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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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미움도 숙명이다
“내가 상제로부터 받은 내림말씀은 사대(事大)였수.”
사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흔히 사대는 사대주의라는 조어(造語)로 활용한다. 그러니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다. 개인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내림말씀인 게다. 나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만지가 흐흐 웃었다.
“내가 처음 그 소리를 듣고 주군과 같은 표정을 지었수.”
“그럴 만하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주저했다. 좌자가 나의 선배인 것으로 판명된 이상 계속 존대를 받고 나는 그에게 하대하는 것이 껄끄러운 탓이었다. 계엄령 하의 광주 당시에 이곳으로 왔다면, 광주가 팔십 년의 일이니까 나보다 삼십오 년은 먼저 왔다는 뜻이다. 허면 당시 새파란 젊은이라고 해도 환갑에 가까운 나이일 터, 아무래도 이치에 맞지가 않았다. 모든 것을 아는 좌자가 내 표정을 짐작해냈다. 그는 푸근히 웃었다.
“우리 꼬인 족보로 살지 말도록 하우. 그냥 그대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좌자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게 좋수. 광주에서 산 것보다 아미산에서 지낸 세월이 더 길단 말이우. 갑자기 주군이 나를 존대하고 그러면 난 미쳐버릴지도 모르우. 우리 복잡하게 놀지 않도록 합시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싸가지를 좀 저버리도록 하겠소.”
“존대하는 것이 싸가지를 저버리는 것이지.”
좌자는 헛기침을 하고 본래 대화의 맥을 찾아갔다.
“아무튼, 처음 사대의 내림말씀을 듣구 한동안은 혼란스러웠수.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제후가 돼서 큰 제후를 섬기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수. 그래서 그냥 숨어버렸지. 아미산으로 들어가 하던 대로 검법이나 닦구 그곳의 술사(術士)들과 교제했수. 그렇게 삼십 년이 흘렀지.”
나는 그의 말을 계속 경청했다.
“좀 구르다 보니까 그 진의를 깨달았수. 사대란 나라가 나라를 섬기는 것도 사대지만, 소인이 군자를 섬기는 것도 사대란 것을 말이우.”
“소인이 군자를……?”
좌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나는 나 잘난 맛에 살았수. 광주에서도 그랬고, 아미산에서도 그랬수. 나보다 검을 낫게 쓰는 이가 없고 다 하찮아 보였수. 잘난 맛에 푹 절어 살다가, 어느 날 눈을 뜰 수 있던 것이우. 너무 늦게 깨닫게 되었지. 그래서 그때부터 내 이름을 만지라고 했던 것이우.”
“아.”
“상제는 내 오만을 꺾어주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래서 사대를 나의 내림말씀으로 할당한 것이우. 너는 모자라고 모자란 인간이니 너보다 넓고 깊은 사람을 만나 섬겨라. 그리하여 너는 너의 모자람을 깨닫고 그를 닮아 넓고 깊은 사람이 돼라. 그것이 지금 내가 이해한 상제의 내림말씀이우.”
나는 관자놀이가 가려워져 긁적였다.
“그런데 나는 노인장이 말하는 넓고 깊은 사람이 아니오.”
좌자는 킬킬 웃었다.
“그것이 바로 주군이 넓고 깊은 사람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좌올시다.”
“…무슨?”
좌자는 술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바다를 다른 말로 뭐라 하는지 아시우? 백곡왕(百谷王)이라 하외다. 오만가지 골짜기, 계곡의 왕이라 하여 백곡왕이우. 바다는 더러운 물이든 깨끗한 물이든, 하류로 흘러 자신의 품에 안기는 모든 물을 말없이 묵묵히 품는단 말이우. 바다는 절대 떠벌리지 않지. 그냥 묵묵히 품기만 해.”
좌자는 내 눈을 바라보며 편안하게 웃었다.
