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89)
89화 사형제 간의 예의 (1)
아직 정식 문도가 아니었던 삼대 제자들이, 비로소 한 송이의 꽃을 수여받게 되었다.
일화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한 명의 당당한 청림도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순하게는 옷과 무기에 완연한 한 송이의 꽃을 수놓을 수 있다는 것. 청산오검이나 등의 기본공에서 더 나아가 청림의 절학들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권리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리에는 당연히 책임이 따르는 법.
일화 제자가 되면서 정식으로 적을 올리면 청림도로서의 문규를 지켜야 한다.
‘악하지 말 것이며.’
‘도(道)를 잊지 말 것이며.’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거악(巨惡)에 대항할 힘을 길러 두어야 한다.’
문규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 세 가지 원칙이다. 청림도는 이 세 원칙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책임이 막중하고 부담을 느낄 만한 일이겠지만, 사실 시험을 끝마친 아이들은 책임감보다는 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마에 영웅건을 두르고, 수려한 명검을 차고 강호를 주유하고 싶었다.
그 간질간질하고 벅찬 분위기는 일화수여식 당일이 되어서 정점에 달했다. 조금 전 무려 림주의 훈화가 끝났기 때문이다.
“조용!”
“곧 규율당주께서 오신다.”
이대 제자들이 떠드는 삼대 제자들을 혼냈다.
삼대제자들은 각자 옷단에 푸르거나 빨간 꽃들을 수놓고 있었다. 무화나 도화제자 시험도 치러서 사형제 관계가 확립된 상태였다.
백여 명의 삼대 제자들이 사열된 순서가 바로 사형제의 서열이었다. 성적이 낮은 축에 드는 어린아이들이 뒤에 있으니, 그들이 바로 막내 사제들.
앞으로 갈수록 체격이 커졌다. 나이도 많고 점수도 높았던 아이들로, 이제부턴 그들이 사형이었다.
그리고 가장 앞줄에는 세 명의 문도들이 서 있었다.
모든 삼대 제자 중에서 그 무공과 지식이 가장 뛰어난 자들. 그렇기에 삼대 제자를 이끄는 맏형을 차지한 자들.
그 세 번째는 바로.
“나, 이거 옷이 좀 작은 것 같은데…….”
준명이었다. 그는 누가 보아도 팔다리가 짧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사이에 키가 컸나 보네.”
“이거 옷을 바꿔야 하나?”
“이번에 새로 꽃을 수놓은 옷이잖아. 침방이 바빠서 한 달은 기다려야 할걸?”
투덜대는 준명에게 핀잔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유수린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연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일화 승급 시험에서 차석을 차지해서 받은 검이었다.
“한 달? 너무 길잖아!”
그녀는 준명을 보면서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근데 이게 자꾸 말이 짧네?”
“……그냥 혼잣말한 건데.”
이제는 사형제 관계가 확실해졌다. 유수린은 준명보다 조금 어렸지만 준명의 사저가 되었다.
“똑바로 해.”
“네…….”
“사저라고 불러.”
준명은 자신이 친구들 중 꼴찌가 되자 땅을 치고 슬퍼했다. 하지만 유수린은 엄하게 지시했다.
준명이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사저.”
“그래.”
“사저…… 헤헤.”
준명은 처음에 유수린을 사저라 부르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히힛.”
“우, 웃지 마.”
왠지 유수린을 사저라고 부르는 것이 기쁜 듯 보여서, 그녀는 준명이 조금 징그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가장 앞의 소년이 끼어들었다.
“싸우지 말고 조용히 있지 사제, 사매.”
자신만만한 그 목소리를 듣자 유수린이 표정을 구겼다.
“앞에 보라고. 규율당주께서 나오시니까.”
“예에, 사형.”
“대사형이라고 부르지.”
멋진 척 목소리에 힘을 잔뜩 주고 말하는 것은 손희일이었다.
마지막 내력 시험의 대역전 끝에 그가 대제자가 되었다.
“……대사형.”
“파하핫!”
손희일은 그렇게 상쾌할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지극히도 당연한 결과였다.
나이로 보아도, 무공으로 보아도, 인품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보아도 대제자는 그가 걸맞았다.
유수린도 준명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삼대 제자 전부를 이끄는 대제자로서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손희일을 대사형으로 모시게 된 일에 납득한 것만 보아도 그랬다.
늘 원하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일화수여식에 첫 열에 섰다. 이마에는 푸른 꽃이 수 놓인 비단 영웅건이 둘려 있었다. 대제자의 증표라며 림주가 직접 수여해 준 것이었다.
그는 다시 생각해도 영광스럽다는 듯, 영웅건을 질끈 묶었다.
하지만 문득 가슴이 서늘했다.
만약 이강이 내력 시험에서 최하점을 받지 못했다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이강이었을 것이다.
진무에게 순위를 물었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희일이 네가 아마 대제자가 되겠지. 거의 확실해.”
