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39
00036 보이지 않는 살인자 =========================================================================
“왔다, 왔어, 얘.”
창을 열어 두고 난간에 기대앉아 있던 산청과 연홍이 호들갑을 떨었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고 있던 인혜는 두 사람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혀를 찼다.
“무에 그리 호들갑이니, 또?”
“정주상회 총각 오는 날이잖아요.”
연홍이 깔깔대며 웃었다. 인혜는 거울에 자기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 보며 타박을 하듯 내뱉었다.
“속도 없는 것들. 사내란 사내를 그리 보고도 아직 덜 물렸니?”
인혜의 말에 산청이 입을 삐죽 내밀며 대꾸했다.
“제가 무얼 하겠다 했나요. 그저 간만에 보는 미남자라 눈이 즐거워서 그렇지요.”
인혜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인혜가 있는 영산홍(映山紅)은 기생들이 소리 잘 하고 얼굴 예쁘기로 경성에서 이름난 요릿집이었다. 당연히 문턱이 닳을 만큼 손님이 드나드는 집이었는데, 그렇게 된 데는 몇 년 전 영산홍을 인수한 이난옥의 힘이 컸다. 난옥은 본래 평양 기생이었다는데 그녀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난옥이라는 이름도 본래 기명이었는데 지금은 그것을 본명처럼 쓰고 있었다. 몇 년 전 평양에서 경성으로 왔다는 난옥은 금광 개발로 돈더미에 올라앉은 박강수라는 사업가의 후처로 들어앉으며 영산홍을 인수했고, 경성에서 가장 이름난 기생들을 모아 왔다. 요리에도 몹시 신경을 써 경성에서 사업을 한다는 이들이라면 영산홍의 단골 아닌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난옥은 식재료도 무척 까탈스럽게 골랐는데, 종로통의 정주상회는 난옥의 보통 아닌 성미에도 몇 년 동안 거래를 이어 오고 있는 집이었다. 본래 영산홍은 정주상회 입장에서도 큰 고객이라 항상 정주상회 주인인 배만국이 직접 배달을 오곤 했는데, 두어 달 전부터 배달을 오는 이가 바뀌었다. 배달을 담당하는 새로운 점원은 열일곱이나 열여덟 정도 되었을 소년으로, 육척 장신에 한눈에 보기에도 놀랄 정도의 미남자라 배달을 온 첫날부터 영산홍의 기생들이 난리가 난 참이었다.
이름은 정해경이라 했는데, 그것이 또 평범한 일꾼 이름 같지는 않다며 해경이 오는 날이면 틀림없이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기생들끼리 입방아를 찧는 것이 소일거리였다. 듣기로는 몹시 성실히 주경야독(晝耕夜讀)한다고도 하여, 영산홍의 기생들은 해경을 보면 농담으로 서방으로 들여 뒷바라지라도 하겠다는 소리를 하곤 했다. 인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주방 근처에서 가져온 식재료를 나르던 해경이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이쪽을 보았다. 산청이 손을 흔들자 해경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산청이 창가에 턱을 괸 채 해경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저 얼굴로 배달꾼이나 하기에는 영 아깝지 않아요?”
“영 아까우면 어쩌려고, 바깥 양반으로 들이기라도 할 테야?”
인혜가 농을 치듯 묻는 말에 산청이 돌아앉아 인혜를 보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했다.
“얼굴이 저만치 반반하면 돈은 내가 벌고 방에 들어앉혀 매일 얼굴만 봐도 좋지 않을까요?”
“이애, 아서라. 끔찍한 소리 하지도 말아.”
질색을 하는 인혜의 얼굴에 산청과 연홍이 깔깔거렸다. 인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해경을 보았다. 확실히 앳된 티가 얼굴에 남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분위기가 감돌아, 절로 마음이 끌리는 구석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인혜는 해경의 그런 분위기가 편치 않았다. 우수(憂愁)라 해야 할까, 혹은 애수(哀愁)라 해야 할까. 어느 쪽이든 그처럼 앳된 소년이 가질 만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느낌조차 여인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요소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인혜는 해경을 볼 때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얼굴은 고와서 무르게 생긴 주제에 말 한마디 붙여 보면 찬바람이 쌩쌩 분다니까.”
