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99
00089 여학교의 유령 =========================================================================
출근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으나 사무실에 나온 해경은 책상 앞에 앉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책상에는 소화에게 받은 출납부가 펼쳐진 채였다. 매달 1원도 틀리지 않도록 꼼꼼하게 기록해 온 출납부의 내역을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이상한 점은 발견하기 어려웠다. 이상한 점이라면 단 한 가지, 애리가 말했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십일 월 장부에는 월초 은용의 집으로부터 육십 원의 용돈이 들어왔고, 사흘도 지나지 않아 한 번,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다시 한 번 두 번에 걸쳐 삼십 원씩 돈을 모두 찾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다른 달에는 그런 식으로 한 번에 큰 액수를 찾아간 일이 없었다. 은용의 집에서 매달 보내오는 돈은 육십 원으로 일정했고, 은용은 대개 일주일에 한 번 오 원에서 많게는 십오 원 정도를 찾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남는 돈은 다음 달로 이월되거나 혹은 세란이 모아 집으로 돌려보낸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도 여학생의 일주일 용돈 치고는 상당한 액수였고, 다른 학생들에 비해 많은 편이기는 했다.
은용과 씀씀이가 비슷한 학생이라면 명하나 영신 정도였는데 명하는 남는 돈이 거의 없이 매주 십오 원에서 이십 원 가까이를 찾아가고 있었다. 영신의 경우 초가을 무렵까지는 이들과 거의 비슷한 액수를 받고 있다가 시월 무렵부터 갑자기 집에서 보내오는 액수가 급격히 적어져, 그때부터는 씀씀이가 줄어든 것 같았다.
아무튼 문제는 왜 은용이 이렇게 큰 돈을 두 번이나 서둘러 찾아갔는지, 왜 장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찾아간 적이 없다고 했는지, 은용의 말이 사실이라면 세란은 왜 찾아간 적도 없는 돈을 찾아갔다고 했는지였다. 모든 점이 다 의문이었다. 더구나 세란이 죽은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은용과 세란 양쪽이 다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세 가지였다. 은용이 돈을 찾아간 일을 잊어버렸든지, 세란이 자신이 기록한 것을 잊어버렸든지, 혹은 다른 누군가가 이 출납부에 개입해 있든지. 그러나 어느 쪽도 명확하지 않았다. 이렇게 큰 액수를 찾아갔는데 찾아간 사람이 잊어버리는 것도, 기록한 사람이 잊어버리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개입했다고 보기에는 출납부에 다른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세란의 필적으로 은용이 개인 용무로 돈을 찾아갔다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찾아간 적 없는 은용의 돈이 사라졌고, 세란의 옷장에서 그 돈이 나왔다. 그것도 육십 원 전부가 아니라 사십 원만이. 그 돈을 발견한 건 명하였고, 두 사람은 세란을 도둑으로 몰아 학교 전체의 따돌림을 받도록 했다. 사건의 전말을 되짚어 본다면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역시 은용과 명하였다. 두 사람이 공모했다면 모든 것이 다 말이 되었다. 출납부의 내역 단 한 가지를 제외한다면. 세란을 협박해 쓰게 한 것도 아닐 텐데 대체 이 출납부를 어떻게 적은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해경은 긴 숨을 내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해경이 차를 마시기 위해 막 몸을 일으켰을 때 사무실의 전화가 울렸다. 해경은 시계를 한 번 보았다. 어디서 연락이 오기에는 좀 이른 시각이었다. 고개를 갸웃한 해경은 전화를 받았다.
“정해경입니다.”
― 미리암여학교의 이정숙이에요.
건너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해경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전화라니 소화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해경이 침착하려 애를 쓰며 네, 하고 대답하자 정숙이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 소화 양이 선생님께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중요한 일이라고요.
정숙의 말에 해경은 남모르게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만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연락을 해 달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무언가 발견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해경은 정숙에게 물었다.
“오늘 학교를 방문할 수 있습니까?”
