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167
============================ 작품 후기 ============================
* 당시 여성 운전수의 존재를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14년의 일로, 1914년 7월 1일 에 백인 여성이 운전수가 되고자 영업 허가를 청원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이 최초입니다. 이후 1919년 최초의 조선 여성 운전수로 언론에 등장한 인물은 전주 출신의 최인선이었습니다. (1919년 12월 16일자 참조) 최인선의 등장 이후 언론에서 여성 운전수의 존재를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자동차상회에 정식으로 채용될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이들도 있었고, 일본에서 직접 운전을 배워 온 ‘유학파’들도 있었습니다. ( 1920년 9월 20일, “평양(平壤)의 여자운전수(女子運轉手)” / 1924년 4월 1일, “여자(女子)로 자동차운전수(自動車運轉手), 일본에 가서” 참조)
0158 / 0178 ———————————————-
천망회회(天網恢恢)
목이 나쁜 자리의 전당포 지하실은 조용했다. 도움을 주고 있는 조공 당원들의 은신처였다. 천장에서 늘어뜨려진 전구가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아경은 의자에 걸터앉아 낡은 천으로 작은 권총의 총신을 천천히 문질러 닦았다. 오랫동안 사용하던 것이었으나 지금은 만일을 대비해 공포탄만이 하나 든 빈 총이었다.
빈 권총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아경은 그것을 등에 비추어 보았다. 문 바깥으로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아경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열리며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준비는 마쳤습니다.”
아경은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품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팔짱을 끼고 문가에 기대 있던 준학이 눈썹을 좁힌 채 아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준학이 짧은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냥 기다릴 수는 없습니까? 꼭 그리 해야겠어요?”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 것 아닙니까?”
아경은 담담하게 되물었다. 준학이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아경을 불렀다.
“아경 씨.”
“오늘 밤 열 시라고 했지요?”
아경은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준학이 한숨을 뱉었다. 아경은 그가 그러는 까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준학에게는 결코 반갑지 않은 것이다. 중만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자신의 이름조차 버리고 살아온 아경이었다. 그리고 준학은 그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아경이 가장 우선이었고, 아경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를 받아줄 수는 없었다. 자신의 처지에 평범한 행복 같은 것은 사치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아경은 그 때문에 항상 준학에게 빚이 있었다. 이름을 바꾸고 도망다니면서도 목숨처럼 간직해 왔던 출원증을 준학에게 준 것은 그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준학은 그것을 온전히 자기 몫으로 하지도 않았고, 아경의 곁을 떠나지도 않았다. 해경이 자신의 동생인 것을 알았을 때, 준학은 해경을 구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미 권중만의 덫에 걸려 들어간 해경을 구하려다 자신까지 함정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 탓이었다.
그러나 아경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애초에 해경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 긴 세월 칼을 갈며 권중만에게 복수할 기회만 노려 왔던 아경이었다. 해경이 중만의 덫에 걸린 채 도움을 기다리는데 이제 와서 목숨 따위가 아까울 리 없었다. 준학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곧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아경의 물음에 대답했다.
“……열 시에 팔판동 육십팔번지 장순현의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이환 공의 말로 장문태 씨에게 확인해 보았는데 장순명이 먼저 전보를 쳤다는군요.”
“까닭은 비밀로 하셨겠지요?”
“조카가 아들을 팔아넘긴 것을 알면 제정신일 리 없으니 그저 장순명도 위험하다고만 말씀하셨답니다. 남경에서 권중만이 잔금을 주겠다며 청부업자를 시켜 접선하기로 했는데 장순명이 거기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잔금도 못 받고 맨몸으로 도망쳤으니 도피 자금이 필요할 겁니다. 다른 일가친척은 모두 멀리 떨어져 있어 장문태 씨에게 도움을 청한 것 같아요. 제 손으로 사촌을 죽여 놓고 그 아비더러 돈을 달라 찾아가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습니다.”
혀를 차는 준학에게 아경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라 팔아먹는 놈이 가족은 못 팔겠습니까? 놈이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건 확실하지요?”
“조공에서 감시하고 있습니다. 종로통 여인숙에 묵고 있다는데 사흘 동안 코빼기 한 번 안 비쳤다더군요. 권중만도 놈을 찾고 있으니 들키면 무사하진 못할 걸 알고 있겠지요. 돈 한 푼 없이 버티는 것도 무리일 테니 오늘 밤에는 목숨 걸고서라도 찾아올 겁니다. 놈을 잡으면 다시 여기로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일이 무사히 끝나면 이환 공에게 연락을 하면 될 겁니다.”