“나는 내가 잘났다고 뻐겼지만 결국은 물살 빠른 일개 계곡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우. 내가 검을 좀 잘 쓴다고? 그래, 잘 쓰지. 그러나 나는 남을 품지 못하우. 수직으로 낙하하는 폭포수처럼 맹렬하게 떨어질 수는 있어도.”
좌자의 눈빛이 넉넉하게 빛났다.
“그러나 내 앞에 앉은 당신, 당신은 맹렬하게 떨어지는 폭포수도 편하게 받아버렸어.”
나는 그의 말이 공치사로 느껴져 부끄러웠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노인장. 좌자가 혹시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어 가르침을 주려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었다.
“그 부끄러움, 겸손함, 자신에 대한 불신. 그것이 주군을 백곡왕으로 만든 것이우.”
좌자는 잠깐 쉬고 말을 이었다.
“영웅은 자신의 야망과 자신의 힘과 자신의 위엄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순 헛것이우. 그런 자는 영웅이 아니우. 백곡왕이 아니야. 어쩌다 빠르게 흐르는 계곡일 뿐이야. 혹은 스스로를 깊다고 믿지만 실은 어디로 흐르지 못하고 내내 고립될 호수일 뿐이지.”
나는 어떠한 첨언도 하지 못했다.
“아미산에서 내려와 여러 제후를 의탁했수. 공손찬에게도 가보고 조조에게도 가보고 여포에게도 가봤지. 가보긴 했지만 그들을 만나진 못했수. 누구도 이 늙은 방사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수. 그러다가, 그러다가 그대를 만난 것이우.”
좌자는 우리의 첫 만남을 떠올리는 듯 감상에 젖어 웃음을 머금었다.
“얼마나 애송이였던지. 내가 분수에 넘치게 방자하게 굴어도 주군은 그냥 송아지 같은 눈알만 굴리며 맞장구만 치셨지.”
나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부끄럽게 웃었다.
“그리고 내 이름을 물어봤수. 아주 하잘 것 없는 일개 노병의 이름을 물어봤어. 대체 이 천것의 이름을 알아서 뭐하려고? 나는 너무 재미있었지. 내 이름을 물어봤단 말이야, 젊은 장군이 일개 노병의 이름을.”
좌자는 탁주가 가득 담긴 잔을 내게 내밀었다. 나도 내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좌자는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나는 그때부터 확신했수. 당신이 내 주군이 될 감이라고. 계곡을 품은 백곡왕이라고.”
“노인장의 말이 부끄럽기만 하오. 나는 정말 멍청이여서, 그래서 현인의 조언을 듣고 그 존함을 여쭈었을 뿐……”
“사기 치지 마시우. 자기를 멍청이라고 부르는 사람 중에 정말 멍청이는 없어. 그리고 그런 사람은 자기가 멍청이가 아닌 줄 알고 있수. 주군은 사기꾼이우.”
나는 멋쩍게 웃었다.
“뭐, 내 판단이 글러먹었을 수는 있수. 주군이 정말로 그냥 일개 쭉정이일 수도 있수.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말이우, 내 판단이 옳았다고 나는 굳게 믿수.”
“나도 노인장의 판단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오.”
“아마 맞을 것이외다.”
좌자는 그렇게 말하고 한참 나물만 씹었다. 그는 눈알을 굴리며 이것저것을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주군도 주군의 내림말씀을 잘 생각해보셔야 하우.”
“생각할 게 뭐가 있소? 내 내림말씀은 화평이고 관운장은 나더러 화내지 않는 것이 화평이라고 했소.”
좌자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관운장이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
“화평이란, 네 내면의 화평을 유지하라는 뜻이 아니겠냐. 온전히 상제의 뜻을 짐작하기는 힘들지만, 대충 사람을 보면 견적이 나온다. 내면의 화평, 이널 피쓰를 지켜라, 이새끼야. 무조건 화를 내지 말라.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이동풍으로 흘려듣고 헤헤 실실 웃어라 이 얘기지. 이렇게 말했소.”
“내 생각보다 제법 거친 관운장이군.”
