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118
00101 위험한 초대 =========================================================================
“가봐야겠습니다.”
해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색이 된 종업원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맸다.
“저, 손님, 죄송하지만 다른 말이 있을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아니 되시겠습니까?”
“명령을 누가 내리는 겁니까?”
해경을 따라 일어난 환이 묻자 종업원이 눈치를 보았다. 환은 소화에게 눈짓을 하고는 먼저 카페를 나갔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환이 움직이는 바람에 종업원이 손을 쓰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사이 해경은 소화를 데리고 환의 뒤를 따랐다. 백삼 호가 있는 일 층의 복도 양쪽을 두 남자가 막은 채였고, 그 사이 열린 문 앞에 몇 사람이 모여 낮은 목소리로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고 있었다. 너댓 걸음 앞서 걸어가던 환이 복도를 막은 두 남자와 뭐라고 몇 마디를 주고받다 해경과 소화를 돌아보았다.
“정 군, 이쪽은 평양경찰서 고등계의 최영부 형사님과 백균철 형사님이다. 이쪽은 제 친구인 정해경 군과 그 약혼녀인 박소화 양입니다.”
해경은 가벼운 목례를 건네며 그들을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곧 그들의 너머 열린 문 안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덕완과 중만의 목소리였다. 대화의 내용까지는 자세히 들을 수 없었으나 방 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환이 영부에게 물었다.
“살인이라니 무슨 일입니까?”
“권중만 사장님께서 백삼 호에 묵고 있던 허진남 씨를 방문하셨다가, 안에서 대답이 없기에 열쇠를 받아 열고 들어가 보니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환이 열린 문 안쪽을 들여다보듯 몸을 약간 기울이며 물었다.
“죽은 사람은 허진남 씨가 확실합니까?”
“네.”
“어떻게 죽었습니까?”
“총을 맞은 것 같습니다.”
“총을?”
환이 되물었다. 해경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총을 쏘았다는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일 진남을 죽인 자 역시 오계영이고, 진남이 정보를 빼돌린 것이 들통 났다면 그에게 동기는 있었으나 그것을 실행에 옮길 상황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폭설 탓에 통신이 두절되고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 해도 안에는 평양서 형사들과 귀빈들이 있었고, 화살이 어디로 돌아올지를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쉽게 주목받을 짓을 두 번이나 연속으로 저지른다는 것은 어지간한 강심장으로는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총격이라면 소리가 상당히 컸을 텐데 들은 사람이 없습니까?”
해경이 묻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해경은 그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듣지 못했다는 뜻일까, 혹은 모두가 한통속일까. 지금은 어느 쪽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해경은 문 안쪽을 가리켰다.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습니까?”
영부와 균철이 시선을 교환했다. 두 형사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안쪽에서 중만이 얼굴을 내밀었다. 바깥이 웅성거리니 무슨 일인가 싶었던 모양이었다. 중만은 거기 서 있는 환과 해경, 소화를 보더니 순간 눈썹을 좁혔다. 문 밖으로 나선 중만이 두 형사를 헤치고 나와 환과 마주섰다.
“종업원들에게 손님들을 그 자리에 계시게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카페에는 전달이 되지 않았습니까?”
웃는 얼굴이었으나 해경은 그 말투에 숨겨진 가시를 쉽게 알아차렸다. 중만이 환의 어깨 너머로 지배인, 하고 불렀으나 환은 아랑곳않고 입을 열었다.
“엔도 선생이 평양기홀병원에 계시기에 현재 숙박객 중에 의사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면 제가 허진남 씨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굳이 그러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
환은 중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해경은 소화를 돌아보았다.
“소화 양은 일단 방으로 돌아가 있는 편이 좋겠습니다.”
소화가 시체를 본 것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총에 맞아 죽은 자를 보이는 것은 꺼림칙한 탓이었다. 그러자 소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들어가게 해 주세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소.”
소화의 말을 들었는지 균철이 얼굴을 굳히며 딱딱하게 내뱉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환이 그 말을 들었는지 안에서 소리를 높였다.
“정 군을 저격한 자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으니 들어오게 하십시오.”
“하지만…….”
