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97
00087 여학교의 유령 =========================================================================
소화는 저녁 내내 침대에 누운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척이는 중이었다. 몸이 몹시 피곤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의심을 받을까 봐 낮에 의무실에서 아스피린 한 알을 타다 먹었는데, 빈속에 약을 먹은 탓인지 약간 기분 나쁜 현기증이 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계속해서 명하가 한 말이 무슨 뜻이었을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명하와 은용은 아까 나간 뒤 계속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때 바깥에서 문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헛것을 들은 건가 싶어 눈을 깜빡이던 소화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허청거리는 몸을 끌고 문을 연 소화가 마주친 것은 영신이었다. 영신은 뒷짐을 진 채 서 있다가 문이 열리자 방 안으로 쑥 들어와 문을 닫았다.
“너 아프다며? 아까 은용 언니가 그러던데.”
영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은용에게 듣고 걱정이 되어 와 본 모양이었다.
“으응. 감기 기운이 조금…….”
소화가 둘러대자 영신이 뒷짐 지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소화는 얼결에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영신이 내민 손에는 종이봉투가 하나 들려 있었다. 소화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영신이 그 봉투를 소화의 손에 쥐어 주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소곤거렸다.
“혼자 몰래 먹어.”
“이게 무언데?”
“아까 명치정 양과자점까지 일부러 나가서 사 온 거야. 눈이 와서 길이 영 엉망이다, 이애.”
영신이 배시시 웃었다. 소화는 봉투를 열어 보았다. 봉투 안에는 처음 보는 과자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봉투를 열자마자 풍기는 단 냄새에 소화는 봉투에 코를 박고 킁킁거려 보았다. 생전 처음 맡아 보는 향기였다. 한과나 약식의 단 냄새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영신이 소화에게 어서 먹어 보라는 손짓을 했다. 소화는 조심스럽게 봉투 안의 것을 하나 꺼내 입에 넣고 씹어 보았다. 이가 닿자마자 파삭거리며 부서지는 감촉에 깜짝 놀란 소화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삽시간에 입 안에서 녹아내린 과자 안에 무언가 달콤한 것이 들어 있었다. 혀 위로 스미는 낯선 달콤함에 소화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눈을 굴리자, 그 표정을 본 영신이 깔깔거렸다.
“넌 어디 고택(古宅) 열두 대문 안에서 한 발도 안 나오고 산 애 같다, 이애. 이거 웨퍼스(wafers: 웨이퍼 과자, 웨하스)라는 거야.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니?”
“으, 으응.”
“더 먹어 봐. 밀가루에 우유하고 버터를 넣어 만든 양과자야.”
버터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소화는 우선 알아듣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영신이 손짓으로 과자를 권하며 비어 있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소화는 봉투 속에 손을 집어넣어 웨퍼스를 하나씩 꺼내 먹으며 영신에게 물었다.
“내가 아프다고 해서 왔니?”
“걱정이 되어 와 보았지. 동무들도 다 나가서 몹시 심심하기도 하고.”
“그렇구나. 고마워.”
소화의 말에 영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침대 위에서 발을 달랑거리며 앉아 있던 영신이 열심히 웨퍼스를 집어 먹는 소화를 마주보다 막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딱 쳤다.
“그러고 보니 너는 한밤중에 아무 일도 없었니?”
“무슨 일?”
입가에 묻은 웨퍼스 가루를 손수건으로 훔친 소화가 되묻자 영신이 흐음,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소화는 넌지시 영신의 눈치를 살피며 물음을 던졌다.
“혹시 그 유령인지 무언지 하는 것 말하는 거야?”
“너도 봤니?”
유령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영신이 눈을 반짝이며 엉덩이만 움직여 조금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소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는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몰라. 아까 다른 동무들이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들어서……너도 보았다며?”
영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공연히 오싹한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목소리를 낮춘 영신이 속삭였다.
