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163
============================ 작품 후기 ============================
* 우리나라에서 지문 감식 기법이 최초로 도입된 것은 1910년 11월의 일입니다. 이후 총독부에서 범죄자 관리를 위해 재소자 대상으로 지문을 수집하였는데, 1931년 당시 기록에 따르면 총독부 법무부에서 관리하던 지문이 약 40만매로 가장 많았으며 경기도경찰부에서 관리하던 지문이 8만매로 그 다음, 경기도를 제외한 각 도의 지문을 수집한 것이 도합 10만매 가량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는 지문실과 사진실, 화학실 등을 갖추어 현대적 과학수사를 도입합니다. 글에 등장하는 후타미[二見] 경부는 실제 경기도경찰부의 지문 감식 전문가였습니다. ( 1934년 10월 22일자 “지문조사(指紋調查)코저 경기(京畿)에서 출동(出動)”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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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축음기의 레코드는 다 돌아가 사무실 안이 조용해진 지 오래였으나 중만은 그 침묵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의자에 깊숙하게 등을 묻고 있었다. 창 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채였다. 중만은 불을 당긴 파이프를 있는 힘껏 빨았다.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깊게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숨을 내뱉자 묵직하고 씁쓸한 담뱃잎의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사무실 안을 떠돌았다. 아주 오랜만에 달게 피워 보는 담배였다. 한 번 더 파이프를 쭉 빨아들인 중만은 숨을 뱉으며 킬킬 웃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신문의 두 번째 면 한가운데 실린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京城神社 殺人犯 現場에서 檢擧(경성신사 살인범 현장에서 검거)
소녀 참살사건의 범인은 청년 탐정
이미 금석에게 보고를 받아 일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또 새로웠다. 중만은 이미 열 번도 더 읽은 기사의 내용을 다시 훑어보았다.
‘지난 십사일 오전 열한시 경 남산공원 경성신사 인근에서 경성부 가회동 이병천의 딸 이영신이 피살되었는데 익명의 제보를 받고 출동한 종로경찰서 경찰들이 현장에서 범인을 검거하였더니 범인은 경성부 명치정에서 탐정사무소를 경영하는 청년 탐정 정해경이라 하며 일전에도 여러 차례 협박의 편지를 보내 돈을 갈취하여 오던 정황이 있으나 범행을 계속하여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암, 그렇고말고. 백 번도 천 번도 더 부인해야지.”
중만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파이프를 뒤집어 재떨이에 털었다. 지금쯤 그 콧대 높은 정해경의 얼굴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져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영신을 이렇게 한 번 쓰고 버릴 장기말로 소비한 것은 조금 아까웠으나, 대어를 낚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미끼가 필요한 법이었다.
따지고 보면 잘못은 고작 학교 하나 다니지 못하게 된 것이 무어 그리 분한 일이기에 이를 갈며 남의 인생을 망치려는 데 좋다고 동조한 계집애에게 있는 것 아니겠는가. 미끼를 마련한 뒤에는 모든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굳이 평양에서처럼 계속해서 거짓말을 덮기 위해 연신 더 큰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몇 개의 가짜 증거, 가짜 목격자, 그리고 매수당한 경찰이면 충분했다. 돈이야말로 모든 것을 진실로 만드는 권능의 신이었다.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만은 신문을 접으며 대답했다.
“들어오게.”
육중한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사이로 들어온 것은 금석이었다. 중만은 반가운 목소리로 금석을 맞았다.
“그래, 아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지.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빠르게 공판으로 넘겨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즉결재판은 어렵다고 하던가?”
“즉결 처분권이나 즉결재판을 발동하기에는 죄가 지나치게 무겁다 하더군요. 경미한 형사 위반에 적용하는 것이라, 이번 같은 경우에는 불가능할 것이라 했습니다. 저, 그런데…….”
금석이 말끝을 흐렸다. 중만은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굳이 그런데, 하는 소리를 덧붙이는 모양새를 보니 무언가 또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석이 주저하며 중만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구니히사 교수라는 자가 부검을 하고 모든 법의학적 증거를 분석하겠다고 했답니다. 경기도경찰부에 지문 감식도 의뢰한 모양입니다. 다른 흉기가 발견되는 대로 그것도 함께 의뢰하겠다고…….”
“뭐가 어째?”