― 오후 시간에 제가 면담을 하겠다고 소화 양을 따로 불러낼 테니 그 때 만나 보시면 어떨까요? 수업은 세 시에 끝마치니 맞추어 오시면 될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며 전화를 끊은 해경은 팔짱을 낀 채 사무실 안을 서성거렸다. 토요일 면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어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학교 안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면 세란과 관련된 일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사소한 발견으로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불러 달라고 했을 리는 없었다. 다시 책상 앞에 돌아가 앉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후까지는 시간이 몹시 더뎌, 해경은 일단 보고 있던 출납부를 한쪽으로 밀어 놓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신문을 철해 놓은 서류철 중 작년 시월 경의 것을 집어 들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무언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돌리기 위해 자주 하는 일이었다.
점심도 먹지 않고 몇 개의 서류철을 읽다 보니 오후 시간이 되었다. 약간 이르게 도착할 것 같았지만 시간에 늦는 편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해경은 서둘러 출납부를 가지고 사무실을 나섰다. 택시를 잡아타고 미리암여학교 앞까지 간 해경은 학생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교무실로 향했다. 면회 때야 최대한 소화의 신분을 믿게 하기 위해 남들 눈에 띄어야 했지만 지금은 그래서는 곤란했다. 다행히 아직 수업을 마치기 전인 탓인지 운동장과 복도에 학생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교무실 문을 두드린 해경이 안으로 들어서자 교무실에 남아 있던 교사 두어 명이 이쪽을 보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 일로 오셨나요?”
세명이었다. 해경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이정숙 선생님을 좀 뵈러 왔습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세요. 수업이 곧 끝나니까요.”
세명이 권한 손님용 의자에 앉은 해경은 눈을 약간 가늘게 뜨며 다시 자리에 앉는 세명을 보았다. 고작 며칠 전에 보았던 것인데 그새 묘하게 얼굴이 수척해진 느낌이었다. 몸이 아팠거나 마음고생을 할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은 세명이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쓰고 있다가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해경을 마주보았다. 해경은 그제야 자신이 세명을 너무 빤히 쳐다보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시선을 피했다. 그때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잠시 후 교무실 문이 열리며 교사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숙이 들어온 것은 몇 분 뒤의 일이었다. 정숙은 의자에 앉아 있는 해경을 보더니 손짓을 했다.
“이 옆의 빈 교실로 불러 두었어요.”
해경은 정숙을 따라 옆 교실로 향했다.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소화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이쪽을 보았다. 해경은 소화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급히 연락을 달라고 했다고요?”
소화가 대답 대신 뒤에 서 있는 정숙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정숙이 들으면 조금 불편한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해경은 정숙을 돌아보고는 정중하게 부탁했다.
“잠시 소화 양과 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제가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인가요?”
“글쎄요. 우선 먼저 이야기를 나눈 뒤에 필요한 내용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숙이 썩 석연치 않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그러지요, 하고는 교실을 나갔다. 해경은 교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화를 마주보았다. 소화가 품에 꼭 끌어안고 있던 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두 권의 공책이었다. 소화는 그 중 한 권을 펼쳐 해경의 앞에 밀어 놓았다. 해경은 펼쳐진 공책 위로 시선을 주었다.
“출납부로군요.”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양식으로 쓰인 출납부였다. 해경은 공책 상단의 날짜를 확인했다. 세란이 쓴 것은 작년 출납부였고 이것은 올해 출납부인 듯했다. 해경은 자신이 가지고 온 출납부의 마지막 부분을 펼쳐 나란히 놓았다.
“세란 양과 같은 방을 썼다는 학생을 만나 보았습니다. 세란 양이 따돌림을 당했던 건 돈 문제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돈을 훔쳤다고요?”
“알고 있었습니까?”
해경이 묻자 소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들었습니까?”
“은용 언니의 돈을 훔친 것이 발각돼 도둑으로 몰렸다고요.”
