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52
00049 나의 신부 =========================================================================
“그것이, 약 보름 전쯤인데……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찾아와 정 선생께서 말씀하신 그런 계집아이를 찾았습니다. 산 년이 아니라 죽은 년이어야 한다고요. 키와 용모가 비슷해야 한다는데 일단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아니어도 조건이 까다로워 삼백 원을 받았습니다.”
삼백 원이면 학생에게는 상당한 거금이었다. 해경은 독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독구는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했는지 중간중간 완춘의 눈치를 보며 더듬거렸다.
“저, 생각보다 시간이 상당히 걸려서, 아무튼 간신히 비슷한 시체를 찾았습니다. 굴다리 밑에서 제 할미와 함께 사는 계집애인데 열병이 나 죽었다는 겁니다. 그 할미에게 이십 원을 주고 시체를 사서 젊은 놈이 시키는 대로 옷을 갈아입히고 물건과 함께 조선맥주 공장 옆 도랑에 버렸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저희가 무어 불법을 저지르거나 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수연의 시체가 가짜라는 것은 부검실에서 손가락을 확인했을 때 이미 깨달은 사실이었다. 해경은 이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독구의 말이 바로 그 증명이었다. 해경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펄쩍 뛰고 싶은 것을 참으며 독구에게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해경의 얼굴을 본 완춘이 물었다.
“찾고 있는 게 이거요?”
“맞습니다. 꼭 확인하고 싶은 일이라 찾아왔을 뿐입니다. 불법적인 일이 아닌 것은 이해했고, 전연 아무런 위해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해경이 아무런 위해가 없을 거라고 강조하자 완춘이 흠, 하고 거의 다 타들어간 시가레트를 바닥에 눌러 껐다.
“정 선생은 이상한 사람이오. 어찌됐든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군.”
“항상 도움만 받고 있어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
완춘이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인사를 건네고 완춘의 사무실을 나온 해경은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광만이 인편으로 보낸 열쇠가 도착해 있었다. 소화를 퇴근하게 하고 광만의 사무실로 갈 생각을 하고 있던 즈음 뜻밖에도 이주가 찾아왔고, 재영의 형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해경은 어떤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었다. 어릴 적 함께 자랐다면 차영 역시 수연을 알고 있을 터였고, 재영을 돕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어떤 도움인가를 주었을 수도 있었다. 이주에게서 차영이 총독부의 설계 부감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해경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한강통에서 총독부 관청회사의 사택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직 입주를 시작하지 않은 사택이라면 충분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몸을 숨길 수 있을 터였다.
재영과 수연이 어떻게 감쪽같이 흔적을 감추었는지도 알게 된 해경에게 남은 문제는 재영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광만이 이미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었고, 재영이 운동에는 만능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혼자로는 혹시 역부족일까 싶어 이주에게 지원을 요청한 해경이었다. 생각대로 해경이 광만의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는 것처럼 가장하자 재영은 사무실로 침입해 불을 끄고 자신을 습격했다. 얼굴을 확인할 틈도 없었을 터였다. 이주의 도움 덕에 재영을 제압하고 자신이 생각한 사건의 경위를 말하자 재영은 그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화연을 동일한 방식으로 숨긴다 해도 한구가 광만의 추심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고, 화연까지 그렇게 숨긴다면 도리어 광만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빚을 갚는 것이었는데, 해경은 한구의 빚을 갚을 방법을 단 하나 알고 있었다. 이주를 데려다 주고 종로통을 지나 돌아가던 해경은 가경상회 앞에서 발을 멈췄다. 불이 꺼진 가경상회 건물 뒤편으로 재영의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해경은 시계를 확인했다. 밤 열한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해경은 빠른 걸음으로 재영의 집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한밤중의 소란에 깜짝 놀란 가정부가 달려 나왔다.
“뉘시오?”
해경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우재영 군의 일로 왔다고 전해 주십시오.”
