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Treasure Sword RAW novel - Chapter 190
190
하지만 마음속에서까지 불만이 없을 수는 없다.
음살문 소문주가 직접 홍화문을 치고자 한다. 그렇다면 멸문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폐허가 될 곳에 어린 새싹들을 집어넣어야 하나.
그들을 뒤에 남겨두어서 음살문의 배후를 치는 게 더 낫지 않겠나.
기무영은 완성되지 않았다. 이런 애들을 검중의 검인 인검 앞에 내놓는다는 것은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으라는 소리와 같다.
헌데…… 해과월의 검을 손에 쥐니 이야기가 달라진다.
‘해볼 만해!’
중년 여인들의 눈가에 떠오른 광채가 그녀들이 떠올리고 있는 격동을 대신 말해준다.
“조용히들 해라. 조용히들 해!”
홍화문주가 힘 빠진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로 후회가 막급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가 만든 검이 기무영을 제대로 완성시켜줄 줄 알았다면…… 비비를 그렇게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다른 방도가 많았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해과월은 녹초가 된 몸을 침상에 뉘였다.
검 네 자루를 하루 만에 만든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그야말로 하루 온 종일 한시도 망치질을 쉬지 않았다.
팔이 뻐근하고, 허리도 묵직하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는다.
‘비비……’
비비가 오고 있다.
물론 수교빈도 오고 있다. 인검이 되었다고 한다. 아주 강한 무인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수교빈은 생각나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연모한 여인이지만…… 지금 그의 마음은 오직 비비만 걱정한다.
비비는 굉장히 상했을 것이다. 수교빈의 독심을 알고 있으니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게다.
해과월은 비비의 얼굴을 그렸다.
‘살아만 있으면 된다. 비비…… 버텨라. 죽을힘을 다해서 버텨.’
5
검에서 보푸라기가 일어난다.
털옷이나 오래 된 옷에서 볼 수 있는 보푸라기가 쇠로 된 검에서 발생한다.
“이게 뭐냐?”
“글쎄요……”
“이런 현상을 본 적이 있느냐?”
“전혀 없습니다요. 검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장인들은 보푸라기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보푸라기는 불에 태우면 탄다. 마치 실처럼 순식간에 타버린다. 검에 실이라도 붙어있다는 소린가!
“이건 직물 장사꾼들에게 알아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요.”
검을 만드는 도공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사입니다.”
“연사?”
“연 줄기에서 나오는 실인데…… 그게 어떻게 검에 틀어박혀 있는지…… 이렇게 검을 만들 수도 있군요.”
“자세히 봐라! 연사가 맞느냐!”
“맞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직물 장사꾼들은 연사를 알아봤다. 하지만 연사가 검에 틀어박혀 있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도공들이 다시 불려왔다.
“이렇게 제련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검에 실이라뇨. 그런데 이게 정말 실입니까? 하!”
도공들이 입을 쩍 벌렸다.
검은 불에 단련된다. 쇠로 만들어진 검이지만 불과 망치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 불, 불…… 그것도 쇠를 녹여 버릴 수 있는 고열!
그런 뜨거움 속에서 실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흠! 동서고금에 이런 일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봤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도공들에게서는 어떤 해답도 찾을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광검이라고 일컬어지는 천하제일검에 연사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후후! 후후후후!”
주한극은 신음 같은 웃음을 흘렸다.
날이 갈수록 힘이 빠진다. 투지가 사라진다. 진기를 운용해보면 손상 받은 곳은 없다. 헌데 괜히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마음이 울적해진다.
“혈황검이 어디 있느냐!”
“화로에 넣으셨잖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어디 있냐는 말이다!”
“버렸습니다.”
“이놈! 죽고 싶은 게냐! 지금 혈황검을 버린 곳이 어디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찾아보겠습니다.”
“찾아와라. 찾아와!”
그는 괜히 소리를 질렀다.
혈황검이 이토록 간절하게 생각난 적도 없다.
혈황검의 투지, 살기, 검음이 술이나 여자보다도, 그 어떤 마약보다도 그리워진다.
안다. 모를 리 있는가. 혈황검을 녹인 사람도 자신이요, 버린 사람도 자신이다. 그러니 혈황검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떤 잔소리도 늘어놓을 수 없다.
알면서 혈황검의 잔재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그만큼 혈황검이 그립다.
“후후후! 후후후!”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툭 하면 웃어댔다.
