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such thing as a war in France RAW novel - Chapter 15
015화
“연대장님, 베르게르 모헬입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마침 혼자였는데 이런 근사한 파티에 참여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라는 신호를 필사적으로 보냈다.
“허허, 경례는 안 하나?”
“파티 분위기를 망치길 원하신다면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하겠습니다.”
대충 둘러봐도 계급이 다양해 보이는데 하급자들이 일일이 인사 시작하면 장담하는데 오늘 내로 안 끝난다.
소소한 반항도 해봤지만 페탱이 보기엔 아랫놈의 귀여운 애교로 보였을까.
“에잉 되었네, 이 친구야. 혼자 적적하게 있을까 봐 내 불렀네. 혹시 불편하진 않겠지?”
“어휴, 당연하신 말씀을. 이런 수준 높은 사교 모임이야말로 제가 원하던 장이었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네.”
프랑스 혁명 때부터 제3 공화국까지 외치는 자유, 평등, 우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그딴 건 군대에선 없다.
오직 따르는 노예와 부리는 주인만이 있을 뿐.
“아 참, 인사하게. 여기는 내 친구… 또 여기는….”
나름 인맥이라며 옆자리 지인들에게 날 소개했지만 딱히 도움 될 거 같진 않았다. 하나같이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이들일뿐더러 페탱의 친구들. 전부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노인들이다.
그렇게 인사돌림빵 한번 당하고 녹초가 되어 구석에 박혀서 와인으로 목을 축이려 하는데.
“또 보네요? 아깐 열심히 도망치더니 하려던 게 얼굴 알리는 거였어요?”
“하하, 도망이라뇨. 마드무아젤, 전 초대된 손님으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려던 거였습니다.”
“아니었는데?”
“뭐, 사람마다 상황을 다르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오빠 둘이 군인에 아빠는 별. 절대 무서워서 웃는 얼굴로 대하는 게 아니다. 단지 이건 그래, 처음 보는 여성에 대한 신사의 매너다.
“으으, 그리고 마드무아젤이라니. 역시 귀족이라 이거예요?”
“귀족이라뇨.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와, 설마 여자 앞에서 권리선언 1조 같은 지겨운 소리를 할 줄이야. 진짜 부대에서만 살았군요?”
“허허허….”
“또 할 말 없으니 웃고요. 나한테 할 말이 그리 없어요?”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말을 아끼는 거라고. 난 여자에 미쳐 내 미래를 팔만큼 눈이 돌아가진 않았다.
그리고 귀족이라고 뭐라 말하는 자기는 오트오베르뉴 가문 출신이면서 귀족적인 면모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거 같다.
객관적으로 바로 옆에서 날 똘망똘망하게 쳐다보는 샤를로트는 매우 아름답다.
연한 갈색과 은발이 섞인 듯한 머리, 활발하면서도 미소 짓는 모습은 가정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음을 알 수 있었다.
귀족 출신에 군인 집안이라더니 마냥 집구석 밖의 일에는 관심도 못 두는 그런 집안은 아닌 거 같다.
그녀는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왜 자꾸 주위를 힐끔거리는 거예요? 저랑 눈 마주치고 대화해야죠.”
“이거 참, 제가 파티는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아 그런 것 같군요. 경험 많으신 레이디께서 이해해주시길.”
“너무 익숙해 보이는데… 그리고 저도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아요.”
“잘되었군요. 우리 서로 각자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아볼까요?”
“됐어요. 다리만 아프지 뭐 하러요.”
저건 못 먹는 감이다. 저건 썩은 과일이야. 절대 찔러볼 생각도 하지 말자.
대화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 오늘따라 날 귀찮게 하는 샤를이 그립구나. 그놈은 인싸라 지금도 시내 맥주집에서 재밌게 놀고 있겠지? 젠장, 두고 보자.
최대한 그녀에게 관심을 안 주려 했지만, 그녀는 재밌는 먹잇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끈질겼다. 아니면 돌변한 내 태도에 반전 매력이라도 느꼈나.
다행히 올 사람들이 다 오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페탱은 잔 하나만 든 채 중앙으로 나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늘 모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집이 이리 차는 날이 오다니, 참 별일이군요.”
농담으로 점철된 그의 말은 재치가 넘쳤으나 가볍게 느껴지진 않았다.
“모두 어느 정도 예상은 하셨겠지만, 아마 내년 이 시간에는 백수가 될 거 같습니다. 그래도 나가서 돈 벌어오라 구박할 아내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깁니다.”
다시 한번 무거워질 뻔한 분위기를 위트 있게 넘긴 연대장님은 잔을 들어 올렸다.
“좋았던 날들을 위하여.”
“위하여.”
나 또한 잔에 담긴 와인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내 옆의 그녀 또한 홀짝이던 잔에 입을 대었다.
그리 다시 시작된 연회. 사실 연회라기엔 그리 격식 넘치진 않았지만 아무튼 곳곳에서 웃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이번 연말 파티 자체가 페탱의 은퇴를 알리는 시간임과 동시에 축하받는 자리였기에 정말 순수하게 친분만을 나누는 자리였다.
