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158
============================ 작품 후기 ============================
* 완충기는 차량의 범퍼, 격자창은 차량의 그릴 부분을 말합니다.
* 1920년대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자동차 회사는 단연 포드 사였습니다. 그러나 1926년을 기점으로 시보레 사가 포드 사의 판매량을 앞지르게 됩니다. 실제 당시 한국에서도 1929년 2월 5일 자동차시험법의 개정을 알리는 신문기사에서 ‘최근 수년 이래로는 ‘포드식’만 아니라 ‘헨듸식(시보레형)’으로 변해가는 추세에 있으므로 오는 삼월부터는 ‘포드식’과 ‘헨듸식’의 둘을 전부 사용 시험케 한다’는 부분이 등장하여 이미 당시에 시보레 보급률이 상당히 높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법의학 관련 부분은 브라이언 이니스, 이경식 역 (휴먼앤북스, 2006)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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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창을 활짝 열어 놓은 택시 안으로 완연한 봄바람이 연신 얼굴을 스치며 흘러갔다. 그러나 해경은 그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은 채 앞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끝도 없는 깊은 물 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가, 다음 순간이면 태양이 작열하는 허허벌판 위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감각이 머릿속을 연신 왕복하며 지났다.
수면제의 힘을 빌어도 쉽게 잠들 수 없었기에, 극한의 피로감 탓이리라 애써 생각하면서도 해경은 자신이 이런 기분이 되는 진짜 까닭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한주, 김화란, 정아경, 정해경. 네 개의 이름이 매 순간마다 끊임없이 반갑지 않은 손님처럼 해경의 뇌리를 번갈아 두드리곤 했다.
천석꾼 집안의 젊은 부부와 두 아이. 참판을 지낸 양반 집안에서 딸에게도 돌림자를 주어 이름을 지었을 정도라면 그 사랑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들 중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헤어지지 않은 채 살 수 있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부질없는 생각들이 연신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빠져나갔다. 불지옥에 산 채로 처넣어진 듯 뜨거운 열기가 목 끝까지 치받히고 나면 곧 눈덩어리를 통째로 삼킨 것처럼 전신이 차가워졌다. 사람이 이렇게 미치는 것인가. 해경은 자조했다.
권중만의 집에서 키우는 개만도 못한 종 취급을 받으며 살던 시절에도,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누나를 찾아 경성에서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하던 시절에도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것일까, 혹은 죽고 싶은 것일까.
“손님, 손님!”
멍하니 앉아 있던 해경은 운전수의 걸걸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택시는 명치정 거리에 서 있었다. 이미 여러 번 불렀는지 거 젊은 사람이, 하고 들으라는 듯 구시렁대는 기사에게 허둥거리며 지갑을 꺼내 돈을 준 해경은 택시에서 내리다 말고 멈칫했다. 길 건너편의 사무실 앞에서 소화가 서성거리는 것을 본 탓이었다. 소화 역시 택시에서 내린 해경을 알아보고는 그 자리에 뚝 멈춰 섰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구도 선뜻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 몇 대의 차가 도로를 지나갔다. 자동차 한 대가 지나칠 때마다 소화의 작은 몸은 완전히 가려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해경은 점멸하는 듯한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몇 번째인가의 차가 지나갔을 때 먼저 이쪽으로 움직인 건 소화였다. 봄 햇살에 바짝 마른 길 위를 뛰어오는 소화의 발끝에서 옅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소화의 등 뒤로 때늦은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 그리고 해경은 그 경적의 잔상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 자신의 눈앞에 와 있는 소화를 보았다.
“선생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밭은 숨이 약간 섞인 채였다.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경은 소화를 내려다보다 불현듯 그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말이 담긴 눈이었으나 소화는 간밤에 그랬던 것처럼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해경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소화가 손을 뻗어 해경의 소매를 꽉 쥐었다. 마치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자동차 한 대로도 완전히 가려져 버리는 그 작은 몸으로도 소화는 어떻게든 자신을 버티게 해 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 나와 있었습니까?”
해경은 애써 웃는 표정을 했다. 소화는 해경을 가만히 보다 입을 열었다.
“날이 좋아서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양 하고 있었으나 해경은 치맛자락을 움켜쥔 소화의 손끝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았다. 지난 밤 해경은 소화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소화 역시 아무 것도 묻지 않았었다. 두려움의 실체와 마주친 순간의 감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소화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은 까닭은 아니었다. 이렇게 한계에 몰린 순간조차도,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해경은 차가워지는 손을 말아 쥐었다.
“그렇군요. 돌아갈까요?”
해경은 먼저 몸을 돌렸다. 길을 건너 다시 사무실 앞으로 돌아온 해경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다 사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온 소화가 문을 닫았다.
“점심은 드셨어요?”
“네. 차라도 한 잔 마시도록 할까요?”
해경이 웃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으며 입을 열자 소화가 네, 하고 대답하고는 찬장에서 다기를 내렸다.
“내가 하지요.”
“아니에요. 앉아 계셔요.”
소화가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해경은 그 뒷모습을 보다 문득 이 정돈된 풍경 안에 소화가 있는 것이 자신에게 너무나 익숙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언젠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 다시 스물대며 뇌리 어딘가에서 되살아났다. 언제까지 여기에서 소화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랬듯이 이런 일상이 영원히 유지될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어렴풋한 예감이 불현듯 등 뒤를 스쳐 지났다.
“부검 결과는 어찌 되었나요?”
차를 내려 가져온 소화가 해경 앞에 잔을 놓으며 물었다. 해경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찻잔에 구석구석 스민 온기에 까닭 없이 불안해졌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용정에서는 심장마비로 사망 소견서를 보내 왔다 하는데, 제대 부검의는 질식사의 소견을 표시해 놓았습니다. 자살이나 자연사로 가장하기엔 매우 부자연스러워요. 이환 씨는 자동차 사고를 가장하여 죽인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어머나, 세상에…….”
소화가 얼굴을 찡그렸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이었다.
“용정에는 야간 통행금지가 내려져 있어 밤에는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죽은 시각은 한밤중으로 추정되는데, 장순현 씨를 잘 아는 누군가가 바깥으로 유인해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외지 사람이 통행금지가 있는 낯선 지역을 한밤중에 함부로 돌아다니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누가 왜 죽였을까요? 역시 그 일 때문일까요?”
