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93
00085 여학교의 유령 =========================================================================
주말은 가족 면회 후에는 자유 시간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말이 자유 시간이지 식사 시간과 독서 시간은 항상 끼어 있었다. 소화는 저녁의 독서 시간을 마치고 씻은 뒤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책상 앞에 앉은 소화는 아직도 화끈거리는 듯한 얼굴을 꼭꼭 눌렀다.
해경이 올 시간에 맞추어 준비하고 나가려다 말고 문득 은용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가, 어쩐지 마음이 동해 명하가 준 입술연지를 꺼내 살짝 발라 보았던 터였다. 순식간에 빨갛게 물드는 입술이 신기해 거울을 이리 보고 저리 보았지만 해경이 그렇게 눈치 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해경이 무어라고 생각했을지 걱정이었다. 학교에서 멋만 부린다고 생각할 것도 걱정이었지만 해경에게 조금 잘 보이고 싶었던 마음도 없지 않았는데 그것을 간파당한 것 같아 창피했던 것이다. 향운정에만 가도 인혜는 물론이고 경성 최고 미인들이 다 모여 있는데 자기 같은 계집애가 예뻐 보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화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서랍을 살짝 열어 보았다. 입술연지 통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소화는 그 통을 서랍 깊숙이 밀어 넣고는 서랍을 닫으며 어제 다 하지 못한 수학 숙제를 펼쳤다. 덧셈과 뺄셈은 할 수 있었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그보다 어려워 영신의 도움을 받아 가며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세면을 했는지 소화보다 십 분쯤 늦게 들어온 은용과 명하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소화를 보고는 말을 걸었다.
“이애, 무엇 하니?”
가까이 다가온 은용이 소화가 펼쳐 놓은 공책을 보고는 곁에 앉았다.
“숙제하는구나?”
“네, 네에.”
“어디 보자.”
은용이 소화가 펼쳐 놓은 공책을 끌어다 들여다보고는 펜을 집어들었다.
“덧셈 뺄셈은 아주 잘하는데 다른 것은 잘 모르는가 보다. 집에서 안 가르쳐 주어서 그런가?”
“네, 배운 적이 없어서…….”
“그래도 덧셈 뺄셈만 잘 하면 되지. 아, 그러고 보니 그렇지 않아도 출납 담당이 나가 버려서 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소화 네가 좀 하렴. 어렵지 않아. 그냥 매달 초에 오는 돈을 꼼꼼히 적고 찾아갈 일이 있을 때마다 적어서 월말에 정산하면 되는 거야. 내가 가르쳐 줄게.”
속사포같이 나오는 은용의 말에 소화는 채 거절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은용은 어어 하고 있는 소화의 공책을 끌어 앞에 놓고는 펜을 든 채 소화가 풀지 못한 문제들을 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은용의 도움을 받아 숙제를 끝내는 데는 삼사십 분 정도가 걸렸다. 은용은 숙제를 마친 소화가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자 웃어 보였다.
“학교생활이 처음이면 쉽지는 않을 거야. 은근히 눈치 볼 일이 많으니까. 그나저나 네 이야기 한 번 해 보렴. 넌 이야기가 통 없더라.”
“네에?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걸요. 여태 집에서만 있었고요.”
속으로 깜짝 놀란 소화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침대에 걸터앉은 명하가 끼어들었다.
“네 이야기가 싫으면 너희 오빠 이야기라도 해 봐.”
“그래. 아까 보았는데 몹시 근사하더라. 아이들이 다 너희 오빠 이야기밖에 안 하던걸.”
은용이 명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명하가 해경의 이야기를 꺼낸 탓에 아까 일이 다시 생각나 얼굴이 화닥거렸다. 소화가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자 은용이 깔깔거리며 명하를 가리켰다.
“명하는 너희 오빠가 보고 싶어서 일부러 따라갔다가 부딪치기까지 했는걸.”
“너 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 놓고서!”
명하는 얼굴을 붉히며 은용에게 팩 소리를 질렀다. 은용이 무어 어때,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명하가 저 계집애가, 하고 내뱉으며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은용에게 팩 집어던지고는 방을 나갔다. 소화가 눈치를 보자 은용이 깔깔거리며 명하가 나간 문 밖을 가리켰다.
