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765
1106화 마지막 장 이후의 이야기 (1)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봄날.
젊은 부잣집 자제로 보이는 남자가 푸른 말을 타고 아름다운 항주성을 거닐고 있었다. 남자 뒤로 많은 종과 호위들이 따르고 있는 게 행렬이 제법 웅장했다. 이 젊은 공자는 서호 옆에 핀 버드나무 아래를 지나고 있었는데, 이따금 손을 들어 앞을 가리는 버드나무 가지를 걷어 올렸다.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일부러 소탈한 척 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오히려 학식이 깊고 귀티가 줄줄 흐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풍겼다.
호수 위에 이따금 배들이 지나갔는데, 붉은 소매를 흔들어 유혹하는 유명한 미녀들은 없었다. 이 부잣집 자제 옆에 있던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웃으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호에 미녀들이 많다고 하던데 어찌 안 보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품위에 맞지 않는 집사의 말이 거슬렸는지 푸른 말 위에 앉아 있는 공자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다른 말을 타고 있는 고수로 보이는 사람이 차갑게 말했다.
“포월루가 천하 곳곳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데다가 누군가가 매일 서호에서 낚시를 하고 있으니 누가 감히 서호 안에서 영업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의미심장한 말에는 숨길 수 없는 불만스러워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경국은 지금도 여전히 천하에서 가장 강한 국가였다. 경도 감찰원은 개편되어서 원장직은 사라졌다. 새로 즉위한 황제 폐하는 관리들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가혹하게 관리 감독하는 대신 풍족한 국고와 이전에 어느 사람의 방법을 배워서 관리들의 봉록을 대폭 올려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외진 지방에서 벌어지는 비리까지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다만 항주성과 같은 풍류가 성행한 곳에서 누가 감히 서호 전체를 제집처럼 장악할 수 있단 말일까?
푸른 말 위에 앉아 있는 공자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자신 일행에게서 멀찌감치 피해 있는 백성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복식과 안색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그가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수년 전 경제가 북벌을 했을 당시 큰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경도 황궁 안에서 세상을 뒤바꿀만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경국의 반역자 범한이 황궁에 몰래 침입해 황제 폐하를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천하의 정세는 요동쳤고 조정도 크게 불안해졌다. 이에 남경성을 공격하려던 경국 기병들은 어쩔 수 없이 철군해야 했다. 경국에게는 삼키기만 하면 되는 입안에 물고 있던 먹이를 놓아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벌이 흐지부지 끝나면서 경국이 거의 점령했던 영토들은 여전히 북제의 영토로 속해 있었다.
경국은 북벌을 아무런 수확 없이 중단한 뒤 새로 즉위한 황제는 새롭게 조정의 기강을 세우고 믿을 수 있는 관리들을 양성했다. 이로써 경국의 수많은 백성은 자신감을 회복했지만, 북벌은 여전히 거론되지 않았고, 아무래도 영원히 늦춰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반면 북제는 남쪽 경국에서 일어난 경천동지할 만한 사건을 보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전씨 집안 황제는 국력을 키우기 위해 내치에 힘을 쏟았고, 이런 노력 덕분에 북제의 국력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한차례 위험한 위기를 견딘 북제는 힘을 점점 회복하는 중이었다. 만약 이대로 대치 상태를 유지하며 북제의 국력이 커지는 걸 지켜본다면 훗날 경국은 다시 북벌하기 아주 어려워질 거였다.
천하를 경악하게 만든 경국 황제 시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경국 조정을 비롯한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고 비밀을 유지하면서 범한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경국을 책임지고 있는 젊은 황제 폐하는 범한과 돈독한 형제 사이인데다가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선대 황제 폐하의 친아들인 황제 폐하가 부모를 죽인 원수를 놓아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모두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경국 조정이 이 경천동지할 만한 사건에서 북제와 동이성이 은밀하게 어떤 역할을 발휘했는지 따지지 않았다는 거였다. 만일 경국 조정에서 이 사건의 배후로 북제와 동이성을 지목했다면, 당시 백성들의 울분을 이용해 북벌을 끝까지 단행할 수 있었을 거였다. 하지만 경국 조정은 의도했든 아니든 경국 황제 폐하 시해 사건이 북제나 동이성과 관련이 있는지 조사하지 않았다.