소화는 차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해경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무엇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가능성은 높겠지요. 권경천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려던 중 갑자기 상해에 있었다는 사촌 형이 용정에서 장순현 씨를 불러들였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두 가지 일이 사실은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지요. 처음 장순현 씨가 권중만 사장과 이환 씨를 연결시켜 준 것도 사촌 형을 통해서였다고 했으니까요.”
“그럼 그 사촌 형이라는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신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이환 씨의 말로는 용정에서 정보를 주는 이들이 있다니 곧 알 수 있겠지요.”
“권중만 사장도 장순현 씨가 자기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겠지요? 그러면 이환 씨에게 보냈던 문서에 아주 중요한 내용이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순현이 휘갈겨 썼던 ‘덫에 걸렸네.’라는 한 줄의 문장이 기실 모든 것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자신도, 환도, 그리고 소화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명백한 증거였다. 권중만이 장순현의 살해를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다면 모든 것은 그저 심증에 불과했다. 심증만으로는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그 이름은요?”
잠깐 혼자 생각에 빠져 있던 해경은 그 목소리에 퍼뜩 소화에게 시선을 돌리며 되물었다.
“이름이라니요?”
“거기 있던 여섯 명의 이름 말이에요.”
아무 것도 알 리 없는 소화가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양 던진 말에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간 대답을 하지 못하고 굳어 버린 해경의 표정을 본 소화가 멈칫했다. 자신이 무어 하면 아니 될 말이라도 했는가 싶은 모양이었다. 입이 말랐다. 해경은 책상 위에 놓아 둔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이 떨리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잡았다고 생각한 찻잔이 순식간에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찻물이 튀며 찻잔이 조각나 부서졌다.
“선생님, 괜찮으셔요?”
놀란 소화가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해경의 젖은 셔츠 앞섶을 닦아내다 해경의 손을 살폈다. 뜨거운 차라 혹여 화상이라도 입지 않았는지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해경이 괜찮다는 손짓을 하자 소화가 몸을 숙여 깨진 찻잔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그냥 두어요. 다칩니다.”
해경은 얼른 소화를 멈추게 하고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찻잔 조각을 주워들었다. 산산이 부서진 다기 조각의 날카로운 면에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미끄러져 서늘하게 번뜩였다. 해경은 저도 모르게 순간 손을 멈추며 깨진 조각에 맺힌 햇살에 시선을 주었다. 날카로운 빛이었다. 다기 조각을 쥔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준 채 그것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던 해경은 짧은 침묵을 깬 소화의 목소리에 퍼뜩 현실로 되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씀해 주실 수는 없나요?”
해경은 고개를 들었다. 소화를 올려다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쳐다본 얼굴에는 그늘이 져 표정을 잘 읽을 수 없었다. 해경은 시선을 약간 내렸다. 소화가 치마폭을 움켜쥔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는 있었으나 기실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해경은 스스로가 한심해져 입술을 깨물었다.
“순천에 다녀오신 거지요?”
뜻밖의 물음에 해경은 미간을 좁혔다. 순천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마른침이 넘어갔다. 해경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되물었다.
“어찌 알았습니까?”
“기차표를 떨어뜨리고 가셨어요.”
워낙 황망했던 탓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실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차표를 떨어뜨리고도 모를 정도였던가, 속으로 생각한 해경은 몸을 일으켰다. 다시 내려다본 소화의 얼굴은 애써 웃는 표정이었다. 소화가 동그란 눈으로 가만히 해경을 마주보다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지는 말아 주셔요.”
작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였다. 마치 무언가 훔치려다 들킨 아이처럼 그 말에 귓가가 확 뜨거워졌다. 꿰뚫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처럼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로 넘어가는 건 이제 불가능한 일일 터였다. 해경은 소화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금 전에 택시에서 운전수가 몇 번을 부르는데도 꼼짝도 아니 하시는 걸 봤어요.”
“소화 양.”
해경이 소화를 부르자 소화가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주저하듯 고개를 숙이며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소화는 아까보다 더 작아진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제가 선생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해경은 소화의 말을 잘랐다. 소화가 멈칫하며 눈을 들어 해경을 보았다. 이번에 잠깐 사이를 둔 쪽은 해경이었다. 해경은 언제나 두려움에 직면한 순간 자신이 무너질 것을 경계해 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게 된 자신의 과거는 해경이 홀로 감당하기엔 쉽지 않은 것이었다.
해경은 순천에서 돌아오던 길을 떠올렸다. 내내 마치 세상에 혼자 남겨진 사람 같은 기분이었다. 그믐의 밤에 와사등 하나 없는 길을 홀로 걷는 사람처럼 막막해져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눈앞에 소화가 있는 것을 보고 무언가 둑이 터지듯 안에서 무너져 내렸었다. 등을 안아 오던 그 팔의 온기가 자신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안 순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 순간의 어둠과 침묵은 놀랍게도 해경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런 위안을 준 사람은 바로 소화였다. 자신의 짐을 타인과 나누어 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때 해경은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했던 것이다.
“……내가 순천에 갔던 건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해경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소화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해경은 한편으로 만약 소화와 자신의 입장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기꺼이 소화의 짐을 나누어 들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고맙고 기쁘게 느낄 것이라는 사실 역시도.
“그 여섯 사람은 이환 씨의 말대로 밀고와 관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십여 년 전 의병에게 군자금과 식량을 대어 주었던 이들이었지요. 권경천은 그들을 밀고했고, 밀고당한 사람들의 집안은 모두 망하고 말았습니다. 재산은 사라지고 대도 끊겼다고 합니다.”
소화가 짧은 숨을 들이키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해경은 소화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여섯 명에게는 각각 부인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행방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 중 누가 권경천에게 복수하려 했는지도 알 수 없어요. 복수할 사람이 남아 있기는 한 건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여섯 사람 중 가장 먼저 체포된 이가 있었습니다. 권경천은 그 집에서 대대로 소작을 부쳤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권경천을 믿었던 겁니다. 설마 밀고를 당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거지요.”
“그 분도 돌아가신 건가요?”
“문초를 받다 죽었습니다. 부인은 자결했고요. 젊은 부부였고 어린 남매가 둘 있었습니다.”
“세상에…….”
소화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손을 모았다. 해경은 입 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말하는 순간 누군가가 심장을 꽉 쥐었다 놓는 것 같은 감각이 지났다.
“마을에서 참판 댁 나으리라고 불렀던 남자의 이름은 정한주, 부인은 김화란이었습니다. 집안에서는 부부의 첫 딸을 몹시 아꼈던 모양입니다. 딸의 이름에도 돌림자를 넣어 지었지요. 어린 남매 중 딸의 이름은 정아경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은,”
해경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바닥에 깨진 찻잔 조각 위로 맺히는 햇살이 눈부셨다. 해경은 그 눈부심을 응시하며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해경입니다.”