중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무섭게 금석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중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금석을 내려다보았다.
“구니히사가 누구인데 이 일에 끼어들어?”
“저, 저어, 구니히사는 경성제대 법의학교실 교수인데 내지에서도 알아주는 법의학 권위자라 경무국으로 올라오는 부검은 대부분 이쪽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환이 이 법의학교실 소속입니다. 직접 부검에도 참여하고 있고요.”
“제기랄, 무어 하나 도움이 되는 게 없군!”
중만은 책상 위의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벽에 맞은 재떨이가 산산이 부서지며 조금 전 털어냈던 담뱃재가 바닥으로 흩어졌다. 금석이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머뭇거리던 금석이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환이 개입한 건 확실합니다. 정해경에게 나카모리라는 변호사가 붙었는데 이왕가(李王家) 고문 변호사랍니다. 변협(辯協: 변호사 협회)에서도 입김이 세고 실력이 뛰어나기로 손꼽히는 자입니다. 만일 이대로 공판에 넘어가면 정해경이 풀려날 공산도 있습니다.”
“그 집에 부검을 거부하라고 했었어야지!”
중만이 화를 내자 금석이 쩔쩔매며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그것이, 부모는 부검을 거부했는데 나카모리가 경찰 측에 강력하게 요청했다 합니다. 제보의 신뢰성을 확신할 수 없고 의심 가는 정황이 있어 반드시 부검을 해야만 한다고요. 마땅히 요청을 거부할 구실이 없었고 구니히사 교수도 이런 사건에서 부검 없이 범인을 확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해서…….”
중만은 쯧, 하고 혀를 차며 관자놀이 부근을 지그시 누르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두 놈 다 없앴어야 해.”
이환을 제거하려 하면 정해경이 방해를 하고, 정해경을 제거하려 하니 이환이 훼방을 놓는 꼴이라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처음 라 세느 일이 일어났을 때 해경을 없앴다면 이렇게 두고두고 손 끝에 박힌 가시처럼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물론 그때는 해경이 이렇게 자신을 위협할 줄 전혀 알지 못했고, 더구나 해경이 그 어린 종놈 이정석이라고는 더더욱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중만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제거하는 것이 어디란 말인가.
“구니히사를 포섭하는 건 어렵겠나?”
중만이 다시 조금 부드러워진 말투로 묻자 금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미가 워낙 꼬장꼬장한 양반이라 경무국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한답니다. 게다가 이환을 얼마나 총애하는지 교실에서도 다른 왜인 학생들은 거들떠도 안 본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우리 쪽에서 구슬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중만은 말끝을 늘이며 금석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입매를 슬쩍 비틀어 올렸다. 조작된 증거와 증인은 이미 갖추고 있었으나, 구니히사의 부검에서 해경이 무죄라는 증거를 찾아낼 확률도 고려해야만 했다.
해경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꾸민 일인지는 뻔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손발이 묶여 자신의 짓인 것을 알아도 어찌 할 수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구니히사와 나카모리 덕에 해경이 풀려난다면 필히 반격을 해 올 것이었다. 중만은 한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자네 어머님은 요즘 좀 어떠신가?”
금석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하며 예? 하고 되물었다. 중만은 참을성 있게 다시 한 번 반복해 물었다.
“자네 어머님은 좀 어떠시냔 말이야.”
“아, 아아, 네. 재작년에 풍이 온 이후로는 무어 거동이 영 힘드셔서요.”
금석은 열아홉에 장가를 들었다가 몇 년 후 돌림병으로 아내와 백일 된 아들을 잃은 뒤로는 다시 결혼하지 않고 홀로 일흔 넘은 노모를 모시고 있었다. 금석 역시 중만의 본가와 멀지 않은 곳에 집이 있었는데, 일 때문에 올라와 있어 항시 노모의 수발을 들 수는 없었으므로 일급을 주어 사람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금석이 말한 대로 노모의 나이도 나이거니와 풍이 온 이후로는 거의 자리만 보전하고 있는 상황이라, 금석의 월급으로 암만해도 생활을 유지하고 약값이며 병원비를 대기 빠듯한 사정임을 중만 역시 빤히 아는 터였다.
금석은 조금 경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중만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노모 이야기를 꺼냈는가 싶은 모양이었다. 중만은 파이프에 새 잎을 채워 넣으며 불을 당겼다.
