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98
00088 여학교의 유령 =========================================================================
유령이 세명이라면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세란의 얼굴을 본 일은 없었지만 잠결에 본 사람들이 모두 세란이라고 확신할 정도였다면 얼굴이 몹시 닮았을 것이고, 교사였기에 한밤중에 자유롭게 학생 기숙사를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잠긴 문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세명이 소화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소화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명의 뒤를 따랐다. 세명이 향한 곳은 희락당 뒤편의 교사 숙소였다. 세명은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는 불을 켰다. 어둠 속에서는 확실히 알아보지 못했지만, 방 안에서 보니 세명의 얼굴에 희게 분칠이 된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본래도 흰 피부였지만 일부러 분칠을 해 더 창백하게 보이도록 한 모양이었다. 소화가 문가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자 세명이 창가의 의자를 가리켰다.
“이리 와서 앉으렴.”
소화는 주춤거리다 세명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세명은 소화를 물끄러미 보다 소화가 맨발인 것을 알고는 짧게 웃었다.
“너는 볼 때마다 맨발이구나. 지난번에도 변소를 찾으러 나온 게 아니었지?”
“네.”
어차피 이제는 더 숨길 것도 없었다. 세명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소화는 잠시 말없이 세명을 마주보다 말했다.
“유령은 선생님이셨군요. 처음부터 말씀하셨으면 제가 굳이 여기에 올 이유도 없었을 텐데요.”
세명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눈이 내리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송이는 점점 굵어져 어느새 바깥이 온통 새하얗게 뒤덮이고 있었다. 경계를 알 수 없이 백색으로 흐려지는 풍경에 시선을 못박은 채 세명이 입을 열었다.
“세란이는 추운 걸 못 견뎠어. 그런 아이가 한겨울에 잠옷 차림에 맨발로 뛰쳐나가 목을 매야만 했을 이유가 무얼까 매일 밤마다 생각했다. 나는 세란이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어. 언니가 되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어. 내가 먼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을 걸 그랬지. 아무 일도 없다기에 그 말만 믿었다가 그 아이가 하루아침에 시체가 되었는데 내가 무얼 할 수 있었겠니?”
자조하는 말투였다. 소화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말아 쥐었다. 꽁꽁 얼었던 손발이 녹으며 끝이 따끔거렸지만 그런 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러면, 유령 흉내를 내신 건…….”
소화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 세명이 대답했다.
“……세란이가 도둑으로 몰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믿을 수가 없었지. 도둑이라니. 남의 돈에 손을 댈 아이가 아닌데 어찌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어. 모두가 세란이를 따돌렸다고 하기에 처음에는 그저 혼을 내 주고 싶었어. 세란이가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매몰차게 굴었던 아이들이 벌벌 떨면서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비는 꼴을 보니 통쾌하기도 했지. 나는 그 애가 죽어서까지 도둑년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지 않았어. 내 동생이 결백하다고 증명하고 싶었던 거야.”
하나뿐인 동생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다고 믿었다면 이런 기행(奇行)을 저지른 것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소화는 조심스럽게 세명에게 물었다.
“그러면 절대로 은용 언니의 돈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확신하시는 건가요?”
“그래.”
“증거가 있습니까?”
소화의 질문이 날카로웠는지 세명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항변하듯 말했다.
“그 아이의 돈을 훔칠 이유가 없으니까. 우리 집은 가난하지 않아. 다른 아이들이 받는 만큼은 주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세란이는 매번 알뜰히 써서 남은 돈을 돌려보낼 정도였어.”
“그 일이 어찌 된 일인지 알고 계세요?”
“듣기로는 출납부에서 은용이가 돈을 찾아갔다고 기록하고는 그 돈을 빼돌려 자기 서랍에 넣어 두었다고 했어. 명하가 그 돈을 발견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왜 그런 짓을 하겠니? 은용이와 대면하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그 말에 소화는 퍼뜩 책상 서랍 속에 있던 세란의 출납부를 기억해 냈다.
“제 방 서랍에 들어 있던 그 출납부 말인가요?”
세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화는 가만히 세명을 보다 물었다.
“혹시 일부러 가져다 놓으신 건가요?”
세란이 죽은 지 일 년이나 지났고, 그 사이 여러 명이 그 방을 거쳐 갔는데 그 출납부만이 거기 있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명 뿐이었다. 세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신 거군요. 저나 선생님이 그걸 보고 무언가를 밝혀 주길 바라신 거지요.”