해경의 말이 끝나자 사무실 안에 무서운 고요가 가득 찼다. 소화는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하니 해경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얼음처럼 굳어 있던 소화는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몇 발자국 더 움직였을 때에서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선생님.”
소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해경은 소화를 마주보았다.
“그 젊은 부부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입 안에서 낯선 단어들이 서걱거렸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그렇게 불러 본 일이 없었다. 해경은 모래를 씹는 듯한 그 생경함을 애써 참아냈다.
“나는 어릴 적 누나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기억도 하지 못할 만큼 어릴 때부터 권경천의 집에서 누나와 함께 종살이를 했습니다. 누나가 열다섯 되던 해, 권경천의 아들이 누나를 겁탈하려 했고 그걸 본 나는 놈을 돌로 내리쳤지요. 우리는 놈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도망쳤고, 산 속에서 헤어졌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누나를 보지 못했습니다. 열여덟 살에 경성에 올라와 지금까지 내내 누나를 찾았지만 단 한 번도 소식을 들은 일이 없습니다. 누나는 그날 죽었을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소화가 다시 한 번 해경을 불렀다. 해경은 희미하게 웃었다.
“예전에 나는 소화 양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살인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였다고 생각한 사람이 눈앞에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요. 내가 죽이려 했던 건 바로 권중만 사장입니다.”
권중만의 이름에 소화의 눈이 더 크게 뜨였다. 해경은 소화의 눈에 스치는 두려움을 읽었다. 그리고 소화가 자신의 두려움을 읽지는 못하기를 바라며 말을 이었다.
“그는 내가 어릴 적 자기를 죽이려 한 종이라는 걸 아직 알지 못합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나인 걸 안다면 권중만 사장은 아마 내게도 덫을 놓겠지요. 이환 씨와 장순현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머뭇거리던 소화가 해경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 해경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마주 쥐었다. 해경은 소화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손을 감싼 소화의 두 손은 작았다. 손톱이 닳고 마디가 도드라진 그 작은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권중만이 장순현 씨를 죽였다는 걸 반드시 증명해야 합니다. 내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더 이상 덫을 놓지 못하게요. 절대로 소화 양을 위험하게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소화는 그 말에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
소화가 순간 목이 메었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소화의 코끝이 조금 빨갛게 달았다. 소화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채 울먹임을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밤에 잠들면 가끔 무서운 꿈을 꿔요. 모르는 이가 저를 죽이려 하거나, 라 세느 지하에서 죽은 사람과 한 방에 누워 죽기를 기다리는 꿈이에요. 그런 꿈을 꾼 날은 무서워서 잠이 오지 않아요. 하지만…… 선생님을 생각하면 괜찮아요. 그럴 때마다 선생님이 몇 번이나 저를 구해 주셨으니까요.”
“소화 양.”
“그러니 이번에는 제가 선생님을 도와 드릴 거예요.”
소화가 해경을 마주보았다. 동그란 눈이 어느새 물기로 반들거렸다. 말을 잃은 해경은 그저 그 눈을 응시할 뿐이었다. 소화는 다시 한 번 그 말을 되풀이했다.
“제가 도와 드릴 거예요.”
해경은 대답 대신 다른 손으로 자신의 손을 쥔 소화의 손등을 감쌌다. 긴 비 끝의 햇살 같은 온기가 스며들었다. 해경은 그 온기의 아주 가느다란 자락도 놓치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소화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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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중만은 책상 앞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정석과 정해경. 선뜻 하나로 겹쳐지지 않는 두 이름이 연신 머릿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둘이 정말 동일인물인지 당장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 중만을 며칠째 짜증스럽게 하고 있었다. 심증은 있으나 아무런 증거도 없는 일이었다.
단지 조사해 본 바로 아버지가 밀고했던 자들 중 일가 친척을 뒤져도 그만한 남매가 있는 것은 정한주가 유일했다. 행랑아범의 말로는 자신의 집안이 아버지 대까지 그 댁에서 소작을 부쳐 먹었다고 했다. 정한주의 증조부와 조부가 참판을 지냈기에 흔히들 참판 댁이라 불렀고, 정한주는 당시 한양에서 공부를 하다 한양 출신의 부인과 결혼을 하여 본가로 돌아와 지냈다는 것이었다.
중만은 아버지가 누구에게 부탁을 받았다며 그 어린 남매를 데려왔다던 행랑아범의 말을 떠올렸다. 정한주의 자식들은 친척집에 가 있어 화를 피했다고 했던가. 아버지가 밀고자인 것을 모르고, 오랫동안 자기 집에서 일해 왔으니 믿을 만한 이라고 여겨 그 아이들을 부탁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한주의 부인이 아이를 잃고 광증에 걸렸다 했으니 아버지는 애초에 그 아이들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후환이 될까 두려워 이름을 바꾸어 붙이고 종의 신분으로 살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린 아이들이었고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중만은 파이프를 물고 성냥으로 불을 당기며 코로 연기를 뱉었다. 아버지는 밀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린 아이들을 죽일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총독 훈장마저 누구 눈에 띌까 싶어 꼭꼭 숨기고 일생을 살았던 자였던 것이다.
“재미있군 그래.”
혼잣말을 중얼거린 중만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고원이 되기 전까지는 참판 댁에서 계속 땅을 부쳐 먹었다 하지만 그건 워낙 오래된 일이었고, 자신이 소작 주는 주인집과 어울릴 일도 없었기에 중만에게는 그들에 대한 기억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정한주의 아들이 정말 자기 집 종놈이었던 이정석인지도 확실히 장담할 수 없었다. 중만은 집안에서 일하는 종놈들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았을 뿐더러, 중만의 기억에 당시 이정석은 체구가 작고 깡말라 별 볼 일 없는 종놈에 불과했던 것이다.
땟국이 흐르던 그 어린 소년의 흐릿한 인상은 어디서나 눈에 띄는 장신의 미남인 정해경과 쉽게 겹쳐지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뜬 중만은 들어오게, 하고 내뱉었다. 금석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는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난번에 알아보라 하신 것 말입니다.”
“무엇을?”
“정해경이 졸업한 고보가 어디인지 알아보라고…….”
금석의 말에 중만은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의 재를 떨어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그래. 알아냈나?”