“내가 뒷동산 고목을 오래 보면 귀신 들린다 했지? 작년에 그 고목에서 목을 매어 죽은 언니의 귀신이란 말이야. 김세란이라고,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모두 알아. 귀신을 본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란다.”
“목을 매어 죽었다고? 왜?”
소화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는지 영신이 황급히 소화의 입을 막으며 쉿, 쉿, 하고 입단속을 했다. 소화가 입을 다물자 영신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의 돈을 훔쳤다가 들켰거든. 창피해서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던가 봐.”
“너도 그 언니를 잘 알았니?”
소화가 물은 말에 영신이 안타깝다는 투로 대답했다.
“나는 그 언니에게 공부도 많이 배웠어서 가까웠는데 참 안되었어. 나는 내지(內地)에 오래 있다 와서 조선말을 하기는 해도 쓸 줄은 몰랐는데 그 언니가 조선말 쓰는 것을 가르쳐 주었거든. 남의 돈을 훔칠 사람 같지도 않았는데 그리 죽을 줄은 누가 알았겠니?”
“그래?”
소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양 되물었으나 속으로는 가슴이 덜컹했다. 세란이 남의 돈을 훔쳤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었다. 돈을 훔친 것이 발각되어 자살했다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유령으로 나타나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소화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것으로 생각했는지, 영신이 잠시 바깥에 누가 오지 않는지 귀를 기울이더니 소곤거렸다.
“세란 언니가 은용 언니의 돈을 훔쳤단 말이야. 명하 언니가 그걸 알고 남들에게 소문을 냈고. 내가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해 줄까? 지금 이 방이 세란 언니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있었던 방이야. 은용 언니도 명하 언니도 다 그 귀신을 보았다고. 나도 그렇지만 그 둘도 어찌나 강심장인지 몰라.”
소화는 책상 서랍 속에 들어 있던 출납부를 떠올렸다. 세란이 죽기 전까지 썼던 출납부가 하필이면 그 서랍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은 우연일까. 등줄기로 소름이 오싹 끼쳤다. 소화의 낯빛이 달라진 것을 안 영신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겁을 주려던 건 아니야. 그저 그런 일이 있으니 너무 놀라지 말라고. 해를 끼치거나 하지는 않거든. 그냥 보기만 하는 게 다야. 말도 걸지 않고. 죽어서도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가 생각하면 불쌍하기도 하고……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어찌 그런 일을 했는지 참 이상하지.”
“그렇구나.”
소화는 겨우 태연한 척 대답했다. 웨퍼스 봉지로는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다. 영신은 소화가 겁에 질렸다고 생각했는지 앉아 있던 침대에서 내려오며 미안한 투로 말했다.
“공연한 이야기를 했나 봐. 어쩌지?”
“아니야, 괜찮아. 나는 이런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해.”
“얼굴은 잔뜩 겁에 질려 놓고선?”
“정말로 괜찮아.”
소화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진짜 무서운 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충분히 체득한 탓이었다. 소화는 잠시 앉은 채 아직 멍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를 썼다. 세란의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은용과 명하였다는 것은 새로운 소득이었다. 세란이 은용의 돈을 훔쳤다……출납부의 내역으로 보았을 때 은용은 분명 매달 상당히 많은 돈을 받고 있었고, 그 많은 돈을 거의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쓰는 편이었다. 그처럼 돈이 많고 씀씀이가 크다면 당연히 표적이 되기는 쉬울 터였다. 하지만 세란이 왜 그 돈을 훔쳤을까. 입구를 알 수 없는 미로처럼 계속해서 벽에 가로막히는 것 같았다. 멍하니 앉은 소화의 얼굴을 살핀 영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니?”
“아, 아니야.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아무튼 참 재미있구나, 유령이라니.”
“이애,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 내가 일부러 겁을 주려고 그런 건 정말 아니다? 그나저나 은용 언니가 뭐라고 하지 않던?”