균철이 무어라고 말하려는데 중만이 손을 들어 말을 막고는 정중한 태도로 해경에게 방 안으로 들어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해경은 열린 문으로 들어서며 방 안을 눈으로 훑었다. 창 한쪽이 열려 있는 방 안에는 덕완과 남조가 함께 서 있었다. 남조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눈치를 보았다. 호텔 지배인으로서는 하루 이틀 사이 총격 사건이며 살인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 것이 결코 달갑지는 않을 터였다. 두 사람은 한쪽 벽으로 비켜서며 눈을 굴리다 해경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해경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눈은 거의 그친 채였다.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가 탁탁거렸다. 해경은 벽난로 가까이 다가가 집게로 장작 하나를 끄집어내어 보았다. 중간 정도까지 불이 붙은 것으로 보아 장작을 넣은 지 기껏해야 이삼십 분이나 되었을까. 바닥에는 뚜껑이 열려 깨져 있는 약병과 어림잡아도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알약이 흩어진 채였다. 해경은 문가에 선 중만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죽은 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권 사장님이신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그 전에 허진남 씨는 방에 혼자 있었던 거고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요.”
중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경은 바닥에 쓰러진 시체로 다시 눈을 돌렸다. 마흔을 갓 넘겼을까. 눈으로 봐도 다부지게 느껴지는 상당한 체구 외에 특별히 눈에 띄는 인상은 아니었다. 허진남. 해경은 그 이름을 다시 한 번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방에 계속해서 혼자였다면 이 장작을 집어넣은 뒤 고작 십 분, 길어야 이십 분 정도 사이에 죽음을 맞이했을 확률이 높았다.
진남의 시체는 천장을 보고 반듯하게 누운 채였다. 정면에는 총상이 눈에 띄지 않았다. 환이 진남의 몸을 들어 뒤집자 등판 한가운데 뚫린 총알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환은 진남의 맥을 짚어 완전히 절명한 것을 확인한 뒤 눈꺼풀을 올려 보고 입 안을 살폈다. 그 사이 방 안을 살피던 소화가 갑자기 바닥에 엎드리더니 몸을 숙여 침대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침대 아래를 휘저었다. 진남을 관찰하느라 소화의 행동을 미처 보지 못했던 해경은 다음 순간 소화가 아얏, 하는 소리에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소화가 오른쪽 손끝을 감싼 채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가느다란 금테 안경이었다.
“그게 무어지요?”
해경이 묻자 소화가 안경을 내밀었다. 안경은 오른쪽 알이 깨져 있었다. 해경은 그제야 소화의 손끝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해경은 서둘러 소화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네에, 조금 벤 거예요.”
아마 깨진 안경알에 벤 듯했다. 해경은 소화의 손을 잡아 살펴보았다. 손끝의 상처에서 선혈이 방울져 올라왔다. 해경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상처 위에 대고 눌렀다. 잠시 그러고 있으려니 소화가 눈치를 보다 머뭇머뭇 손을 뺐다. 다른 사람들이 이쪽을 흘끔거리며 보는 까닭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해경은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소화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피가 멎을 때까지 누르고 있어요.”
소화가 손을 뒤로 감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경은 안경을 들어 꼼꼼히 관찰했다. 테에는 흠집 하나 없었고 먼지가 내려앉거나 한 흔적도 없었다.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테 안쪽에는 大學堂(대학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해경은 아마 이 안경이 본정 이정목(本町 二丁目: 충무로 2가)의 대학당안경점에서 맞춘 제품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안경의 한쪽 다리는 심하게 휘어져 있었다. 해경은 그 안경을 들고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안경은 허진남 씨의 것이 맞습니까?”
“네, 아마도.”
문가에 서 있던 중만이 대답했다. 해경은 미간을 약간 좁히고는 남조를 향해 물었다.
“오늘 백삼 호에 출입한 사람은 없습니까?”
입이 마르는지 연신 혀로 입술을 축이며 서 있던 남조가 갑작스러운 해경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바로 세웠다. 해경이 그를 빤히 마주보자 남조가 곁에 서 있던 덕완의 눈치를 살폈다. 해경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덕완 씨, 오늘 여기에 오신 적이 있습니까?”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덕완에게로 향했다. 덕완이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나눌 이야기가 있어 잠시 들른 적은 있습니다만.”