* * *
사람들은 푸른 말을 탄 젊은 공자가 경국의 황제 폐하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부잣집 자제 옆을 지키고 있는 고수가 현재 경국의 제일 고수인 추밀원 부사 섭완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만약 북제 사람이 경국의 황제와 섭완이 경도에서 멀리 떨어진 항주에서 동시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아마도 대규모 자객을 보내 운을 시험해 봤을 거였다. 어쨌든 경국 황제와 섭완이 한날한시에 죽는다면, 경국으로서는 엄청난 손실이 될 테니 말이다.
지금 경국 황제는 선대 황제 폐하와 의 귀빈 사이에 태어난 3 황자 이승평이었다. 그는 오늘 경도에서 멀리 떨어진 항주에까지 봄놀이하러 오면서도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째로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섭완은 천하에서 드문 9품 강자였고, 둘째로 그의 주변에 궁정 고수들이 숨어서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승평이 여유롭게 서호 주변을 거니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세상에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십여 년 전에, 그러니까 경력 6년에 짐이 강남에서 꼬박 1년을 머문 적이 있었네.”
푸른 말을 탄 이승평이 햇빛을 반사하는 서호의 잔잔한 수면처럼 맑은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항주 화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서호 옆 저택에서도 며칠 머문 적이 있었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짐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었어.”
“폐하께서는 천하의 안전과 만백성들의 바람을 책임지고 계신 만큼 어렸을 때처럼 자유롭고 즐거운 생활을 하실 수 없지요.”
섭완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서호 버드나무 아래를 거니는 두 사람의 주변에는 황궁 사람들만 있고, 행인들이 멀찌감치 피해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누가 엿들을 걱정 없이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승평은 섭완의 무례하면서 고지식한 말을 듣고도 옅은 미소만 지었다. 훈계하는 뜻이 담겨 있는 섭완의 말에 싫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유는 이승평은 섭완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게다가 섭완이 과거 자신의 무예 태부라서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오늘날까지도 이승평은 마음속으로 유일한 스승은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그 사람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호 버드나무 길을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던 일행은 어느덧 산 아래 길을 가고 있었다. 어느덧 이들은 앞에 오랜 시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회색 벽에 검은 처마인 장원이 도착했다. 대나무 숲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고즈넉한 장원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곳은 변한게 하나도 없군.”
말에서 내린 이승평이 차분히 주변을 바라보았다. 장원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평상복을 입은 황제 폐하를 맞이할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활짝 열린 대문 앞에 선 경국 황제 폐하가 의복을 정돈한 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서호 옆에 지어진 장원은 앞으로는 아름다운 호수 풍경이 펼쳐졌고, 뒤로는 산을 끼고 있었다. 푸르게 우거진 산은 수려하고 그윽하면서도 습한 음산한 기운은 느껴지지는 않았다. 호수 위로 불어오는 온화한 바람이 나무 사이를 스쳐 장원 안으로 들어오자 장원 뒤쪽 서재 안에 목소리도 온화하게 변했다.
“스승님께서 은밀하게 지지해주신 덕분에 제가 몇 년 동안…….”
“스승님,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스승님…….”
* * *
경국 황제 이승평이 스승이라 부르는 그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말 없이 듣기만 하더니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여기까지 오셨으니 서호에서 쉬다가 가십시오. 강남은 풍광이 아주 좋고 날씨도 좋아서 경도에서보다 더위도 덜하고 추위도 덜합니다.”
그 말이 들린 뒤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지더니 약간 원망 섞인 이승평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스승님, 저는…… 어쨌거나 이 나라를 책임지는 천자입니다.”
“폐하,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다만…… 저는 이미 경국의 신하가 아니지 않습니까?”
“스승님, 황실 금고 일을 도대체 언제 조정에 넘겨주실 생각이십니까. 이미 감찰원에서 그 마을의 위치를 조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한 나라의 제왕으로서 모르는 척할 수가 없습니다.”