“은용 언니가?”
되물은 소화는 곧 출납부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아, 응. 출납부 관리를 좀 맡아서 해 보라고 했어. 언니가 가르쳐 주겠다고.”
“그럴 줄 알았어. 그거 아주 은근히 귀찮은 일이거든. 돈을 만지는 일이라 공연히 잘못되어 불똥이 튈까 봐 다들 안 하려고 하니까.”
“너도 해 보았니?”
소화가 묻자 영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 잠시 했었는데 나는 영 셈에는 소질이 없어서 하다가 그만두었지. 아무리 해 보아도 할 때마다 자꾸 계산이 틀리지 않아?”
대답한 영신이 깔깔대며 웃었다. 따라 웃던 소화는 다음 순간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웃음을 멈추며 그쪽을 보았다. 은용과 명하가 방 안으로 들어서다 영신이 있는 것을 보더니 문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두 사람 다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영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해 그런 모양이었다. 은용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영신에게 말했다.
“여기서 무엇 하니, 너? 곧 점호 시간이야.”
“지금 돌아가려고 했어요.”
얼른 몸을 일으킨 영신이 소화에게 눈짓으로 웨이퍼 봉지를 가리키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후다닥 방을 나갔다. 소화는 이불 속에 봉지를 감췄다. 은용이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물었다.
“영신이가 무어라고 했니?”
“네?”
깜짝 놀란 소화가 되묻자 곁에서 옷을 정리하던 명하가 한 마디 거들었다.
“저 애는 쓸데없는 말이 많으니 너무 가까이 어울려 다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 네.”
“어서 잘 준비나 하자.”
소화는 침대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저 둘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세란의 죽음과 가장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두 사람. 그렇다면 은용과 명하가 두려워하는 것 역시 세란과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취침 점호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명하가 먼저 자리에 누웠다. 은용은 점호를 하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갔다. 소화는 침대에 누운 채 가슴 위에 두 손을 모았다.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어질거리던 머리가 조금씩 맑아졌다. 한참이 지나 점호를 마친 은용이 방으로 들어오며 불을 껐다.
소화는 숨을 죽인 채 침묵에 싸인 방 안에서 꼼짝도 않고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가 침묵 위로 간간이 떠돌았다. 과연 오늘 밤에도 유령이 나타날지 알고 싶었다. 밤을 새더라도 기다려 볼 작정이었다. 그 지루한 기다림을 깬 것은 바스락대는 기척이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소화는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귀를 기울였다. 은용의 숨소리는 여전히 색색대고 있었지만 명하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명하가 틀림없었다. 명하가 침대에서 내려서 조용히 문가로 걸어가는 기척이 들렸다. 명하는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몹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소화는 명하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맨발로 바닥에 내려선 소화는 손톱만큼 열린 문틈으로 바깥에 귀를 기울여 보고는 복도로 나섰다. 건물 안은 고요했다. 지난번 명하의 뒤를 따라 나왔을 때 뒷동산으로 통하는 뒷문이 열려 있었던 것을 기억해 낸 소화는 복도의 벽이 만드는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날처럼 다시 세명을 마주칠까 봐 일 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에서 인기척이 있는지 없는지 한동안 기다려 본 소화는 아무런 기척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일 층 복도로 들어섰다. 서둘러 뒷문 쪽으로 달려간 소화는 닫혀 있는 문을 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번에는 분명 열려 있었던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며 닫힌 문에 손을 댄 소화는 스르르 밀리는 문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잠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위를 한 번 더 살핀 소화는 문을 조금 더 열고 그 틈으로 비집고 나갔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칼바람이 불어 발이 시린 것은 이미 생각도 나지 않았다. 휑하니 트인 공터를 둘러보던 소화는 문득 누군가의 인기척을 듣고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다 재빨리 쓰레기를 태우는 아궁이 뒤로 몸을 숨겼다. 그 바람에 문 근처에 세워져 있던 빗자루가 쓰러지는 소리가 나서, 소화는 몸을 웅크린 채 입을 틀어막았다.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곧 작은 목소리가 났다.