아경은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시계 바늘은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앞으로 두 시간. 이미 조공에서 감시중이라 했으니 만일 일이 틀어진다 해도 어떻게든 도와 줄 이들은 있을 터였다. 아경은 품에 넣은 권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준학을 마주보았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아경의 입에서 나온 말에 준학이 멈칫했다. 처음 해경의 사무실에 도착해 명함에서 정해경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소화가 보여 주던 그 순간 아경은 그때까지 지켜 왔던 자신의 세계가 모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해경이 죽었다는 것을 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의심하지 못하고 살아 왔던 아경이었다. 차라리 해경 역시 그랬더라면 아경이 지금 이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을 터였다. 해경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믿었기에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아경은 대답 없는 준학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나 제 피붙이를 두 번 죽이려 하는 걸 누가 두고 보겠습니까.”
아경은 권중만이 자신을 범하는 내내 해경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얼마나 자세히 묘사해 주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중만은 내내 해경이 산비탈 아래로 굴러 머리가 깨지고, 산짐승에게 팔다리를 뜯어 먹혀 뼈가 다 드러난 몰골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수도 없이 말했다. 아경이 마침내 그 모습을 제 눈으로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는데도 마치 눈앞에서 본 듯 그릴 수 있을 때까지.
아경은 이미 그렇게 과거에서 죽여 버린 해경을 중만이 다시 한 번 죽이려 드는 것을 결코 참을 수 없었다. 해경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않았더라도, 자신 역시 더 빨리 해경을 찾아냈을 터였다. 권중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든 지금처럼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만은 그런 기회를 모조리 빼앗아 갔다.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반격 이외의 방법은 없었다. 아경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준학이 시선을 내리며 짧게 웃었다.
“하지만 마음에 둔 이가 불길로 걸어 들어가는 걸 말리지 않을 사람도 없습니다.”
그 말에 가느다란 바늘을 심장에 찔러 넣은 듯 차갑고 뜨끔한 감각이 지났다. 준학이 어떤 심정으로 그 말을 하는지 차라리 몰랐다면 더 쉬웠을지도 몰랐다. 잠시 침묵하던 준학은 아경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 손바닥을 소리 나게 마주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미소를 지었다.
“지금 출발하지요. 자칫하다간 늦겠습니다.”
먼저 문을 나서는 준학의 등은 단단했으나 고독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탓일까. 예전 언젠가 아경이 그렇게 말했을 때 준학은 그 말을 부정했다. 마음을 준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것이라던 준학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아경은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끝내 자신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준학이 계속해서 이 진흙탕에서 자신을 끌어내려 하는 것은 그에게 다른 사람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준학이 만약 해경을 위해 위험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해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마음 아파할 것을 걱정하는 까닭임을 아경은 잘 알고 있었다.
아경은 그의 뒤를 따라 지하실을 나섰다. 전당포에서 팔판동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늦은 저녁이지만 해가 길어져, 예전이었다면 이미 어두웠을 길은 아직 푸르스름하게 낮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경은 한 걸음 뒤에서 준학의 그림자를 밟으며 말없이 걸었다. 준학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근처에 있을 겁니다. 위험해질 것 같으면 절대 나서지 말아요. 장순명은 어디에서든 다시 잡을 수 있습니다.”
“한시가 급한 일입니다.”
아경은 짧게 대답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아경의 그 말에 절대로 장순명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준학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경은 그가 혼잣말로 무어라고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보았으나, 그 내용이 무엇인지 묻지는 않았다.
팔판동 초입에 들어서자 점방 앞의 평상에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던 사내가 손을 들어 보였다. 미리 포섭해 둔 곳이었다. 준학이 그리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인가를 나누더니 몇 발짝 떨어져 선 아경에게 손짓을 했다. 아경이 달려가자 준학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장순명이 예정보다 빨리 움직일 것 같다는군요. 서두르지요.”
고개를 끄덕인 아경은 준학과 함께 골목 안쪽으로 들어섰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지나 육십팔번지 앞에 선 두 사람은 번지수를 확인했다. 대문 안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조카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준학이 온 방향으로 뻗은 두 갈래의 골목을 가리켰다.