“폐하, 만일 이 일에 불만이 제기하는 대신이 있다면, 저를 찾아오라 말씀하십시오. 저는 황실의 금고가 누구의 것인지 알려져도 상관없습니다.”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정원이 보이는 서재 유리 창문이 열려 있었고, 창 아래 밝은 부분에 범한이 앉아 있었다. 그가 이승평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정원에 핀 복숭아꽃을 바라보았다.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범한이 천하에서 모습을 감춘 지도 오래되어서 찻집이나 골목에서 그의 행방에 대한 의문이나 소문이 나오지 않는지도 오래였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 경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시선이자 권신이며 최후의 반역자였던 그는 잊혀 있었다. 이처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범한의 얼굴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수년의 세월도 그의 눈가와 귀밑에 세월의 흔적을 남기기에는 부족했다. 범한은 이전과 다름없이 수려한 외모에 더욱 여유롭고, 침착해져 있었다.
이승평이 범한을 바라보더니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이승평의 옆에 서 있는 섭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범한을 노려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섭완은 오랫동안 범한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가 어딘가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섭완은 이 사실을 떠올릴 때면 못마땅해서 견딜 수 없었다.
선대 황제를 시해한 반역자가 경국 영토 안에서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황당한 현실 앞에서 섭완은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섭완은 지금은 나서서는 안 되는 때라는 걸 알고 있기에 애써 화를 삼키기는 했지만, 말투에 못마땅한 기색이 드러나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작은 범 대인, 폐하 앞에서 신하의 본분을 지키시는 게 좋을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섭완을 바라보고는 빙그레 웃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범한은 섭완이 어떤 성정을 가진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고, 지금 조정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범한은 섭완이 자신에게 강렬한 적의를 가지고 있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신하의 본분이라? 내가 정말 일평생 경국의 신하로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때 황궁 안에서 그런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섭완이 범한을 찢어 죽이지 못해 한스러워하는 것처럼 경국 조정의 충성심 넘치는 관리들은 하나 같이 자취를 감춘 작은 범 대인에게 강렬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런 원한을 잠재우기 위해서 몇 년 동안 경국 조정은 범씨 가문을 핍박하고 재산을 모두 몰수한 뒤 정왕부에서 감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인 이승평의 친모가 유씨 국공 집안 출신인 덕분에 국공 골목은 범한의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치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범씨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경도를 떠나 있었고, 몰수된 재산은 정왕부가 관리하게 했으니 진정으로 범한에게 해가 된 건 없었다.
범한이 침착하고 온화한 눈빛으로 이승평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 세월 폐하를 뵙지 못했군요. 조정 일이 바쁘실 테니 이틀 정도 머물다가 가십시오.”
범한은 섭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것은 더 없는 침착함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비롯된 행동이었다.
이승평이 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신 누이와 아이들을 보지 못한지도 오래되었군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숙녕이와 량이는 지금 사사에게 글자를 배우고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 먼저 가시지요. 저는 옷을 갈아입고 가겠습니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제가 요새 잠이 많아져서 이제야 일어났거든요. 정말 이전과 비교하면 많이 게을러졌지요.”
* * *
경국 황제 이승평과 경국 명장 섭완은 평범한 손님들처럼 범한의 안내 없이 서재에서 걸어 나왔다. 이런 대우와 상황은 정말이지 법도에 맞지 않는 거였다. 하지만 이승평과 섭완은 불만을 제기하거나 화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방금 전 서재 안에서 나눈 대화에서 범한은 이미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이었다.
서호 범씨 집안 저택 집사가 정중히 길을 안내했다. 이 집사는 친근감이 느껴지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얼굴에 여드름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얼굴 가득 짓고 있는 온화한 미소 덕분에 흉터는 잘 보이지는 않았다.
저택 안에 아름다운 돌길을 따라 걸어가던 이승평은 앞장서서 안내하는 집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집사의 뒷모습이 눈에 익은 데다가 손님을 대하는 집사의 행동에서 황궁의 기풍이 짙게 묻어났다.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하던 이승평의 머릿속에 중요하지 않아서 잊혀졌던 한 인물이 생각났다.
“홍죽?”
이승평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떠보듯이 이름을 불렀다.
“네, 폐하.”
범씨 집안 집사가 걸음을 멈추고 움찔하더니 몸을 돌리고는 공손히 인사했다.
이승평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오래도록 집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 경도를 떠날 때 자네도 궁을 떠났었지. 다만 스승님 곁에 있을 줄은 몰랐다.”
황제 폐하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범씨 저택 안에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내젓고는 홍죽을 따라 곁채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