“하하! 제가 화이트 와인을 섞은 폭탄주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오오오! 쭉쭉 들어간다 들어가!”
뭐, 대부분은 그렇단 말이다.
도수만 따지자면 소주와 맞먹는 와인을 몇 잔이나 마셨을까. 슬슬 취기가 약간 오르는 기분에 난 슬쩍 옆을 쳐다봤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씩 갸우뚱거리는 듯했다.
“마드무아젤? 마담?”
앉은 채로 내 어깨에 기댄 샤를로트. 그리 많이 마시지 않은 거 같았는데 주량이 약했나 보다.
“저기요, 아가씨. 여기서 주무시면 입 돌아가는데.”
살짝 흔들어보았으나 아무런 저항 없이 이리저리 흔드는 대로 움직이는 걸 보아 제 몸 챙겨서 돌아가긴 글러 보였다.
“하아… 이건 뭐 어쩌라는 거야.”
그래도 여자 혼자 연회장 구석에 널브러져 있도록 놔둘 수 없었기에 난 그녀를 부축했다.
‘위층에 남는 게스트 룸이 있던가? 아까 보니 이미 올라가서 쉬는 사람도 있던 거 같던데….’
부디 남는 침대 하나라도 있길 바라며 그녀를 옮기길 잠시.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누군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음?”
“….”
건장한 체격에 머리를 뒤로 깔끔히 넘긴 젊은 남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날 직시했다. 뭔가 아닌 거 같으면서도 샤를로트와 닮은 눈동자와 그의 군복에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레몽 드 라 로크. 샤를로트의 오빠요. 그쪽은?”
“하하, 전… 음. 그냥 취한 여성분을 도와주려는 사람입니다.”
말하고도 순간 흠칫했다. 이거, 누가 들어도 나쁜 짓 하려다가 걸린 놈의 변명처럼 들린다.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는 남성.
한 대 맞으려나 싶으면 어쩔 수 없이 반격하고 주위 사람들이 말리면 떨어진 뒤, 진정하고 해명. 이후의 혀를 차는 연대장님까지 머릿속에서 영화 한 편이 재생되었지만.
“내가 부축하지.”
다행히 그는 아무 말 없이 샤를로트만을 챙겼다.
“내 신분은 걱정 마시오.”
“걱정 안 합니다.”
그의 군복에 눈동자 색이며 누가 봐도 샤를로트는 그의 누이다. 애초에 페탱의 초대를 받았으니 여기 있겠지.
“그럼.”
“편히 가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짧은 한마디만을 남긴 채 난 자리를 떠났다.
더는 파티장에 머물 이유도 없으니 어서 돌아가 쉬고 싶었다.
***
“일어나라.”
“….”
“바닥에 버리기 전에 일어나라고.”
샤를로트에게 냉담히 말하는 레몽. 잠시 반응이 없던 샤를로트는 갑자기 네크로맨서가 막 살린 해골처럼 스르륵 제자리에 똑바로 섰다.
“아, 오빠 진짜 짜증 나. 왜 하필 거기 서 있는데!”
“또 이상한 짓을 꾸미고 있었구나.”
“이상한 짓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허 참!”
“그런 거치고는 너무 아쉬워하는데.”
“저기요, 스스로가 방해꾼이라는 자각은 있으세요?”
“하아….”
취기에 몸도 못 가누던 가냘픈 여인은 이 자리에 없었다. 오직 오빠의 멱살을 잡고 뒤흔드는 대장부만 있을 뿐.
‘어쩐지 와인을 양손에 쥐고 병째로 들이켜도 꿈쩍도 안 하던 애가 취한 채로 있다 싶었다.’
필사적으로 취한 척하는 여동생. 이를 곤란한 표정으로 부축하는 젊은 군인.
레몽은 이 음험한 음모를 보고도 지나칠 만큼 비겁하지 않았다.
“아씨, 방에 단둘이 있을 때가 메인 디시인데. 하다못해 어디까지 갈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정말 네놈 머릿속에는 사탄이 가득하구나. 참으로 딱해.”
“뭐라고! 동생을 방해했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사과는 네가 그 남성한테 했어야지.”
“으윽, 진짜 말 한마디를 안 져! 오빠는 짜증 나는 존재라니까!”
도와주지 못할망정 계획을 다 망쳤다 생각한 샤를로트는 마치 원한이라도 품은 악귀처럼 돌변하였다. 이는 평생을 알고 지낸 레몽조차 놀랄 정도였다.
“갑자기 평소엔 하지도 않던 짓을 한 거냐?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만남은 절대 싫다더니.”
“모헬 중위는… 뭔가 달라. 군인이면서 오빠들처럼 고지식하지도, 그렇다고 저 얼굴로 바람둥이도 아닌 거 같아.”
“잘생겨서군.”
“아니거든! 무엇보다 나 같은 여자가 관심을 보이는데 피하다니. 정말 미친 거 아니야?”
“군인으로서 위기 감지 능력도 뛰어나고.”
“아아악! 진짜!”