“누가 있는 것 같아요.”
명하였다. 잠시 사이를 두고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잘못 들었겠지요. 바람 때문에 빗자루가 쓰러진 모양입니다.”
소화는 눈을 크게 뜨며 숨을 더 죽였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금남의 구역인 여학교에, 그것도 이런 한밤중에 남자가 있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듯 하던 두 사람이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화가 거기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상해로 가신다고요.”
“아마도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는 곧 명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명하 씨.”
“여자라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제발 데려가 주세요.”
“명하 씨 같은 분이 어떻게…….”
남자의 말이 끊겼다. 소화는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더 작게 웅크렸다. 심장이 귀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명하는 지난번에도 이 남자를 만나러 나왔던 것이 틀림없었다. 미리 시간을 정해 두고 만났던 모양이었다. 남자의 말로 미루어 보아 이미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이런 관계를 유지해 왔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기숙사로 연결되는 문이 덜컹 소리를 냈다. 남자가 뭐라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으나 소화가 있는 곳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곧 남자가 동산으로 통하는 오솔길로 달려가는 소리가 났고, 명하 역시 다급히 뒷문을 통해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소화는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금 명하가 들어간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안으로 들어오자 그때까지 긴장 탓에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발끝부터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몸이 벌벌 떨렸다. 소화는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떨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 떨림이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명하의 비밀을 엿본 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화가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려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한 걸음 떼어놓았을 때였다. 복도 저편에 흰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소화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그림자는 소화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한순간 명하인가 생각했으나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림자는 복도의 끝 방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 그림자와 소화의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멀어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으나 창백한 낯빛이 달빛에 비쳐 무언가 산 사람 같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유령이다.
소화는 그 자리에 굳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그림자는 곧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통해 사라졌다. 숨을 들이쉬었던 소화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림자가 사라진 곳으로 발을 옮겼다. 복도를 지난 소화는 바깥으로 나가는 유리문을 밀었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미 그 그림자의 흔적은 없었다. 잠긴 문으로 어떻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문을 두어 번 밀어 보던 소화의 눈에 문득 무언가가 들어왔다. 소화는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가늘게 떴다.
현관에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기세 좋게 내리는 눈에 점차 덮여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건 분명 누군가의 발자국이었다. 발자국은 현관 앞에서 화단을 돌아가는 방향으로 나 있었다. 소화는 한참 동안 그 발자국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귀신은 다니는 흔적이 없다고 했다. 발자국을 남기는 귀신이라는 것은 단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분명 사람이다. 누군가가 어떤 이유로 유령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소화의 어깨를 짚었다. 서늘한 냉기가 한 겹의 잠옷 천 아래로 스몄다.
“박소화?”
나지막한 목소리에 소화는 소스라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세명이었다. 소화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세명을 올려다보았다. 세명의 흰 얼굴은 무표정했다. 세명이 물끄러미 소화를 마주보다 물었다.
“오늘도 변소를 찾지 못했니?”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생각하던 소화는 문득 세명의 치맛자락을 보았다. 발목 근처를 덮는 흰 잠옷 치맛자락의 끝이 젖어 있었다. 흙 같은 것이 군데군데 튄 자국도 남아 있었다. 소화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치맛자락을 만져 보았다. 아직 차갑고 축축했다. 소화의 행동에 놀랐는지 세명이 뒤로 물러섰다.
“이애, 무얼 하는 거니?”
“선생님이신가요?”
소화는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세명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을 했다. 소화는 세명의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입을 열었다.
“방금 화단을 돌아 다시 여기로 들어오셨지요?”
소화는 말없이 세명을 쳐다보았다. 세명이 핏기 없는 입술을 물었다. 소화는 그 입술 끝이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