“왼쪽이 대로로 통하는 지름길입니다. 장순명을 잡으면 바로 저쪽으로 나가지요. 차를 대기하고 있을 거라 했습니다.”
거의 속삭이다시피 말한 준학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아경은 흩어지자는 손짓을 했다. 준학은 바로 옆집을 살폈다. 사람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잠든 것인지 옆집은 암흑 천지였다. 준학이 야트막한 담을 훌쩍 넘어 그 뒤로 숨었다. 아경은 담벼락을 바로 돌아서 모퉁이에 바짝 붙었다. 이제부터는 기다리는 것이 관건이었다. 자신과 준학 말고도 골목 곳곳에 다른 동료들이 잠복해 있을 터였다. 만일 순명이 자기 존재를 들킨다면 무사히 도망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어둠 속에 완전히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인 아경은 입 안으로 숫자를 세었다. 권중만의 집에 있을 때부터의 습관이었다. 그 지옥 같고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아경은 천장을 보며 속으로 숫자를 세곤 했다. 수를 세는 데 집중하고 있으면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담벼락에 몸을 바짝 붙이자 등으로 냉기가 스며들었으나 그런 감각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골목 안은 쥐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경이 몇 번째로 다시 하나부터 세기 시작했을 때였다. 누군가가 골목 어귀로 들어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경은 그늘 속에서 눈만 내밀어 그 인기척의 정체를 확인했다. 후줄근한 차림에 얼굴을 나병 환자처럼 동여매 가린 남자였다. 순간 장순명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남자는 발을 끄는 듯한 걸음으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도피하던 도중 다리를 다쳤거나, 혹은 돈이 없다 했으니 배를 심하게 곯은 탓일지도 몰랐다. 저런 꼴이라면 설령 권중만과 바로 앞에서 마주쳤대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을 터였다.
아경은 그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누군가 잠복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듯 세월아 네월아 하며 겨우 순현의 집 앞까지 온 남자가 그제야 목을 빼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남자의 발치로 쥐 한 마리가 날카롭게 울며 달려갔다. 남자가 놀란 듯 쉰 목소리로 짧은 비명 같은 것을 지르며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에이, 재수 없게…….”
혼잣말이었으나 가까이 있던 아경은 그의 목소리를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순명이었다. 순명이 대문으로 가까이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들킬 것이 두려웠는지 그 소리는 너무 작았다. 안에서 아무도 나와 보지 않자 조급해졌는지 순명이 조금 더 크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여전히 현관문이 닫혀 있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 손을 비비며 대문 앞을 오가던 순명은 결심한 듯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려 했으나, 다음 순간 손을 치켜든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뒤통수에 아경이 총구를 들이댄 탓이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해야 할 거요.”
아경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공포탄 한 발밖에 들지 않은 총이었으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라면 공포탄만으로도 충분히 상해를 입힐 수 있었다. 물론 순명의 입장에서는 그 총에 총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므로 얼어붙은 것도 당연했다.
“……누, 누가 보내서 왔소?”
순명이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조그맣게 헐떡이며 물었다. 남경에서 기껏 여기까지 도망쳐 왔더니 순현의 집 대문 앞에서 붙잡힐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터였다. 아경은 대답 대신 뒤통수에 댄 총구를 콱 눌렀다. 순명이 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벌벌 떨고 있는 것이 총구로 느껴질 정도였다.
“도망칠 생각은 마시오. 입 다물고 왼쪽 길로 나가요.”
한쪽 손을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가 질린 채 굳어 버린 순명은 아경이 가리키는 대로 간신히 몸을 돌려 지름길인 왼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순명은 다리를 끌며 걷는 내내 두 손을 비비며 빌었으나, 아경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순명이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목숨만…… 이,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아경은 그가 자신을 권중만이 보낸 청부업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굳이 부정해 줄 생각은 없었다. 가는 길에 혹여 경찰의 눈에 띌까 싶어 뒤통수에 겨누었던 총구를 허리로 내려 쿡 쑤셔 박은 아경은 순명에게 내뱉었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걷는 게 좋을 거요. 여기에 총알이 박히면 반신불수가 되어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될 테니.”
