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95
00086 여학교의 유령 =========================================================================
해경은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고풍스러운 한옥 건물로 최소한 백여 년은 족히 되었을 듯한 집이었다. 지금의 사정은 어떤지야 모르겠으나 상당한 부잣집이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崔擇滿(최택만)이라고 쓰인 문패를 다시 한 번 본 해경은 대문을 두드렸다. 서너 번쯤 문을 두드리자 누군가 안에서 달려 나와 문을 열었다. 머릿수건을 뒤집어 쓴 중년의 부인이었다. 급히 온 것인지 손에는 아직 빗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뉘십니까?”
부인이 해경을 쳐다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하더니 해경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해경은 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부인에게 내밀었다. 부인이 명함을 받아들어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고, 나는 까막눈이라 줘도 못 읽어요. 무슨 일로 오셨소?”
“아, 그러시군요. 혹시 이 댁에 최애리 양이 계십니까?”
“작은 아가씨는 무슨 일로?”
애리의 이름을 대자마자 부인이 삽시간에 경계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행히 아직 이사를 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해경은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애리 양이 미리암여학교에 다닌 적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리암여학교에서 발생한 일로 여쭤보고 싶은 것이…….”
“뭐요? 썩 가요, 썩 가! 큰일 날 총각이네, 아주. 어서 썩 가지 못해요?”
해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 부인이 빗자루를 휘둘렀다. 놀란 해경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부인이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빨리 가라는 표시를 했다.
“작은 아가씨는 학교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한단 말이오! 몇 달을 요양하셔서 이제 겨우 진정을 하셨는데! 그 학교 일이라면 머리카락 끝만큼도 관련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어서 가요, 누가 보기 전에 어서 가!”
“잠깐 이야기만 할 수 없겠습니까?”
“아 거 멀쩡하게 생긴 총각이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들어?”
대문 앞에서 잠시 실랑이가 벌어지자 누군가가 대청마루로 나와 부인을 불렀다.
“안양댁, 무슨 일이에요?”
안양댁이라고 불린 부인이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양장을 한 중년의 여자가 마루에 선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십 대 초중반쯤 되었을까, 나이가 보이기는 했으나 귀티가 흐르는 얼굴에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는 여자였다. 안양댁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모님. 웬 총각이 집을 잘못 찾아서요.”
“그래요?”
“최애리 양을 만나러 왔습니다.”
안양댁이 뭐라고 말하기 전 해경은 선수를 쳤다. 그 말에 여자가 의아한 표정을 하며 해경을 빤히 보았다. 안양댁이 사색이 되어 해경을 떠밀었다.
“이 사람이 정말!”
“잠시만요. 우리 애리를 만나러 왔다고요? 왜요? 어디서 온 누구십니까?”
여자가 마루 아래로 내려서며 물었다. 안양댁이 쪼르르 달려가 해경이 주었던 명함을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명함을 받아들어 눈으로 훑더니 해경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탐정사무소에서 무슨 일로?”
“미리암여학교에서 발생한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애리 양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실례인 줄 알면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미리암여학교의 이름을 들은 여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사건이기에 여기까지 찾아왔지요? 우리 애는 더 이상 그 학교와는 연관이 없어요.”
“애리 양이 심적으로 고통을 받은 것은 알고 있습니다. 강요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한 소녀가 죽었고, 그 죽음이 억울한 것인지 아닌지를 밝히고 싶은 것뿐입니다. 만약 내 자식이 죽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왜 죽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해경의 말에 여자가 잠시 해경의 명함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안양댁이 옆에서 초조한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한참이나 서 있던 여자가 해경에게 말했다.
“애리에게 한 번 말이나 꺼내 보지요. 크게 기대는 말아요.”
여자가 몸을 돌려 안채로 들어갔다. 기다리는 동안 안양댁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해경을 보며 공연히 빗자루 끝으로 해경을 쿡쿡 찔렀다. 해경은 웃는 낯으로 그럴 때마다 자리를 살짝 피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애리가 학교를 그만둔 것도 이해가 갔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심하게 받았던 모양이었다. 이삼십 분쯤 지나 안채에서 나온 여자가 해경에게 안쪽 방을 가리켰다.