“그것이, 등록된 모든 고보에 연락을 돌려 보았지만 전부 최근 오륙 년간 그런 졸업생은 없다 합니다. 중퇴한 재학생도 없고요.”
“한 사람도 없다고?”
“동명이인조차 없습니다.”
아주 드문 이름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동명이인조차 없다는 말인가. 놈이 이정석이라는 이름을 쓰지는 않았을까, 잠시 생각하던 중만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죽이려다 도망쳤으니, 만에 하나라도 운 좋게 후견인이라도 하나 건져 학교에 입학했다면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이 있는 이름은 쓰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만약 이정석이 정한주의 아들이라면 자신의 본명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것일까. 행랑아범의 말로 그 남매는 자신의 집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중만은 다시금 이지순을 떠올렸다. 그 계집이라면, 어쩌면 자신과 동생에 대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날 밤 이정석이 산에서 죽은 것이 아니었다면?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까지는 사실이라 해도, 죽지 않고 살아서 도망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전에 이지순이 제 동생에게 자신들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해 줄 시간은 충분했을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중만은 책상 서랍을 열어 종이 한 장을 찾아냈다. 일전에 금석이 가져다 준 장부로, 정해경이 이지순이라는 여자를 찾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단지 이 여자가 그 계집일 수도 아닐 수도 있고, 혹은 정해경과 관련이 있는 여자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한 장의 종이가 매우 새롭게 느껴졌다. 만일 그날 이정석이 죽지 않고 도망쳐 본명인 정해경으로 이름을 바꾸고 잃어버린 자신의 누나를 찾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면 들어맞는군.”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중얼거린 중만은 헛웃음을 뱉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라 세느 일로 처음 해경을 만나러 갔을 때 느꼈던 기묘한 기시감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단 한 번도 그 기시감의 이유를 생각해 본 일이 없었는데 설마 그래서였던 것인가.
중만의 생각을 알 리 없는 금석이 눈치를 살폈다. 중만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등을 묻고는 미친 사람처럼 킬킬거렸다. 만약 이정석이 정해경과 동일인물이라면 아직 제 누나를 찾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몇 년을 이처럼 찾아 헤맸다면 분명 아직도 누나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소에 몸을 던져 죽은 누나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 알겠네. 나가 봐.”
중만은 금석 쪽을 쳐다보지 않고 손을 저었다. 그러자 금석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사장님. 오전에 부재중이실 때 고토 보안과장에게 연락이 왔었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르겠다고요.”
“언제쯤?”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오는 대로 들여보내게.”
금석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물러갔다. 중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축음기에 레코드를 걸어 놓고는 사무실 안을 서성거렸다. 창에 쳐 놓은 두꺼운 커튼을 걷자 봄 햇살이 하얗게 사무실 안을 밝혔다. 중만은 창가에 선 채 바깥에 시선을 주었다. 그렇다면 정해경은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자신이 집안의 종놈을 잊을 수는 있어도, 그 종놈이 자신을 잊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 리 없었다. 처음 해경의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다 치더라도 명함을 주었으니 이름을 보았다면 분명 생각이 났을 터였다. 평양에서 사사건건 훼방을 놓은 것도 그 때문이었던가. 해경이 그렇게 계속 껄끄러운 입 안의 가시처럼 느껴진 것이 전부 과거의 악연 탓이라고 생각하자 그제야 꽁꽁 묶여 있던 매듭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영악한 놈 같으니.”
중얼거린 중만은 창을 열어젖혔다. 바람이 안으로 불어들었다. 자신이 죽지 않았으니 이제 와서 살인범으로 고발을 할 수도 없었고, 상해로 엮어 넣기에는 이미 법적으로도 공소시효가 지난 일이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 어린 종놈과 정해경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당장 증명할 수도 없었다. 레코드판 한 장이 완전히 돌아갈 때까지 창가에 걸터앉아 있던 중만은 바깥에서 들리는 비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 고토 보안과장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중만은 창가에서 내려와 직접 문을 열었다. 고토가 이렇게 미리 이야기도 없이 당일 방문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도 독립운동 하는 놈들을 좀 더 잡아들일 방법이 없겠냐며 사람을 들들 볶았으니 아마 그 일로 온 것이 아닐까 싶어 불쾌감이 더럭 끼쳤으나, 중만은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며 문 앞에 선 고토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렇게 잊지 않고 들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이봐, 차 한 잔 내오게.”
“커피가 좋겠군.”
비서를 향해 말한 고토가 중만이 안내한 자리로 앉았다. 수행 비서를 밖으로 내보내고 둘만 남은 사무실에서 문을 닫게 한 고토가 중만을 마주보았다.
“언제 보아도 얼굴이 좋군 그래.”
“모두 덕분이지요.”
덕담인지 비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투에 중만은 눈치 없는 척 웃는 얼굴로 답했다. 비서가 곧 커피 두 잔을 가져와 내려놓고는 다시 방을 나갔다. 비서가 놓고 간 커피를 몇 모금 홀짝이던 고토가 썩 심기가 편치 않은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고토는 주머니에서 은제 담뱃갑을 꺼내 궐련을 한 대 빼어 물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만은 서둘러 성냥을 그어 고토가 문 궐련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고토가 허공으로 연기를 뱉어내고는 미간을 약간 좁혔다.
“혹시 흥친왕의 손자인 이환에 대해 잘 알고 있소?”
중만은 고토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고토가 이환에 대해 물을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독립 자금을 댄 것으로 이환을 엮어 넣으려던 작업은 거의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그 일에 대해 알고 묻는 것인가 싶어 순간적으로 눈치를 본 중만은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
“친목회 자리에서 한두 번 본 일이 있습니다. 인사는 나누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요?”
“음, 그런가? 제대 의과대학 출신으로 상당한 반골분자라 하던데.”
“정치적인 이야기는 나눈 일이 없어서요.”
중만이 발을 빼자 고토가 다시 한 번 연기를 훅 뱉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며칠 전에 내게 찾아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소. 자기가 불령선인 조직을 색출하기 위해 이용하던 정보원이 있었는데, 그 정보원이 살해당했다는 거요.”
“예?”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환이 불령선인 조직을 색출하다니,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반골 기질 탓에 운현궁에서 이환을 상당히 골칫거리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는 알음알음 돈 지 오래였고, 총독부에서도 그 때문에 이환을 주시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내지 황실에서 정략결혼을 원하지만 이환이 절대 응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도는 터였다. 그런 이환이 정보원을 이용해 독립운동 단체를 밀고하려 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혹스러워하는 중만의 표정을 슬몃 살핀 고토가 코로 웃는 소리를 내었다.