소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확실히 세명의 의도대로 자신이 먼저 그 출납부를 살펴보았고 그것을 해경의 손에 넘겨주었다. 해경 역시 그 출납부에서 무언가를 찾아냈을지도 몰랐다. 처음 정숙이 의뢰를 하러 왔을 때 세명이 직접 그것을 넘겨주었다면 정숙에게 의심을 받았을 테니 일부러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한 모양이었다.
“출납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무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소화는 출납부의 기록들을 머릿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은용은 확실히 매달 꽤 많은 돈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세명의 말대로 돈을 훔친다면 그런 방식은 지나치게 이상했다. 왜 굳이 출납부에 돈을 찾아갔다고 기록한 뒤 그 돈을 빼돌렸을까? 누가 보아도 가장 먼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소화는 세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려고 애를 썼다. 만약 자신이 세란이고 은용의 돈을 훔칠 마음이 생긴다면 애초부터 들어온 돈이 없는 것으로 빼돌리는 편이 더 쉬웠다. 돈을 부치는 과정에서 송달이 잘못되었다든가 하는 핑계를 댄다면 누구와 대면하더라도 들키지 않았을 터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누명을 썼다면 누가 왜 그랬을까요?”
“나는 은용이와 명하를 의심하고 있어. 처음 훔쳤다는 돈을 발견한 것도 명하고 도둑이라고 몰아붙였던 건 은용이니까. 두 사람이 무슨 작당을 해서 세란이를 그렇게 몰아붙일 이유가 있었겠지. 그래서 내가 두 사람 앞에 더 자주 나타났던 것이고.”
소화는 자신이 보았던 출납부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당시 출납부의 기록상 은용과 명하 둘 다 상당히 많은 돈을 자주 가져가고 있었다. 영신의 말로 학교에서는 용돈을 지나치게 많이 쓰는 것을 자제하라고 권하고 있다고 했고, 세란은 출납부 관리를 꼼꼼히 했으니 이 문제와 관련해 어떤 충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은용 언니가 돈을 찾아갔다는 내역을 세란 언니가 쓴 것이 확실한가요?”
그 물음에 세명은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소화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확실한 거군요.”
은용은 돈을 찾아간 적이 없다고 했지만, 세란이 훔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면 출납부에 그렇게 기록한 연유가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면 은용 언니가 돈을 찾아가 놓고 명하 언니와 모의해 일부러 누명을 씌웠다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
세명의 대답은 단호했다. 소화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우선 유령의 정체를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 있었다. 날이 밝는 대로 해경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줄 생각이었다. 소화는 세명에게 차분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일단 방으로 돌아갈게요. 이 이야기는 당분간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화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세명이 바닥에 놓인 자기 실내화를 가리켰다.
“신고 가렴.”
“아, 네.”
그제야 맨발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은 소화는 얼른 세명의 실내화에 주섬주섬 발을 구겨 넣고는 서둘러 기숙사 건물로 돌아왔다.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복도를 걸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소화는 문을 닫고 돌아서다 흠칫했다. 자는 줄 알았던 은용과 명하가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었던 탓이었다. 놀란 소화가 문 앞에 멈춰 서자 두 사람이 동시에 이쪽을 보았다.
“어디에 갔다 오니?”
먼저 입을 연 것은 명하였다.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그 말끝이 떨리는 것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무언가 심하게 긴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화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 명하가 다시 물었다.
“너 김세명 선생하고 만났지?”
“네?”
“잡아뗄 생각 하지 마. 내가 보았단 말이야.”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명하가 방으로 먼저 돌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어딘가에 숨어 자신과 세명이 함께 가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혹시 위장 학생인 것이 들통 난다면 입장이 매우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유령의 정체는 알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은 탓이었다. 소화가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어물거리자, 명하가 침대에서 내려서 소화에게 다가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소화를 다그쳤다.
“아까 거기 있었던 것도 혹시 너야?”
“네?”
소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명하가 소화의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
“김세명 선생한테 내 이야기 한 거니? 응? 너 아까 영신이 그 계집애한테 무슨 말 들었어?”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며칠 전에도 내 뒤를 따라왔잖아!”
명하의 말에 소화는 기억을 더듬었다. 며칠 전이라면 한밤중에 명하의 침대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나갔다가 세명을 처음 마주쳤을 때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걸 어찌 알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은용이 옆에서 명하를 거들었다.
