 만이 중요할 수 있겠는가? 천하에 누가 만민의 걱정하고 동정하겠는가? 흑기를 이끌고 천하 삼천리를 누비며 백발이 될 때까지 20년간 외로이 나라를 위해 힘썼구나. 늙어 쇠약해진 노인이라 하지 말고, 쉴 틈 없는 영웅이라 비웃지 마라.
* * *
범한은 매번 자신이 이 세상에 초연해졌다고 느꼈다. 황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조용한 삶을 살면서도 그는 이 시를 볼 때면 당시의 많은 일이 떠올랐다. 사실 진짜 황제 폐하를 무너뜨린 일격은 황궁에 쏟아진 무지개나 범한의 공격이 아니라 오랜 시간 참고 인내해온 절름발이 노인의 배신일 거였다.
절름발이 노인의 공격은 경제가 오랜 시간 감추고 있던 썩은 상처를 드러나게 했고, 경제가 신단에서 내려와 평범한 사람으로 변하게 해주었다. 이에 사람들은 경제를 공격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시를 바라보던 범한이 돌 옆에 피어 있는 노란색 꽃을 꺾어 무덤 위에 내려놓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