가정부가 그 말에 입을 떡 벌리더니 해경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웬 미친놈인가 싶은 모양이었다. 뒷걸음질을 치던 가정부가 후다닥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잠시 후 중년의 남자가 대신 나왔다. 병진이었다. 한눈에도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한 병진이 어둠 탓에 얼굴을 찌푸리며 해경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대번에 안색이 달라졌다.
“당, 당신…….”
“재영 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겁니다.”
더듬거리는 병진의 말을 자르고 해경이 내뱉자 병진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해경을 올려다보았다. 해경이 집 안쪽의 현관을 가리켜 보이자 병진이 망설이다 해경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에 앉아 있던 숙자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더니 해경을 알아보자마자 곧 사색이 되었다. 며칠 사이에 더 수척해진 모양새였다. 해경은 병진과 숙자의 맞은편에 앉으며 바로 입을 열었다.
“재영 군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다 죽어가던 숙자가 그 말에 눈을 번쩍 뜨며 몸을 내밀었다. 아들 일이라니 사무실에서 해경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도 모조리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해경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숙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내일이면 재영 군을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도 있지요.”
“무슨 소리인지 똑바로 좀 이야기해 봐요!”
숙자가 절규하듯 소리를 질렀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숙자가 휘청하는 통에 깜짝 놀라며 달려와 숙자를 부축했다. 해경은 가정부가 얼른 물을 가져다 숙자에게 마시게 하는 것을 기다렸다. 물 한 잔을 숨도 쉬지 않고 마신 숙자가 해경을 재촉했다.
“어서, 어서 말해 봐요. 우리 재영이가 살아 있습니까?”
“네. 말씀드렸다시피 내일이면 돌아오게 해 드릴 수도 있고요.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
병진이 되물었다. 해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서한구 씨의 빚을 모두 갚아 주셔야겠습니다.”
서한구라는 이름을 듣기 무섭게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해경은 병진이 마른침을 삼키는 것을 눈치챘다. 입이 마르는 듯 가정부에게 물을 한 잔 더 가져오게 한 병진이 한참 말없이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서한구가 보낸 자요? 우리 재영이를 납치한 것도 그쪽인 거요?”
해경은 대답 대신 웃었다. 병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구에게 두 집안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들었을 때 해경은 이들이 보인 과민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자들이 그 기억을 모두 잊고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을 때쯤, 불현듯 과거의 그림자가 등 뒤를 덮쳐 온다면 누구라도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을 할 터였다. 한구의 이름조차도 저 먼 기억 속에 묻고 살아가던 이들이 해경을 만나고부터 얼마나 불안감에 시달려 왔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해경이 되물은 말에 두 사람은 모두 대답하지 못했다. 병진이 손을 저어 가정부를 물리고는 세 사람만 남은 거실에서 침묵을 지켰다. 해경은 두 사람을 보다 말했다.
“서한구 씨는 아드님의 실종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럼…….”
“오히려 아드님께서 서한구 씨의 따님이 실종된 사건과 관련이 있지요.”
“뭐라고?”
한구가 자기 귀를 의심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해경은 손끝으로 눈썹 부근을 두어 번 문지르며 가볍게 웃는 소리를 냈다. 해경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어릴 적 재영 군과 수연 양은 함께 어울려 자랐지요. 그런데 당시 두 분이 소작을 부치던 땅의 지주였던 수연 양의 조부는 그 모습을 보고 몹시 크게 화를 냈습니다. 감히 천한 것이 금쪽같은 손녀를 넘본다는 것이었지요. 우 사장님께서는 아들에게 수연 양에게 절대로 접근해서는 안 되고, 다시는 만나서도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일로 마음의 상처를 입어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지요. 사장님께서는 주인댁의 패물에 손을 댔습니다. 맞습니까?”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해경의 목소리에 병진과 숙자는 얼어붙어 손을 마주잡은 채였다. 숙자는 숫제 곧 실신할 것 같은 얼굴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병진이 그런 숙자의 손을 조금 더 꽉 움켜쥐더니 입술을 깨물고 한참이나 바닥을 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미 지난 일이오.”