애초에 도망칠 기력도 없어 보였으나, 그 말을 듣고서는 더더욱 의욕을 상실한 듯 순명이 숨만 헐떡이며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어귀에 검은 자동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빈 차 같았으나, 순명과 아경이 골목 어귀로 나서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두 명의 남자가 튀어나와 순명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 그 얼굴에 검은 자루를 씌우고는 팔을 뒤로 꺾어 묶은 뒤 자동차 뒷좌석에 처넣고는 문을 닫았다. 두 남자가 다시 차에 올라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자동차가 완전히 사라지자 준학이 등 뒤에서 나타났다. 계속 뒤를 밟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어찌 하겠습니까?”
아경은 재빨리 들고 있던 총을 안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약속과 다르다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누가 사람을 보냈다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권중만 말입니까?”
“달리 다른 사람도 없지요. 오줌이라도 쌀 기세던데 어차피 지킬 의리도 없으니 알아서 자백할 겁니다.”
아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권중만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알아보다 중만이 상해 쪽에 자금을 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때문에 용정의 독립 단체들과 접촉하며 친분을 쌓았던 아경은 세상에 장순명 같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를 거기서 배웠다.
앞에서는 조국의 내일을 논하면서도 돌아서면 동료를 밀고하는 자들이 널린 세상이었다. 아경은 그런 자들에게 분노하면서도 자신이 그런 자들을 모두 나서서 없애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순명 역시 그런 흔한 자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해경을 죽이기 위한 덫에 놓인 미끼가 되기 전까지는. 준학이 굳은 얼굴로 선 아경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돌아갑시다. 이환 공에게 연락을 주어야 하니까요.”
두 사람은 다시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갔다. 전당포 앞에는 아까 순명을 싣고 간 자동차가 서 있었다. 차 안에는 납치의 흔적 따위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이미 지하실로 데려간 모양이었다. 전당포 안으로 들어선 준학이 전화를 빌려 환에게 연락을 하는 동안 아경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닫힌 문 너머로도 순명이 울부짖는 소리가 넘어와, 문고리를 쥐었던 아경은 잠시 멈칫하다 문을 열었다.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의자에 묶인 채 발광하는 순명과, 자동차 안에 있던 두 남자였다.
아경은 의자를 하나 끌어 순명의 맞은편에 앉았다. 빛 아래 드러난 순명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면도를 오랫동안 하지 못해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이며 부랑자 같은 옷 꼴만 보아도 얼마나 갖은 고생을 다 해서 도로 경성으로 도망쳐 들어왔는지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래,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소?”
아경이 내뱉자 순명이 밭은 숨을 헐떡이며 아경을 노려보았다. 아경은 품 안에서 다시 권총을 꺼내 겨누며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순명이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혀를 찬 남자들이 순명의 어깨를 콱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아경을 향해 웃었다.
“김 선생, 취미가 너무 고약하신 것 아닙니까?”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겠군요.”
마주 웃으며 대꾸한 아경은 총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순명을 마주보았다.
“돈을 얼마나 받았기에 사촌동생까지 팔아넘겼소?”
순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경은 그 얼굴에 약간 놀란 기색이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권중만이 보낸 사람들이 아닌가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그런 것은 아경에게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경은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권중만은 사냥이 끝나면 개 삶을 물부터 끓이는 인간이오. 사람 잘못 본 것도 당신 죄지.”
“나,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오! 그 애를 죽일 줄 알았으면 협조하지 않았을 거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는 그만두지요. 그러면 권중만이 장순현을 불러 무얼 할 줄 알았소? 상해 쪽에도 장순현이 돈을 빼돌렸다는 거짓말을 한 걸 보면 당신은 애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고 있었던 게지.”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시면…….”
“내게 변명하지 마시오. 사촌을 죽여 놓고 그 아비에게 돈 달라는 낯짝이라면 어디 가서도 먹고 살 만은 하겠으나, 어차피 내가 여기서 살려 보낸대도 당신이 사지 멀쩡히 살 날이 그리 많지는 않을 거요.”
아경의 말에 순명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경의 말대로 배신자로 낙인찍힌 이상 상해 쪽에서 순명을 가만히 둘 리 없었다. 일본 경찰로 넘어가기 전 그쪽에서 처리하려 들 터였다. 혹은 만약 이 일이 문태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 역시 그저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목숨을 구걸하는 인간이 어찌 남의 목숨에는 그리도 둔감한가 속으로 생각하자 입이 썼다. 순명은 체념했는지 고개를 떨구었다. 아경은 침묵하며 그를 마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준학이 계단을 내려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경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학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남자를 알아본 탓이었다.