‘그놈에게 멋지게 당했어.’
해과월!
웬만한 속임수는 환히 꿰뚫어보는 백전노장이 풋내기가 파놓은 함정에 덜컥 걸려버렸다.
저 검…… 저 요물!
광검이라고? 미친 검이라고? 광견들의 정신까지 가미시킨 지상 최악의 폭검(暴劍)이라고!
어떤 놈이 그런 말을 나불거리는지 만나기만 하면 주둥이를 확 찢어놓고 싶다.
광검은 절대로 난폭하지 않다. 절대로 피를 원하지 않는다. 싸울 생각도 하지 않는 양순한 검이다. 도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불진(拂塵)과 다를 바 없다.
저런 검이 어떻게 그리 마음에 들었을까?
이 점이 해과월에게 당한 것이다. 그 놈이 잔수를 펼쳤는데, 진의를 알아보지 못했다.
광검이 날이 갈수록 양순해진다.
헌데 저 검은 정말 요상하다. 투지가 사라지는 것은 좋은데, 사라지려면 저만 사라질 것이지 검주까지 끌고 들어간다. 검주의 투지까지 소멸시킨다.
연사…… 연사가 풀리면서 광검의 광기도 풀려나간다. 그리고 줘도 쓰지 않았던 검…… 비성검문 제일검에게 주었던 검과 흡사한 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을 더욱 미치게 하는 것은 그가 이미 광검에 중독되었다는 점이다.
광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지금이라도 부러트리면 그만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투지를 살리고, 세상을 지옥으로 떨어트리기 위해서는 그런 짓을 해야 한다.
헌데 하지 못하겠다. 검을 떼어놓지 못하겠다.
광검을 놓으면 자신의 생명도 끊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제 죽으나 사나 광검과 평생을 같이 해야 한다는 숙명적인 느낌이 든다. 마치 광검과 자신이 하나가 된 듯하다.
이러니 어떻게 광검을 버리겠는가.
“후후후후! 꼼짝없이 당했군. 당했어.”
주한극은 자조 섞인 웃음을 토해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야심한 밤, 그들 아홉 명은 한 자리에 모였다.
주한극의 부름을 받고 비성검문을 빠져나온 이후, 처음으로 모이는 그들만의 자리다.
“맹주는 변했다.”
일성(一聲)이 심상치 않았다.
“광검 때문에 그래. 그놈의 검 때문에 맹주가 점점 미쳐가.”
“흠……”
그들은 이미 벌어진 사실을 부인하지 못했다. 맹주를 위해서 변명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은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광검의 기운과 맹주의 기운이 충돌한다.
처음에는 아주 호흡이 잘 맞았다. 광검을 들기만 하면 진기가 충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한 동안 하지 않았던 검초수련까지 했다.
헌데 연사가 풀려나가기 시작한 후, 광검의 기운은 맹주의 기운을 갉아먹는다.
해결책은 매우 간단하다. 언제든 광검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끝난다. 비록 혈황검은 없지만 대신 손에 잡을 만한 검은 널려있다.
그런데 그 간단한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심마(心魔)!
그렇다. 맹주는 광검의 광기에 걸려들었다. 검을 버리면 안 된다는 중압감을 벗어던지기 못하고 있다. 손에서 놓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 마음이 들수록 더욱더 꼭 끌어안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검과 싸운다.
검의 기운을 자신의 진기로 꼭 억누르려고 한다.
사실 광검은 아무런 기운도 뿜어내지 않는다. 무기(無氣)라고 할 만큼 평범해졌다. 광검의 광기는 연사가 풀리면서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제일검이 지녔던 검처럼 평온한 느낌만 준다.
맹주는 그 평온함을 혈기로 바꾸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혼자 전쟁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싸울 사람이 없는데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온갖 발광을 해본들 무엇이 남겠는가.
맹주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이 상태라면 희망이 없다.”
“그렇지? 점점 악화될 거야.”
“맹주를 심마에서 끌어내야 하는데…… 우린 아홉이다. 다섯이면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맹주를 공격하자고?”
“심마에서 빠져나오게 하려면 충격을 주는 수밖에.”
“다섯은 너무 쉽다. 여덟로 하자. 한 명만 남아있으면 돼. 어차피 우린 이미 끝났다고 보니까. 앞으로 맹주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는 검문이 직접 나서야 해.”