좌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생각할 때마다 열 받는다. 말끝마다 새끼야라니. 열 받는 와중에 그립기도 하고……
“관운장의 말을 잘 뜯어보시우. 관운장은 사족을 달았수. 온전히 상제의 뜻을 짐작하기는 힘들지만, 대충 사람을 보면 견적이 나온다라……”
말 그대로인데 뜯어볼 건 또 뭐람? 좌자는 나를 잠깐 흘겨보고 답을 일러주었다.
“관운장도 상제의 고매한 내림말씀을 온전히 알지 못하우. 그냥 주군이 띨띨하고 호구 같아 보이니까 화평의 의미를 그냥 화나 내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우.”
띨띨하고 호구 같아 보인다는 말에서 내가 화를 내야 하나? 근데 그건 사실이라 받아칠 말이 없다……
“이미 관운장의 말대로라면 주군은 벼락을 맞아도 골백번은 더 맞았을 것이우. 입으로만 화평을 중얼거리면 뭐해? 얼굴빛부터 빨갰다가 퍼랬다가 지랄 발광을 하는데.”
“그, 그건……”
“주군이 받은 화평의 내림말씀은 겨우 화내지 말라는 뜻이 아니우. 주군은 그냥 그 정도의 소임만 해내면 될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사대의 의미를 새로 깨우쳤듯, 주군도 화평의 의미를 새로 깨우쳐야 할 것이우. 내가 받은 사대의 내림말씀은 금기가 아니라 달성해야 할 목표란 말이우. 내림말씀은 사소한 금기일 수도 있지만 금기가 아니라 일생을 꿰뚫어 해내야 할 목표일 수도 있지.”
“그렇다면 화평이란 대체……”
내가 말 꼬리를 길게 늘이자, 좌자는 눈을 빛냈다. 그 눈빛은 지엄하면서도 너그러웠고, 엄숙하면서도 천진했다. 그는 한참 침묵했다. 나는 그의 눈빛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좌자는 벌떡 일어나 탁자를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내 얼굴에 바짝 제 얼굴을 갖다 댔다.
“주군의 화평은 주군 혼자만의 화평이 아니우.”
그는 우리의 주안상을 바라봤다. 나물과 술.
“나물의 싹이 트는 산의, 술을 담글 물이 흐르는 강의 화평……”
좌자는 쌕쌕 숨을 쉬었다.
“나물을 무치는 손의 화평, 누룩을 밟는 발의 화평…… 땅과 물과 사람의 화평……”
그는 입가를 한껏 벌렸다. 벌린 그의 입, 그 틈으로 보이는 붉은 목젖, 그 뒤로 보이는 새까만 동굴 같은 구멍. 나는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위압감을 느꼈다. 그는 광기에 서린 웃음을 짓다가 벼락처럼 소리쳤다.
“천하의 화평! 천하의 화평! 천하의 화평! 천하의 화평!”
천하의 화평! 그 벼락같은 여러 번의 외침이 내 온몸을 흔들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 내 목을 조르는 듯 숨이 막혔다. 좌자는 주먹을 불끈 쥐고 양팔을 뻗었다.
“천화의 화평이 바로 주군이 일생을 던져 해내야 할 상제의 내림말씀인 것이오!”
“처, 천하의……”
“말 더듬지 마시오! 분명하게 발음하시오!”
“천하의……”
“분명하고 분명하게 발음하시오!”
“천하의 화평……”
“옳소! 옳소! 그것이 주군의 내림말씀이외다.”
내 몸에 천하가 한꺼번에 무너져 쏟아지는 듯했다. 땅이 뒤집히고 산이 무너지고 강물이 거꾸로 흐르고…… 그리고 땅에, 산에, 강에 의지하는 천하의 사람들이, 그들이 휘청거려 넘어지고, 넘어지면서 내 팔목을, 발목을, 어깨를 붙들고……
“천하의 화평……”
나는 그 말밖에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천하의 화평. 내게 내려진 일생의 소임. 천하의 화평……