소화의 대답에 해경은 흠, 하고 가벼운 헛기침을 뱉고는 세란이 기록했던 출납부를 가리켰다.
“여기 은용 양이 삼십 원씩 두 번을 찾아갔다고 기록을 했지요. 그런데 은용 양은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답니다. 돈을 찾아 가려다 문제가 생긴 거지요. 세란 양은 장부에 기록되어 있으니 돈을 찾아간 것이 맞다고 했다가 다툼이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은용 양의 부모님이 돈을 수금할 때 상회 도장을 찍어 그 돈을 보냈는데, 도장이 찍힌 돈 사십 원이 세란 양의 옷장에 있는 것을 명하 양이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겁니다. 세란 양은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은용 양은 도둑과 한 방을 쓸 수 없다며 방을 바꿔 달라고 했다는군요. 그래서 세란 양이 내가 만났던 학생과 한 방을 쓰게 됐던 거고요. 그 학생의 말로 세란 양이 그 일로 몹시 괴로워하다 자살했다고 하더군요.”
해경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소화가 물었다.
“정말 세란 언니가 돈을 훔쳤을까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해경이 되묻자 소화가 닫힌 문 쪽을 한 번 흘끔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훔쳤다면 왜 그리 복잡하게 했는지를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집에서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는 편이 더 간단할 텐데요. 장부에 기록되어 있으니 대면을 하면 금방 밝혀질 일이고…….”
“그렇지요.”
해경이 수긍하자 소화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하는데 몹시 고민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해경은 참을성 있게 소화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주저하던 소화가 꺼내 놓은 말은 몹시 뜻밖의 것이었다.
“저 유령의 정체를 알았어요.”
“뭐라고요?”
생각도 못한 말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소화가 입가에 살짝 손가락을 대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김세명 선생님이에요.”
“그걸 어찌 알았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소화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명하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유령으로 의심해 뒤를 밟았다가 명하가 학교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알게 된 일이며 한밤중에 세명을 두 번이나 마주쳤던 것, 두 번째 마주쳤을 때 유령이라고 생각했던 형체가 문으로 사라진 것을 보고 뒤쫓았다가 눈밭의 발자국을 발견한 것, 세명의 치맛자락을 보고 문 밖으로 사라졌던 유령이 세명임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듣던 해경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 했는데 왜 따라간 겁니까?”
책망하는 것처럼 들렸는지 소화가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소화를 나무라려던 해경은 그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생각해 보면 소화가 그리 겁 없이 구는 것도 자신의 조수로 일한 뒤부터니 해경 자신에게 그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해경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돌렸다.
“무어, 덕분에 김세명 선생이 유령이란 걸 알았으니……그래서요?”
“김세명 선생님은 은용 언니와 명하 언니를 의심하고 있었어요.”
“그 두 사람이 가장 유력하기는 하지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지만 출납부의 내역이 석연치 않습니다. 세란 양이 직접 쓰지 않았다면 그걸 누가 어떻게 썼을까요?”
해경이 즉각 되묻자 소화가 역시 그렇지요,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해경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왜 육십 원이 아니라 사십 원만이 옷장에서 나왔을까 하는 점도 의문이지요.”
“누군가 써 버리고 남은 것을 넣어 두었다면요?”
“육십 원을 훔쳐낸 누군가가 이십 원은 써 버리고 남은 사십 원을 세란 양의 옷장에 넣어 두었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요?”
해경의 물음에 머뭇거리던 소화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저, 옛날에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씀씀이는 본래 작은 것을 크게 하기는 쉽지만 큰 것을 작게 하기는 어렵다고요.”
해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소화를 마주보았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탓이었다. 해경의 얼굴을 본 소화가 책상 위에 펼쳐 두었던 출납부를 해경의 앞으로 밀어 놓으며 누군가의 출납 내역을 보여 주었다.