“내가 보았는걸. 명하가 나갈 때마다 너도 일어나서 따라 나가지 않았어?”
은용이 잠들어 있다고 철석같이 생각했었기에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명하는 아마 소화가 자신의 뒤를 밟아 남자를 만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세명에게 일러바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소화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명하가 초조한 얼굴을 하더니 소화에게 물었다.
“너 김세명 선생에게 무슨 소릴 했니? 내가 누구를 만났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어?”
“네? 아, 아니에요. 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너 아까 무얼 보았니?”
“저, 전 그냥…….”
소화가 말을 얼버무리자 명하와 은용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무어라고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소화는 불안감을 누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한참을 소곤거리던 명하가 후다닥 자기 지갑을 가져오더니 지전을 몇 장 꺼내 소화의 손에 쥐어 주며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제발 오늘 본 것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마. 어차피 졸업식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졸업식만 무사히 끝나면 돼.”
“아니에요, 이런 건 필요 없어요. 이야기 안 할게요.”
당황한 소화가 명하에게 돈을 돌려주려 했으나 명하는 그 돈을 억지로 소화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은용이 혀를 찼다.
“영신이 그 계집애가 입이 싸서 문제야, 아무튼. 진작 다른 방으로 내쫓았어야 하는데.”
은용이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소화가 이 돈을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서 있자 명하가 소화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
“모자라다면 더 줄 테니까, 알겠지? 한두 달만 입 다물어 주면 돼. 너만 조용히 하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단 말이야.”
“네, 네에.”
얼결에 대답한 소화는 어서 자라고 채근하는 은용의 말에 서둘러 침대로 들어갔다. 주머니에서 바스락대는 지전의 감촉에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남자를 몰래, 그것도 금남의 구역인 학교 안에서 만난다는 것을 들키면 바로 퇴학 처분일 테니 졸업이 코앞인 명하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돈을 주어 입막음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소화였다. 명하의 비밀을 엿볼 생각은 애당초 전혀 없었고, 다만 명하가 유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를 밟았던 것인데 뜻밖에 남의 약점을 쥐게 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에 돌부리가 채이는 것 같았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날이 밝는 대로 해경에게 연락을 취해 알게 된 모든 일을 다 이야기해 줄 심산이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깜빡 잠들었던 소화는 기상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번뜩 눈을 떴다. 며칠째 잠을 깊게 자지 못해 몸이 피곤했다. 주섬주섬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세면장에서 얼굴을 씻고 돌아온 소화는 책상 위에 무언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밤에는 경황이 없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검은색 표지의 공책이었다. 소화가 막 표지를 들춰 보려는데 세면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은용이 소화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말한 출납부야. 오늘 식비를 계산하는 날이니 오늘부터 네가 기록하도록 해.”
“아, 네.”
세란의 이름이 쓰여 있었던 것이 작년 출납부였으니 이것은 올해 출납부인 모양이었다. 아침 식사 종이 울리기 무섭게 서둘러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돌아온 소화는 아직 은용과 명하가 오지 않은 방에서 출납부를 펼쳐 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두세 가지 이상의 필적이 나오는 것을 보아 기록하는 사람이 여러 번 바뀌기는 한 것 같았다. 출납부를 안고 학교 건물로 간 소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때마침 정숙이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소화는 정숙에게 뛰어갔다.
“저어, 선생님.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요.”
정숙 역시 주변을 한 번 살펴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언데?”
“정 선생님께 연락을 넣어 주실 수 있나요? 급한 일이라고 꼭 뵈었으면 한다고요.”
“무어 중요한 것이라도 알아낸 거니?”
소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숙이 눈으로 알겠다는 표시를 했다. 다른 학생들이 건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정숙이 재빨리 소화의 교복 매무새를 매만지며 말했다.
“교복을 단정히 입고 다녀야지.”
“네, 죄송합니다.”
얼른 정숙에게 맞장구를 친 소화는 자연스럽게 정숙과 떨어져 교실로 들어갔다. 조금 일찍 온 모양인지 아직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리에 앉은 소화는 출납부를 펼쳐 첫 페이지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출납부에는 작년 12월의 출납 내역부터 기록되어 있었다. 장을 넘겨 가며 가장 윗줄부터 출납 내역을 살피던 소화는 문득 손을 멈췄다. 무언가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소화는 다시 한 번 앞장을 넘겨 내역을 보고는 12월까지의 출납 내역을 모두 확인했다. 분명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 다른 부분이 있었다. 뚫어지게 출납 내역을 들여다보던 소화의 곁에 방금 교실로 막 들어온 영신이 앉았다.