“우리 애가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군요.”
“감사합니다.”
여자는 대답 대신 해경을 방으로 안내했다. 해경은 여자가 안내한 방에 들어섰다. 제법 가격이 나갈 법한 가구들로 꾸며진 방이었다. 한낮이라고는 해도 창에 커튼을 쳐 놓은 탓에 방 안은 어둑했다. 창가 앞에 놓인 의자에 한 소녀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소녀를 불렀다.
“애리야.”
애리라고 불린 소녀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수척하고 창백한 얼굴이었다. 어둠도 빛도 아닌 모호한 경계 속에서 묶지도 않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소녀에게는 귀기(鬼氣)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해경은 문가에 몇 걸음 떨어져 선 채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니,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요.”
애리가 금방이라도 꺼져 들어갈 것 같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가 잠시 망설이는 얼굴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외간 남자와 단 둘이 방 안에 두기가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 앞에 있으마.”
여자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해경은 문가에 선 채 애리를 마주보았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애리였다.
“미리암여학교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고요.”
“네.”
“세란이에 관한 일인가요?”
해경은 애리의 입에서 나온 세란의 이름에 멈칫했다. 애리가 먼저 그 이름을 꺼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애리는 해경의 표정을 보더니 해경이 무언가 대답을 하기도 전 손을 뻗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약통을 열었다. 독일제 아스피린이었다. 알약 두어 개를 꺼낸 애리는 물도 없이 입 안에 알약을 털어 넣고는 천천히 씹어 삼키며 말했다.
“죄송해요. 세란이 생각을 하면 두통이 심해져서요.”
해경은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리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해경은 무릎 위에 놓인 애리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이미 일 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다시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긴 숨을 내쉰 애리가 눈을 들어 해경을 마주보았다.
“무어 궁금하신 일이 있어 여기까지 찾아오셨죠?”
“김세란 양이 자살한 것이 확실합니까?”
해경의 물음에 애리는 떨리는 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몸을 약간 움츠렸다. 오한이 나는 듯했다. 허공으로 시선을 던진 애리가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애가 목을 맨 것을 눈앞에서 보았어요.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그 날 일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어렵다면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어려울 것은 없지요. 아직도 매일 밤마다 그 날 생각을 하는걸요.”
애리가 웃었다. 서리로 만든 것 같은 웃음이었다. 손을 대면 그대로 스러져 버릴 듯한. 생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걷혔다. 애리가 머릿속을 더듬는 듯 느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흐린 날이었어요. 달이 잘 보이지 않았거든요. 자다가 문득 누가 창을 열어 두었는지 추워서 깼어요. 창이 조금 열려 있기에 다시 닫고 자려 하는데 세란이가 자리에 없는 걸 알았지요. 평소였다면 변소에 갔겠거니 하고 말았겠지만 그날따라 유독 기분이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같은 방을 쓰던 아이들을 깨워 세란이를 보지 못했냐고 물었어요. 둘 다 못 봤다고 하기에 희숙이라는 아이와 함께 세란이를 찾아 나섰지요. 뒷문 쪽에 동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데 문을 열었더니 아직 아무도 안 밟은 눈밭에 발자국이 나 있지 뭐예요. 어쩐지 불길해서 그 발자국을 따라갔어요. 그랬더니 공터 고목에…….”
“이미 죽어 있었습니까?”
“그 때 세란이가 죽어 있었는지 아닌지는 몰라요. 우리는 가까이 가지도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저와 희숙이가 보았을 때는 이미 거기에 목을 맨 뒤였어요.”
애리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호했다. 그 날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해경은 팔짱을 낀 채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왜 자살했는지 아십니까?”
그 말에 애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해경은 애리의 표정을 가만히 보았다. 해경은 그런 얼굴을 하는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죄책감, 혹은 부채감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법한 어떤 감정들이 그 안에 존재했다. 애리는 매우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해경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야기하기 어려운 이유입니까?”