“처음 오던 날부터 다들 너희 오빠 이야기만 하니 저 계집애가 구경이나 한번 해 보겠다고 콧대 높게 굴더라고. 그러더니 아까는 교무실에서 나오는 걸 보고 일부러 부딪혔다지 않아? 여우 같은 계집애, 아무튼 얌전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소화는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해경에 대해 다른 소녀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는 일이기는 했다. 강당에 있을 때도 계속해서 흘끔거리는 시선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해경과 함께 다닐 때마다 그런 시선을 받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누군가가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어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은용이 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소화를 물끄러미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오빠를 보니 양복도 아주 고급이고 차에 기사까지 딸려 있던데 네게는 그만치 신경을 아니 쓰는 모양이구나. 지난번에 보니 교복도 큰 것을 입혔던데.”
“아, 아니어요. 오빠는 평소에 사치를 싫어해서요. 좋은 것을 사서 오래 아껴 입는 편이에요. 저도 물건 보는 눈이 잘 없어서 백화점 같은 데 가는 건 내키지 않아요. 교복은 키가 더 자랄지도 모른다고 해서 일부러 크게 맞춘 것이고요.”
소화는 내심 화들짝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추며 변명처럼 대답했다. 은용과 그리 자주 대화를 나누거나 마주치는 편이 아닌데도 눈썰미가 몹시 좋은 편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자신에게 그만큼 관심을 두고 있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위장 학생인 소화에게는 썩 좋은 건 아니었다. 은용이 혹여 자신의 신분을 눈치 채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번뜩 지나쳐 속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소화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손바닥을 말아 쥐었다. 은용이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소화를 빤히 보았다.
“너는 참 재미있어. 여기에 올 것 같은 애가 아니란 말이야.”
“네?”
“너 기독교 신자도 아니지? 왜 하필이면 이 학교에 온 거야? 이화라든가 숙명이라든가 배화라든가, 고보가 많은데 생긴 지도 오래되지 않은 학교에 온 까닭이 무얼까 궁금해서 그래.”
소화가 머릿속으로 막 대답할 말을 찾고 있는데 때마침 취침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희락당의 당장을 맡고 있는 은용은 매일 취침 시간이 되면 각 방을 돌아다니며 빈자리가 없는지 점호를 해야 했다. 은용이 종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소화를 가만히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소화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참고 있던 숨을 훅 내뱉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탐정 흉내를 내는 건 자신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소화는 서둘러 자기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고 문가에 등을 돌린 채 누웠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등 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은용이 이 방에 오는 것은 다른 방의 점호가 다 끝난 뒤였기에 아마 나갔던 명하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이불 펴는 소리와 철제 침대의 다리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시간 더 부산스레 굴던 명하가 자리에 누운 듯했다. 짧은 정적이 지나고 명하가 입을 열었다.
“이애, 자니?”
“아니오, 아직이요.”
소화는 등을 돌린 채 약간 경계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명하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까 은용이가 뭐라고 하든? 그 애가 뭐라고 했든 신경 쓰지 마. 그 애는 종종 그렇게 남 놀리는 것을 좋아해서 그래.”
소화는 명하가 해경을 보려고 따라갔다가 일부러 부딪혔다는 은용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지만, 사실이어도 무어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었기에 평소에 그리 새침하고 말이 별로 없는 명하가 저렇게까지 저어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동시에 해경이 화장을 했느냐고 물어보았던 일이 떠올라 얼굴이 다시 화끈거렸다. 명하에게도 그 일이 이렇게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라면 명하의 태도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소화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하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시 후 은용이 돌아왔는지 방의 불을 끄고 은용이 침대로 들어가는 기척이 났다.