“죽은 자는 조선일보 기자인데, 최근 용정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동태를 살피겠다고 간 자가 일주일만에 사고로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거요. 그런데 시신을 수습하러 용정에 갔더니 누가 보아도 살해당한 것을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했다는군. 용정 총영사관 경찰에도 직접 고발하고 시신을 가져와 내게도 정식으로 사건을 접수해 달라며 부검 허가를 요청했소.”
조선일보 기자, 용정, 심장마비 따위의 단어들이 날카로운 침처럼 등줄기를 따끔하게 찔렀다.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솟았다. 중만은 떨림을 감추기 위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으며 물었다.
“……죽은 자가 누구라고요?”
“조선일보 기자인데 이름이 장순현이라고 했던가, 그런 비슷한 이름이었지 아마.”
중만의 속을 알 리 없는 고토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장순현이라니. 중만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애써 초조함을 숨겼다. 애초에 자신과 이환을 연결해 준 것이 장순현과 장순명이기는 했지만, 장순현이 아무리 갑작스레 죽었다 한들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자를 용정까지 찾아가 부검을 요청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다.
“부검이라니, 시신을 어찌 가져왔답니까?”
중만은 태연한 척 의아한 표정을 했다. 시신에 칼을 대어 부검하는 것은 그리 보편적인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자식이 죽었는데 선뜻 그러마 할 부모는 더더욱 드물었다. 고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까지야 내가 알겠나. 여튼 이미 제대 법의학교실 구니히사 교수가 부검을 마치고 보고서까지 보내 왔더군. 위에서는 왕공족이 직접 조직을 색출하겠다니 눈이 뒤집혀 무엇이든 협조해 주라고 난리인데 나는 영 미심쩍어. 그래서 지나는 길에 권 사장 생각이 나 한 번 들러 보았소. 혹시나 이환에 대해 잘 안다면 무슨 꿍꿍이인지 좀 알고 싶어서 말이야.”
“그러셨군요. 이 일에 관해 아는 사람이 있는지 한 번 수배해 보겠습니다.”
“아무튼 조선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자가 많아 안심을 할 수가 없어.”
고토가 혼잣말처럼 내뱉으며 혀를 찼다. 그리고는 곧 중만을 의식한 듯 웃는 얼굴을 했다.
“물론 권 사장 같은 일등 신민에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오.”
“조선인들이 워낙 어느 모로나 열등한 것은 사실이지요.”
“그거야 그렇지.”
고토가 껄껄 웃으며 남은 커피를 마셨다. 중만은 바닥으로 어슷하게 시선을 내린 채 머리를 굴렸다. 이환을 엮어 넣으려던 계획이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이환이 정말 무슨 꿍꿍이가 있어 장순현을 정보원으로 썼고, 용정 총영사관 경찰에까지 원조를 요청했다면 화살이 이쪽으로 돌아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환이 직접 나선 것을 보면 결코 작은 일은 아닌 듯싶었고, 평양에서의 일과 이 일까지 겹쳐지면 이환이 자신을 순순히 신뢰하고 선처할 리 없었다. 게다가 이런 일이라면 이환이 정해경에게까지 도움을 청했을 수도 있었다.
골칫거리가 둘로 늘어 버리는 것은 중만의 입장에서 매우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평소라면 고토가 가겠다고 해도 억지로 잡아 앉혀 둘 중만이었으나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중만은 짐짓 손목의 시계를 보며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죄송해서 어쩌지요, 제가 사업상 중요한 회의가 있어 지금 나가 보아야 합니다. 모처럼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좋은 곳에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음번에 미리 연락을 주고 오신다면 제가 반드시 근사하게 대접하겠습니다.”
“아, 그렇소? 내가 눈치가 없었군. 사업하는 이들은 원체 바쁘지. 선약도 없이 시간을 빼앗아 미안하오.”
고토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접 문을 열어 고토를 배웅한 중만은 고토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문을 부서져라 닫고는 제기랄, 하고 중얼거렸다.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 한없이 꼬일 수도 있는 것인가. 초조하게 방 안을 돌아다니던 중만은 바깥에 대고 소리를 쳤다.
“밖에 누가 있나? 당장 들어오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금석이 뛰어 들어왔다. 중만은 손에 집히는 재떨이를 금석에게 내던졌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재떨이를 피하지 못하고 맞은 금석이 억 소리를 내며 이마를 감쌌다. 손바닥 아래로 핏줄기가 흘렀다. 중만은 바닥에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금석에게 고함을 질렀다.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예?”
“이환이 고토에게 직접 찾아갔다지 않아! 장순현은 살해당한 거라며 총독부에 고발을 하고 부검까지 요청했어. 이미 부검이 다 끝나 보고서가 총독부로 들어갔단 말이야! 일을 어떻게 했기에 이 지경을 만들어!”
삿대질을 하며 다그치는 중만의 말에 금석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금석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서는 고개를 조아렸다. 중만은 바닥에 엎드린 금석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가 분에 못 이겨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금석이 움찔하며 그 커다란 몸을 움츠렸다. 중만은 이 일이 금석의 탓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자신의 행동이 단순히 화풀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숨을 고른 중만은 곧 부드러워진 말투로 내뱉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쩔 수는 없지. 용정 쪽은 확실히 입막음해 둔 건 맞나?”
“네, 물론입니다. 장순명은 남경에 숨어 있고 용역을 준 자들은 확실하게 함구하기로 약조했습니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라 쉽게 입을 열지는 않을 것입니다.”
금석이 엎드린 채 벌벌 떨며 대답했다. 중만은 팔짱을 낀 채 멈춰 서서는 몸을 돌리고 창 밖을 응시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는 싹을 모조리 뽑는 수밖에 없었다. 중만은 금석을 등진 채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장순명이 숨어 있는 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고 있나?”
“그것까지는…… 남경에 도착했다는 전갈만 받았습니다.”
“제거하지. 이환이 우리보다 먼저 장순명을 찾아내면 곤란해질 거야. 심지가 약한 놈이라 배신할 수 있어.”
돈 앞에서 사촌동생까지 팔아먹은 인간이라면 그 반대도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중만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굳이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알아서 일을 키우는군.”