“지난해 출납부를 보면 분명히 집에서 꽤 많이 용돈을 보내 주고 있었는데 작년 말부터 돈이 줄어들더니 올해 정월부터는 뚝 끊겼어요. 하지만 수업료와 식비는 모두 내고 있고요. 다른 사람들보다 하루 이틀 늦기는 하지만요. 이것 이외에는 한 달에 겨우 일이 원 오는 달도 있고 그렇지 않은 달도 있어요.”
해경은 소화가 말한 출납 내역을 확인해 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해경 역시 작년 출납부 내역을 꼼꼼히 살피며 본 기억이 있었다. 수업료는 정월과 사 월, 칠 월, 시 월 네 번에 나누어 이십 원씩을 내야 했고 식비는 매달 십오 원을 냈다가 남은 것을 돌려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소화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해경을 마주보았다.
“식비는 다달이 삼사 원 이상을 남기지만 학생들이 자선 사업을 하는 데 쓰이기 때문에 실제로 돌려받을 수 있는 건 일이 원 정도지요. 마음껏 쓰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돈이에요.”
해경은 서둘러 세란이 기록했던 작년 출납부를 펼쳐 비교해 보았다. 소화의 말대로였다. 해경은 소화가 짚고 있는 이름을 입 안으로 읽어 보았다. 李英申(이영신). 소화의 말끝이 약간 떨려 나왔다.
“……하지만 씀씀이가 크고 돈을 아끼는 법이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누군가의 돈을 훔쳤을지도 모르지만, 여기서는 모두가 용돈을 조금씩 타서 쓰기에 돈 관리를 직접 하지 않으면 그러기는 쉽지 않아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일 년 동안 이전과 똑같이 돈을 쓰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장부에 기록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지요?”
해경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은 말에 소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경은 흠, 하며 잠깐 생각하다 새 출납부로 다시 눈을 주었다. 잠시 그 출납부를 훑어보자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해경은 정월부터 십이 월까지의 내역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았다.
“집에서 보내 주는 용돈이 상당히 커졌군요.”
해경이 가리킨 것은 명하의 이름이었다. 작년에는 분명 다달이 육십 원 정도의 돈이 오고 있었는데, 올해 출납부에는 팔십 원 가까운 돈이 들어오고 있었다. 명하는 대부분 돈이 들어오는 즉시 이십 원을 찾고 이삼 일 사이에 다시 한 번 십 원에서 이십 원 가량의 돈을 찾아가곤 했다. 은용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학생이 이렇게 많은 돈을 쓸 이유는 드물었다.
“명하 언니가 영신이에게 돈을 주고 있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소화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목을 빼어 창문 너머를 한 번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들이 영신이와 어울리지 말라고 이야기했었어요. 공연한 소리를 한다면서요. 그런데 제가 한밤중에 명하 언니가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것을 보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명하 언니가 기다리고 있다가 저를 붙들며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영신이가 무슨 말을 했느냐고요. 그때는 놀라서 그냥 넘어갔는데 이후에 그 말을 생각하니 영신이가 혹시 이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가 싶어졌어요. 그것을 빌미로 해서 매달 명하 언니에게 수업료와 용돈을 받아 쓰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고요.”
“이영신 양은 지난 시 월부터 집에서 보내는 돈이 급격히 줄기는 했어요. 수업료를 낼 만큼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달에 수금은 정확히 됐었지요?”
“네.”
“그 돈이 어디서 났을까요?”
“은용 언니가 잃어버린 것이 육십 원이고, 세란 언니의 옷장에서 발견된 것이 사십 원이니까…….”
“영신 양이 훔쳤다고 생각하는군요.”
해경이 말을 맺자 소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말이 되었다. 이십 원만이 없어진 것도, 집에서 오는 돈이 없지만 씀씀이가 줄어들지 않는 것도, 명하가 지나치게 많은 돈을 찾아가는 것도 모두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단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남아 있었다.
“출납부의 내역은 어떻게 된 걸까요?”