소화는 이불에서 눈만 내놓은 채 숨을 죽였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 그런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일요일에는 평소보다 기상 시간이 한 시간 늦었지만, 그렇다 해도 잠을 자지 않으면 몹시 피곤할 것이 틀림없어 억지로 눈을 붙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뜬눈으로 뒤척이던 소화는 고요한 방 안에 귀를 기울였다. 은용과 명하는 이미 잠들었는지 깊은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바로 누운 소화는 눈을 감고는 애써 잠을 청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화가 막 선잠이 들었을 무렵이었다. 이불 아래로 발이 나와 있었는지 발끝으로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이제 갓 잠이 든 터라 몸이 무거웠다. 소화는 발로 이불을 조금 당겨 덮었다. 그러나 그 서늘한 기운은 곧 이불 위로 드러난 뺨과 양 손등 위로도 내려앉았다. 창이 열린 것일까 생각하던 소화는 다시 뒤척이며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명하의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소화는 잠이 덜 깨어 멍한 눈꺼풀을 애써 깜빡이며 어둠 속에서 형체를 드러내는 침대를 가만히 보았다. 그리고는 곧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명하의 침대가 비어 있었던 것이다.
소화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은용은 세상모르게 잠든 채였다.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잠시 변소에라도 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려 했으나 어쩐지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소화는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기의 정체는 반쯤 열려 있는 문이었다. 소화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맨발로 열린 문틈을 빠져나갔다. 복도의 창으로 달빛이 스며들어 창틀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소화는 발이 시린 것도 잊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 층에는 명하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문이 닫힌 다른 방 앞을 천천히 지나친 소화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어두운 계단을 한 발씩 디딜 때마다 작게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소화는 누가 듣지는 않을까 걸음마다 숨을 죽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역시 닫힌 방문이 일렬로 늘어선 채였다. 소화는 최대한 벽에 바짝 붙어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복도 끝의 기숙사 뒤쪽으로 통하는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입이 말랐다. 소화가 그 문을 열기 위해 막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서늘한 손이 소화의 어깨를 짚었다. 죽을 만큼 놀란 소화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을 꽉 감고 있던 소화의 머리 위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한밤중에 여기서 무얼 하는 거니?”
소화는 숨도 쉬지 못하고 있다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달빛이 역광으로 비쳐 그 얼굴이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림자 속에 녹아든 얼굴이 세명임을 확인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소화는 일어나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세명이 손을 뻗어 소화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취침 시간에는 함부로 방 밖에 나오면 아니 된다고 들었을 텐데.”
“벼, 변소에 가려 했는데 길을 잃었어요.”
소화는 더듬거리며 변명을 했다. 세명이 잠깐 소화를 마주보다 반대편 복도를 가리켰다.
“변소는 이쪽 끝으로 나가렴.”
“네.”
고개를 주억거린 소화는 간신히 발을 옮겼다. 크게 놀란 탓인지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소화가 서너 걸음 걸어갔을 때 문득 뒤에서 세명이 소화를 불러세웠다.
“이애, 잠깐만.”
소화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세명이 뒤에서 다가오더니 소화의 맞은편에 서며 발치를 가리켰다.
“발이 몹시 시릴 텐데 왜 맨발로 나왔지?”
소화가 핑계를 채 생각하기도 전 세명은 자신이 신고 있던 신을 벗어 주었다. 깜짝 놀란 소화가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자 세명은 몸을 숙여 소화의 발에 직접 신을 신겼다. 소화의 발을 만져 본 세명이 미간을 찡그렸다.
“발이 얼음장 같구나. 변소는 맨바닥이라 신을 신어야 갈 수 있어. 어서 갔다오고 신은 내일 돌려주렴.”
“네, 네에.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화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자 세명이 어서 가라는 손짓을 했다. 소화는 얼결에 복도 끝으로 와 변소로 들어섰다. 혹시나 명하가 여기에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변소에도 아무도 없었다. 소화는 받아 놓은 물로 손만 서둘러 씻고는 한참을 변소 안에서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소화는 조심스럽게 문을 조금 열어 문틈으로 복도 쪽을 보았다. 세명은 그새 돌아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소화는 세명이 다시 나타나기 전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이미 잠은 모두 깬 채였다.
