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73)
73화 결자해지(結者解之) (2)
백씨세가는 서안제일가(西安第一家)이다.
그런 세가가 죄인들을 가두는 뇌옥이다. 경비가 삼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높은 수준의 무인이 수하들을 데리고 돌아가며 경비를 선다.
하지만 육호는 그것을 뚫고 들어와 백진태를 구출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백진태는 육호라는 사내를 따라 뇌옥 밖으로 올라왔다. 경비를 서고 있던 무사들 역시 미혼산에 당해 쓰러져 있었다.
그곳을 벗어나서야 백진태는 입안의 피독주를 뱉을 수 있었다.
“이 정도로 효과 좋은 미혼산은 구하기 어려운데 말이야. 피독주도 그렇고. 흐, 당신 주인은 인맥도 좋은가 보군.”
“조용히 하시오. 다시 뇌옥에 처박히고 싶지 않으면.”
육호는 싸늘하게 말했다.
백진태는 어깨를 으쓱하며 쓰러진 무사를 살폈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았다.
검을 뽑아서 휘두른 그는 쓰러진 무사를 내려다보았다. 베어 죽일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따라오시오.”
“……그러지.”
때마침 육호가 백진태를 불렀다. 백진태는 무사들을 남겨 두고 육호에게 따라붙었다.
“이 옷을 걸치시오.”
“오호.”
바위틈에서 그가 꺼낸 것은 하인들의 옷이었다. 그것도 몹시 더러운, 똥지게를 나르는 자들의 옷.
백진태는 말없이 옷을 입었다. 내공을 쓸 수 없는 지금은 그의 말에 따르는 것이 옳았다.
육호 역시 복면을 벗고 비슷한 옷을 입었다.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인피면구인가?”
그 질문에 육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하나의 인피면구를 건넸다.
“쓰시오.”
“이런 것까지 써 보게 되다니.”
인피면구를 쓰자 백진태의 예전 모습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육호는 미리 준비한 똥지게를 들고 앞장섰다.
담벼락을 넘을 필요도 없었다.
냄새를 풍기며 대문 앞에 도착하자, 문지기들은 코를 막으며 그들을 통과시켜 주었다.
대문을 나서서도 육호는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골목을 돌아가자 평범한 양민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또 한 번 갈아입으시오.”
“그러지.”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옷을 벗어 주었다. 그리고 대신 육호와 백진태의 옷을 입었다.
똥지게까지 짊어진 그들은 태연하게 떠나갔다.
그리고 백진태의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마차를 여러 번 갈아타게 될 것이오. 이 안대를 쓰고 있으시오.”
눈을 가리라는 말에 백진태가 볼멘소리를 했다.
“뇌옥에서 구해 주기까지 했는데 굳이 이런 짓을 해야 하나?”
“손을 묶겠소.”
“참 내, 완전히 무시하는군.”
백진태는 순순히 안대를 쓰고 손을 묶었다.
육호라는 자의 수완이 꽤 좋은 듯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흔적을 지웠으니, 세가의 추적도 당분간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내심 안도하며 백진태가 마차에 등을 기댔다.
“당신 주인은 너무 비싼 척 군단 말이야. 직접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드니. 그래도 백씨세가의 적룡단주라고 하면 강호 어디에서도 알아주는 위치인데.”
“당신을 구해 내기 위해 우리는 많은 희생을 치렀소.”
“그래, 내게 쓸모가 있으니 그랬겠지?”
“질문은 내가 할 거요. 대답만 하도록.”
육호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백진태는 킬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 충성을 바친 수하가 더 있소? 처형당하지 않은 자들 중에서.”
“형님이 전부 찾아내지 못했다면 아마도 남아 있겠지. 이기대에도 조금…….”
“그들 중에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입을 봉해야 할 자가 있소?”
입을 봉한다는 말은 살인멸구(殺人滅口)를 의미할 것이다.
“음, 딱히. 아, 호진이 그 아이는 조금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이기대의 부대주야.”