“피…… 우리들의 피면 될까?”
“맹주를 믿는 수밖에. 이 짓도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돼. 심마가 더 깊어지면 돌이킬 수 없게 돼. 그때는 우리 피가 아니라 온 세상의 피를 다 바쳐도 검을 놓지 않을 거야.”
그들은 침묵했다.
어둠이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쒜엑! 쒜액!
부지불식간 검광이 피어났다.
“뭐냐!”
주한극이 쩌렁 일갈을 내질렀다.
애완견들이 미쳤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쥐약을 먹었는지 갑자기 미쳐서 날뛴다.
“맹주! 용서하시오!”
쒜에에엑!
검광이 득달같이 등을 쳐왔다. 거의 동시에 또 다른 검이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하하하하!”
주한극은 어처구니없어서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확실히 평소의 그가 아니다. 예전의 맹주라면 사리판단부터 했을 것이다. 이들이 무엇 때문에 반기를 들었는지 냉정한 눈으로 살펴볼 것이다. 일단은 검광을 피하면서.
주한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릉! 쒜에에엑!
그는 검부터 뽑았다. 그리고 일검견혼, 검을 쓰면 반드시 혼을 보고 만다는 죽음의 절학을 펼쳤다. 그동안 수족처럼 아끼던 수하들을 가차 없이 베어냈다.
퍼억! 파아아앗!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던 검사가 검과 함께 베어졌다.
광검은 광기를 죽였지만 그래도 명검이다. 비성검문 검사의 검을 무우처럼 갈라버리고, 뒤이어 떨어지는 몸뚱이까지 잡초 썰듯 가볍게 갈라냈다.
쒜엥! 쒜에엑!
주한극은 번개처럼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까앙!
검과 검이 부딪친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검사의 검이 뎅겅 잘려나간다.
도무지 이놈의 검을 상대할 수 없다.
검사는 검이 잘리는 즉시 검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쭉 당겨서 검에 들이밀었다.
푸욱!
광검이 검사의 몸을 가차 없이 꿰뚫었다.
“뭐하는 짓!”
주한극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
“맹주, 여기도 있소이다!”
쒜에엑! 쒜에에에엑!
사방에서 검풍이 회오리쳤다. 육방(六方)에서 검 여섯 자루가 일시에 몰아쳤다.
“하하하하하! 이것들이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환장했어. 하하하하! 내가 종이호랑이로 보이더냐!”
주한극은 대노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 수하들이 일시에 달려드는 이유를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쳐 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꾸욱!
광검에 몸이 관통당한 검사가 마지막 사력을 다해서 광검을 움켜잡았다.
사령집검(死靈執劍)!
상대의 병기를 빼앗는 비성검문만의 독보적인 무공이다.
검이 몸을 관통하는 순간, 전신 진기를 검에 밀착시킨다. 검이 썰고 지나간 근육에 밀집시킨다. 그리고 바로 죽는다. 죽음으로써 밀집된 힘을 응고시킨다.
그럴 경우, 검을 빼내기란 매우 어렵다. 바위에 박힌 검을 뽑는 것과 같은 힘이 필요하다.
“크하하하!”
주한극이 앙청광소를 터트리며 발길질을 했다.
퍼억!
사령집검을 실시한 검사가 썩은 나뭇단처럼 나가떨어졌다.
주한극의 검이 독 오른 독사처럼 번뜩였다.
쒜엑! 쒜에에에엑!
퍽! 퍼퍽! 퍼퍼퍼퍼퍽!
비성검문 검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그들의 움직임과 맹주의 움직임은 천양지차, 토끼와 거북이의 움직임처럼 현격한 차이가 난다. 광검을 들고 절반쯤 이성을 잃어버린 맹주에게 옛정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들이 피떡이 되어서 나가떨어졌다.
맹주는 비성검문 검학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정통할 대로 정통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비성검문 검학으로 맞선다는 것은 목숨을 끊어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여덟 명이 순식간에 죽고……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주한극은 망연히 서서 죽은 자들을 쳐다봤다.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
자신을 지켜주던 자들이 모두 한줌 혈육이 되어서 나가떨어져 있다. 검을 휘두를 때는 몰랐는데, 팔이 떨어지고, 목이 반쯤 잘리고, 몸이 양분된 자도 있고……
“뭐냐!”
주한극이 다소 차분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한 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는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다. 멀리서 이 광경을 모두 지켜봤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