숫제 몸을 반쯤 내밀고 해경을 구경하던 연홍이 투덜거렸다. 산청이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아주 한겨울 눈보라 치듯 하지?”
“어지간한 낯짝 같으면 꼴에 주제도 모른다 할 텐데, 얼굴이 원체 반반하니…….”
연홍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혜는 해경이 일하는 모습에 시선을 주다 산더미같이 쌓인 식재료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난옥이 오늘 저녁에 ‘바깥 어르신’인 강수의 중요한 접대가 있다며 저녁 예약을 모두 취소하고 기생들을 대기시켜 놓은 참이었다. 음식을 얼마나 많이 할 요량인지 평소보다 식재료도 몇 배로 발주한 모양이었다.
“무슨 손님을 부르기에 음식을 저만큼 할까?”
인혜가 고개를 갸웃하자 산청이 대답했다.
“바깥 어르신 회사 직원들도 전부 오고, 아무튼 아주 큰 모임이래요. 난옥 언니가 원체 손이 커야지요.”
“그런데 작년 이맘때가 큰아들 죽었을 때 아니야? 제사상을 잔칫상처럼 차리겠네.”
연홍이 무심히 내뱉은 말에 산청이 어머, 하며 연홍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인혜도 연홍에게 눈을 흘기며 나지막이 타일렀다.
“누가 듣겠다, 연홍아.”
“죄송해요.”
연홍도 아차 싶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강수에게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박성탁이라 했고 나이는 열둘이었다. 후처로 들어간 난옥이 성탁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돌보아 성탁도 난옥을 무척 따랐다. 난옥이 재작년에 아들을 낳은 뒤로도 성탁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작년 이맘때 성탁이 까닭을 알 수 없이 급사했다. 강수가 금광 사업을 하며 워낙 악독하게 굴어 천벌을 받은 게 틀림없다고 사람들끼리는 수군거리곤 했으나, 원인도 모른 채 금쪽같은 장남을 잃은 것은 까닭이 무엇이든 비통한 일이라 누구든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은 저어하는 편이었다. 주방에서 벌써 음식을 시작하는지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하며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산청이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전을 부치기 시작했나 봐요.”
“그런가보다.”
창가에 기대 건성으로 대답하던 인혜는 난옥이 본채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몸을 바로 했다. 마루로 올라와 인혜가 있는 방의 문을 열어젖힌 난옥이 아직 분도 바르지 않은 인혜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이애, 여태 꼼짝도 않고 무엇 하는 게야? 두 시간 후부터 손님들이 온다니까 다들 어서 준비해.”
“네.”
“그나저나 오늘같이 바쁜 날 개돌이하고 장두가 빠진다니 큰일이네.”
난옥이 혼잣말처럼 내뱉으며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 부근을 눌렀다. 개돌이와 장두는 음식 나르는 일 외의 각종 잡다한 일을 맡아 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산청이 노리개를 찾아 달다 물었다.
“개돌이하고 장두가 왜 빠진대요?”
“둘이 어제 저녁 술을 마셨는데 술병이 아주 단단히 났다지 뭐야. 둘이 다 밤새 토사곽란(吐瀉癨亂)하고는 자리보전하고 누워 꼼짝도 하지 못한단다. 천하에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하필이면 오늘 그럴 게 뭐람.”
한탄하듯 대답하는 난옥을 보고 치마끈을 매던 연홍이 창 밖을 가리켰다.
“저기, 저 정주상회 총각한테 하루 도와 달라 하면 안 되나요? 우리 일이라면 배 사장님도 그러마 할 텐데요.”
연홍의 말에 난옥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을 하다가 몸을 내밀어 창 밖을 보았다. 해경이 식재료를 거의 다 날랐는지 허리를 편 채 옷자락을 털고 있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난옥이 손짓을 하며 해경을 불렀다.
“거기 총각, 이리 좀 와 봐요.”
난옥의 말에 해경이 멈칫하다 이쪽으로 걸어왔다. 난옥이 창가에 선 채 해경에게 물었다.