“좀 가까운 곳으로 모셔야지. 언제까지 그리 살 건가?”
“예, 그러면야 좋지만…….”
금석이 말끝을 흐렸다. 노모를 모시고 살 집을 따로 구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었다. 중만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뻐끔거리며 그런 금석을 흘끔 보다 시선을 돌렸다.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그때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기 위한 대비책은 하나쯤 있어야 했다. 무엇하러 약점 따위를 만든단 말인가. 속으로 생각한 중만은 부정확하게 뭉개지는 발음으로 말을 돌렸다.
“이미 저질러진 일을 어쩔 수는 없으니 우리가 좀 더 빨리 움직이도록 하지. 장순명의 행방은 찾았나?”
“아니오, 아직…… 저, 그것이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눈치를 채?”
“잔금을 주기로 했는데 만나기로 한 시간에 나오지 않았답니다.”
중만은 이 끝으로 파이프를 잘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후환이 없으려면 장순명까지 제거해야 했고, 때마침 순명은 남경으로 도망을 가 있었으므로 쥐도 새도 모르게 그 곳에서 없앨 작정이었다. 잔금을 남경에서 치러 준다고 하며 약속 장소에 나오면 그 자리에서 제거하기로 청부업자들과 말을 맞추어 두었는데,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니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남경을 이 잡듯이 뒤져 찾아내. 눈에 보이면 즉시 제거해 버리고. 오래 살려 두면 아니 될 놈이야. 제 사촌도 팔아먹는데 돈 주는 놈 무는 것은 더 쉽지.”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덕완은 일을 잘 진행하고 있나? 멍청한 놈이라 영 믿음이 가질 않아. 정해경 일만 아니면 내가 직접 하는 편이 안심이 될 텐데…….”
중만은 진심의 짜증이 담긴 말투로 내뱉었다. 이환을 제거하는 일을 덕완에게 맡기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평양에서의 실패 때문일 수도 있었으나, 덕완이 그리 선하지도 못한 주제에 또 막상 이런 일을 하기에는 마음이 약한 위인인 것이 영 찜찜했다.
덕완은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려 하지 않고 남이 떠먹여 주는 것만 받아먹기를 기다리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러니 여태 그 모양 그 꼴이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중만에게 금석이 말했다.
“강도살해로 위장하려는 모양입니다. 지난주에 청부업자로 유명한 최백길과 김재면이라는 자와 접촉을 한 것은 알고 있는데 이덕완이 둘 중 어느 쪽과 일을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양쪽 다 평판은 확실한 자들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니 이환만 없애면 되지 누구와 일하는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나. 아무튼 제발 실수하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게. 그리고 일정을 좀 당겨야겠다고 전해. 이거야 원, 시간을 끌다가는 도리어 우리 쪽이 크게 당할 판이야.”
우리 쪽, 이 아니라 내 쪽이라고 해야 옳은 말이었겠으나 중만은 부러 그 둘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득은 혼자 가져도 책임은 나누어야 하는 법이었다. 물론 금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콩고물 정도야 떨어뜨려 줄 수도 있었으나 인절미까지 나누어 먹자고 달려드는 것은 곤란했다.
다만 언젠가 그 인절미를 좀 맛이라도 볼 수 있다는 희망 정도는 주는 것이 중만의 방식이었다. 그래야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더욱 맹목적으로 복종할 것이므로. 중만은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수고했네. 오늘은 이만 가서 쉬도록 해.”
금석이 조금 물러나며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육중한 문이 닫히자 사무실 안은 다시 고요로 잠겨들었다. 중만이 파이프를 빨아들였다 숨을 내뱉는 소리만이 간간히 그 정적을 일그러뜨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뿐이었다. 중만은 한구석에 밀어 놓은 신문으로 눈을 주었다. 소녀 참살사건의 범인은 청년 탐정…… 제아무리 날고 긴다는 정해경이라도 그토록 쉽게 눈이 가려지고 만 것이다. 중만은 짧게 웃었다.
“멍청한 놈.”