소화는 몸을 작게 웅크린 채 이불을 덮어쓰고 온 신경을 문 밖에 기울였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조용한 방을 울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소리 없이 닫혔다. 명하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잠시 부스럭대던 명하는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소화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명하 쪽을 보았다. 대체 이 밤에 어디를 나갔다 돌아온 것일까.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화는 조심스럽게 명하의 침대 옆으로 가 잠든 명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처음부터 몹시 평온하게 잠들어 있다고 생각할 법한 얼굴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못박혀 명하를 보고 있던 소화는 침대로 돌아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소화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기상 종소리에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 은용이 이미 일어나 있는 소화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했다.
“이애, 너 얼굴이 왜 그러니?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온 은용이 소화의 이마를 짚어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열이 조금 있는 것도 같은걸. 의무실에 내려가서 선생님에게 아스피린이나 피라미돈을 좀 달라고 해서 먹으렴.”
“네.”
소화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한밤중에 맨발로 돌아다녔더니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식사는 할 수 있겠어?”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 밥맛이 있을 리 만무했다. 소화가 눈치를 보자 은용이 알겠다는 표정으로 더 자라는 손짓을 했다.
“날이 추워지니 감기 환자가 많아. 심해지면 공연히 다른 동무들에게 옮기니 어서 약 타 먹고 쉬렴.”
부드럽게 말한 은용은 아직 잠들어 있는 명하를 깨웠다. 아무래도 한밤중에 자리를 비웠다 돌아와 다시 잠든 탓인지 명하는 잠을 잘 깨지 못했다. 은용은 익숙한 일인 듯 대수롭지 않게 잠투정을 하는 명하를 몇 번 더 깨워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는 함께 세면을 하러 내려갔다. 텅 빈 방 안에 혼자 남겨진 소화는 침대에 누운 채 두 사람이 나간 문을 보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어젯밤 명하는 도대체 어디를 나갔다 온 것일까. 밤을 새어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점점 머릿속과 눈꺼풀이 묵직해져 비몽사몽하며 반쯤 잠이 든 상태로 멍하니 누워 있던 소화는 곧 명하와 은용이 돌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은용이 말하는 소리가 머릿속을 한 번 걸러져 둔탁하게 들어왔다.
“무서워서 어찌 하니? 어제도 나타났다는데…….”
“조용히 해. 저 애가 듣겠어.”
명하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은용이 잠깐 사이를 두더니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보니 고뿔이 들었는지 열이 나고 몸이 좋지 않아 보이더라고. 잠이 든 것 같아.”
“아무튼 말이야. 이번에도 확실히 보았대?”
“그렇다잖아. 바로 옆방이라는데……너 어젯밤에 아무 것도 못 보았니?”
“피곤해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이 잤어.”
명하의 대답에 소화는 가물가물해져 가던 정신줄을 번뜩 붙들었다. 은용이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명하에게 물었다.
“그 일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거지?”
“말만 안 했다면 누가 알겠어.”
둘의 대화에 바짝 집중하고 있던 소화는 무심코 이불자락을 조금 잡아당겼다. 부스럭 소리가 나자 두 사람이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흘렀다. 아마 소화가 정말 잠들었는지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소화는 잠든 척을 하며 뒤척이다 돌아누웠다. 명하가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잠든 것 맞겠지?”
“그런 것 같은데. 어서 나가자.”
은용이 명하를 재촉했다. 두 사람이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화는 이불자락을 꼭 움켜쥔 채 멍한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려 노력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떠올렸다. ‘어제도 나타났다’는 건 무엇일까. 옆방에 나타났다고 했고 은용이 무섭다는 표현을 쓴 것을 보아 분명히 그 문제의 유령 이야기임에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유령의 존재를 자신에게 숨기려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신입생이기 때문일 터였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아이에게 굳이 유령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아니면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명하는 어젯밤 분명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놓고 은용에게는 태연하게 깊이 잤다며 거짓말을 했다. 소화의 머릿속으로 번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명하가 유령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유령이 옆방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명하가 어젯밤의 행적을 잡아떼는 것도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왜 명하가 세란의 유령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소화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또 있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였다. 아무도 모르는 ‘그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말만 안 했다면 누가 알겠어. 명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뇌리에 되살아났다. 어쩐지 좋지 않은 기분이 되었다. 몸이 으슬거리며 발끝에서부터 떨려 왔다. 그 오한이 추위 탓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소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