“그러면…….”
모두의 시선이 막 내력 시험에서 최하점을 받은 이강에게 쏠렸었다.
“시험 하나에 최하점을 받았으니 이강이는…… 잘 모르겠구나.”
이강의 순위는 확 미끄러진 것이다.
안도감이 확 밀려왔었다. 웃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배려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희일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친구들의 뒤편으로 일백에 가까운 삼대 제자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이강의 모습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순위가 낮아진 건가?’
다른 시험을 잘 봐서 중상위는 될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저 뒤편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사형제 서열을 따지면 손희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것이다.
흐뭇한 미소가 실실 새어 나왔다.
“커흠.”
그때 규율당주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손희일도 다시 앞의 단상을 바라보았다.
림주의 다음 차례로 연설을 하려는 것이었다.
“림주님의 조금 전 말씀은 모두 금과옥조로 가슴에 담아 두었으리라 믿는다.”
규율당주 도법은 야차(夜叉)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상이었다. 철사같이 억센 수염과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문규를 어긴 자들을 심판하고 죄를 지은 마인들을 징벌하는 규율당의 당주를 맡을 만했다.
“너희들은 이제 당당한 림의 정식 문도다. 그 말은, 문규를 지키고 대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렁우렁 울리는 규율당주의 목소리.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이들을 훑어봤다.
“문규를 어기고, 악행을 저지르며, 기사멸조(欺師滅祖)를 범하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는다.”
기대감에 부풀었던 아이들의 얼굴이 굳었다.
규율당주의 말은 그만큼 그들에게 묵직하게 다가왔다.
“……또한, 너희들은 이제 일화제자인 동시에 운자 배이다. 호형호제하며 친구처럼 굴던 사이도 있으리라 안다. 허나…….”
그 말이 맞았다. 아직 사형, 사제라는 호칭이 입에 붙지 않은 아이들이 많았다.
어린 문도 중에는 은근슬쩍 예전처럼 서로 말을 놓는 녀석들도 있었다.
규율당주가 자신의 독문무기인 거대한 철곤을 바닥에 내려찍었다.
콰앙!
“호칭을 똑바로 하고 사형제 간의 예를 갖추어라. 그것이야말로 문파의 근본이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내 앞에서 저잣거리의 왈패들처럼 구는 꼴을 보인다면. 내 친히 태형을 칠 것이다.”
규율당주의 팔뚝이 터질 듯했다. 저 철곤에 맞는다면 엉덩이가 말 그대로 박살 날 것이다.
“대답 안 하나?”
““예!!””
아이들이 악을 지르듯 대답했다.
모두가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실수로 원래 친구였던 문도를 예전처럼 부르면 크게 경을 친다는 이야기였으니.
“그러면 모두, 해산.”
““해산!!””
하지만 모두의 표정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딱 한 명, 헤실헤실 웃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사형제 간의 예의범절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대제자. 손희일이 그랬다.
“푸하하하핫!”
떠나는 아이들의 사이에서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크흠.”
규율당주가 노려봐서 손희일은 얼른 목을 움츠렸다. 그는 손희일에게 터벅터벅 다가와 말했다.
“대제자와 그 옆의 두 명은 신시(申時) 경에 규율당으로 찾아오라.”
“예?”
“듣지 못하였느냐.”
“아, 알겠습니다, 당주님!”
규율당주가 손희일과 그 일당을 부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주가 떠날 때까지 그들은 감히 이유를 물어보지 못했다.
“내가 웃어서 그런가…….”
“대사형 탓이네요.”
“대사형 탓이야.”
그저 그렇게 추측하며 불안해할 뿐.
* * *
규율당으로 호출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손희일은 긍정적인 추측을 도출해 냈다.
“나는 대제자고, 너희들도 사실상 아이들을 이끄는 입장이니까. 그래서 부르신 것 아닐까?”
“무슨 말이야, 아니 말이에요. 사형?”
사형이라는 호칭을 음미하며, 손희일이 빙긋 웃었다.
“그냥 우리에게 삼대 제자 간의 질서를 바로 세우라고 말씀하실 것 같아.”
“그런가…….”
유수린과 준명으로서도 납득할 만한 추측이었다.
“그러면 들어가지.”
이미 약속 시간인 신시가 다 되었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대사형부터 앞장서시죠. 사제들은 뒤따르겠습니다.”
“……큭.”
이곳 규율당 앞에서 한참 머뭇거렸지만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손희일은 대사형답게 규율당의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제자 손희일이 당주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규율당의 담에는 탈출을 막기 위해 뾰족한 쐐기가 달려서 무척 위압적이었다.
손희일은 가슴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끼며 다시 한번 인기척을 냈다.
이상하게도 규율당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그때, 정면에 있던 본당의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와라.”
안에서 규율당주가 손짓했다. 손희일과 일행은 얼른 포권으로 예를 취하려 했지만, 규율당주는 인사를 받지도 않고 들어갔다.
