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Treasure Sword RAW novel - Chapter 19
19
“예약금을 받을 수 있나?”
“참으세요. 약속은 꼭 지키니까.”
그녀의 입에서 단내가 풍겼다.
봄에 핀 들꽃처럼 풋풋하면서도 싱그러운 미소까지 띄었다.
수의원은 혀를 내밀어 바싹 타들어가는 입술을 적셨다.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된 채.
‘성공이야!’
처음 펼쳐본 혼천음양마공인데, 늙은 고목에 꽃이 피게 만들었다.
수의원 같은 자가 욕정을 일으켰다.
운기 같은 것을 한 것도 아니고 비급에 쓰인 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그녀의 얼굴에 하얀 미소가 피어났다.
4
한 시진은 오랜 시간이 아니다.
펄럭!
창문 사이로 흰 천이 나부꼈다.
‘깨어났어!’
그녀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해과월!
그는 그녀의 또 다른 병기다. 무기다.
잊었는가? 그는 자신의 정혼자다. 정혼은 이미 물 건너 간 이야기지만 그건 자신에 한한 것이고…… 해과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충직한 자이니까.
탁좌량도 그런 점을 알고, 그를 끌고 온 것이다.
협조? 검을 만들어? 해과월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미끼로 내세우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괜히 찔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살살 구슬리는 건데. 하지만 후회를 만회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녀는 재빨리 약천으로 발길을 옮겼다.
“또 막을 거야?”
경비 무인은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상종도 하기 싫다는 표정이다.
청천맹에서 그들 남매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출세를 위해서 아비를 죽인 파렴치한이 되었다. 그것도 정도를 표방하는 청천맹에서.
부엌에서 일하는 부엌때기조차 고개를 돌려버리는 암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녀는 태연하게 발길을 옮겼다.
“반각뿐이야. 반각이 넘으면 안 돼. 모두들 이때쯤 깨어날 줄 알고 있으니까. 신경을 보통 쓰는 게 아냐.”
“걱정 마세요.”
“칼 같은 건?”
“호호호! 걱정 마세요. 또 죽일까봐요?”
“그 약속은…… 지키겠지?”
“아주 즐거운 시간을 약속하죠.”
수교빈은 수의원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한 사내가 보인다. 질기디 질긴 목숨, 정혼자 해과월이 나무 침상에 누워있다.
그의 주변으로는 오물 투성이다.
해과월의 입 주변으로는 토한 흔적이 가득했다. 대소변까지 지렸는지 구린 냄새가 진동한다. 아니, 그것보다도 피부에 생긴 화농(化膿)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풀풀 풍긴다.
아주 지독한 상태다.
원래는 목욕을 시켜야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 목욕할 시간 반 각을 내준 것이다.
“깨어나서 다행이야.”
해과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눈 좀 떠봐. 나 보기 싫어?”
해과월은 의식을 회복했다. 사람을 또렷하게 알아보고, 말도 정상적으로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는 눈을 감고 뜨지 않는다. 그녀를 쳐다보지 않는다.
“마음 많이 상했구나?”
그녀는 나무 침상에 걸터앉았다.
솔직히 말하면 앉기 싫다. 구역질이 치밀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다. 하지만…… 조금만 참자. 탁좌량, 그 놈이 자신의 진가를 알아야 한다.
“무슨 말을 해도 용서가 안 되겠지만…… 용서를 빌게.”
“뭘…… 해주면 되나?”
해과월이 눈을 감은 채 물어왔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해과월의 말투에서 그의 진심을 읽었다.
해과월, 더 이상 곁에 두기가 힘들어졌다. 곁에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물어온 게다.
“탁좌량의 말, 절대 듣지 마. 다른 사람의 말은 전부 거절해. 또한 청천맹 내의 어떤 보직도 맡지 마. 청천맹 내에서는 아예 쇠를 만지지 마. 내 요구는 이것뿐이야.”
“이걸로…… 정혼…… 파기하자.”
“정혼 파기? 호호호! 솔직히 우리…… 정혼한 적도 없잖아? 괜히 아버지가 한 말이지.”
“파기하자.”
“그래, 알았어. 파기해. 하지만 파기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어.”
“……”
“내 말 한 가지 무조건 들어줘. 네가 언젠가는 크게 쓰일 것 같아서 말이야.”
해과월은 침묵했다.