중만은 덫을 놓은 곳에는 얼마든지 자신도 걸려들 수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는 있었다. 다만 실제로 지금처럼 발목에 올무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망할 놈들. 중만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환과 해경을 떠올렸다. 장순현을 죽인 것이 자신이라는 걸 그 두 사람이 눈치 채고 있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두었다가는 자신이 목을 졸리는 것은 순식간일 터였다.
다만 장순현의 사건이 고발된 이상 자기 손으로 두 사람의 피를 보게 만들어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여러 개의 덫을 너무 가까이에 두면 다른 동물은 걸려들지 않는 법이다. 중만은 햇살이 쏟아지는 창 밖을 뚫어지게 보았다.
“이덕완에게 연락을 하게. 최대한 빨리 내가 만나고 싶다고 전해.”
“네.”
금석이 얼른 대답했다. 중만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일전의 그 계집 말이야, 미리암여학교에서 박소화와 얽혔다는. 이름이 무어라 했지?”
“이영신입니다.”
“그래. 그 계집도 불러 주게. 내가 꼭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사례는 서운하지 않게 하겠다 하고.”
“알겠습니다.”
금석이 엎드린 채 대답하며 눈치를 살폈다. 중만은 몸을 돌리며 금석을 내려다보았다.
“무엇 하는 게야? 내 말 못 들었나?”
“아, 아닙니다. 바로 그리 하겠습니다.”
금석이 후다닥 몸을 일으키며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갔다. 중만은 금석이 엎드린 자리에 선명히 남은 핏자국과 깨진 재떨이 조각을 보다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사냥도 해본 놈이나 하는 것이다. 그런 어설픈 놈들이 친 덫에 걸려들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좋은 날이군.”
중만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커튼을 잡아당겨 쳤다. 방 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놈들에게 한때의 치기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구렁텅이로 처박히는 기분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그때 가서 후회하는 것은 이미 늦은 일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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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이미 골백번도 더 본 듯한 순현의 부검 소견서 사본에서 눈을 뗀 환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이미 저녁 여덟 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법의학교실의 동료들은 모두 퇴근한 지 오래였다. 텅 빈 연구실은 스산했으나 환에게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환은 보고 있던 소견서 사본을 다시 봉투에 넣어 책꽂이에 꽂아 두었다.
장준학이 경성에 도착했을까, 속으로 생각한 환은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지난번 부검 직후 환은 준학에게 해경의 말대로 포드 차종으로 최근 수리를 맡겼거나 차체에 손상이 간 차가 있는지, 차주가 경찰이거나 그 주변 인물은 아닌지 알아보아 달라고 연락을 했다. 준학에게 답변이 온 건 나흘 뒤의 일이었다.
용정에서 현재 의심이 가는 인물을 찾아냈으며, 재단 일로 경성에 다시 들르게 되었으니 이틀 뒤 자신이 직접 환에게 방문하겠다고 전해 왔던 것이다. 김 선생이 용정에서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중이니 곧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던 준학의 말을 떠올린 환은 긴 숨을 내쉬었다.
“아직 아니 갔군.”
환은 문가에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구니히사 교수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팔짱을 낀 채 서서 환을 빤히 보고 있었다. 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네,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
“불이 켜져 있기에 다시 올라와 보았네.”
“그러셨군요.”
“장순현의 부검 소견서를 보고 있었나?”
마치 등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던 양 묻는 구니히사를 향해 환은 멋쩍게 웃는 얼굴을 했다. 구니히사가 한동안 말없이 환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그 친구가 자네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나?”
환은 멈칫하며 그를 마주보았다. 구니히사는 평소 학생들의 사생활 따위에는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제대 교수들 사이에서도 연구밖에 모르는 별종으로 통하고 있었다. 세계정세는 물론이거니와 교내 정치와도 거리가 멀었다. 학생들에게 결코 친절하거나 편안한 종류의 교수는 아니었으나, 환은 그의 그런 점이 어떤 면에서는 법의학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장점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때문에 구니히사가 자신에게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환은 잠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네.”
“자네의 위치에 안주하기를 포기할 정도로?”
구니히사의 질문은 날카로웠으나 그 의중을 바로 짐작할 수는 없었다. 환은 대답 대신 그를 보았다.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구니히사가 코끝으로 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조선인들은 흥미로운 인종이야. 모든 학생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간혹 자네와 같은 학생들을 발견할 때마다 내심 놀라운 생각이 든다네. 조선의 엘리트들, 부유하고 똑똑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왜 쉽게 안주하지 않는가? 왜 침묵을 선택하지 못하는가? 입을 다물고 순응하며 백치처럼 군다면 모든 것이 훨씬 더 편해질 텐데 말이야.”
구니히사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내뱉었다. 순간 멈칫한 환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모든 일본인 교수가 구니히사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거니와, 그의 말 역시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속을 쉽게 알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굳이 대답을 기다린 말은 아니었던 듯 구니히사가 말을 돌렸다.
“오후에 경무국 보안과에서 찾아왔더군. 자네가 어떤 학생인지 상당히 궁금했던 모양이야.”
“그랬을 겁니다.”
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골 기질 탓에 집안에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취급당하고 있었고, 총독부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여겨 주시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환 자신이었다. 보안과의 고토를 직접 찾아가 사건을 접수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고토가 몹시 당황하던 표정을 하던 것을 떠올린 환은 구니히사를 마주보았다. 구니히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주 이상한 학생이라고 대답해 주었네. 정신이 나간 놈일 수도 있다고 했지. 제정신인 자가 돈도 되지 않는 법의학 따위를 할 리 없지 않겠느냐고. 아니 그런가?”
“선생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미친 스승 밑에 미친 제자라, 썩 재미있는 조합이군.”
농담처럼 대꾸한 환의 말을 가볍게 받아친 구니히사는 곧 벽에 걸린 시계로 눈을 돌렸다.
“그만하고 들어가게. 자네가 이 시간까지 고작 그 부검 소견서를 보느라 쓰고 있는 전기도 위대한 대일본제국의 자산이니, 낭비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네.”