“일찍 왔구나. 감기는 좀 어떠니?”
소화는 출납부를 덮어 서둘러 책상 서랍 안에 집어넣으며 웃어 보였다.
“이제 괜찮아. 걱정해 주어서 고마워.”
“어제 준 웨퍼스는 혼자 다 먹었니?”
“응.”
소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신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가방을 책상에 올렸다. 소화는 영신의 가방이 새 것임을 알아차렸다. 명치정에 나갈 때 새로 산 모양이었다. 영신이 그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가방 안에 책 대신 들어 있는 것은 커다란 종이 봉투였다. 소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영신을 마주보자, 영신은 봉투를 열어 안을 보여 주었다. 봉투에 가득한 것은 생전 처음 보는 양과자들이었다.
“이게 다 무어야?”
소화가 놀란 얼굴로 영신을 마주보자 영신이 먹으라는 손짓을 하며 소화에게 말했다.
“이건 슈크림이라는 거고, 이건 비스켓트야. 홍차와 먹으면 아주 맛있어. 다음에 내 방에 놀러 오면 홍차를 끓여 줄게.”
“홍차?”
“우리 아버지가 영국에서 가져오신 거야. 어지간한 끽다점(喫茶店)에서 마시는 것보다 훨씬 좋은 차라고. 아 참, 이것도 한 번 먹어보렴.”
영신이 봉투 안에서 꺼내 준 것은 갈색의 손톱만한 덩어리였다. 소화가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자 영신이 껍질을 까 주었다. 그것을 입에 넣어 본 소화는 삽시간에 퍼지는 단맛에 깜짝 놀랐다.
“이건 무어니?”
“초콜렛이야. 이거 아주 맛있단다, 이애.”
소화가 놀란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깔깔거린 영신은 때마침 교실로 들어오는 친구들에게 봉투 안에 있던 양과자를 모두 하나씩 맛보도록 나누어 주었다. 교실은 때 아닌 간식 시간이 되었다. 그때 수업 종이 울리며 수학 교사인 조양미 선생이 들어왔다. 영신은 양미가 들어오기 무섭게 봉투를 가지고 나가 양미에게 과자를 권했다.
“선생님도 하나 드셔요.”
양미가 웃으며 봉투 안의 과자를 집어 들었다.
“영신이 너는 매번 이리 인심이 좋아서 어찌하니? 여자가 살림을 알뜰히 해야 하는데 너는 영 글렀다.”
“저는 돈 많은 사내가 아니면 양과자점 하는 사내에게 시집가려고요.”
영신의 농에 교실 안의 아이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양미는 교탁을 탁탁 치고는 말했다.
“자아, 영신이는 어서 자리로 들어가고 다들 입 안에 있는 것은 빨리 먹어요. 오늘은 교과서 팔십 쪽을 할 차례이지요?”
영신이 옆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소화는 입 안에서 녹아 가는 초콜렛을 굴리며 곁눈질을 했다. 영신은 서랍에서 책을 꺼내 펼치고는 언제나처럼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칠판을 보고 있었다. 서서히 혀 위에서 사라진 초콜렛의 단맛 끝에 싸한 쓴맛이 올라왔다. 낯선 감각이었다. 소화는 문득 당의정(糖衣錠)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쓴 환약의 겉을 달콤한 것으로 싸 맛을 속이는 것. 어쩌면, 만약에……. 칠판 앞에서 무어라고 말하는 양미의 목소리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수업을 마쳤는지 알 수 없었다. 소화는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영신에게 부탁을 했다.
“저, 영신아. 수학 공책 좀 빌려 줄 수 있겠니? 수업 내용을 알아듣기가 어려워서 필기도 하지 못했어.”
“이애도 참, 어쩐지 정신을 놓고 있더라.”
영신이 선뜻 자기 공책을 내밀었다. 소화는 고마워, 하고 입술을 달싹이며 그 공책을 서랍 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어젯밤의 일을 하나씩 기억 속에서 되살려 보았다. 조각난 그릇을 맞추듯 이야기의 파편이 어떤 지점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