“오늘 우리가 손이 좀 모자라 그런데, 배 사장한테는 내가 이야기할 테니 하루만 도와줄 수 있겠어요? 큰 손님들이라 그래요. 삯은 후하게 쳐 줄 테니.”
잠시 머뭇거리던 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해경의 대답에 난옥이 해경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문가에 서 있던 길동을 불렀다. 길동은 잡일 하는 직원들을 관리하고 있는 사내였다. 난옥은 길동이 달려오자 해경을 가리켰다.
“이 총각 바로 옷 좀 갈아입혀요. 오늘 하루 개돌이하고 장두 대신 일할 거예요.”
“네, 사장님.”
길동이 해경을 데리고 별채 쪽으로 들어갔다. 난옥이 한숨 돌렸다는 얼굴을 하고 인혜를 돌아보았다.
“자련이 너는 이따 바깥 어르신 오시면 그 방에 들어가서 시중 좀 들어라. 어르신이 네가 노래하는 걸 원체 좋아하시니……그리고 그 청색 저고리 대신 빨간 것을 입으렴. 치마는 지난번에 그 녹색이 좋겠다. 중요한 손님들이 많이 오실 테니 화장도 좀 공들여 하고.”
인혜가 대답 대신 경대 앞에 앉아 분을 바르기 시작하자 난옥이 혀를 찼다. 난옥은 인혜가 기생 주제에 콧대가 높다며 항상 불평이 많았으나, 영산홍의 이름값 중 큰 지분은 인혜 덕이었기에 다른 기생들에게처럼 까다롭게 굴지는 못했다. 인혜가 미인이기도 미인이었으나 노래 실력이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에, ‘영산홍에는 자련을 보러 간다’는 말이 경성 사내들 사이에서 흔히 나올 정도였다. 난옥은 인혜가 들으라는 듯 끌탕을 치다 다른 방으로 향했다. 입술연지를 찍어 바르던 산청이 인혜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는 좀 유하게 구시면 난옥 언니가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텐데 어쩜 그리 뻣뻣하셔요?”
“난옥 언니 간이고 쓸개고 받았다가는 먹다 체할 것 같아 그리는 아니 하련다.”
무심히 대답한 인혜는 난옥이 골라 준 옷 대신 청색 저고리와 노란 치마를 입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일본제 풍조 향수를 두어 번 뿌린 인혜는 독한 향에 얼굴을 찌푸렸다. 향수는 아무래도 취향이 아니었으나, 난옥은 그 편이 더 고급스러워 보인다며 모든 기생들에게 향수를 뿌리도록 하고 있었다. 벽장을 열고 가야금을 꺼낸 인혜는 방에 앉아 줄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요 며칠 비가 와 날이 습했던 탓에 가야금이 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앉아 줄을 맞추고 있으려니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바깥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들이 어서 오십시오, 하고 외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기생들이 모두 방 밖으로 나와 마루에 도열했다. 인혜도 한 발 늦게 따라 나가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눈에 보기에도 오륙십 명은 너끈히 될 듯한 손님들이었다. 쪼르르 달려 나온 난옥이 인혜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이애, 바깥 어르신 손님들은 네가 안내해 드리려무나. 안채 가장 큰 방으로 모셔라. 네 노래를 듣겠다고 일부러 오신 분들이란다.”
“네, 그러지요.”
순순히 대답한 인혜가 마루 아래로 내려서자 그제야 인혜가 자기가 시킨 대로 옷을 입지 않은 것을 안 난옥이 한 소리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곧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인혜는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강수에게 다가가 몸을 숙여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시지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이게 누구야, 자련 아닌가? 언제 봐도 미인이구만. 잘 있었나?”
인혜를 알아본 강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인혜는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숙여 보였다. 강수가 자기가 데리고 온 손님들을 돌아보며 인혜를 가리켰다.
“우리 영산홍의 자랑인 자련입니다. 미모도 미모거니와 목청이 경성 제일이지요.”
“그러면 들어가서 노래부터 한 곡조 뽑아 주시게!”