바닥까지 발로 차며 성질을 부리던 샤를로트는 레몽과 대화를 포기하고 연회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레몽이 지켜보니 술로 기분을 풀려는 듯했다.
‘동생아… 파티에 있는 술을 다 먹을 생각이니.’
샤를로트는 정말 쉬지 않고 목구멍에 음료를 들이켰다. 한동안 이어질 난동이기에 레몽은 막진 않았다.
비록 동생의 미움을 샀지만 레몽은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위험에 처할 뻔한 젊은 군인을 구했기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늘 몸 성히 집에 못 돌아갈 뻔한 사실을 그 청년은 알까.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거라 판단하여 레몽은 아까 그가 떠나도록 놔뒀다.
레몽 드 라 로크. 그는 침묵의 수호자. 뒤에서 지켜주는 구원자.
다크 나이트였다.
***
“그래서?”
“뭐 그래서. 그냥 가족한테 넘겨주고 난 빠져나왔다네.”
“아니, 그냥 나왔다고? 하다못해 ‘잠시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지키겠습니다’도 아니고 그냥 집에 갔어?”
“더 할 게 뭐가 있나.”
“자네, 혹시 그… 안 서나?”
“닥치게.”
연말 파티 다음 날 31일.
새해가 시작되기 직전 샤를은 어김없이 날 찾아왔다. 핑계는 올해의 술을 다 마셔버려서 내년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
매년 술을 담그는 프랑스는 저장용이 아니면 그해에 다 마셔서 없애야 새해에 악재가 없다고 믿는 미신이 있긴 한데 솔직히 이건 핑계고.
“일단 한잔하게.”
“자넨 집에 안 가나?”
“베르게르, 자네나 나나 어차피 집에 가봐야 혼자야. 그럴 바엔 우정이라도 나누자고. 아무튼 계속 이야기해 보게.”
“그 뒤로 돌아와서 발 닦고 침대에 누워 잤네. 이야기 끝. 되었나?”
“아아악! 미친놈! 푸아그라를 입에 넣어줘도 왜 삼키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해!”
“……”
누가 들으면 네가 일해서 푸아그라 사다 줬는데 내가 안 먹는 줄 알겠다.
발광하는 샤를의 태도에 난 다시 한번 어제를 회상해 봤다.
그녀가 취했고, 난 그녀를 부축해주려다가 오빠를 만났다. 그녀를 넘겨주고, 난 돌아와서 취침.
‘뭐 더 있을 게 있나?’
딱히 문제 될 만한 요소는 없어 보이는데. 오히려 안 떠났다면 이후가 문제였을지도. 뭐가 되었든 겨우 폭탄을 피한 운수 좋은 날 아니었나.
“처음부터 잘못되었네, 이 친구야. 여성분께서 그리 적극적으로 나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아마 있는 자존심과 체면 다 걸고 자네한테 온 걸 텐데!”
“아니,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솔직히 말하게. 자네 모태에서 나와 폐로 숨을 쉰 뒤로 연애를 해본 적이 있나?”
“…씨발.”
“허, 허허! 내 친우가 정신적 고자라니!”
“그게 무슨!”
“베르게르 모헬 중위, 닥치게. 경험이 없으면 고자인 거랑 결론적으로 뭐가 다른가? 바게트 안에 치즈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안 먹어보고 어찌 아냔 말이야!”
와, 순간 설득당할 뻔.
이거 그거 아닌가. 상자 안에 파블로라는 개를 집어넣었는데 파블로가 종에 반응할지 안 할지 모르는…. 아무튼 뭐 그런 비스무리한 거.
문과라 역사는 나름 알아도 과학은 잘 모르겠다.
“샤를, 나를 그리 핍박하면서까지 하고자 하는 말이 뭔가.”
멀대 같은 놈이 자기 일처럼 길길이 날뛰니 나도 감당이 안 되어서 설명을 듣는 대신 결론으로 건너뛰었다.
“다시 만나보게. 그 여성분, 엄청 아름다우셨다며.”
“뭐, 그랬지. 조숙하다기보단, 은근 순수하면서도 청초하더군.”
“오호, 분석까지? 자네도 아예 마음이 없진 않아?”
“아니. 시작할 생각은 없네.”
유왕이 포사라는 여자 때문에 주나라를 밥에 말아먹고 걸왕은 말희라는 여자 때문에 하나라를 국 끓여 잡쉈다.
아무리 여자가 예뻐도 내 결심한 바를 잊을쏘냐!
“또 혼자 이상한 망상 한 다음 결연한 표정 짓지 말고, 어서 기회가 있을 때 잡게나.”
“샤를, 내 자네한테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래.”
“역시 고-”
“그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알아두게.”
“쯧….”
말을 잇진 않지만 나를 위아래로 훑는 게 어디 물건에 하자 없는지 확인하는 공장장의 시선이다. 야 이눔아, 나 멀쩡하다고. 의심되면 같이 씻으러 가보든가.
이런 대화 자체가 솔직히 너무 억울하다.
‘나도 남자라고.’
그런데 어쩌겠나.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그리 난 마음을 굳혔다. 적어도 그리 생각했다.
다음 날 나한테 한 편의 편지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