“살려야 할 자는 있소?”
“좋을 때야 내게 충성을 바치던 애들이지만 이제 와서 따를 놈이 있을지는 모르겠네. 흐흐.”
살려야 할 자가 없다면 모두 죽여야 할 것이다.
백진태의 웃음이 그쳐 갈 무렵, 육호는 두 번째 마차로 갈아탔다.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아는데. 우리에 관한 일을 얼마나 말했소.”
“거의 다 불었지.”
“……염치가 없군.”
“설마 당신들이 나를 구하러 올 줄 알았겠어?”
“그들에게 털어놓은 것과 털어놓지 않은 것들을 전부 말해 주시오. 우리도 뒤처리를 해야 하니.”
“아는 것도 없는데 말할 게 무엇 있었겠나. 기껏해야 삼호에 대한 것과…….”
지필묵을 펼쳐서 백진태의 말을 적는 소리가 들렸다. 한 식경 정도 더 달린 뒤에 마차를 또 한 번 갈아탔다.
육호는 백진태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성의 있게 답했던 것과 달리, 백진태의 답은 점점 짧아졌다.
어쩌면 조금 귀찮은 듯도 보였다.
“그렇군. 그러면, 백씨세가의 전대 가주는 광동에 은거하고 있다는 것인가. 멀리도 갔군.”
“그렇지.”
“또 말해 줄 것은 없소? 백씨세가의 구린 비밀이라든가. 떠볼 만한 자가 더 있다거나. 우리에게 많이 도움이 될 것이오.”
“…….”
백진태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한참 침묵하더니, 그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흐하핫.”
그러자 계속 질문을 던지던 육호도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마차는 조용히 달렸다.
한 시진쯤 지났을까. 어둑한 새벽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동이 트는 것이다.
마차도 멈추었다.
“내리시오.”
육호는 먼저 문을 열고 나섰다.
마차의 문을 열자 겨울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불어 왔다. 내공을 잃은 백진태에게는 뼈까지 시리는 한기였다.
“벌써 도착이야?”
“그래, 다 왔소.”
“흐흐흐…….”
눈이 가려진 백진태로서는 주변의 풍경을 알지 못했다.
“……나도 멍청하군. 홀라당 넘어갔어.”
백진태의 속마음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씨익 웃는 것은 무척이나 유쾌해 보였다.
“누구냐 넌.”
어느 시점부터 눈치채 버렸다. 백진태를 구한 것은 흑암과 그 부하가 아니었다.
워낙 자연스럽게 굴었기에 착각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속여 먹을 줄은 몰랐다.
철컥하는 금속음이 울렸다. 백진태는 칼에 베일 것을 각오했다.
“정보를 다 털어먹었으니 이제 죽이려고?”
“잘난척하지 마시오.”
사내는 백진태의 안대를 벗겼다. 인피면구를 벗었는지 육호의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내 이름은 필환.”
“처음 듣는 이름이군.”
필환은 묶었던 백진태의 손목을 풀어주기까지 했다.
“비연대 소속 무사요. 당신에게 베여 죽은 무중의 동료지.”
“아, 그놈들 중 하나인가.”
백진태가 찢어져라 미소 지었다. 필환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하지만 그는 백진태에게 해코지하는 대신, 살의를 억누르고 물러났다.
이곳은 막다른 분지였다. 마차가 지나온 숲길은 제외하고 도망칠 곳이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시오.”
필환이 그렇게 떠나자 백진태는 홀로 남았다.
그리고, 숲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그를 알아본 백진태는 웃지도 못했다.
“형님이 미쳤나 보군.”
“숙부.”
나타난 것은 검을 뽑아 든 이강이었다.
백진태는 이강이 아니라 그가 나온 숲을 노려봤다. 내공을 잃어 감각이 무뎌졌기에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무사들이 숨어 있을 것은 분명했다.
“네가 칼을 들고나와서 무엇 하려는 게냐.”
“칼을 뽑아서 달리 할 것이 있겠습니까.”