조소 어린 농담을 던지고는 돌아선 구니히사가 문을 닫았다. 환은 그 자리에 선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밑창이 닳은 구두가 끌리는 소리가 점차 멀어지다 완전히 사라졌다. 환은 천장에 매달린 등에서 쏟아지는 빛을 올려다보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구니히사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왜 쉽게 안주하지 못하는가? 왜 침묵을 선택하지 못하는가? 환은 쓰게 웃었다. 만약 이렇게 허무하게 죽은 자가 순현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지금처럼 위험한 외줄타기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결국 자신의 일이 되기 전에는 나서지 않는 이 나약함조차 어떤 이들에 비하면 치열한 것이란 말인가. 답을 구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이런 생각에 반드시 따라오는 우울감을 피하기 위해 환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는 불을 끄고 연구실을 나섰다. 이미 거의 불이 꺼진 학교 건물을 빠져나온 환은 사가로 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본가에서는 학교에서 사가까지 가는 십오 분도 아니 되는 시간조차 환이 혼자 다니는 것을 매우 싫어했으나, 환은 무언가 생각할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차를 기다리게 하는 대신 걸어서 돌아가곤 했다.
생각에 잠겨 이미 인적이 드문 인도를 걷고 있던 환은 옆의 차도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기다릴 필요 없다고 했는데 굳이 기다린 것인가 싶어 미간을 찌푸린 환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에 멈칫하며 그 자리에 섰다. 준학이었다.
“담이 크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요즘 같은 때 홀로 다니시다니요. 어서 타십시오.”
준학이 운전석에서 내려 직접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환은 준학의 차에 탔다. 문을 닫은 준학이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오자 환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경성에는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오후에 도착해 미리암여학교 재단 일을 잠시 보았습니다. 저녁에 사가에 들렀더니 연구실에서 곧 퇴근하신다기에 기다리다 아무래도 늦으시는 것 같아 직접 모시러 온 겁니다.”
준학이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환은 곁눈질로 준학을 흘끔 보았다. 정중하고 단정한 미남자인 탓일까, 환은 문득 그가 해경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피식 소리를 내어 웃은 환은 곧 헛기침을 했다. 준학은 의아한 듯 잠깐 환 쪽을 보았으나 곧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지 않은 사가 앞에 차를 세운 준학이 문을 열어 주려는 것을 막은 환은 먼저 차에서 내려 준학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현관을 열자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손님이 오셨었는데…….”
“앞에서 만났소. 서재로 차 두 잔만 부탁해요.”
고개를 가볍게 까딱해 보인 환은 서재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온 준학은 환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서재 안을 둘러보던 준학이 미소를 지었다.
“책을 상당히 좋아하시는군요.”
“망신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읽는 편입니다.”
환 역시 살짝 웃어 보이며 가벼운 겸양으로 대답했다. 그때 쟁반에 찻잔 두 개를 받쳐 든 하녀가 서재로 들어와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는 나갔다. 환은 완전히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준학의 맞은편에 앉았다. 준학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김 선생 편으로 부검 소견서 내용은 받아 보았습니다. 제창병원 측에서도 부검은 하지 못해 다른 부분은 모르겠으나, 외상에 대한 대부분의 내용에는 동의했습니다. 시신이 들어온 뒤 경찰이 의사들에게 일체의 검사는 하지 말라 하고 보관만 부탁했다 하더군요. 눈으로 보기에도 외상이 상당했는데 사인이 심장마비라 해서 내부에서도 이상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답니다.”
“어찌되었든 경찰 쪽에 손을 쓴 것은 맞겠군요.”
“용정에는 일본 총영사관 경찰과 중국 경찰 양쪽이 모두 활동하고 있습니다. 범인이 둘 중 어느 쪽을 포섭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한쪽에만 손을 썼다면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양쪽을 모두 포섭했을 수도 있지요.”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준학이 말끝을 흐렸다. 준학의 말대로 확실히 그런 일은 쉽지 않았다. 중국 역시 조선만큼이나 반일 감정이 강한 나라였다. 게다가 완전히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조선과는 달리 아직 중국 영토는 중국 정부의 통치하에 있었으므로, 중국 경찰에서 간도의 일본 총영사관 경찰을 탐탁찮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서로 눈에 불을 켜고 트집을 잡을 일만 사사건건 찾고 있을 터인데, 어느 한쪽만 포섭해 이런 일을 꾸민다는 것은 위험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준학이 환을 마주보았다.
“말씀하신 대로 최근 수리를 맡겼거나 하자가 생긴 포드 차량을 수배해 보았는데, 장순현 씨가 사망한 뒤 하자가 생긴 차량은 몇 대 없더군요. 그 중 가장 의심스러운 차량은 용회자동차부(龍會自動車部) 소속의 포드 트럭입니다. 완충기 부분이 상당히 찌그러졌고 격자창에 이물질이 묻어 있었습니다. 김 선생 말로는 피인 것 같다는데 사람의 피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확인을 하지 못했답니다.”
“수리를 맡기지는 않은 겁니까?”
“일정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까요. 자동차부는 일정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운행에는 문제가 없어 수리를 맡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가 운전했는지는 알 수 있습니까?”
“자동차부에서 출차(出車)를 할 때는 명부에 항상 기록을 합니다만, 확인한 바로 장순현 씨가 죽은 날 밤에는 출차된 기록이 없었습니다.”
환은 준학의 말에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뱉었다. 쉬운 일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계속해서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리는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준학이 그런 환의 얼굴을 보고는 곧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장순현 씨가 묵고 있던 여관 사환이 그 트럭을 기억하고 있더군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든 환은 준학을 마주보았다. 준학이 예의 그 배우 같은 얼굴로 웃었다.
“놀라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제 성격이 급한 탓이겠지요.”
환은 누군가 움켜쥐었던 심장을 갑자기 풀어 준 듯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불현듯 이런 부분도 해경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의 속을 알 리 없는 준학이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날 밤 자기 전 차가 급정거를 하며 무언가 들이받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창을 열고 보았더니 검은 색 포드 트럭이 길가에 서 있었다는 겁니다. 십 분 정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던 것 같은데, 워낙 길이 어두워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보지 못했지만 포드 트럭은 맞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무얼 들이받는 소리가 났지만 트럭이 떠난 뒤에 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더군요.”
“순현이를 차로 치어 놓고 옮긴 것일까요? 그 트럭이 용회자동차부 소속이라면 그 중 누가…….”
“용정 경찰서장이 용회자동차부 운영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준학이 환의 말을 끊었다. 환은 다음 순간 하려던 말을 멈추며 미간을 좁혔다. 용정 경찰서장이 자동차부 운영에 관여하고 있다…… 부검실에서 해경은 순현을 죽인 차는 경찰자동차일 수도 있다, 경찰이 관여되어 있다면 야간 통행금지에서도 자유롭고 사인을 감추기도 쉽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경찰이 한패라는 겁니까?”