“그렇지요. 이미 지난 일입니다. 한순간 홧김에 저지르신 일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어쨌든 사장님께서는 그 패물을 밑천으로 경성에 올라와 가경상회를 세우셨고, 두 아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습니다. 그리고 전 재산을 도둑맞은 서한구 씨는 가세가 몹시 기울어 딸을 고리대금업자에게 팔아넘겨야 할 판이 되었지요.”
해경의 이야기를 들은 병진이 벼락을 맞은 듯한 얼굴로 해경을 보았다. 그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병진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무엇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병진은 고개를 떨구며 긴 숨을 내쉬었다. 해경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재영 군과 수연 양은 어렸습니다. 신분이고 재산이고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겠지요. 두 사람은 언젠가부터 다시 연락을 하게 됐고, 재영 군은 수연 양이 아버지의 빚 때문에 원치도 않는 후처 자리에 팔려가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재영 군은 그저 자기에게 소중한 이를 돕고 싶었던 겁니다. 때문에 이런 실종극을 벌이게 된 거고요. 그러니 서한구 씨의 빚을 갚지 못하면 재영 군도 수연 양을 두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해경의 말에 병진이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해경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빚을 우리가 갚아 주어야 한다는 거요?”
“빚을 갚는다기보다는 죄를 갚는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텐데요.”
“법적으로도 이미 우리를 처벌할 수는 없소.”
병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소시효도 지났고 이미 증거도 사라진 지 오래지요. 법적으로는 당연히 처벌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두 분의 아드님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자랑스러운 부모님이 실은 남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절도범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걸 두 분께서 무슨 수로 견디시겠습니까?”
숙자가 그 말에 거의 우는 듯한 목소리로 해경에게 매달렸다.
“재, 재영이가, 재영이가 이 사실을 압니까?”
해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숙자가 병진을 붙들었다.
“여보, 여보, 이 사람 말대로 해요. 얼마든 우리가 갚아 주어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억만 금을 줘도 상관없어요. 차영이와 재영이가 알면 어찌 하실 거예요? 네? 그냥 주어 버려요, 원래 우리 것이 아니었다 생각하고 주어 버려요, 제발요!”
숙자가 통곡하기 시작했다. 병진은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우는 아내를 내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병진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일 날이 밝으면 동신금융의 송광만 사장에게 찾아가 서한구 씨의 빚을 모두 갚아 주시면 됩니다.”
“알겠소.”
병진의 대답에 해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향하는 해경의 등에 대고 병진이 물었다.
“그게 전부요?”
해경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뒤의 일은 재영 군과 직접 이야기해 보십시오.”
해경은 재영의 집을 나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해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사등의 빛이 밤을 물들여 희끗해진 어둠이 펼쳐진 채였다. 해경은 긴 숨을 들이쉬었다가 걸음을 옮겼다.
“미스터 정은 정말 돈방석 앉을 팔자는 아닌 모양이에요.”
소화가 가져온 차를 마시며 인혜가 해경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책상 앞에 앉아 안경을 쓴 채 무언가를 읽고 있던 해경은 안경 너머로 인혜를 흘끔 보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할 뿐이었다. 소화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이야기가 어찌 되었는지, 가경상회의 우병진 사장이 광만에게 찾아와 한구의 빚을 모조리 다 갚아 주는 바람에 닭 쫓던 개 꼴이 된 광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 그 놈이 서한구의 빚을 다 갚아 주었는지 모를 노릇이라며 펄펄 뛰던 광만은 기어이 해경의 사무실로 찾아와 주었던 착수금을 돌려달라고 했고, 해경은 두말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받았던 돈을 모두 돌려준 터였다.
“적당히 해결해 주었으면 의뢰비는 아쉽지 않게 받았을 터인데, 참…….”