“흐흐흐, 형님이 허락하시더냐? 나를 죽이려거든 차라리 아까 그 무사에게 시키면 될 것을.”
백진태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흘렸다.
곧 죽을 것은 예상했지만 설마 조카인 이강이 칼을 들고 나타날 줄이야.
“평무사에게 숙부의 목을 치게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줄 압니다.”
“그러면 형님이 직접 오셔야지.”
“아버지께 동생을 베게 하는 것도 불효 아니겠습니까.”
백진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나를 우습게 보는군. 단전이 부서졌다고 하나 너 같은 병신 놈에게 당해 줄 줄 아느냐? 흐흐.”
이강은 말없이 검을 치켜들었다.
당연히, 유성아를 가져왔다. 오늘 이곳에서 숙부를 벨 각오를 했다.
총관이 생각해 낸 계책이었다. 백진태를 속여서 그가 말하지 않은 정보를 뱉어내게 한다. 아버지와 장로원이 허락한 일이었다. 이강은 직접 나서기를 자처했다.
“결자해지라고 생각해 주시지요. 저 또한 숙부에게 받아 낼 것이 있으니.”
이강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곳까지 찾아왔다.
백진태는 검을 들었다.
“오냐, 네가 죽을 생각을 했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지.”
“보답까지 기대하진 않았습니다만.”
“내가 지면, 흑암이라는 자의 정체를 알려 주겠다.”
이강이 눈을 찌푸렸다.
“모르시던 것 아니었습니까.”
“정확하지는 않지. 하지만 나는 추측해 냈다.”
늘 웃는 얼굴이기에 사람들이 간과하곤 하지만, 백진태의 통찰력은 나쁘지 않았다.
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흐.”
백진태가 히죽 웃고, 어떠한 예고도 없이 선공을 나섰다.
휘이익-
비록 내공을 잃고 감금당해서 몸이 쇠했다고는 하나, 그는 엄연히 초절정의 문턱을 밟은 무인이었다.
어리고 허약한 조카의 목은 복숭아 따듯 날려 버릴 수 있으리라.
검이 독사처럼 이강의 목을 향해 짓쳐들었다.
카아앙-!
하지만 이강은 검을 비틀어서 검격을 막아 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진태는 표정이 굳고 말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반탄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내공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냐?”
도저히 그렇게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강은 그런 백진태의 질문을 비웃었다.
“그리 보이십니까?”
여전히 그의 하단전에는 한 줌의 내공조차 모이지 않았다.
다만 꾸준히 익힌 태음경이 중단전의 진원진기를 비옥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근육이 붙은 몸에는 미약하게나마 태음경의 묘리가 담겼다.
“웃어?”
“늘 웃으시는 분이 왜 제게는 엄격하십니까.”
“이놈이……!”
백진태가 검을 휘둘렀다. 이강은 떨어지듯 몸을 수그리고 다리를 길게 뻗었다.
이것은 청림의 진리연에게 배운 경공이다. 이강의 몸이 쭈욱 늘어나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백진태의 검을 피해 냈다.
다만 이강의 등이 훤히 드러났다. 백진태는 웃으며 등을 향해 검을 날렸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이강의 예상하에 있었다. 이강의 전신이 순간 흐릿해졌다.
태음절맥으로 타고난 예민한 감각. 그것을 기반으로 능지평에게 전수받은 무영검각의 휘무영.
몸의 탄력을 극대화해서, 검에 회전력을 담는다.
그의 검이 길게 늘어져서 호를 그렸다.
치익-
백진태의 콧잔등이 길게 베였다. 조금만 더 피하는 게 늦었다면 얼굴이 두 쪽 났을 것이다.
백진태는 이강을 얕볼 수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버지가 저를 그냥 보내시지는 않았겠지요.”
“건방진 놈.”
이강이 직접 나서겠다고 했을 때 당연히 반대가 나왔다. 하지만 이강은 가주와 장로들의 제지에도 지금 이 자리에 섰다.