그들은 허둥지둥 규율당주가 연 문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규율당주 도법, 이대 제자 중의 대제자 진무. 진리연, 도법진인의 제자들, 그리고…….
손희일은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예상하지 못한 인물, 백이강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유수린이 손희일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귓속말했다.
“인사.”
그제야 손희일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이곳의 가장 큰 어른인 규율당주를 바라보고 포권을 취했다.
“제자 손희일, 규율당주님의 부름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그는 절도 있는 자세로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대사형으로서 유수린과 준명을 대표해 문례(門禮)를 취한 것이다.
규율당주의 앞이었기에 더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흠잡을 곳 없는 예법이었다.
“그래. 문례를 제대로 익혀 두기는 했구나.”
“감사합니다.”
규율당주도 눈빛을 달리했다. 이대 제자들은 빙긋 미소지으며 사질들을 바라봤다.
“호, 귀여운데. 이맘때가 저렇게 잔뜩 기합이 들어갈 때기는 하지.”
“후후.”
진무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진리연도 살포시 웃었다.
손희일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진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조금 전보다는 더 가벼운 예법으로 포권했다.
“사숙을 뵙습니다.”
“오냐. 하핫.”
더할 나위 없는 깔끔한 예법이었다. 일대 제자와 이대 제자들을 동시에 만났을 때 인사를 하는 정석적인 방법.
손희일은 멀뚱히 서 있는 이강을 바라봤다.
‘이놈…….’
대사형을 앞에 두고 있으니, 그다음에는 이강이 손희일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
여기서는 그저 간단하게 아무 말 없이 포권을 살짝 하는 것이 최선. 그러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강은 가만히 서서 손희일의 눈을 마주 볼 뿐이었다.
손희일이 당황했다.
‘예법을 전혀 모르나?’
다른 곳도 아니고 규율당주 앞에서 이렇게 뻗대는 것이 감탄스러웠다.
어이가 없어진 손희일이 필사적으로 눈짓을 했다.
이강이 아, 하더니 손희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반갑다.”
“…….”
손희일은 우뚝 굳었다. 순간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규율당주와 이대 제자들 앞에서, 하늘 같은 대사형의 어깨를 두드리고 반말을?
손희일이 굳어 있자 이강은 의아해하면서 덧붙였다.
“잘 부탁해? ……이게 아닌가?”
“미친놈이……!”
손희일은 당황과 분노로 이강의 손목을 콱 움켜쥐었다.
“정신 차려, 아직도 네 처지를 모르나?”
이제 대제자가 된 손희일이었기에, 이강에게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손님이 아니니까 망나니처럼 굴지 마.”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대 제자들의 표정도 굳고, 무엇보다 규율당주의 표정이 보통이 아니었다.
까드득-
그가 잡고 있는 의자의 팔걸이가 비틀리는 소리였다.
“오만방자한 놈.”
입에서 불길이라도 솟을 듯한 분노한 목소리였다.
“내 앞에서 그러는 것은,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규율당주가 일어서자 방 안에 그림자가 지는 듯했다.
“……아니면, 사문의 문규를 우습게 아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태형감이다.”
분노한 규율당주가 이강을 즉결 심판할 것이다.
손희일마저 이강이 가여워지는 순간이었다.
“야,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해!”
그는 이강의 뒤통수를 툭 쳤다.
이강은 그럼에도 여전히 멀뚱히 손희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신기한 것이, 손희일을 보는 이강의 얼굴이 점점 내려갔다. 아니, 희일의 키가 커진 것일까?
그것이 아니었다.
규율당주가 손희일의 목깃을 붙잡아 들어 올린 것이었다.
“너, 내가 우습나?”
“예, 예에? 아니요!”
왜 이강이 아니라 그를 들어 올린 것인지, 희일은 알 수 없었다.
규율당주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러면, 왜 네놈이 하늘같이 여겨야 할 사숙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느냐.”
“사숙, 사숙이요? 저는 그런 적이…….”
“네가 네 사숙의 손목을 움켜쥐고 욕설한 것을 내가 똑똑히 보았다!”
규율당주는 손가락을 들어 이강을 가리켰다. 그가 이강을 손희일의 사숙이라고 호칭한 것이다.
“쟤가 저희 사숙이라구요……? 그럴 리가.”
“림주님이 진작에 정하시고, 장로회의까지 마쳐서 받아들인 일이다. 그것을 무시하여 기사멸조를 범하는 것이냐!”
“사조님, 제가 어찌 그런……!”
손희일은 그만 정신이 나갈 듯한 기분이었다.
분명 같은 삼대 제자라고 알았던 이강이다. 그런데 규율당주가 처음 듣는 말을 했다.
“쟤는 분명 저희랑 같이 일화 승급 시험을…….”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손희일은 덜덜 떨리는 얼굴로 이강을 돌아봤다.
이강은, 아주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희일은 정신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