소화가 대답 대신 옆에 놓아 두었던 다른 공책을 펼쳤다. 해경은 아무 생각 없이 그 공책을 보았다. 수학 공책인 모양이었다. 이게 왜, 하고 물으려던 해경은 순간 멈칫했다. 공책의 필적이 몹시 익숙했던 것이다. 해경은 다급히 공책을 살펴 그 주인을 찾았다. 공책의 뒷표지에는 이름 세 글자가 선명히 쓰여 있었다. 이영신. 출납부에 남아 있는 세란의 필적과 거의 흡사한 필적이었다. 놀란 해경은 소화를 마주보았다.
“알고 있었습니까?”
소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영신이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요. 내지에 오래 있어 조선말을 하기는 잘 하지만 쓰는 것을 잘 몰라 세란 언니가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세란 언니의 글씨를 흉내 내어 쓰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어 수업 내용을 잘 모르겠다고 공책을 빌려 달라 했지요.”
해경은 펼쳐 놓은 공책과 출납부의 글씨를 비교했다. 아무리 보아도 거의 같은 필적이었다. 물론 이것을 세란이 직접 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세란이 출납 내역을 이렇게 적고 은용의 돈을 훔쳤다면 당연히 가장 먼저 범인으로 몰렸을 터였다. 진짜 도둑이라면 그런 위험을 부담하고 싶어 할 리 없었다. 글씨를 거의 똑같이 흉내 낼 수 있는 영신이 계획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영신은 남들의 의심을 피하면서 돈을 쉽게 훔칠 수도 있었을 터였다. 출납부를 뚫어지게 보던 해경이 물었다.
“영신 양이 돈에 쉽게 접근할 방법이 있었습니까?”
“출납부를 기록해 본 적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셈이 서툴러 매번 계산이 틀려 그만두었다고요. 어쩌면 그 때가 이 즈음이었을지도 몰라요.”
“세란 양이 가르쳐 주었을 수도 있겠군요. 그때 남의 돈에 손을 대었고 말이지요.”
해경은 흠, 하며 출납부의 내역을 보다 고개를 들어 소화를 마주보았다. 소화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앉아 있었다. 놀란 해경은 몸을 숙여 소화를 살피며 물었다.
“왜 그러지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소화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영신이는 동무로 제게 무척 잘해 주었어요. 먼저 말도 걸어 주었고 어려운 일도 도와 주었고요. 몸이 아프다고 하니 비싼 양과자를 일부러 사다 주기도 하고……그런데 그런 동무가 정말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걸까요? 만약에 영신이가 아니면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요?”
신식 학교에서 또래들과 어울려 생활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새 정이 든 모양이었다. 모든 정황이 동무를 가리켰기에 자신을 불렀지만, 만에 하나라도 영신이 범인이 아니라면 그 죄책감을 어찌해야 할지 걱정하는 것이었다. 해경은 가만히 소화를 마주보다 말했다.
“소화 양은 함부로 누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소화는 대답 대신 눈만 들어 해경을 보았다. 해경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영신 양이 의심을 피해 갈 수 없었기에 내게 이야기를 했을 테고요.”
“……네.”
“그러면 소화 양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한 겁니다. 나머지는 내게 맡겨 주겠습니까?”
소화는 가만히 해경을 마주보다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해경은 소화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정숙 선생님을 불러 주시고 소화 양은 방으로 돌아가도록 해요.”
“네.”
대답한 소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들어온 정숙이 문을 닫고는 서둘러 해경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요?”
“김세란 양이 죽기 전에, 서은용 양과 한 방을 쓸 당시 그 방에 누가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뚱딴지같은 해경의 물음에 정숙이 미간을 조금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세란이와 은용이, 명하, 영신이가 한 방을 썼지요.”
물론 우연히 네 사람이 같은 방을 썼고, 우연히 영신이 세란과 흡사한 필적을 지녔으며, 우연히 장부에 기록되지 않는 돈을 계속해서 써 왔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해경은 우연이 겹치면 어느 순간 더 이상 우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경은 정숙을 마주보았다.
“서은용 양과 고명하 양, 이영신 양을 불러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