당연히, 백진태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 줬으리라.
캉! 카캉!
칼과 칼이 부딪치면서 불똥이 번쩍번쩍 튀었다.
체력은 비슷하다. 이강은 절맥증이었지만 백진태 역시 몸이 상했으니.
검술의 조예는 분명 백진태가 훨씬 깊다. 검을 잡고 산 세월이 있으며 재능도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백진태가 생각지 못한 요인이 세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이강의 검술이 그의 기대 이상이었다는 것과.
두 번째는 백진태의 약해진 몸과 검술 간의 괴리였다. 그는 제 솜씨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은 검의 재질 차이였다.
과연 운철검인가.
화영서가 날을 갈아 준 유성아는 매서웠다. 격돌의 순간마다 백진태의 칼날은 뭉텅뭉텅 이가 나갔다.
주고받은 합이 채 백 초식이 넘지 않을 시점이었다.
카각-!
불길한 소음과 함께, 이강의 검이 백진태의 검을 한 치나 파고들었다.
둘은 그 자세로 굳었다.
이강과 백진태의 눈이 마주치고, 이강은 손목을 회전해 칼을 비틀었다.
챙강!
백진태의 검이 두 동강 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백진태의 실전경험이 빛을 발했다.
“크큭!”
그는 당황하지 않고 부러진 검으로 이강의 복부를 찌른 것이다. 섬전 같은 기습이었다.
다만, 손의 감각이 시원찮았다.
꾸구국-
백진태의 얼굴이 황당하게 일그러졌다.
“호신갑을 두르고 있어?”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복부의 찢어진 옷 틈으로 사슬의 형태가 엿보였다. 보갑은 아니겠지만, 검기조차 쓰지 못하는 백진태로는 뚫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강이 백진태의 가슴을 검으로 겨누었다. 승패가 확정되었다.
이강의 승리였다. 백진태도 그것을 알았다.
“살려 달라고 빌 생각은 없다.”
“압니다.”
이강은 무정한 얼굴로 답했다.
불사신검의 빙의도 필요 없이 승리했다. 호신갑이 없었더라도 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강은 숙부의 얼굴을 노려보며 말했다.
“약속을 지켜 주시죠.”
약속한 대로 흑암의 정체를 밝히라는 뜻이다.
백진태는 흐흐 웃더니, 다른 소리를 했다.
“이곳에 형님이 와 계시냐? 지켜보고 있어?”
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해 주지.”
백진태가 귀를 대라는 손짓했지만, 이강은 그런 개수작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냥 말하시죠. 크게.”
“거참 겁은 많아 가지고. 그래…… 그놈들은 말이다…….”
그는 잠시 입맛을 다시는 듯하더니.
아득, 하고 혀끝을 깨물어 잘랐다. 그리곤 입안에 차오르는 핏물을 푸우 하고 이강의 눈에 내뿜었다.
그런 백진태의 가슴을 이강의 검이 꿰뚫었다.
푸욱-
부러진 검을 휘두르려던 백진태의 오른손은 맥없이 떨어졌다.
“끝까지 이렇게 구시는군요, 숙부.”
이강은 핏물을 막아 낸 왼손을 털었다.
긴급한 순간에 혀를 베어 물어 피를 내뿜는 수법. 진작 비연대원들에게 배워 아는 것이었다.
이강의 검은 백진태의 가슴을 완전히 관통했다.
백진태는 힘없이 웃었다.
“흐, 흐흐…….”
백류산이 보는 앞에서 이강을 죽이고자 했건만.
마지막 기습에 실패한 백진태는 한차례 몸을 떨었다.
“끝까지 말씀 안 해 주실 겁니까?”
“흐으…….”
“숙부?”
“…….”
백진태는 더 이상 웃지 못했다.
조금 전의 웃음이 마지막 단말마였다.
“……그냥 가 버리셨네.”
이강이 검을 뽑았다.
백진태의 몸이 미끄러지듯 엎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