환이었다. 머리나 옷매무새가 그리 정갈하지 않은 것을 보니 몹시 급히 온 모양이었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눈치를 보듯 눈만 들어 흘끔거리던 순명이 환을 알아보고는 대경실색하며 의자에 묶인 채 움찔거렸다. 그리로 고개를 돌린 환이 순명을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렇지 않아도 서늘한 인상에 곧장 냉기가 어렸다.
“……정말 순현이를 팔아넘긴 자가 형입니까?”
그 목소리는 낮았으나 분노를 누르고 있는 투는 선연했다. 순명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은 때로 긍정보다도 더욱 확실한 답이었다. 환은 순명의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였다.
“말해 봐요. 권중만이 모든 걸 지시했습니까? 순현이를 용정으로 불러들이고 미행을 붙여 차로 치어 죽이게 한 사람이 누군지 내 앞에서 말해 보란 말입니다.”
순명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환은 입매를 비틀었다.
“애국지사인 양 하며 내게 독립 자금을 후원해 달라고 할 때는 그리 청산유수시던 분이 왜 지금은 한 마디도 아니 하십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소.”
다음 순간 환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순명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두 명의 남자가 재빨리 환을 순명에게서 떼어 놓았다. 분이 풀리지 않는지 숨을 고르던 환이 그제야 지하실에 다른 이들이 있는 것을 깨달은 듯 멈칫하고는 곧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경은 얼른 환과 순명의 사이에 끼어들어 두 남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일전에 말씀드린 조공 소속의 동료들입니다. 이 분은 황일욱 씨라 하고, 이쪽은 오계영 씨입니다.”
“……이쪽 분이 누구라고요?”
환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오계영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아경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오계영 씨라 합니다.”
환이 허, 하고 짧은 숨을 뱉으며 탁자 위에 걸터앉았다. 오계영은 본래 조선공산당 평양지부의 서기로 일하던 자였으나, 권중만의 밀고로 조직 전체가 와해될 때 수배자가 되고 만 처지였다. 조공에서 일하기 전 대한독립군단 소속의 사수였는데, 명사수로 이름이 나 몇 차례 친일파 테러에 가담한 일이 있는 탓이었다.
경성에서는 그가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다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현재 그는 호적에서도 사망자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죽지 않고 목숨을 건져 용정까지 도망쳐 온 뒤로는 유령처럼 떠돌며 권중만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계영에게 물었다.
“오계영 씨, 혹시 대한독립군단에 있었고 조공 평양지부의 서기를 지낸 적이 있습니까?”
놀란 것은 계영뿐만이 아니었다. 아경과 준학, 일욱 역시 당혹스러운 얼굴로 환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을 본 환은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전에 평양에서 열린 친목회의 신년회에 참가했을 때 일본군 장교 와타나베 이사오를 가장한 자가 자신을 암살하려다 사망했는데, 권중만이 그 자를 바로 오계영이라고 했다는 이야기였다. 환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계영이 입을 열었다.
“놈이라면 가능한 이야기지요. 놈은 내가 죽었다고 알고 있으니, 뒤탈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내 이름을 팔아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을 겁니다. 어차피 이환 공께서 저의 정체를 알 리 없고 죽은 자를 추적할 리도 없으니까요.”
“그럼 거기서 죽은 자는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알 수 없지만, 만일 동기가 있다면 그 자가 진짜 와타나베 이사오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환은 헛웃음을 뱉고는 팔짱을 끼었다.
“……살인마가 멀끔한 얼굴의 가면을 쓰고 도대체 몇 사람을 그런 식으로 살해한 것인지 가늠할 수도 없군요. 좋습니다. 어차피 꼬리가 길면 지금처럼 밟히게 되어 있고, 실패한 적이 없었다면 방심할 수밖에 없을 테지요. 우리라고 권중만에게 덫을 놓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환은 순명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씩씩대는 숨을 뱉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순명의 머리 위로 환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때마침 우리에게도 훌륭한 미끼가 하나 있으니까요.”
지하실의 등이 다시 한 번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아경은 환의 서늘한 얼굴에 그늘이 점멸하는 것을 보았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림자 속에서 언뜻 엿보이는 고통은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경은 그 그림자를 못 본 척하며 눈을 돌렸다. 환이 누구에게도 그 고통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한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