“그때 허진남 씨에게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없었습니까? 불안해한다든지 누군가를 기다린다든지…….”
“아무 것도요.”
덕완이 즉각 대답했다. 해경은 안경을 들어 보였다.
“침대 아래 이 안경이 있었는데요.”
“그냥 떨어졌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덕완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해경은 덕완에게 물었다.
“혼자였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이 안경은 알이 깨져 있고 한쪽 다리는 완전히 휘어졌습니다. 협탁에서 떨어지는 정도로 이렇게 안경이 망가진다는 건 이상하군요. 누군가와 몸싸움을 한 증거는 아닐까 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진남의 시체를 살펴보고 있던 환이 손짓으로 해경을 불렀다. 해경은 가까이 다가가 시체 위로 몸을 숙였다. 환이 진남의 눈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확실히 긁힌 듯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아직 붉은 빛이 선명해 생긴 지 오래 되지 않은 상처임은 분명했다. 해경은 그 상처를 뚫어져라 보며 입을 열었다.
“허진남 씨는 체구가 상당한 분이라 이덕완 씨가 이 정도로 거친 몸싸움을 벌이기에 좋은 상대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 상처는 매우 최근에 생긴 것인데, 만약 오늘 생긴 것이 아니라고 해도 하루 이상 지났을 것 같지는 않군요. 이렇게 다툴 만한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이덕완 씨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 오셨던 것입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조선공산당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덕완에게 해경이 사이를 두지 않고 날카롭게 묻자 덕완의 눈이 약간 크게 뜨였다. 덕완이 중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만이 괜찮다는 표정으로 손짓을 하자 덕완이 팔짱을 끼었다.
“무어, 아신다니 이야기는 편하겠군요. 조선공산당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허 변호사가 사이에서 정보를 전하는 역할을 했고 그 과정에서 저에게 약간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본인이 총을 맞으셨으니 더 잘 아시겠지만 놈들은 일단 일차적으로 실패를 했고, 허 변호사 말로 분명 다음 작전을 꾸밀 것이라고 해서 대책을 논의하려 잠시 만난 거요.”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통신과 교통이 두절이라 당장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허 변호사는 오계영이 상당히 강성이라 두 번째 시도는 좀 더 큰 규모로 실패 없이 하려고 들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눈이 그치는 대로 경찰에 지원을 요청해 병력을 보강하자는 이야기를 했지요.”
해경이 덕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환은 고개를 갸웃하며 진남의 시신을 이리저리 살폈다. 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진남의 시체를 약간 옆으로 끌어 옮겼다. 바닥에 깔린 카페트 위로 진남의 등에서 흘러나온 피가 얼룩져 있었다. 다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 흔적을 유심히 관찰하던 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다시 벤 손을 붙들고 방 안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소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베개가 없담?”
해경은 그 말에 반사적으로 침대를 보았다. 소화의 말대로였다. 진남이 쓰던 침대 위에는 베개가 없었다. 해경은 남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베개를 처음부터 놓지 않았습니까?”
남조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한 침대에 베개는 반드시 하나씩 놓도록 되어 있습니다.”
해경은 그 말에 열려 있는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가 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창가 아래쪽에 쌓인 눈 위로 무언가가 떨어진 듯한 흔적이 있기는 했으나 베개는 보이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베개가 없어진 것일까 해경이 막 생각한 순간, 환이 몸을 일으키며 내뱉었다.
“이이는 총을 맞아 죽은 게 아닙니다.”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일제히 환을 보았다. 한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몇 초 동안 흘렀던 정적을 깬 것은 덕완이었다. 덕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며 다소 과장되게 어깨를 올렸다가 도로 내렸다.
“등판에 아주 구멍이 났는데 총을 맞아 죽은 게 아니면 어찌 죽었다는 게야?”
“그 말대로지. 등 한가운데 총을 맞은 사람이 피를 이렇게 적게 흘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망설임 없이 대꾸한 환은 진남의 시체가 누워 있던 바닥을 가리켰다. 카페트 위로 남은 핏자국은 크지 않았다. 환은 고개를 들어 사색이 되어 서 있는 남조를 보았다.
“혹시 메스와 핀세트(pincette)같은 것을 비치하고 있습니까?”