“왜? 그건 안 되겠어?”
“그러자. 네 말…… 들어준다.”
“알았어. 이걸로 거래 끝.”
수교빈이 벌떡 일어섰다.
“아휴! 냄새…… 목욕 좀 하고, 좋은 옷 좀 골라 입어. 네 재주면 굶지는 않을 거야.”
그녀가 한시도 더 머물기 싫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그가 노린 사람은 처음부터 호신위장이다.
다 잡은 맹주, 목을 치기만 하면 되는 맹주!
그렇기에 안심하고 떠나왔는데, 그런 맹주를 놓쳤다. 죽이기만 하면 되는데, 죽이지를 못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기만 했다면 틀림없이 죽이는 건데……
이 모든 원인이 호신위장에게 있다.
이놈을 잡기 위해서 급히 자리를 뜬 것이 불찰이다.
결국 꿩을 놓쳤다. 아주 큰 놈을 놓쳤다. 그렇다면 알이라도 확실히 잡아야 한다. 호신위장을 낚아채고, 해과월을 수중에 꽉 쥔다면 맹주가 살아있어도 위협거리가 되지 않는다.
해과월에게 검을 만들게 한다.
천살검 같은 검을 서너 자루만 더 만들어도 아주 막강한 제국이 만들어진다.
호신위장은 맹주의 심복이다.
그를 생포함으로써 맹주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다.
죽이지는 않는다. 죽이는 것은 타격이 아주 약하다. 잡아놓고 야금야금 살을 파먹는다.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게 해준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호신위장이 해과월을 노린다면 노리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해과월이 칼에 찔려서 약천이 있으니 상황이 더 좋다.
놈을 약천으로 끌어들인다.
“움직임은?”
“없습니다.”
‘없기는…… 병신들!’
움직이고 있다.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다. 사방을 대낮처럼 환히 밝혀놓고도 잡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목공(木工)들은?”
“워낙 뿌리가 없는 사람들이라. 하지만 인근에 있는 자들은 모두 모아놨습니다.”
“몇 명이야?”
“한 이백 명 정도 됩니다.”
“초창기 일꾼은?”
“겨우 서너 명 정보밖에는……”
“됐어. 그 정도면. 개인별로 면담해. 구석구석 샅샅이 파악해 내.”
“알겠습니다.”
수하들이 물러나갔다.
호신위장은 맹주의 그림자였다.
양지는 맹주에게 양보하고 음지에서만 산 인물이다. 그러면서 항시 양지를 지켜봤다. 길을 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언제나 호신위장에 곁에 있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맹주가 맹내를 거닐 때, 호신위장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회의를 할 때도 호신위장은 없었다. 후원을 산책할 때도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항시 따라붙고 있다는 것은 아는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암로(暗路)가 있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다.
암로는 분명히 존재한다. 헌데 파악이 되지 않는다. 눈썰미 있는 자들이 전각은 물론이고, 천정, 대들보, 바닥 밑까지 샅샅이 뒤졌는데도 사람이 기어 다닐 만한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비밀 통로……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통로를 직접 만든 목공들이다. 이백 명의 목공들 중에서 최소한 한 명은 통로를 만든 자가 있을 것이다.
통로를 모두 파악할 필요는 없다.
한 군데, 딱 한 군데만 찾으면 된다. 그러면 다른 통로도 찾을 수 있다. 한군데만 발견하면 고구마 줄기 캐내듯이 줄줄이 끌어낼 수 있다.
“약천 쪽 움직임은?”
“검군 소저께서 드셔계십니다.
‘검군 소저?’
천문성은 피식 웃었다.
죽산의 색녀가 어느새 검군 소저로 둔갑한 모양이다.
그녀는 해과월을 끝가지 이용하려고 한다. 칼로 찌르기까지 했으면서.
‘정말 뻔뻔스러운 여자. 군장이 골치께나 아프겠군.’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놈이 약천으로 움직일 게다. 너희들이 발견한다는 건 무리고…… 해과월을 주시해라. 경계를 강화할 필요는 없어. 주시하기만 해. 해과월이 언제 사라지는지만 파악하면 된다. 아무리 너희들이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스읏! 쿡!
그는 천정에서 살며시 기어 내려왔다. 그리고 해과월이 일어서기 전에 마혈을 꾹 눌렀다.