아무리 귀한 보물이 있어도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정아경을 알고 있다는 쪽지를 보낸 것은 사실 별 것도 아닌 미끼일 뿐이었다. 만일 실패한다 해도 정해경이 이정석과 동일 인물이라는 의심이 합당한 것인지 확인해 볼 수는 있었으므로 밑져야 본전이었다. 그 쪽지를 받고 해경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면 영신의 명줄이 조금 더 길어질 수는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해경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욱 쉽게 그 덫에 걸려들었다. 해경이 미끼를 물자 그 뒤의 일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해경이 사무실에서 뛰어나오는 것을 본 즉시 먼저 출발한 금석이 아무 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경성신사 앞에 앉아 있던 영신을 시간에 맞추어 죽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는 가짜 제보자가 정확한 시간에 제보를 했고, 가짜 목격자가 보지도 못한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고작 이 정도의 덫에 걸리리라 상상이나 한 적이 있었을까. 지금까지 그 계집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 정해경의 유일하고도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자신에게는 피를 나눈 형제가 없어 그런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역시 중만에게 그런 감정은 결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계집은 어찌 되었을까?”
중만은 재를 털며 중얼거렸다. 정해경이 몇 년을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도 머리카락 끝 하나 찾지 못했다면 죽은 것이 거의 확실할 터였다. 자신도 그 계집이 사라진 것을 알고 몇 날 며칠을 눈이 시뻘개져 찾아댔던가.
귀기(鬼氣)에 가까울 정도의 냉기가 서려 있던 서슬 퍼런 눈매가 문득 뇌리를 지나쳤다. 중만은 헛웃음을 뱉었다. 과연 독특한 계집이기는 했다. 십 수 년이 지나서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이 날 정도라니. 살아서 아들이라도 하나 낳았더라면 첩실 자리 정도는 주었을 것이다.
중만은 문득 그때 그 계집이 어찌 도망쳤던 것일까 새삼 궁금해졌다. 온 몸에 붉은 반점이 얼룩져 누가 보아도 필경 돌림병이라며 나자빠질 꼴을 하고 있던 계집이 도대체 무슨 수로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 것일까. 역시 소에 몸을 던져 버린 것이었나, 하고 생각하자 입 안이 씁쓸해졌다. 하기야 어차피 돌림병이었다면 그 몰골로 돈 한 푼 없이 어디서 죽어도 죽었을 터였다.
혀를 찬 중만은 신문을 한쪽으로 밀어 놓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계획대로 정해경과 이환만 정리한다면 나머지는 그리 골치 아플 것이 없었다. 박소화가 있기는 했으나 정해경도 이환도 없다면 그런 계집 하나 없애는 것이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거의 끝이 난 것인가. 중만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남은 것은 백명숙 뿐이었다.
“그 망할 년.”
킬킬대며 중얼거린 중만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린 중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 어미를 꼭 빼닮은 얄쌍한 얼굴 탓인지, 고 어린 것을 볼 때면 자신과 절반이나마 피를 나눈 형제라는 생각은 일절 들지 않았다.
백명숙이 지금이야 숨을 죽이고 산다지만 언제 자신의 뒤를 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자라는 것은 금방이었다.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중호 몫의 유산을 관리하는 것은 자신이었으나, 그 시기가 지나면 상당한 유산이 중호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두 눈을 뜨고 생돈을 빼앗기는 것은 중만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열여덟까지야 무어 앞으로도 한참이겠으나,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사업이 잘 굴러가 그 정도 유산은 푼돈이라고 여기고 아낌없이 내어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니 그럴 수도 있었다. 그 유산이 중만 자신에게도 몹시나 절실하고 또 절실해질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러니 제 어미와 작당질을 할 만큼 머리가 굵어지기 전 제거해야 했다. 중만이 베풀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는 그나마 어미와 자식을 한 번에 보내 주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그럴 수는 없었다. 정해경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뒤여야 했다. 정해경만 사라지면 모든 일이 너무나도 쉽게 풀릴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깔끔하게 그 둘을 제거할 수 있을까. 백명숙과 중호가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에 몸이 떨렸다. 몸을 숙인 채 한참을 쿡쿡거리던 중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축음기에 한 장의 레코드를 올려놓았다. 중만이 최근 가장 즐겨 듣고 있는 레코드였다. 스산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윤심덕의 였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허망한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정적의 장막을 살처럼 날카롭게 찢으며 울려 퍼졌다. 중만은 창가에 선 채 파이프를 천천히 빨며 창 바깥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믐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