“아, 아, 네. 구급약품을…….”
“좀 가져다주십시오.”
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조가 바람같이 달려 나갔다. 해경은 환의 곁에서 몸을 숙여 진남의 시체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진남의 사인(死因)이 총상 때문이라고 한다면 석연치 않은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환의 말대로 바닥에 남은 출혈량은 지나치게 적었다. 게다가 등 한복판에 총상을 입었다는 것은 상대에게 거의 완전히 등을 보였다는 뜻일 터였다. 창은 열려 있었지만 만약 창 밖에서 저격을 한 것이라면 이 현장은 이상했다. 창은 안쪽에서 열고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었기에, 정말 오계영이 바깥에서 저격을 한 것이라면 진남이 일부러 안에서 창을 연 뒤 등을 돌리고 서 있었어야만 했다. 오계영이 두 번째 시도를 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자가 그런 자살 행위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구나 상처가 남고 안경이 완전히 망가질 정도로 격렬한 몸싸움을 한 뒤라면 더더욱.
“그건 이 살인 현장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요.”
해경은 진남의 시체에서부터 창가까지 바닥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창가에 다다른 해경은 손을 뻗어 열려 있던 창을 잡아당겨 닫고 거기에 기대섰다. 그리고는 방금 자신이 지나온 자리를 가리켰다.
“오계영이 아무리 명사수라 한들 눈이 내리는 가운데서 이렇게 정확히 사람을 쏘아 맞추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허진남 씨는 바로 이 자리에서 총을 맞고, 맞은 즉시 그 자리에 반듯하게 누워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곳에는 혈흔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오계영이 눈보라 속에서도 백발백중으로 상대를 맞추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지요. 어떤 짐승이라도 상처를 입으면 본능적으로 안전한 곳을 찾습니다. 등 한가운데 총상을 입었다면 피를 상당히 흘렸을 텐데 방 안에는 시체 바로 아래를 제외하면 핏자국이 전혀 없군요.”
해경은 손끝으로 방 안을 조망하는 포물선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총을 맞은 순간에는 분명 피가 튀었을 텐데 방 안 어디에도 그 흔적이 없고요.”
“그렇지. 답은 하나뿐이오. 죽은 뒤에 쏜 거지.”
환이 내뱉었다. 해경은 팔짱을 끼며 방 안의 사람들을 응시했다. 당혹스러움과 공포가 뒤섞인 그 얼굴 사이에 분명 누군가가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그때 남조가 구급약 상자를 들고 헐떡이며 돌아왔다. 환은 남조가 가져온 구급약 상자를 열고는 진남의 상의를 벗겨 엎드린 자세로 바꾸어 놓았다. 메스로 등 한가운데의 상흔을 짼 환이 핀셋을 넣어 상흔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피로 물든 총알이었다. 환은 그 총알을 해경에게 내밀었다.
“정 군, 알아볼 수 있겠나?”
해경은 총알을 받아들어 손바닥 위에 올리고는 유심히 보았다. 한동안 말없이 총알을 들여다보던 해경은 천천히 대답했다.
“팔 밀리미터 남부탄입니다.”
이 총알을 쓰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으며, 해경은 그것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일본군이다. 팔 밀리미터 남부탄은 일본군 총기의 자체 규격으로 자동단총과 권총에 모두 쓰이는 제품이었다. 만일 누군가 호텔 안에서 이 현장을 꾸며냈다고 한다면 자동단총은 지나치게 눈에 띄므로 권총으로 쏘았을 터였다. 일본 육군의 제식 권총인 십사년식 권총 역시 당연히 이 총알을 쓰고 있었다. 순간 해경의 머릿속에 두 사람의 이름이 지나갔다. 와타나베 이사오와 사카모토 다케야.
“이 일이 오계영의 짓이라고 믿습니까?”
해경은 덕완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덕완이 마른침을 삼켰다. 해경은 덕완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오계영은 대한독립군단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대한독립군단은 연해주에 거점을 두었고, 그곳에서는 노서아(露西亞: 러시아) 총기를 무척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굳이 그가 일본군 전용으로 쓰이는 총기를 구해 사용한다?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요. 성능도 노서아 총기가 단연 뛰어나니까요.”