“널 해치러 온 게 아니다. 맹주님께서 널 보고 싶어 하신다. 네 의사가 어떤지 모르겠다만, 내가 받은 명이 이거라서 널 납치한다. 먼 길을 갈 테니 마음 편하게 먹어라.”
해과월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반각이 늦었어.’
반각이라는 시간은 매우 소중했다.
천문성 사마소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검군 군장도 오고 있다.
청천맹의 고수들이 혼절에서 깨어난 해과월을 보고자 대거 움직이고 있다.
해과월은 폭풍의 핵이다.
그는 당금 무림에서 제일의 보검을 만들 수 있는 명장이다.
솔직히 그가 만든 검으로 싸움을 하면 내공이 삼 성 이상 증가한 효과를 본다.
그가 깨어났다. 하지만 독액 때문에 몸이 매우 지저분하다. 악취가 너무 심하다. 그래서 목욕을 시켜야 한다. 반각, 반각 후면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다.
반각 동안 청천맹 무인들은 처소에서 기다린다.
그 시간동안 자신은 해과월을 안고 도주할 수 있다. 움직임이 둔한 비로이지만, 그래도 상당히 나아갈 수 있었다.
그 귀중한 시간을 수교빈이 빼앗았다.
지금도 늦지 않다.
촌각을 아껴야 할 정도로 다급한 상황인데……
그래도 지금 움직여야 한다. 지금 빼내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를 잡지 못한다. 밖으로 나간 고수들이 돌아오기 전에 한 걸음이라도 멀리 달아나야 한다.
그는 해과월을 옆구리에 끼고 천정으로 솟구쳤다.
“없어졌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방금 전까지 나무 침상에 누워있었는데, 목욕물을 가지고 들어와 보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혼절에서 깨어났다고는 하지만 혼자서 기동하려면 정양을 더 해야 한다.
칼에 찔린 상처가 매우 중하다.
봉합을 해놓은 상태지만 큰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찢어진다. 상처가 아물려면 적어도 두세 달은 누워있어야 한다.
외상은 내상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해과월의 체내에는 영약과 독약이 마구 상충하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닥치는 대로 싸우고 있다. 결국은 독이 소멸되겠지만, 지금은 바늘로 쑤시는 듯 고통스러울 게다.
절대로 혼자서 움직일 수 없다.
“조용히 해라.”
그들 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그들은 급히 뒤돌아봤다.
청천맹 무인이 서있다. 하얀 무복에 은빛 요대를 하고 있으니 세심전 무인인 것 같은데.
“바,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알고 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세심전 무인은 제사실을 쓱 훑어보았다.
사람이 들락거릴만한 구멍은 보이지 않는다. 호신위장이 해과월을 데리고 도주했는데, 어디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천정!’
제사실에서 유일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천정뿐이다. 사면 벽이 두꺼운 돌 벽이다. 바닥은 단단한 땅이다. 흙에 회칠을 해놔서 돌 벽이나 마찬가지다.
천정이다.
‘제길! 알면서도 못 찾으니 눈 뜬 장님. 욕먹어도 싸지.’
그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해과월이 사라질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이다. 그를 데려간 사람이 누군지도 짐작하고 있다.
알겠는가! 다 알고 있다!
천문성 사마소가 제사실로 왔다.
급히 달려온 것도 아니다. 유람이라도 하듯이 사방을 둘러보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이거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분명히 있었는데.”
수의원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급히 변명했다.
천문성이 웃으면서 말했다.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아, 무슨 말을…… 천문성이 하는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 뼈가 되고 살이 된다는 건 아네만…… 그런데 정말 해과월이 없어진 것만은 나와 무관한……”
사마소가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그 나이쯤 잡으셨으면 여색은 그만 밝히시지.”
“뭐, 뭣!”
“제가 아는데 군장이 모르겠습니까. 쯧!”
“으……”
수의원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군장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세요.”
“아, 알겠네.”
수의원이 고개를 푹 떨궜다.
약천에서 의술이 가장 뛰어난 사람은 당연히 수의원이다. 하지만 기술(奇術)까지 뛰어나지는 않다. 의원 중에는 기이한 방편만 쫓는 사람도 있다.
“그건가?”
“그렇습니다.”
염소처럼 가는 수염을 기른 의원이 목함을 열었다.
목함 속에는 지네 한 마리가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