“당직을 했던 경찰의 명단을 알아보았지만 그날 밤 외출을 한 경찰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더군요. 평소 경찰과 긴밀히 관계를 맺고 있는 건달패들이 있는데, 이들이 장순현 씨가 죽기 이틀 전 경찰서장을 만나러 왔었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장이 그들에게 차를 빌려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직접 죽인 것은 그 자들일 수도 있겠군요.”
건달패 중 돈만 받으면 무엇이든 하는 치들은 흔히 있었다. 그들이 장순현의 살해를 의뢰받고 서장을 통해 용회자동차부의 트럭을 빌린 뒤 순현을 죽인 것이라면 납득이 갔다. 간도 지역은 본래 치안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사람 하나 죽인 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덮는 것은 경성에서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애초에 살해에 적합한 장소에 오게 하기 위해 장순현을 용정으로 불러들인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환은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다. 장순명.
“혹시 장순명을 본 사람은 없습니까?”
장순명 역시 순현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장순명도 나쁜 일을 당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애초에 순현을 용정으로 불러들인 사람이 순명이었다는 것을 떠올리자 그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뇌리로 지나쳤다. 두 사람은 사촌지간이었고, 순현은 순명을 신뢰했기에 권중만을 자신에게 소개시켜 준 것이었다. 그 때문에 순명이 이 일과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을 내뱉고도 등줄기로 끼치는 소름에 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말아 쥐었다. 환의 입에서 나온 순명의 이름에 준학이 눈썹을 약간 좁혔다.
“아직 목격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처음 제창병원에서 준학을 만났을 때, 준학은 순명이 순현을 배신자로 여겼다고 말했었다. 자신의 원조가 끊긴 일로 상해 쪽에서 순현을 비밀리에 주시하고 있었고, 그것을 안 순명은 진상을 알기 위함이었는지 혹은 자기 손으로 처단할 목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총독부의 감시가 있다는 이유로 순현을 용정으로 불러들였다. 상해에서는 두 사람 모두가 죽은 것으로 생각한다던 준학의 이야기가 퍼뜩 생각나, 환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상해에서 순현이를 주시하기 시작한 건 장순명의 말 때문입니까?”
“익명으로 후원하던 금액이 끊긴 뒤 장순명이 장순현을 수상히 여겼다고 들었습니다. 자금을 넣은 것 자체가 함정인 것이 분명하다고 그쪽에 이야기를 했고, 진상을 알기 위해 상해 쪽에서 용정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쪽에서 장순명과 장순현을 죽였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준학은 그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 중 한 사람이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두 사람 모두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용정 경찰과 사이가 좋지 않아요. 일본 경찰과는 더더욱 가까이 할 수 없고요. 일본 경찰에서 수배를 받고 있는 자들도 여럿입니다. 굳이 중국 경찰과 일본 경찰 양쪽에서 감시를 받는 용정으로 불러들여 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차라리 상해로 불러들였으면 불러들였지요.”
“양쪽의 감시를 받는데도 경성보다 차라리 용정이 순현이를 살해하기 더 쉬운 장소는 아니었을까요?”
“경찰이 뒤를 보아 준다면 가능하지요.”
“장순명이 그들과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환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준학이 멈칫했다. 왜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했던가. 처음부터 순현이 권중만을 자신에게 소개해 준 것은 장순명을 통해서였다. 순현은 순명을 신뢰하고 있었기에 그랬을 뿐, 그 자신이 권중만을 직접 만난 일조차 없었다. 그러다 권경천의 죽음에 얽힌 비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순현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순명의 부름을 받고 용정으로 갔다가 살해당했다. 만약 처음부터 순명이 권중만과 관계가 있던 것이라면? 그 두 사람이 순현과 자신을 속이고 덫을 치려다 권경천의 죽음이 밝혀질까 두려워 순현을 살해한 것이라면?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준학이 되물었다. 환은 순간 망설였다. 자신의 의혹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자신이 권중만을 통해 상해에 돈을 댄 익명의 후원자라는 것을 밝혀야 하는 탓이었다. 준학에게 그것까지 모두 털어놓아도 될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환은 준학을 마주보았다. 손바닥에 차가운 땀이 배어나왔다. 문득 해경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외줄 위에서는 돌아갈 곳이 없다고 했던가. 어차피 누가 먼저 덫에 걸리느냐의 싸움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역시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은 짧게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순현이를 통해 상해로 후원금을 보냈던 후원자는 나입니다. 자금을 보내기 위해 알아보던 도중 순현이가 장순명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장순명이 내게 연결해 준 자는 자금 세탁을 주로 한다는 인천항만주식회사의 권중만 사장이었고, 모종의 일로 후원을 중단했습니다. 순현이는 권중만 사장에 대해 조사하던 도중 살해당한 겁니다.”
환은 그 말을 들은 준학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유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준학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권중만을 통해 거액을 후원하던 사람이 이환 공이셨습니까?”
“알고 있었습니까?”
“우리는 오랫동안 권중만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까닭을 알 수 없이 미묘한 감정의 결이 느껴졌으나, 그 이질감의 정체를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으나, 환은 거기에 대해 캐묻는 대신 말을 이었다.
“권중만 사장을 통해 상해로 상당한 자금이 세탁되어 들어간다고 들었습니다. 회사 소유의 선박을 이용해 수배당한 운동가들을 밀항시키는 일도 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장순명이 그와 결탁해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맞습니까?”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준학에게 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팔짱을 낀 채 시선을 내리고 있던 준학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장순명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이 먼저겠군요. 김 선생이 조공(朝共) 당원들과 함께 일하고 있으니 용정에 연락을 넣어 두겠습니다.”
“조공이라면?”
“조선공산당입니다. 당이 해체된 뒤 일부 당원들은 용정에서 지하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지요.”
권중만이 일전에 조선공산당을 밀고한 적이 있다는 말을 떠올린 환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이들이 조선공산당의 남은 당원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권중만에 대해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을 것은 확실했다. 그 점에서는 믿어도 좋은 것일까. 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준학이 곧 다시 웃는 표정을 하며 환을 마주보았다.
“권중만이 이 일에 관련이 있다면 자다가도 일어나 뛰어올 자들이 몇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지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남은 일이 있어서요.”
인사를 건넨 준학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오지 마십시오.”
환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놓자 준학이 다시 한 번 목례를 하고는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준학의 뒤를 따라 나간 환은 거실 창가에 서서 대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권중만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준학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말에서 느껴지던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을 떠올린 환은 그의 자동차가 대문 앞을 지나쳐 멀어지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않고 어두운 거실 창 밖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