덕완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해경은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곳의 숙박객 중 일본군 소속인 자들이 두 명 있지요. 와타나베 이사오, 사카모토 다케야. 이덕완 씨는 이 친목회의 간사시니 두 사람을 다 잘 아실 텐데요.”
“다, 당신 지금 일본군을 범인으로 의심하는 거요? 아니, 그보다 내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 믿는 겁니까? 나는, 나는 절대 아니오. 간사라고 해도 그들은 신입 회원이라 얼굴을 본 건 여기 와서 처음이었단 말입니다.”
덕완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해경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통신이 연결되는 대로 평양기홀병원에 연락을 해서 제 어깨에서 빼낸 총알이 무엇인지 알아본다면 좀 더 확실해지겠지요. 만약 그 총알 역시 팔 밀리미터 남부탄이라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그 두 사람이 될 겁니다. 일본군 육군의 제식 권총이 그 총알을 쓰고 있으니까요.”
“와타나베와 사카모토를 이 자리에 불러 와요.”
환이 문가에 선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두 형사에게 말했다. 영부와 균철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자 환이 그들에게 물었다.
“내 말 못 들었습니까?”
영부가 균철의 옆구리를 찔렀다. 균철이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치다 서둘러 사라졌다.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해경은 날카로운 눈으로 방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꾸미다 실패한 현장이었다. 분명 허진남은 어떤 방식으로 먼저 죽어 버렸고, 누군가 그것을 오계영의 짓으로 뒤집어씌우고 은폐하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총격 살인 현장을 만들어 낸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해경은 무심코 소화 쪽을 보았다. 소화는 침대 옆의 협탁에 놓인 잔을 들어 살피고 있었다. 잔에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호박색 물이 남아 있었다. 술인지 차인지 알 수 없었다. 잔을 코에 대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 본 소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해경은 소화를 보고 있다가 물었다.
“잔 안에 든 게 무어지요?”
“삼(蔘) 냄새가 나는데 아마 인삼차나 인삼주 같아요.”
소화가 맛을 보려는 듯 잔을 기울이는 것을 본 해경은 재빨리 그리로 걸어가 얼른 소화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들었다. 소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해경을 올려다보았다. 해경은 소화에게 주의를 주었다.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는데 함부로 마시면 큰일 납니다. 독살의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소화가 아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이쪽을 보고 있던 환이 퍼뜩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바닥에 흩어져 깨진 약병을 손으로 헤쳤다. 소화가 놀란 표정으로 환에게 말했다.
“그러다 다치시겠어요.”
그러나 전혀 아랑곳 않고 바닥을 뒤지던 환이 절반쯤 깨진 병의 조각을 찾아내 거기 붙어 있는 상표를 읽었다. 그리고는 해경과 소화에게 자신이 들고 있는 병을 가리켰다.
“범인은 여기 있었군.”
해경이 의아한 표정을 하자 환은 두 사람 쪽으로 상표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캄펠’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환은 방 안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캄펠은 강심제요. 아주 흔히 쓰이는 약이지. 물론 과용하면 발작을 일으키니 주의해야 하고. 그런데 몇 년 전에 제대 약물학교실에서 아주 흥미로운 연구를 하나 발표했소. 인삼을 투여한 자에게 캄펠을 썼더니 인삼을 투여하지 않은 자보다 더 적은 양으로도 발작을 일으켰다는 거요. 그래서 캄펠을 복용하는 자에게는 인삼을 피하도록 조언을 합니다. 허진남 씨가 캄펠을 복용하고 있었다면 평소 심장 질환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그가 이 사실을 모르고 인삼차와 캄펠을 함께 먹었다면 발작이 일어나 사망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있지요.”
“그 사실을 아는 자가 일부러 먹인 것은 아닐까요?”
소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환이 그 말에 막 대답하려는 순간 균철이 돌아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그리로 쏠렸다. 일본군 장교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균철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균철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사카모토 씨를 모시고 왔습니다.”
“와타나베 이사오는?”
환이 묻자 균철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와타나베 씨는 방에 없었습니다.”
“방에 없다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방에 아무 짐도 없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말에 환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조선공산당인가, 일본인 장교인가? 도대체 어느 쪽이 더 위험한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