누군가가 강수의 뒤에서 외쳤다. 인혜는 웃으며 대답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였습니다. 제 목청도 경성 제일이지만 영산홍의 요리도 경성 제일이니, 어서 들어 일단 요리부터 맛보시지요.”
인혜는 난옥이 말한 대로 안채의 가장 큰 방으로 손님들을 안내했다. 손님들이 자리에 앉자 곧 요리가 줄줄이 들어왔다. 강수의 옆자리에 앉은 인혜는 무심코 요리를 가지고 들어온 직원을 보았다. 해경이었다. 처음 해 보는 일일 텐데도 능숙하게 순서에 맞춰 요리를 놓는 것이 제법 일머리는 있어 보였다. 강수의 근처에 앉아 있던 강동방직의 고태식 사장이 해경을 빤히 보다가 허, 하고 웃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이난옥은 머슴도 얼굴 보고 데려오는가?”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해경에게 쏠렸다. 분명히 자신에게 한 말인 것을 알았을 텐데도 해경은 대답 대신 방을 들락거리며 요리를 놓아 둘 뿐이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이 시선을 끌었다. 인혜는 저도 모르게 해경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확실히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개봉하지도 않은 상품(上品)의 중국 술병을 강수의 앞에 놓아 둔 해경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물러갔다. 태식이 멋쩍은 듯 입맛을 다셨다.
“그 머슴 붙임성 한 번 대단하구만.”
“저희 가게에서 쓰는 사람이 아니라 그래요, 사장님. 일손이 모자라 다른 가게에서 급히 빌려 왔답니다.”
불같은 태식의 성격을 아는 인혜는 공연히 해경에게 불똥이 튈까 싶어 얼른 해경을 변호해 주었다.
“아, 그렇소?”
하루 급하게 쓰는 직원이라면 그렇게 불친절할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는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되물은 태식이 강수를 보았다.
“좋은 술을 두고 구경만 하라고 할 참이시오?”
“그럴 리가요.”
강수가 서둘러 병을 따 인혜에게 건넸다. 인혜는 술병을 들고 방 안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의 잔을 채웠다.
“드시는 동안 저는 가야금을 마저 조율해 가지고 오겠습니다.”
잔을 전부 채우고는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나온 인혜는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해경을 보았다. 빈 접시가 나오면 치우고 다음 요리를 가져오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어쩐지 신경이 쓰여 해경을 잠시 보고 있던 인혜는 해경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 내 방에 가서 가야금을 좀 들어다 주지 않겠어요?”
인혜를 흘끗 내려다본 해경이 별 말 없이 인혜의 뒤를 따랐다. 방으로 돌아온 인혜는 가야금을 안고 앉아 줄을 골랐다. 해경은 문 앞에 선 채였다. 인혜는 해경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물었다.
“이름이 정해경이라 했던가? 나이가 어찌 되지요?”
“올해 열여덟입니다.”
해경이 대답했다. 끝이 딱 떨어지는 말투에는 태식의 말대로 붙임성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말을 섞기 싫어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혹은, 말을 섞는 것을 피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인혜는 해경에게 조금 흥미가 생겼다. 고개를 들어 해경을 쳐다보자 서늘한 눈이 시선을 맞받아 왔다. 그 눈을 빤히 보던 인혜는 흠,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이런 일을 할 사람으로는 아니 보이는데 무슨 사연이 있나요?”
기생 일을 하며 사람이라면 질리도록 본 덕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제는 반 무당이라고 하는 인혜였다. 얼굴을 보고 한두 마디 섞으면 무슨 일을 하는지, 성격이 어떤지는 쉽게 알 수 있는 탓이었다. 그 말에 해경의 흰 얼굴이 굳어졌다. 인혜는 그 표정이 대답보다 더 확실한 대답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과연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배 사장님 말로 밤에는 몹시 열심히 공부를 한다던데 기특하군요.”