인혜가 투덜거리는 말에 해경이 책에 눈을 둔 채 대답했다.
“한 번만 더 말씀하시면 열 번째입니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말하겠어요. 이래서야 소화 양 월급이나 제때 주기는 하는 겐지 원.”
인혜가 새침하게 대꾸하자 듣고 있던 소화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월급은 한 번도 밀리지 않고 매번 제 날짜에 주시는걸요.”
“들으셨지요?”
해경이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하는 말에 인혜가 해경 쪽을 향해 눈을 흘기고는 소파에 등을 묻었다.
“사람 팔자라는 것이 참 알 수 없지요. 가경상회 우 사장이 빚을 갚아 주었다는 그 사람이 본시 옛날에는 우 사장에게 소작을 주던 양반집 자제였다면서요? 이제는 형편이 바뀌어 우 사장이 그 사람을 상회에서 일도 하게 해 준다 하고……과거에 무어 재미있는 인연이 있었을까요?”
해경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소화는 인혜를 살짝 보고 배시시 웃기만 했다. 인혜가 소화의 표정을 보더니 무슨 사연이 있다는 것을 곧 눈치 챈 듯했으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소화가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열자 문 앞에 이주가 서 있다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이주는 사무실 안을 건너다보더니 머뭇거렸다.
“아, 손님이 계신 줄 모르고…….”
해경이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보았다가 이주에게 손짓을 했다.
“괜찮습니다. 이리 들어오세요.”
이주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서는 인혜를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인혜가 살짝 목례를 건네자, 해경이 이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에 제게 아주 큰 도움을 준 소년 탐정입니다.”
이주가 그 말에 얼굴을 붉혔다.
“그렇지 않아도 이주 군에게 줄 선물이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해경은 책상 옆에 노끈으로 묶어 둔 책 몇 권을 가리켰다. 이주가 가까이 다가와 그 책을 살펴보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탐정 소설 여러 권이었다. 해경이 말했다.
“이주 군이 아직 읽어 보지 않았을 만한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들면 좋겠군요.”
“네, 네에.”
이주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그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품에 안았다. 해경이 물었다.
“재영 군은 학교에 잘 나오고 있습니까?”
“네, 좀 오래 앓았다고 했습니다. 다들 그런가보다 하고 있고요.”
“잘 되었군요.”
해경의 대답에 이주가 아, 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제게 약혼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고보를 마치면 곧 혼인을 하겠다고…….”
소화는 놀란 얼굴로 입가를 가렸다. 상대는 묻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해경도 잠시 멈칫하더니 곧 웃어 보였다.
“축하한다고 전해 주겠습니까?”
“네, 그럼요.”
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경은 이주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주 군도 잠시 앉아 차 한 잔 할 정도의 시간은 있겠지요?”
해경은 다기를 놓아 둔 탁자로 가 다관에 물을 부었다. 화차(花茶)의 화사한 향이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목련의 향이었다. 해경은 우려낸 차를 잔에 따르며 말했다.
“새 신부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차로군요.”
소화는 눈을 감은 채 그 목련의 향을 들이마셔 보았다. 이주의 앞에 잔을 놓아 준 해경이 눈을 감고 있는 소화의 손에도 따뜻한 찻잔을 쥐어 주었다.
“소화 양에게도 잘 어울립니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소화는 깜짝 놀라 눈을 뜨고 해경 쪽을 보았으나, 해경은 이미 창가 앞에 선 채 등을 돌리고 있었다. 소화는 해경의 뒷모습을 보다가 어쩐지 귀 끝이 달아올라 고개를 숙인 채 찻잔 안을 내려다보았다. 금빛의 찻물이 찻잔 안에서 찰랑였다. 소화는 따뜻한 김에 섞여 올라오는 그 향을 다시 한 번 맡아 보았다. 소화 양에게도 잘 어울립니다. 해경의 목소리가 끝을 흐리는 목련의 향처럼 언뜻 머릿속을 맴돌다 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