애리가 눈썹을 찡그렸다. 입술을 두어 번 물었다 놓은 애리는 고개를 숙였다. 어두운 바닥 위 그림자 어딘가를 응시하던 애리는 손끝을 만지작거리다 긴 한숨을 쉬었다.
“세란이는 죽기 전까지 매우 고통을 받고 있었어요.”
“왜지요?”
“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세란이를 따돌렸으니까요.”
세란이 학생들 사이에서 겉돌았다고 하던 정숙의 말이 떠올랐다. 해경은 애리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애리는 조금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금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건, 그건……그러니까, 세란이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에요. 모두가 그 애를 좋아했어요. 세란이는 공부도 몹시 잘 했고 얼굴도 고왔고, 또 하급생들도 잘 가르쳐 주었어요. 그런 동무는 세상에 없을 거라고 다들 무척 자랑스러워했지요. 성정이 아주 바른 아이라 많은 돈이 오고가는 일에 제격이라고 기숙사의 출납 일도 맡아서 했어요.”
소화가 자신에게 주었던 출납부가 바로 세란이 쓰던 것인 모양이었다. 애리는 바싹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출납을 하다가 문제가 생겼어요. 그때 같은 방을 쓰던 서은용이라는 아이와 크게 다툼이 있었거든요.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아니, 무어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운영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아무튼 제가 있을 당시에는 집에서 용돈을 부쳐 주면 출납 담당이 그것을 모두 받아 가지고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장부에 적고 주는 식이었어요. 대체로 다들 씀씀이가 크다 보니 학교에서 검소하게 지내도록 권장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용돈을 지나치게 자주 타 가거나 많이 가져가면 주의를 받곤 했어요. 아무튼 그러던 중에 은용이가 집에서 온 용돈 육십 원 중에 일부를 타 가려고 세란이에게 말을 했더니 장부에는 이미 돈을 모두 타 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삼십 원씩 두 번을요. 은용이는 받아 간 일이 없다고 하고 세란이는 장부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하니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있나요? 더구나 그렇게 큰돈인데요.”
“그 내막은 어찌 된 거였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애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단 장부에 은용이가 돈을 찾아 간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 무어라 할 수는 없었지요. 은용이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만 어쩌겠어요. 그런데 세란이가 쓰던 옷장에서 그 돈이 나온 거예요. 은용이 부모님이 하시는 상회에서 수금이 될 때마다 돈에 도장을 찍는다는데, 그 도장이 찍힌 돈 사십 원이 나온 거지요. 누가 보아도 은용이 돈이었고요. 당연히 은용이는 출납 담당인 세란이가 그걸 이용해 자기 돈을 훔쳤다고 펄펄 뛰었고, 세란이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돈이 나온 이상……은용이가 도둑년과는 한 방을 쓸 수 없다고 방을 바꾸라 해서 세란이가 제가 있던 방으로 오게 된 거예요.”
“그래서 따돌림을 당하게 된 겁니까?”
“때마침 세란이 씀씀이가 조금 커졌었어요. 듣기로 하급생들에게 간식을 사 먹이거나 하는 일이 많았다고요. 본래 워낙 검소한 아이라 기숙사 살림도 아끼고 아껴 잘 했는데 훔친 돈으로 그리 써 댔느냐 소리가 나온 거지요. 세란이는 아니라 했지만 다들 의심을 했고 눈이 곱지는 않았어요. 저도 남들 보는 곳에서는 세란이에게 말을 잘 걸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 세란이도 점점 지치고 괴로워하는 것 같았어요. 방에서 혼자 여러 번 울기도 했고…….”
애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새삼 결국 세란이 괴로워하다 죽도록 방치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애리는 말을 멈추며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그러쥐었다. 해경은 애리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폐쇄적인 여학교 기숙사에서 벌어진 금전 문제라면 확실히 작은 일은 아니었을 터였다.