인혜는 더 캐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해경은 그 말에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네,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더 이상의 말 없이 한동안 시간을 들여 가야금의 조율을 끝낸 인혜는 손짓으로 해경을 불러 가야금을 들게 했다. 사실 가야금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옮길 수 있었으나 어쩐지 해경이 자꾸 눈에 걸려 그런 것이라, 인혜는 가야금을 들고 한 걸음 앞서 가는 해경의 등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파고들어 묻는 데는 취미가 없었다. 방 앞에서 해경에게 가야금을 받아든 인혜는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가야금을 조율하는 동안 식사는 끝난 모양이었다. 술이 몇 잔을 돌았는지, 대부분이 불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해경이 안으로 들어와 빈 그릇을 재빨리 정리해 나가더니 잠시 후 술안주를 가지고 돌어왔다. 귀한 생표고를 볶아 낸 버섯볶음이며 구절판, 생선회 따위가 줄을 지어 상 위에 놓였다. 해경이 상을 차리고는 나가자 난옥이 안으로 들어섰다.
“요리는 입에 좀 맞으시는지요?”
난옥이 묻는 말에 개성 금광 사무소 소장인 차문환이 잔을 들어 보였다.
“영산홍이 경성 최고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다행입니다. 일이 바빠 잠시 인사만 드리러 왔답니다. 저희 바깥 어르신 일 좀 잘 돌보아 주십시오. 맛난 요리는 언제든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난옥의 말인데 여부가 있겠소?”
문환이 껄껄 웃으며 말하자 손님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따라 웃은 난옥이 인혜에게 손짓을 했다. 인혜가 가까이 오자 난옥이 인혜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이애, 네가 바깥 어르신 시중 좀 들어 드리렴. 나는 다른 방에 가 봐야 해.”
“네.”
인혜가 고개를 끄덕이자 난옥이 서둘러 방을 나갔다. 인혜는 강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미 술이 조금 된 듯 얼굴이 상기된 강수의 잔을 채워 주자, 강수가 버섯볶음을 가리켰다.
“이것이 무엇으로 만든 것이오?”
“생표고입니다. 장흥에서 직접 공수한 것으로 매우 귀한 음식이랍니다.”
“그러면 맛이나 한 번 보여 주겠소?”
부인이 멀쩡히 코앞에서 오가는데도 수작을 부리는 태도가 썩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인혜는 그런 것을 얼굴에 드러낼 정도의 애송이는 아니었다. 웃는 낯으로 버섯볶음을 집어 강수의 입가로 가져간 인혜는 강수의 입 안에 그것을 넣어 주었다. 강수가 다소 취해 무너지는 발음으로 손을 뻗어 인혜의 어깨를 감싸고는 웅얼거렸다.
“미인이 주니 더 맛있는 것 같소.”
“그러면 술을 드시는 동안 제가 노래를 하지요.”
말을 돌린 인혜는 강수의 손을 살짝 밀어내고는 가야금을 안고 앉았다.
“‘녹음방초(綠陰芳草)’로 시작하겠습니다.”
인혜는 가야금 줄을 몇 번 튕겨 보고는 가야금으로 반주를 하며 소리를 뽑기 시작했다. ‘녹음방초’는 의 한 곡조였다. 녹음방초 승화시에 해는 어이 아니 가노, 오동야월 달 밝은데 밤은 어이 수이 가노. 일월무정 덧없도다, 옥빈홍안이 공로로다. 우는 눈물 받아내면 배도 타고 가련마는 지척동방 천리로다, 바라를 보니 눈에 암암……인혜의 깨끗한 목청과 가야금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느새 손님들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인혜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인혜가 한 곡조를 막 끝내고 인사를 했을 때였다. 눈을 감고 앉아 있던 강수가 옆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곁에 앉아 있던 태식이 허 참, 하며 강수를 흔들었다.
“이보시오, 박 사장.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새 만취한 게요?”
강수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평소 애주가인 데다 주당인 강수가 고작 술 몇 잔에 쓰러진 것은 처음이었다. 태식이 혀를 차며 강수를 일으켜 앉혔다.
“거 이 사람…….”
다음 순간 태식이 입을 다물었다. 영문을 몰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인혜 역시 눈에 들어온 강수의 얼굴에 잠시 굳어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강수의 얼굴은 온통 붉은 발진으로 뒤덮인 채였다. 태식이 어, 어, 하며 말을 잃고 있다가 강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강수의 몸이 옆으로 털썩 떨어지며 그 입에서 허연 거품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