“이전에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해경이 묻자 애리가 꽉 막힌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네. 세란이는 셈이 아주 밝은 아이였어요. 계산을 틀리거나 하는 일도 절대로 없었고요. 처음에는 모두가 세란이가 그럴 리 없다 했지요. 그런데 은용이도 경우가 밝고 셈이 좋은 아이라 누구의 말이 진짜인지 모르게 되어 버렸던 거지요. 하지만 세란이가 은용이의 돈을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제일 처음 그 돈을 발견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고명하라고 그 둘과 같은 방을 쓰던 아이예요. 은용이와 친해서 은용이가 받는 돈에 매번 도장이 찍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요. 명하가 세란이와 한 옷장을 썼는데 우연히 거기서 보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세란이에게 그 일을 따지고 들었었어요.”
애리가 끝내 눈물을 찍어 내며 대답했다. 서은용과 고명하 둘 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해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은용과 명하는 지금 소화와 한 방을 쓰고 있는 상급생이었다. 두 사람은 현재로서 세란의 죽음과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이기도 했다. 해경은 머릿속에 두 사람의 이름을 단단히 새겨 놓았다.
“그건 그렇고, 유령 이야기를 좀 듣고 싶군요.”
해경이 말을 돌리자 애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모양이었다.
“불을 좀 켜 주시겠어요?”
애리의 부탁에 해경은 벽에 붙은 스위치를 눌러 등을 켰다. 방 안이 환해지자 애리는 어깨를 웅크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아무에게도 이건 말한 적이 없어요.”
애리의 목소리가 숨소리처럼 작아졌다.
“그걸 처음 본 건 세란이가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어요. 한밤중에, 꼭 그날처럼 자다가 찬바람이 들어와 잠이 깼지요. 창을 닫으려고 일어나다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발치에 서 있는 거예요. 세란이가요. 죽을 때 입고 있었던 잠옷을 입고…….”
한층 더 창백해진 애리가 손짓으로 치맛단 흉내를 냈다.
“이렇게 치렁치렁한 하얀 옷이었는데 그걸 입고 서 있었어요. 저를 보더군요.”
“무슨 말을 했습니까?”
애리는 조금 빨라진 말투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무 말도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보기만 했어요. 아주 오랫동안이요. 얼마나 그렇게 봤는지 모르겠어요. 정신을 차리니 기절했었는지 날이 밝았더군요. 헛것을 본 게지, 그리 생각하려 했는데 그러고 며칠 지나 희숙이가 한밤중에 울면서 저를 깨우는 거예요. 세란이를 보았다고요. 자다가 변소에 가려 문을 나섰는데 복도에 세란이가 서 있었다는 거예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냥 보기만 했다는군요. 똑같이요.”
“세란 양의 유령을 본 학생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애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해경을 마주보았다.
“보지 못한 아이들은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세란이는 억울해서 나타났을 테니까요. 나는 도둑이 아니라고 증명하려 자살했을 거예요. 그러니 자기를 도둑이라고 생각한 아이들 모두에게 나타났을 게 틀림없어요. 학교의 모두가 세란이를 따돌렸으니까요.”
“애리 양도 세란 양을 도둑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 말에 애리가 힘없이 웃었다.
“그렇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모두의 사랑을 받던 소녀가 하루아침에 도둑으로 몰려 모두에게 미움을 받고 결국 자살에 이르렀다. 세란이는 억울해서 나타났을 거라는 애리의 말에 해경은 옛날이야기 속의 귀신들을 떠올렸다. 귀신이 산 자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풀지 못한 한이 있어서라고 했던가. 만약 그 유령이 정말 세란이라면 애리의 말대로 자신을 의심했던 모든 아이들에게 결백을 주장하려 나타나는 것일까. 애리가 떨리는 손을 맞잡고는 해경에게 말했다.
“무슨 사건을 조사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세란이가 누명을 쓴 것이라면 꼭 밝혀 주세요.”
해경은 말없이 애리를 응시했다. 애리의 눈가에는 어느새 다시 눈물이 고인 채였다.
“……그리고 제가 세란이에게 미안했다고도 꼭 좀 전해 주세요.”
해경은 미리암여학교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라던 애리가 자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한 까닭은 이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서를 받고 싶은 것이다. 그저 방관자였던 자신에 대해. 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가장 먼저 할 것은 문제의 사건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